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장. 초대(5)
“맞아요, 그게 최선이었죠.”
적탑주가 긍정했다.
“어떤 인간도 그보다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지는 못할 겁니다.”
세 번째 천벌을 예지했을 때.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었던 단군이 살아나지 못할 259명을 직접 고른 일은 최선이었음을.
“그 남자처럼 1만 명의 평생과 그 평생이 얽힌 세상 전체의 인과를 살피지 못하니까.”
하나 긍정하면서도, 그녀의 얼굴은 명확히 표현할 수 없는 참담함으로 그늘져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걸 아주 잘 알아요. 자신은 완벽하지 않지만 어쨌든 모든 인간보다 낫다는 걸 알아서, 그래서 그 남자는 어떤 선택을 하든 결코 후회하지 않죠.”
오랜 세월 품어 왔을 생각을 털어놓는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새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건 이미 인간이 아니라 신이야. 모든 인간보다 우월하지만 전능하지는 못한 신.”
희미하게 떨리던 목소리가 점차 찌르듯이 날카롭게 갈라졌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가 그냥 죽으라고 선택한 259명의 삶은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그늘진 얼굴이 망막에 그대로 박혀버린 것처럼,
지금 그녀의 얼굴이, 삼신을 마주했을 때의 나와 똑같아서.
아무렇지 않게 불우한 죽음을 내리는 그 신을 원망하던 내 얼굴과 똑같아서.
아무 대답도 못한 채 적탑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가 왜 당신을 원하는지 알아요, 염라.”
그녀가 말을 이었다.
“권선과 징악의 신인 당신이 내리는 벌은 결국 신의 뜻이 될 테니까요. 인간은 그것에 감히 의문을 표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것이 적탑주가 내 길을 가로막고 섰던 이유였다,
“그래서 나는 당신과 그 남자가 손잡은 세상이 오는 게 무서워요.”
그녀는 한기에 몸을 움츠리듯 제 팔뚝을 감쌌다.
“그 세상은 그 남자가 선택한 세상을, 그 남자가 그의 능력 안에서 가장 많은 인간을 위해 선택한 가장 합리적인 세상을 거부하면 악이 될 테니까.”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나를 막고 선 이의 마음을 뚜렷하게 이해했다.
“……세상은,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엉망진창으로 굴러가게 내버려 둬야 해요.”
설령 그녀가 내린 결론이 어떤 면에서는 극단적인 비약을 품고 있을지라도.
그 말에 어떤 마음이 담겨 있는지만큼은.
“가장 합리적인 길을 선택해도 세상은 여전히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면…… 그럼 모든 불행한 이들에게는, 자신이 불행한 세상이 곧 최선이라는 뜻이 되어버린다고요.”
-……그럼 우리는, 인간은, 그 이유 없는 불행 앞에서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받아들여야 한단 말씀이십니까.
나 또한 눈앞의 적탑주와 똑같은 얼굴로 삼신에게 그리 말했으므로.
“그래요, 나는 차라리 불행에 이유가 없는 세상을 바라는 거야.”
그녀가 아랫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
“하지만 그가 신이 된다면 세상의 모든 불행에는 더 많은 수의 행복이라는 이유가 붙을 거예요.”
거기까지 말한 적탑주가 입을 다물었다.
냉소도, 조소도 사라진 자리에는 울분과 초조가 남았다.
팔뚝을 감쌌던 그녀의 손은 어느새 제 피부를 쥐어뜯고 있었다.
“…….”
나는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눈빛을, 업경을 통해 전해져 오는 감정들을 곱씹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그녀의 고뇌를 마주한 끝에,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전부가 아니군요.”
업경의 권능이 희미하게나마 잡아챘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직 무언가를 감추고 있음을.
“당신이 단군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당신이 말한 게 전부는 아닐 거예요.”
“그렇다면요?”
그녀가 날카롭게 반응했다.
동시에 살갗이 타들어 가는 환상통이 재차 홧홧하게 나를 덮쳐 왔다.
