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장. 새로 태어난 죽음에게(1)
단군을 만나고 돌아온 저승.
나는 호구별성에게 강림 형을 데려와달라고 부탁하고는 바리부터 찾았다.
“삼신이 어디 계신지 알 수 있을까?”
“사랑과 희망 병원에서 줄곧 기다리고 계세요.”
바리는 고요한 얼굴로 대답했다.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돌려준 답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름의 고뇌 끝에 결단한 것이었건만, 삼신은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또한 곧바로 대답해준 바리조차도 내가 그리 물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내 선택이 과연 정말로 나의 의지일까?”
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미래를 볼 수 있는 소녀는, 이것마저 알고 있었다는 듯 또다시 한 점의 흔들림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저는 한 번도 제가 제 의지로 살아간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나이에 맞지 않게 모든 일에 초연한 모습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 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빠가 무엇을 두려워하시는지 알 것 같아요.”
초연한 얼굴로 바리는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저도 인간이니까요.”
나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그냥 그런 대답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후 나와 바리 사이에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 이어지는 와중.
“다녀오셨습니까, 대왕님.”
나무들을 돌보러 갔던 강림 형이 호구별성도 없이 홀로 돌아왔다.
돌아온 그는 곧장 서늘한 눈으로 내 상태부터 살폈다.
“불쾌한 일은 없으셨습니까.”
“아뇨, 별일 없었어요.”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살짝 고개를 돌렸다.
단군이 북유럽에 함께 가자고 했던 것도,
적탑주와의 대화도,
일단은 생불왕을 찾아간 후에 전하는 것이 좋겠지.
탯줄부터 끊어야 본격적으로 다음 계획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형, 저 바로 삼신께 가려고요.”
형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만 특유의 사늘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딱히 업경의 권능을 차단한 것도 아닌데 여전히 그에게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늘 부담으로 다가왔던 그의 감정이 막상 잘라 낸 것처럼 사라지자 지금까지와는 다른 갑갑함이 느껴졌다.
저승에서 가장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형이 이제 와서 어떤 미지의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형이 아침에 한 말 때문은 아니에요. 원래도 탯줄을 잘라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괜히 말을 길게 덧붙였다.
“그러실 테지요.”
나를 내려다보던 형은 옅은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오늘은 이만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별일이 없으셨다고는 하나, 먼 거리를 오고 가신 것만으로도 피로가 쌓이셨을 겁니다.”
할 말을 마친 형이 도로 입을 다물었다.
업경은 그 표정 없는 얼굴 너머로부터 아무것도 전해 오지 않았다.
권능에 힘을 더해 보았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정자세로 선 그는 지나치게 굳건한 한 그루 거목 같았다.
수피마저 단단한 그 나무에 틈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형에게서 느껴지던 갑갑함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상실감으로 변해 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리의 말에 수긍할 때와는 전혀 다른 마음이었다.
얼핏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나눈 대화였다.
그러나 이제는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49년을 형제로 지내 왔던 우리는 어느새 서로에게 속내를 비치지 않을 만큼 조심스러워지고 말았다는 것을.
근래에 이어진 몇 번의 작은 언쟁이,
그럼에도 계속 아무렇지 않게 서로를 대해왔던 것이,
사실은 아무렇지 않았던 게 아니었다는 것을.
하지만 정작 그것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나는,
일찌감치 내 방으로 돌아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파묻혔다.
할 일이 분명한 내일이라도 빨리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
***
이튿날.
사랑과 희망 병원에 다다랐을 때였다.
나는 병원 입구에 선 삼신을 발견하고 꽤나 복잡한 심경이 되어 차를 세웠다.
그녀의 예언이 결국 이루어지고 말았음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전과 달리 백발을 흰 비녀로 틀어 올린 삼신은 그때와 같은 서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데 그녀의 시선을 받아 내며 차에서 내린 직후.
