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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의 왕위를 계승했다-104화 (104/187)

31장. 새로 태어난 죽음에게(4)

쌍검을 든 삼신으로부터 엄청난 신성이 흘러나왔다.

만물의 운명을 점지하는 생불왕의 신성이었다.

휘몰아치는 신성 속에서 삼신의 남색 저고리와 붉은 치맛자락이 고아하게 휘날렸다.

나는 그 막대한 힘에 솜털이 하나하나 서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그녀와 마주 섰다.

“그 칼, 오관 녀석이 준 것이었지?”

삼신이 물었다.

“왕이 돼서 아직도 왕이 내린 칼을 쓰면 되겠느냐. 격에 맞지 않아.”

그러더니 손에 든 검 중에 하나를 내게 넘겼다.

“……!”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해서 망연히 삼신을 보고 있으니 그녀가 매섭게 눈썹을 추켜올렸다.

“뭐 하는 게냐, 어서 받지 않고!”

냉엄한 일갈에 결국 쭈뼛거리며 검을 받았다.

생불왕이 2만 년을 품어온 검이라서일까.

손에 쥐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가슴이 묵직해지는 기분이었다.

검을 받고도 그저 멍청히 서 있는 내게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쪽이 ‘죽음’이다.”

그리고 손에 들린 다른 검을 내게 보였다.

“이쪽은 ‘탄생’이고.”

다음에는 다시금 따끔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제대로 쥐어라. 내 모자란 너에게 한 수 가르쳐야겠으니.”

호통 소리에 끌려가듯 엉겁결에 삼신의 검, ‘죽음’을 바로 쥐었다.

검수엽보다 조금 더 묵직한 무게에 다소 생경함을 느끼며 자세를 잡아보는데.

촤아아아악!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신성을 가르며 삼신이 예고 없이 내게 달려들었다.

채애애애애앵!

나는 가까스로 그것을 막아냈다.

“아직도 힘은 시원찮구나.”

금방이라도 혀 차는 소리가 뒤따를 것 같은 어투였다.

그녀의 키는 강림 형만큼이나 커서 직접 검을 맞대자 상상 이상으로 큰 압박감이 느껴졌다.

“하긴 그 가느다란 팔이 젓가락은 제대로 휘두르겠느냐.”

찍어 누르듯 나를 내려다보며 그녀가 입술을 비틀었다.

채애애애앵!

동시에 날카로운 그녀의 검이 무섭게 치고 들어왔다.

채앵!

채애애앵!

채애앵!

순식간에 두 검이 여러 번 맞부딪쳤다.

“어째 점점 죽상이 되어가는구나.”

눈이 마주친 삼신이 입가에 짓궂은 웃음을 걸며 나를 놀려 댔다.

발끈하는 것도 그저 찰나에 불과했다.

나는 역공은커녕 찔러 들어오는 검을 받아치기에도 급급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받아치는 것조차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검을 쳐내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반응할 뿐.

지금 나는 그저 삼신이 몰아붙이면 몰아붙이는 대로 몰리고 있었다.

……저승 던전에서 강림 형을 상대할 때도 이 정도로 속수무책이었던가.

채앵!

챙!

채애애앵!

삼신의 검과 뒤엉킬 때마다, 그녀의 검이 내게는 너무 버겁다고 느꼈다.

그러면서도 이만한 검을 반사적으로나마 받아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아마 삼신이 나를 봐주고 있기 때문일 터였다.

“참 멍청한 얼굴이야.”

어느 순간, 검을 휘두르던 삼신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도 내 검이 무겁더냐?”

나는 새삼 그녀가 내게 그렇게 환히 웃어준 것이 처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이 생의 무게란다, 새로운 죽음이여.”

삼신의 묵직한 말이 이어졌다.

“너는 항상 이 무게를 기억해야 해.”

삼신의 검도 함께 나를 짓눌렀다.

“너한테 생은 항상 무거워야 해.”

채애애애애앵!

그녀의 거침없는 일격에, 내가 쥐었던 ‘죽음’은 결국 볼품없이 날아가버렸다.

“……읏.”

나는 욱신거리는 손목을 감싸 쥐었다.

