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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장 (3) (103/187)

31장. 새로 태어난 죽음에게(3)

-그대는 무엇을 바라는가?

원천강이 내게 물었다.

나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잠시간 원천강이 품은 사계절의 풍경을 관조했다.

그리고 삼신이 왜 이 힘을 인간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고 말했는지 실감했다.

사계절을 품은 운명의 강은 과거와 미래의 구분이 없는 우주의 시간을 품고 있다.

인간의 인지를 뛰어넘은 초월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는 확연하게 느꼈다.

원한다면 어떤 답이든 받아낼 수 있을 것이며,

그 답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무엇이든 말해 보라, 그대가 바라는 것을.

원천강이 계속해서 속삭였다.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부드러운 속삭임에 나는 천천히 나의 욕망을 반추했다.

“…….”

그런데 기이하게도,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원천강에게 묻고 싶은 것이 없었다.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내가 침묵하자 원천강이 다시금 말해 왔다.

-나 또한 그대의 마음을 바라보고 있음이니.

원천강의 말에 나는 나의 욕망을 하나씩 거슬러 올라갔다.

바라는 게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저승을 재건하고 싶었다.

내가 사랑하는 땅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세상의 전부와 이별을 겪어야 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위안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방법을 원천강에게 묻고 싶지는 않았다.

저승의 재건은 나의 숙원이지만, 그것을 원천강이 확정된 운명으로 점지해버리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원천강이 소원을 이루어준다 한들,

원천강의 뜻대로만 살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나는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다만 원천강의 너른 품속에서 ‘오늘이’의 신화를 곱씹었다.

이무기, 연꽃나무, 장상도령과 매일낭자.

그들은 운명신 ‘오늘이’를 맞이하면서 원천강이 점지한 운명대로 숙원을 풀게 된다.

그러나 용으로 승천하고, 꽃이 만개하고, 글 읽기를 멈추고 서로와 결혼한 장상도령과 매일낭자가…… 숙원을 이룬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더 이상 전해 오지 않는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반대가 아니었을까?

‘오늘이’를 만난 덕에 원천강의 힘으로 숙원을 이룬 게 아니라,

원천강에 묶여 있던 운명에서 벗어남으로써 그제야 진실로 ‘오늘’을 맞이하게 된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끝에, 나는 삼신을 만나기로 결심하면서부터 줄곧 나를 괴롭혔던 의문과 재차 마주했다.

이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이라면,

나는 정말 내 의지대로 살아오고 있는 것이 맞는가.

“……저는 그냥, 후회 없는 오늘을 살고 싶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원천강에게 말했다.

설령 내가 살아가는 날들에 이미 정해져버린 것이 있다 한들, 고뇌하고 결의했던 나의 선택에 흔들림이 없기를.

“어떻게 해야 후회 없는 오늘을 살 수 있습니까?”

그렇기에 나는 원천강에게 물었다.

당신이 품은 우주의 시간 속에서, 나의 삶을 후회 없이 보내는 방법을.

-미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다만 후회만을 걱정할 따름이라.

나를 감싼 원천강의 물결이 크게 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내게는 원천강이 호방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옳다. 그대는 과연 ‘죽음’이 맞구나.

나는 자연스레 나를 이곳으로 안내하던 삼신의 말을 떠올렸다.

-생의 끝에서 과연 욕심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냔 말이다.

나는…… 삼신의 뜻대로 원천강의 시험에 제대로 통과한 것이 맞는 걸까?

-그대, 후회 없이 오늘을 살기를 바라는가?

원천강이 다시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오로지 그대의 의지대로 오늘을 살라.

-그대의 의지대로 살아야 후회도 오로지 그대에게 달리지 않겠는가.

썩 명쾌한 답은 아니었다.

-의심하지 말라.

-모든 것은 그대의 선택이고, 그 선택이 곧 그대의 운명일지니.

그러나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지 않는 원천강이 그리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분명한 위안이 되었다.

-그저 최선을 다해 살라.

-그리고 그대가 다한 최선을 의심하지 말라.

-그리하면 어떤 오늘을 살아도 그대는 결코 후회가 없을지니.

앞으로 내가 어떤 삶을 살든,

무엇에 최선을 다하든,

우주의 시간이 나를 격려해주겠다는 말로 들렸다.

[ (!) 원천강을 클리어했습니다! ]

팝업창이 떴다.

사계절의 시간이 부드럽게 나를 감싸면서 시야가 새하얀 빛으로 뒤덮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평범한 장례식장이었다.

원천강의 흔적은 더 남아 있지 않았다.

“……어.”

다만 한 가지.

내 손에는 검수엽 대신 전에 없던 물건이 들려 있었다.

“연꽃?”