삼신의 옆에 낯선 얼굴의 중년 여성이 함께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인간과 긴밀하게 지내지 않았던 삼신이 굳이 누군가를 곁에 두는 것은 묘한 일이었다.
“음? 할망이 웬일로 누굴 데라고 왔대?”
차사들 또한 같은 생각이었는지 호구별성이 먼저 의문을 표했다.
“신기한 일이구나. 삼신께 마땅히 뜻이 있으시겠지만.”
5천 년 넘게 생불왕을 보좌해 왔던 사라도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한마디 보탰다.
“……?”
그때 삼신이 데려온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아아.”
뜻밖에도 나를 본 여인은 돌연 눈시울을 붉혔다.
“제연이 오빠.”
생각지 못한 호칭에 나는 멈칫했다.
“허.”
“으응, 뭐야?”
“…….”
차사들도 제각각 다른 소리를 내며 눈을 크게 떴다.
“오빠, 나야. 수연이야.”
그러나 신들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다가오는 여인을 지켜보면서,
나는 정말로 그녀가 인간 이제연을 기억하고 있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수연이는 49년 전 내 손으로 직접 저승에 데려와야 했던, 내 여섯 살짜리 막냇동생의 이름이었으니까.
“아이고 어떡하니, 우리 오빠. 정말로 그때와 똑같구나.”
다가온 그녀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내 뺨에 손을 대었다.
“이렇게 어렸는데, 정말, 얼마나 힘들었을까. 우리 첫째랑 얼마 차이 나지도 않는데.”
내가 기억하는 여섯 살 여자아이와는 전혀 닮지 않은 중년의 얼굴이었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봤다.
나를 바라보는 여인의 얼굴은 한없이 애틋했다.
다만 그것은 오빠를 그리워하던 어린아이로서가 아닌…… 자식뻘의 청년을 가여워하는 중년 여성의 측은지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재회에 대한 반가움보다도 있을 수 없는 일에 대한 괴리를 느끼며, 그녀의 어깨 너머에 서 있는 삼신을 보았다.
삼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기에, 내 여동생이었던 여인을 내 앞에 데려다 놓았다는 듯이.
“언젠가부터 오빠가 기억났어.”
여인이 말했다.
“그게 정말로 내 기억이 맞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언젠가 오빠를 만난다면 꼭 말해주고 싶었어.”
내가 기억하는 아이의 흔적은 하나도 없이.
젊은 청년을 바라보는 서글픈 어른의 눈으로.
“미안해, 오빠. 그때 우리가 오빠한테 너무 큰 짐이었어.”
……그건 여섯 살짜리 애가 할 말이 아니야.
나는 여인의 눈을 마주하며 생각했다.
……더 이상 내 여동생이 아닌,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 할 말은 더욱 아니고.
대답 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인간의 생은 한 번뿐.
환생은 이전의 삶을 이어가는 일이 아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삶을 자신의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런 여인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이것이 정상적인 일이 아님을 실감했다.
또한 그리하여 나는, 거듭 전생의 인연을…… 탯줄을 끊어 내야 한다는 사실을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삼신은 이걸 위해 여인을 이 자리에 부른 것이다.
잔인하게 느껴질 만큼, 정말 나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고서.
“그래도 다행이야.”
그녀가 말을 이었다.
“우리 오빠, 가엾고 불쌍한 우리 오빠가, 그래도 그 모진 고생을 겪고 결국은 귀한 분이 되셨구나.”
그런데 이어지는 여인의 말에서, 나는 한순간 무언가 다른 느낌을 받았다.
때문에 처음으로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삶에 걸맞게 웃어 보였다.
“아주 좋았어. 시대가 힘들었지만 새로운 부모님은 전생만큼 좋은 분이셨고, 남편도 성실했어. 애들은 착해서 벌써 다 어른이 됐어.”
그렇게 자연스러운 얼굴로 현생을 말하다가,
“그런데…… 먼저 갔어. 남편이… 3년 전에…….”
