32장.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마침내 탯줄을 끊어 냈다.
새로운 어머니도 모시게 되었다.
나는 탄생과 죽음을 양손에 들고 삼신을 올려다보았다.
그토록 꺼렸던 신을 어머니로 모시게 되다니.
다소 멋쩍었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아니, 어쩌면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뭘 또 실실 쪼개는 게야! 안 그래도 덜 큰 놈이 그리 웃기까지 하니 아주 덜떨어진 놈처럼 보이지 않느냐!”
……어, 음, 좋다고 해도 되는 걸까.
면박이 장대비처럼 쏟아지고 있는데.
나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반듯하게 자세를 갖추었다.
그래도 성에 안 차는지 삼신은 쯧쯧 혀를 차며 인상을 찌푸렸다.
“너는 대체 생전에 뭘 먹고 살았길래 키가 그것밖에 안 큰 게야.”
덜 컸다는 게 내 키 얘기였나.
삼신은 아주 불만스러운 눈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아주, 내 턱에도 겨우 닿는구나!”
저 지금 허리도 쭉 펴고 있는걸요.
제가 작은 게 아니라 삼신께서 엄청 크신 건데.
제법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면 그녀가 직접 육체를 빚어낸 사라만 해도 190cm에 육박한다.
삼신은 그 사라보다 더 컸으니, 기실 내가 아니더라도 대부분 그녀보다 작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 봤자 덜 큰 주제에 말대꾸나 한다는 소리나 들을 것 같으니 속으로만 억울해하기로 했다.
“……흥.”
한참 동안 내 키를 타박하던 삼신은 이내 코웃음 치며 팔짱을 꼈다.
내 눈썹 한 가닥까지 못마땅한 기색이었으나 그쯤 하겠다는 듯 다른 말을 꺼냈다.
“아까 내 필드를 보았겠지?”
나는 질문의 요지를 몰라 조금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저승의 전설을 가졌듯 나는 운명신들의 전설을 가졌다. 수명에 복록까지 빼곡하게 명부를 써내던 신화였지.”
다만 이어지는 말에는 무심코 입매를 굳혔다.
그 말이 내포한 의미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래, 너와 내가 한반도의 전설을 가졌는데…… 한반도의 전설급 각성자는 아홉이 더 있었지.”
삼신이 말했다.
“한반도의 전설은 총 열 개인데 말이다.”
나와 삼신의 전설을 제하면 한반도에 남은 전설은 여덟 개.
즉, 한반도를 나누어 가진 아홉 명의 각성자들 중 최소 한 명은 외국의 전설을 가졌다는 의미였다.
그 아홉 명 중 하나인 흑탑주는 쓰러졌으니, 이제는 여덟 명이 되었고.
“뭐, 그러든 말든 나는 인간 놈들의 정치판에는 하등 관심 없어.”
그녀가 시큰둥하게 덧붙였다.
하긴 인간 각성자를 쓰러트리고 그들의 전설을 손에 넣는 일이었다.
애초에 인간과 겨루는 것 자체가 그녀의 격에 맞지 않는 것이리라.
“그래서 나도 어떤 놈이 물 건너왔는지는 몰라. 그냥 너도 알고 있으란 뜻이다.”
삼신은 말을 마친 뒤 불쑥 돌아섰다.
“가자, 네 차사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제 그만 나를 보내줄 때가 됐다는 듯이.
***
“허…….”
“아이구야…….”
차사들에게 돌아오자마자 눈이 마주친 사라와 호구별성이 앓는 소리를 냈다.
내가 탯줄을 불완전하게 끊었다는 게 전부 보이는지 바리 또한 나를 보는 눈이 살짝 커져 있었다.
“그래, 뭐…… 새 왕이 뜻이 그러한데 내 무슨 말을 하겠느냐만…….”
잠시간의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사라였지만, 그는 끝내 말꼬리를 흐렸다.
“아니, 뭐. 나도 우리 전하가 괴짜라서 맘에 드는 거긴 한데…….”
맞장구치려던 호구별성도 애매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았다.
그래도 굳이 나쁜 말을 하지 않는 것에서 내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마음이 느껴졌다.
나는 그런 나의 차사들을 향해 가볍게 미소 지었다.
“다녀오셨습니까.”
다만 사라와 호구별성을 지나 마지막 한 명과 마주했을 때에는 어쩔 수 없이 표정이 흐트러졌다.
평소와 같은 서늘한 눈에 여상한 어투.
특별히 노여움이 깃든 것도 아니건만, 나는 형이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괜히 부담을 느끼며 시선을 피했다.
“……네. 다녀왔어요, 형.”