딱히 오래 합을 나눈 것도 아닌데 그새 숨이 가빠져 있었다.

두 팔이 저릿했고 다리마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만큼 삼신의 검은 무거웠다.

지금껏 내가 검을 맞대었던 어떤 것들보다도.

“주워라.”

나와는 달리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삼신이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네가 덤벼 보아라.”

서슬 퍼런 눈은 내게 잠깐의 휴식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저릿한 팔을 무시하며 다시 한번 ‘죽음’을 휘둘렀다.

채앵!

채애애앵!

채애앵!

이번에는 내 쪽에서 먼저 시작한 대련.

짧은 사이 삼신의 검에 조금 익숙해진 것인지 아까보다 수월하게 검을 받아칠 수 있었다.

다만 무언가 달랐다.

분명 그녀의 검이 조금 더 눈에 보이고, 조금 더 생각하며 휘두를 수 있게 되었음에도, 어째선지 지금이 훨씬 엉망인 것 같았다.

죽음의 신들에게 배운 나의 검도, 탄생의 이치를 담은 삼신의 검도, 분명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데…… 묘하게 아까보다 훨씬 더 엉망진창이었다.

채애애애앵!

그렇게 합을 섞은 끝에 내 검은 또다시 날아가고 말았다.

“무엇을 느꼈느냐.”

검을 갈무리한 삼신은 여전히 어떤 흐트러짐도 없이 엄숙하게 물었다.

“…하아, 하…….”

그에 비해 나는 완전히 지쳐버려 간신히 두 발로 선 채 숨만 헐떡였다.

밭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삼신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대련을 곱씹었다.

조금씩 편해지는 호흡과는 반대로 내 고개는 점차 아래로 떨어졌다.

“……제가, 너무나도 엉망입니다.”

나는 그렇게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두 번째 대련이 첫 번째보다 엉망이었던 이유는 결국 내 검이 삼신의 검에 많이 못 미쳤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시작한 삼신에게 내가 맞출 뿐이었던 첫 번째와 다르게, 내 부족한 검에 맞추느라 삼신도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엉망이지. 아무렴, 네 녀석이 모자라도 한참을 모자라지.”

나를 내려다보는 삼신의 눈은 여전히 매서웠다.

“하지만 죽음이여, 너는 아직도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다만 그 입가에 옅은 웃음기가 배어 있어 나는 무심코 멍한 얼굴로 삼신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탄생과 죽음. 너는 둘 중 어느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느냐.”

“……아.”

죽음은 탄생을 앞지를 수 없다.

두 번째 대련은 그 절대적 명제를 부정하는 일이었다.

생각지 못한 깨달음에 작게 숨을 들이켰다.

지금껏 휘둘러 온 나의 검이 허물을 한 겹 벗어 낸 듯 새로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저 죽음의 사자로서 휘둘러 왔던 나의 검은, 이제 생의 반대편에 선 ‘죽음’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다만 그것은 붙잡기엔 너무도 희미했던지라, 나는 실낱같은 깨달음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며 삼신에게 말했다.

“……한 번만 더.”

아직은 어렴풋한 감각에 가까운 이 깨달음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한 번만 더,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하나 내 말에 삼신은 그저 더 짙은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싫다.”

매섭게 날이 섰던 눈마저 어느새 장난스러운 반원을 그렸다.

“귀찮아. 네 실력이 하찮아서 재미도 없고.”

가볍게까지 느껴지는 대답에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어차피 탄생과 죽음은 하나야.”

그녀는 이런 내 얼굴이 재미있는지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러니 이다음은 네놈이 알아서 하거라.”

탄생과 죽음은 하나다.

삼신의 말을 더듬듯 그녀가 준 검을 만지작거렸다.

듣고 있으니 무언가 깨달음이 올 듯 말 듯 답답하고 안타까운 느낌이 이어졌다.

그냥 시원하게 답을 내려줬으면 싶었지만, 삼신이 말대로 이다음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내 그쪽이 ‘죽음’이랬지?”

삼신이 들고 있던 다른 검까지 내게 던지며 말했다.

“이쪽은 ‘탄생’이다.”