“징악의 신답게 내 머릿속을 헤집고 진실을 파헤치기라도 할 건가요?”
적탑주가 품은 주작의 전설이 그녀를 파헤치려는 나의 권능에 즉시 적의를 드러낸 것이다.
실체가 없음에도 몹시 뜨거운 불꽃이었다.
그녀의 적의가 그만큼 격하게 타오르기 때문일 터였다.
뜨겁게 타오르는 열기 속에서 나는 적탑주의 힘을 가늠했다.
이 공간은 그녀가 전개한 생사결의 필드였다.
그녀 스스로 나를 내보내주지 않는다면, 나는 그녀를 죽여야만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
이길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
그녀의 힘을 가늠하던 업경의 권능이 돌연히 나를 비추어 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이 보이는 것처럼 생생히 감각할 수 있었다.
일전에 안보팀장을 베어 냈을 때처럼 내 몸을 죄고 있는 탯줄을.
옴짝달싹할 수 없이 탯줄에 꽁꽁 묶여 있는 나 자신을.
이 순간 업경이 그런 내 모습을 보여주는 의미는 명확했다.
온전히 신의 격을 갖추지 못한 지금,
탯줄에 묶인 나로선 그녀를 제대로 상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탯줄은 결국 나의 한계였다.
한계가 존재하는 한 나는 한반도의 강자들을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나를 들여다보고 상대를 들여다보는 업경의 권능은 내게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새로운 왕이여, 나는 이미 내 앞에서 탯줄을 끊는 네가 보인다.
신을 원망하는 나를 비웃고 조롱했던, 그 저주와 같던 예언이 재차 떠올랐다.
때문에 나는 무심코 헛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눈앞의 적탑주가, 쓰러트려야 하는 적이 아니라…… 그저 거울 속 나를 보는 듯했으니까.
그것은 무척 이상한 기분이었다.
상대는 나를 신으로 바라보며 적의를 드러내고 있건만.
나는 그녀에게서 인간으로서의 내 모습을 찾고 있다니.
“아니요, 그러지 않을 겁니다.”
나는 대답했다.
“내게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고 해서 지금 당신이 말한 게 거짓이 되지는 않으니까.”
나는 단군이 제 뜻을 이루기 위해 징악의 권능을 원한다는 그녀의 말을 온전히 믿지 않았다.
그가 내게 속내를 감추고 있다고 해도, 현세 아닌 내세를 바란다던 덧없는 웃음을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군에게 그러했듯, 나는 그녀에게서도 똑같이 진심을 느꼈다.
날카롭게 날이 선 그녀의 눈에는 이제 신을 향한 적의뿐이었다.
그 익숙하고도 애틋한 감정을 마주하며 천천히 물었다.
“……이름이 뭡니까.”
내 물음에 적탑주의 인상이 한층 서늘해졌다.
“그건 왜 묻는 거죠?”
한편으로는 희미한 의아함도 묻어났다.
적탑주 또한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나를 대상으로 카르마 필드를 전개했을 때, 내게 시전자의 이름이 포함된 팝업창이 떴다는 걸.
나를 덮친 환상통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그것은 적탑주가 나를 향한 적의를 거두지 않았다는 뜻이었고, 기실 그건 그녀의 눈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잊지 않으려고.”
때문에 나는 신을 증오하는 인간에게 말했다.
“신을 미워하는 인간의 얼굴을,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하려고.”
냉정을 가장하면서도 타오르는 증오를 감추지 못하는 얼굴을 새기듯이 눈에 담으며.
적탑주로서가 아니라,
천부인의 간부로서가 아니라,
그저…….
“……도영.”
그래, 그저 ‘도영’의 얼굴로 기억하기 위해서.
도영의 얼굴에 떠오른 의아함은 조금 더 깊어질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를 불태우던 환상통은 그녀의 대답과 함께 촛불이 꺼지듯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고작 그런 말만으로도 사라질 적의였다는 듯이.