업경은 여전히 형에게서 아무런 감정도 읽어 내지 못했다.
나를 못마땅히 여기고 있을까.
신답지 못한 선택을 했다고 실망했을까.
비로소 답을 찾고 후련히 웃었던 게 바로 조금 전인데.
이상하게도 검푸른 눈 앞에 서자 아까처럼 솔직하게 웃기 힘들었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대왕님.”
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해 왔다.
나를 직시하는 서늘한 시선과 다시금 마주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신지요.”
시선이 맞닿은 직후 그는 더없이 공손한 태도로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한숨을 삼켰다.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 형과 독대하는 것이 두려웠다.
달라진 우리의 관계가 불편했다.
의식적으로 벌어진 거리와 전에 없던 과보호가 낯설고 부담스러웠다.
형을 앞에 두고도 형을 잃어 가는 것 같아 불안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형과 이렇게 지낼 수는 없었다.
주먹을 꽉 쥐었다.
내내 어그러지기만 한 대화를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돌려놓아야 했다.
무서워도.
더 늦기 전에.
“……그럴게요, 형.”
긴 망설임 끝에 대답했다.
형은 곧바로 등을 돌려 걸어갔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던 때와는 다른, 몹시도 천천한 걸음걸이였다.
나는 이쪽을 바라보는 호구별성과 사라, 바리에게 의식적으로 웃어 보인 뒤 형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인간의 걸음걸이로 5분.
딱 그만큼의 시간을 형 뒤에서 말없이 걸었다.
병원 구석 어느 텅 빈 산책로에서 걸음을 멈춘 형이 나를 돌아보았다.
“……당신께서 처음으로 명부를 찢은 날.”
그와 단 몇 걸음만을 남기고 멈춰 선 내 귓가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차사들은 잘했다고 했었지요.”
예상치 못한 화두에 입술을 달싹였다.
47년 전, 처음으로 명부를 찢어 쌍둥이 형제를 살렸던 날.
명부를 찢은 죄로 우리 대왕님께 뺨을 열 대나 맞고 돌아온 내게 삼백의 형제자매들은 말해주었다.
진짜 차사가 된 것을 축하한다고.
“모든 차사들은 그때의 당신처럼 명부를 찢습니다.”
형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더 이상 명부를 찢지 않지요.”
서늘한 두 눈이 나를 향했다.
그 뒤에 나올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 느리게 숨을 삼켰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러쥔 손이 차가웠다.
물에 잠긴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명부를 찢으면, 그 사람은 불행해지니까.”
쌍둥이들을 다시 만나고부터 줄곧 내 업이 된 사실을 들춰내야 했기 때문이다.
“예, 그렇습니다.”
형의 나지막한 긍정 앞에 나는 결국 시선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형은 왜 갑자기 그 얘기를 꺼내는 걸까.
차라리 왜 탯줄을 완전히 끊어 내지 않았느냐고 혼을 내지, 왜 하필…….
“하지만 결국 차사들은, 언젠가는 다시 명부를 찢게 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에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믿는 것이지요.”
나도 모르게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되살아난 그들은 훨씬 더 가혹한 운명에 맞서야 하겠지만, 끝끝내 잘 살아 내리라 믿어 보는 것이지요.”
형의 얼굴은 변함없이 차가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귓가로 스며드는 말은 너무도 다정해서, 나는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아.”
인간이 인간을 사랑할 때, 누구도 상대가 완벽할 것이라 기대하고 사랑하지 않는다.
어딘가 미숙하고 모자란 부분이 있을 것을 알지만 다른 부분을 믿고 사랑할 뿐이지.
……그렇구나.
그래서 차사들은 인간의 나약한 부분이 가혹한 운명에 부서질 것을 알면서도, 또 어느 부분은 잘 견뎌 내리라 믿고서 명부를 찢는 것이다.
“이제 당신께서는 영원히 마음 한구석이 아프실 겁니다.”
형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것이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이니까.”
그의 낮은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언제나 새파랗게 날 서 있던 눈이 서서히 휘어졌다.
서툰 다정함을 담아 반원을 그린 눈에서 걱정과 염려가 읽혔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업경의 감각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자연스럽게 알았다.
지금 내게 해준 말들은 그가 강림차사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오직 강림차사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형에게는 무척 오랜 고뇌가 필요했을 것이다.
형이 그토록 고뇌한 것은 인간으로 남고자 하는 나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우주의 시간이 하나라면, 저의 뿌리도 영원히 당신과 똑같은 인간에 머물러 있지 않겠습니까.”
한없이 깊고 검푸른 눈동자가 오롯이 나를 비추었다.
업경의 권능은 변함없이 잠잠했다.