푸른빛이 감도는 아름다운 연꽃 한 송이였다.

파아아앙!

영문을 알 수 없어 손에 들린 연꽃을 내려다볼 때였다.

돌연 연꽃이 새하얀 빛으로 산개했다.

[ (!) 당신의 카르마에 따라 ‘풍문(E)’이 완성되었습니다. ]

새로운 팝업창이 떴다.

[ ‘사계절을 품은 강.’ ]

- 분류 : 풍문(E)

- 권능 : 천기(天機)

- 내용 : 하늘에는 사계절을 품은 강이 있을지니.

- 효과 : 하늘의 신화에 대한 도전 자격을 얻습니다.

“도전 자격? 이건 또 뭐야?”

난생처음 보는 효과에 인상을 찌푸렸다.

지난번에 그림 리퍼를 만나서 융합 풍문을 알게 된 것도 그렇고, 단군이 풍문을 넘겨주는 기능을 알려준 것도 그렇고.

아직도 내가 모르는 게 많구나.

애당초 우주강도단이 제대로 일을 안 한 게 잘못이다만.

“아니, 그보다 이거 나한테 들어와도 되나?”

무려 원천강의 풍문이 아닌가.

천계에 있던 강이 뜬금없이 저승 신화에 속하게 돼도 괜찮은 걸까.

“정말, 멍청하게 서 있는 꼬라지가 아주 지 애비랑 똑같군.”

삼신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줄곧 지켜보고 있었는지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그 모자란 염라보다 더 모자란 게 또 새 염라라고 관을 쓰다니. 말세가 별게 말세더냐.”

매몰찬 악담이 쏟아졌다.

감히 생불왕에게 맞설 배짱은 없었기에, 나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삼신은 돌아가신 우리 대왕님한테도 자주 한심해서 못 봐주겠다는 얼굴로 핀잔을 퍼붓고는 했으니.

-정말, 그대의 땅은 2만 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대충이군!

그러면 우리 대왕님은 삼신이 호통을 치든 말든 그냥 심드렁하게 대꾸하셨고.

-아, 산 놈들은 열심히 살아야지. 근데 죽은 놈이 열심히 살아서 뭣 해?

삼신의 악담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잠시 우리 대왕님을 생각하던 때였다.

“각오는 해 뒀겠지?”

삼신이 내 의식을 돌리듯 날카롭게 물었다.

“따라와라.”

그녀는 그 말만 남기고 먼저 성큼 발을 내디뎠다.

더 말을 보태지 않아도 알았다.

이제 정말 탯줄을 끊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정말, 한시도 기다려주질 않으시네.”

빠르게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짧게 바라보다가 서둘러 그녀를 뒤따랐다.

***

장례식장 밖으로 나와 다다른 곳은 아무도 없는 공터였다.

걸음을 멈춘 삼신이 그제야 서늘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 (!) 공간의 지배법칙이 바뀝니다. ]

필드를 알리는 팝업창이 떴다.

[ 생불왕 ‘삼신할미’가 자신의 업으로 필드를 전개합니다. ]

- (!) 해당 필드의 등급은 ‘카르마(K)’입니다.

- 해체 조건 : 시전자의 카르마 완전 해체

생사를 겨루는 카르마 등급의 필드.

나를 해치기 위해서 펼친 게 아니라는 것쯤은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

2만 년의 카르마로 쌓아 올린 필드 안에서 나는 새삼 생불왕의 막대한 신성을 실감했다.

전설급 각성자인 흑탑주와 적탑주의 필드도 겪어 보았으나, 삼신의 필드에는 분명 그들보다도 훨씬 더 고강한 연륜이 담겨 있었다.

세월의 격이 다른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삼신이 쌍검을 꺼냈다.

각각 탄생과 죽음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두 검은 생불왕의 손에서 교차하여 하나의 가위로 변모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인과를, 탯줄을 잘라 내는 생불왕의 권능이었다.

파아아앙!

나를 중심으로 눈부신 빛이 번졌다.

그 빛은 다시 거미줄처럼 엉킨 줄이 되어 나를 묶었다.

탯줄.

수많은 전생을 거치며 쌓아 온 나의 인과이자,

나를 잉태한 인간 세계와의 유대였다.

가위를 높이 치켜든 삼신이 새파랗게 날 선 눈으로 나를 직시하며 그대로 손을 움직였다.

서거어어억!

단 한 번이었다.

생불왕의 손짓 한 번에 나를 묶고 있던 모든 탯줄이 잘려 나가며 순식간에 하나의 굵은 실로 얽혔다.

“뽑아라.”

하나의 실이 된 탯줄은 어느새 내 손에 쥐여 있었다.