서서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래도 괜찮을 거야. 오빠 같은 사람이 왕이라면…… 거긴 분명 좋은 곳이겠지?”
조심스럽고도 무척이나 간절한 목소리였다.
내가 잘 아는, 가장 익숙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었다.
……아.
이것 때문이었구나.
비로소 나는 천천히 깨달았다.
삼신이 그녀를 데리고 온 진정한 이유를.
“……그래.”
깨달아버렸기 때문에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좋은 곳에 머물다가…… 언젠가 너를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 말 한마디에 세상 모든 근심이 가신다는 듯 여인은 환하게 웃었다.
이제 나는 여섯 살에 굶어 죽은 아이의 오빠가 아닌, 가족을 먼저 떠나보낸 어느 여인의 위안이었다.
삼신은 그녀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것이 저승의 왕이라는 나의 숙명임을.
***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떻게 된 일이긴, 훨씬 오래전부터 환생문이 맛이 간 게지.”
나는 바리와 차사들도 뒤로한 채 삼신에게 물었고,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삼신이 코웃음을 쳤다.
“원래도 가끔씩 전생을 기억하는 놈들이 있긴 했어. 다섯 살이 되기 전에 다들 잊어버렸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가벼운 어투였으나, 그녀는 금세 다시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저 애의 경우 환생문 탓만은 아니야.”
그것이야말로 본론이라는 듯이.
“이 병원에 원천강이 씌었다.”
“……원천강이요?”
뜻밖의 말에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천계의 원천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녀는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럼 내가 입에 담을 원청강이 달리 또 있겠느냐.”
참으로 퉁명스러운 반응이라 나는 조금 겸연쩍게 입을 다물었다.
원천강이란 사계절을 품고 있다는 천계의 강이다.
원천강이 사계절을 품은 것은 그 강이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운명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모든 것들의 운명인 만큼 세상의 모든 이치를 알고 있어 어떤 질문에도 대답을 해준다고 들었다.
……본디 천계에 있을 원천강이 이승에 나타났다니.
역시 천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해서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천신인 삼신이 나선 것이고.
“인간이 원천강을 탐내기 전에 내가 원천강의 전설을 회수해야 해.”
삼신이 다시 말했다.
“물론 인간이 감히 탐낼 만한 신화도 아니지만.”
나는 여느 때보다 더 냉소적인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다면 이곳에 계셨던 것이…….”
“그래, 원천강 때문이지. 내가 설마 탯줄도 못 끊은 핏덩이 뒤치다꺼리나 하려고 예까지 왔겠느냐.”
말을 끝내기도 전에 삼신의 독설이 쏟아졌다.
딱히 내 탯줄을 끊어주기 위해서 여기 있던 것은 아니라는 말에, 나는 괜히 멋쩍어져서 잠자코 그녀의 핀잔을 듣기만 했다.
“그러니 새 염라, 네놈도 당장 원천강을 처리하러 가야겠다.”
한데 별안간 삼신이 그리 말했을 때는 또다시 멍청하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요?”
모든 태어난 것들의 정점에 서 있는 생불왕이, 굳이 나를 대동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저는…….”
“그래, 탯줄에 묶인 반푼이 따위가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삼신은 불퉁한 목소리로 내가 아직 채 내뱉지도 못한 내 결점을 긍정했다.
“그래도 상대는 원천강이야.”
하나 그러면서도 재차 냉엄한 신의 어조로 돌아왔다.
“탄생이 나서면 죽음도 반드시 뒤를 따르는 법이지. 그게 운명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왕이 당연한 이치를 읊었다.
나는 그 말에 아무런 대꾸를 떠올리지 못하고, 그저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야만 했다.
다만 신수의 갈기처럼 사납게 흩날리던 백발을 비녀로 곱게 틀어 올려서 그런 걸까.
오늘따라 그녀가 아주 조금 유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