형은 아직도 내게 감추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건 그런 법이었다.
인간은 때때로 사랑하는 이에게도 감추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 마음이 서로에게 상처가 될까 되레 벽을 세울 때도 있다.
그래도 여전히, 인간은 충분히 사랑할 수 있다.
감추고 싶은 마음을 제외하고도 사랑해 마땅한 마음들이 있다.
……그래.
나와 달리 탯줄을 끊은 형은, 이따금 내가 쉬이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을 꺼내어 내 마음에 비수를 꽂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형의 시선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그저 나를 걱정하는 형에게 필요 이상으로 날을 세워 상처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한들 그것이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지 못할 이유는 되지 않을 것이다.
“……네, 형.”
마침내 대답했다.
“앞으로도 가끔씩 마음 한구석이 아프게 되더라도, 저는 정말로 괜찮을 거예요.”
내 고통을 이해하고 나누어줄 이가 여기 있으니까.
***
모든 것이 끝났다.
나는 탯줄을 끊고 인간의 인과에서 자유로워졌다.
또한 탯줄을 품음으로써 인간의 감정을 잃지 않았다.
“……어.”
매서운 얼굴로 나를 배웅하는 생불왕의 곁에 낯익은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한때는 내 여동생이었던 여인과 주술의 여파에서 회복한 쌍둥이 형이었다.
“……부디 안녕히 가시기를.”
여인은 탯줄을 끊은 나를 더 이상 기억하지 못했다.
“……그리고 부디, 제 가족을 보살펴 주시기를.”
단지 사랑하는 이를 먼저 보낸 사람으로서 간절히 저승의 왕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나는 그런 여인에게 할 수 있는 한 가장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그저 그분과 다시 만났을 때…… 그때 들려드릴 행복한 이야기를 한가득 만들어 오세요.”
안심한 듯 덩달아 환히 웃는 그녀를 지나 이번에는 그 옆에 선 쌍둥이 형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여인과 달리 그에게서는 지금도 짙은 슬픔이 느껴졌다.
기어코 동생에 대한 사랑을 놓지 못하는 형의 괴로움이 내 것처럼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그 겨울날에 집을 나갔던 어린 형제를 잊지 못하신 거죠.”
나는 말했다.
어린 날의 형제를 여전히 사랑해서 괴로워하는 이에게.
“당신을 해치려던 악인은 제가 반드시 지옥에서 벌할 것입니다.”
저승의 왕으로서 선언했다.
“그러니 당신은 그 아이를 계속 사랑하셔도 됩니다.”
나를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세상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의 표정이었다.
“……아니, 아닙니다. 왕이시여.”
그는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말씀해주실 것 없습니다. 그 애는 더 이상 없는데, 아직도 그놈을 놓지 못하는 제가 어리석은 겁니다.”
선한 사람은 원래 그렇다.
인간으로서 어찌하기 힘든 못된 생각을 품었다는 것만으로, 그런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어 가슴 아파한다.
“그렇죠. 많은 사람을 해치고 자신의 형마저 해치려던 악인을 놓지 못하는 건 분명 나쁜 일입니다.”
때문에 나는 말을 이었다.
저승의 왕으로서.
권선과 징악의 신으로서.
“그렇다면 당신의 그 나쁜 마음도 제가 벌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의 못된 마음에 대고 말했다.
“당신은 애써 억누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평생토록 죄책감을 놓지 못할 선인에게 말했다.
“마음이 가는 대로 두십시오. 당신이 스스로를 벌하지 않아도 제가 벌하겠습니다.”
한순간 멍한 표정을 지은 그는 이내 입을 앙다물고 주억거렸다.
“꼭…… 꼭 그렇게 해주십시오……!”
가느다랗게 떨리면서도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버리지 못한 저의 이 어리석은 마음을 잘라서, 지옥에 떨어진 그놈과 함께 불태워 주십시오!”
그리하여 남자는 비로소 어린 날의 형제와 이별할 준비를 했다.
“언젠가, 언젠가 그렇게라도, 제가 그놈의 죄를 함께 짊어질 수 있게…….”
그의 말끝에 어쩔 수 없이 희미한 울음소리가 섞여 들었다.
그 목소리를 뒤로하며 생각했다.
-언젠가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여, 이 지옥에 아무도 남지 않는 날이 올 거야.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는 그리 말했지만.
어쩌면 인간은 지금도 충분히 인간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여 시작된 저승의 신화.
그 기저에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부분마저 품고 싶다는 마음이 함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그것만은 지옥에서 벌하면 되지 않겠는가.
사랑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알면서도, 기어이 다른 모든 부분을 사랑하고 마는 것이 인간이니까.
32장.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