탄생과 죽음.

얼떨결에 두 검을 모두 받은 나는 멍하니 삼신과 검을 번갈아 보았다.

“……그게 인간이야. 탄생부터 죽음까지, 그게 인간의 전부다.”

내게 ‘탄생’과 ‘죽음’을 쥐여준 삼신은 한순간 더없이 자애로운 얼굴을 했다.

“탄생의 어머니와 죽음의 아버지를 모신 너는…… 이제 인간의 신이 될 거야.”

인간의 신.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다 알고 계셨습니까?”

……그렇게, 그렇게나 깊은 고민을 해왔음에도.

내가 탯줄을 끊으러 올 것이라 예언했던 삼신은, 그때 이미 오늘 내가 할 선택까지 알고 있었구나.

“그게 뭐가 중요하더냐.”

삼신이 통렬하게 말했다.

“인간으로 살기로 했으면 그냥 인간으로 살아. 그 모든 선택이 스스로의 의지인 것을 의심하지 말고 살아.”

원천강이 들려주었던 대답과도 상통하는 말이었다.

“이상하지 않으냐.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 운명을 점지하는 것은 삼신이거늘, 정해진 운명을 살고도 정작 인간은 염라에게 인생을 평가받다니.”

삼신이 말을 이었다.

“분명 모순이지.”

하나 모순이라 말하면서도, 그리 말하는 얼굴에는 냉소가 없었다.

“원래 인간이 그래. 지나간 슬픔은 운명이니 어쩔 수 없었다고 여기면서, 오늘은 또 자기들의 의지로 선택하고 싶어 해.”

냉소가 아니라, 오히려 무언가를 측은히 여기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탄생과 죽음…… 인간의 양 끝에 나와 염라가 있었다.”

혹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삼신한테는 지나간 슬픔을 맡기고, 염라한테는 오늘의 선택을 책임지게 하려고.”

먼 곳을 보는 듯한 눈으로 나지막이 말하던 그녀가 다시금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러니 인간의 신이여. 너도 인간으로 살면 돼.”

내게 신의 숙명을 받아들일 것을 명하던 삼신.

그녀는 지금 내게 인간으로 살아갈 것을 격려하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슬픔은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대신 오늘은 오로지 네 의지대로 살아가.”

내가 너무도 미워했던 운명의 신이, 인간으로서의 내 선택을 존중해주고 있었다.

“수없이 고뇌하고 결의하며 나아간들, 뒤돌아보면 결국 네가 걸어 온 길은 하나로 이어질 테지.”

“…….”

“그 하나뿐인 길이, 네가 수없이 고뇌하며 결의했던 너의 하나뿐인 운명이 될 거야.”

삼신은 끝내 정해진 운명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매 순간 치열하게 고뇌하고 결의할 나의 선택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나는 새삼 그녀를 미워했던 반백 년의 세월을 곱씹었다.

나는 분명 삼신을 미워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을 당연한 것이라 관조하는 생불왕을 미워했다.

내가 그토록 삼신을 미워했던 것은, 그녀가 항상 사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정해도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것은 분명 존재했다.

세상은 원래 불합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후회 없이 오늘을 사는 것.

그게 인간이 운명을 살아가는 방식일 것이다.

“그래서 나도…… 너의 의지를 한번 믿어 보려고 해.”

삼신이 다시 말했다.

“그래, 인간처럼 말이다.”

나는 우주가 지금 이 순간을 안배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삼신과 내가…… 신과 인간이 마주 보게 하기 위해서.

인간으로 남기로 한 내가 삼신을 통해 신을 이해하고, 신 중의 신이었던 삼신이 나를 통해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자, 모든 탄생은 죽음을 낳을지니.”

이윽고 삼신이 내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새로운 죽음이여, 나를 어머니로 모시겠다면 절을 한번 올려 보거라.”

나는 감히 어떠한 대답도 찾지 못한 채로, 다만 말로 담아내지 못할 깊은 경애를 품은 채로, 그녀에게 천천히 절을 올렸다.

모든 태어난 것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대신하여.

탄생의 어머니께, 새로운 죽음으로서.

31장. 새로 태어난 죽음에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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