나는 묵묵히 손바닥 위에 놓인 탯줄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자름으로써 세상과 너의 모든 연이 잘렸다.”

신언으로 말하는 게 아닌데도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담긴 목소리였다.

“이제 너 스스로 뽑음으로써 완전히 그것들을 끊어 내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삼신이 모든 실을 잘라주었으니, 나는 인간으로서 쌓아온 카르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한 가닥으로 얽힌 실마저 뽑아 내면, 나는 완전히 인간을 탈피하고 신과 똑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 터였다.

탯줄을 쥔 손에 미약하게 힘이 들어갔다.

자연스레 두 여인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세상은,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엉망진창으로 굴러가게 내버려 둬야 해요.

주도영.

내가 잊지 않겠다고 했던, 신을 미워하는 인간의 얼굴과.

-그래도 괜찮을 거야. 오빠 같은 사람이 왕이라면…… 거긴 분명 좋은 곳이겠지?

내 여동생이었던 여인의, 신에게 위로받은 인간의 얼굴이었다.

아.

어쩐지 미소가 지어질 것만 같았다.

나는 처음부터 정해진 일을 하듯 실을 굳게 쥐었다.

그러고는 실을 뽑지 않고, 그것을 다시 내 안으로 품었다.

내가 품은 실은 그대로 내게 스며들어 도로 나오지 않게 되었다.

“…….”

일부러 보지 않아도 나를 향한 삼신의 시선이 한층 냉담해지는 게 느껴졌다.

“네놈이 기어이 정신이 나갔구나!”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호통이 날아왔다.

“내 기껏 너에게서 인간의 업을 잘라줬거늘, 어째서 너는 그 인간의 업을 다시 짊어지려는 것이냐!”

하지만 호통을 들으면서도 나는 그만 정말로 웃고 말았다.

내가 생각한 게 맞다는 안심감 때문이었다.

세상과 연결되었던 탯줄은 잘려 나갔다.

나는 이제 진짜 신으로서 세상의 인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러나 탯줄을 완전히 뽑아내지 않았기에 인간의 마음도 잃지 않을 수 있다.

“……여동생이.”

그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비로소 고개를 들어 생불왕을 마주했다.

“그분이, 제가 저승의 왕인 것을 알고 웃었기 때문입니다.”

“어처구니가 없구나. 그 애가 아직도 네 여동생이더냐.”

내 대답에 삼신이 벼락같이 꾸짖었다.

그럼에도 나는 좀 더 선연히 웃어 보였다.

“아니요, 그분은 더 이상 제 여동생이 아닙니다.”

이제는 끊어져버린, 끊어져야 했던 그 소중한 인연을 곱씹으면서.

“그분이 웃은 것은 제가 그분의 오빠라서가 아니라…… 제가 그분의 마음에 공감할 것이라 믿으셨기 때문이겠죠.”

그 소중한 인연이 내게 남긴 숙명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저는 언젠가 제 나라에 오게 되실 모든 분들이, 그분과 같은 얼굴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탯줄을 끊기 싫었던 건 세상에 널린 수많은 불행에 더 이상 공감하지 못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탯줄을 끊고자 했던 건 오랜 세월 쌓아 온 인과에 묶여 자유로워야 할 순간에 자유롭지 못할까 봐 불안했기 때문이다.

결국 둘 중 하나를 포기할 각오로 삼신을 찾은 것이었건만.

둘 다 해결되었으니 남은 것은 그저 후련함뿐이었다.

무척이나 후련해서, 계속해서 실없는 웃음만 터져 나왔다.

앞으로 내 나라에서 만나게 될 모든 이들이 내게 똑같이 웃어주기를 바랐다.

“뭐가 그리 좋다고 쪼개는 게냐, 멍청한 놈.”

삼신이 다시 말했다.

“내 너에게 분명히 말했다.”

조금의 냉소도 없는, 그저 진중한 신의 목소리로.

“영겁의 세월이 지나도 신의 숙명은 변하지 않는다. 네가 기어이 눈물을 흘리기로 했으니, 너는 영원히 눈물이 마를 날이 없을 것이다.”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삼신의 경고는 이전처럼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뭐, 눈물 나는 인생들만 제 나라를 찾으시지는 않겠지요.”

때문에 웃음을 거두지 않고 대답했다.

삼신은 그런 나를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래도 여전히 손해 보는 장사로구나. 행복보다 널린 것이 불행이거늘.”

그러고는 답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빤히 보자 재차 서늘한 얼굴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손에 들려 있던 가위를, 어느새 두 개의 검으로 되돌리면서.

“새로운 죽음이여, 내 아직 너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있다.”

이윽고 검을 든 그녀를 중심으로 막대한 신성이 불어 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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