“주도영.”
이윽고 도영이 자신의 성까지 입에 담았을 때.
문득 그녀가 말하지 않은 단군과의 관계가 되씹혔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하나로 엮어 가장 진실에 가까운 결론을 내는 업경의 통찰이었다.
나는 조금도 닮지 않은 외모를 지닌 두 사람이 생각 이상으로 가까운 관계임을 직감했다.
누나일까.
여동생일까.
경지에 이른 도사는 본디 육체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신들처럼 정신과 육체가 고정된다.
젊게만 보이는 그녀도 사실은 단군처럼 보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가까운 친척일까.
나는 단군과 도영의 관계를 생각해보면서, 그녀에게 마저 말했다.
“알겠습니다. 잊지 않을 겁니다.”
……나도 한때 당신과 같은 얼굴을 했다는 것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그 말만은, 목구멍 안으로 삼켜 내고서.
마침내 결단했다.
이제는 정말 삼신을 만나러 가야겠다고.
이대로 탯줄을 끊어, 더 이상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게 될지라도.
내가 그녀와 같은 얼굴을 했다는 것만큼은,
나와 그녀가 똑같이 느꼈던 신에 대한 비탄만큼은 결코 잊지 않을 테니까.
***
서천꽃밭의 한 귀퉁이.
황폐해진 땅에 돋은 다섯 그루의 작은 묘목.
다섯 지옥의 권능을 품은 지옥수들이었다.
그 지옥수들을 심어둔 자리에 다다른 호구별성은 눈살을 찌푸렸다.
작은 나무들 사이에 붙박이처럼 서 있는 크고 시커먼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홀로 단군을 만나러 나갔던 그녀의 왕이 막 저승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한데 저놈이 또 자리에 없는 것을 보고는 그녀에게 놈을 데리고 와달라 부탁해 와서, 오기는 왔다만.
“아주 살림을 차려라, 살림을.”
호구별성이 강림의 크고 너른 등을 쏘아보며 말했다.
안 그래도 밤낮으로 나무만 보고 살던 놈이다.
오늘은 왕이 외출을 나가기도 전에 또 틀어박히더니 여태 나오질 않고 있었다.
“…….”
강림은 그녀를 보고도 대꾸조차 없이 다시 나무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싸울 때는 사나워도 입을 다물 때는 또 원체 목석 같은 놈인지라, 그러고 있으니 쓸데없이 크기만 한 게 꼭 바위나 거목을 세워 놓은 것 같았다.
내버려 두면 언제까지고 그러고만 있을 것 같아서, 호구별성은 다시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야, 꼴값 그만 떨고 집에 들어와. 왕이 오자마자 너 없다고 찾는다.”
왕이 찾는다는 말에 그제야 놈이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걸 왜 네가 전하는 거지, 흉물.”
“염병, 그럼 너 때문에 대왕님께서 예까지 행차하시리?”
한껏 비꼬아주니 놈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버릇처럼 시비를 걸긴 했어도, 저도 왕이 직접 와서 부르는 것은 언어도단임을 아는 것이다.
‘꽁한 걸 보니 아직도 왕한테 삐져 있구만.’
대답도 없이 인상만 찌푸리는 꼬라지를 보며 호구별성이 속으로 혀를 찼다.
아침에 왕과 한차례 언쟁을 치를 때부터 알아봤다.
속 좁은 놈이 아직도 왕의 얼굴을 보기 멋쩍어하는 게 분명했다.
그래봤자 타고나기를 충신이 천명인 놈인지라 왕의 곁을 지키지 못해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일 터인데.
“안 갈 거면 말든가.”
잠시 기다리다 툭 던졌더니, 계속 말이 없던 놈이 불쑥 나무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니, 가겠다.”
짜증나게 긴 다리를 뻗어 성큼 발을 내디디면서.
“잠시 생각을 좀 했을 뿐이야.”
묻지도 않은 말까지 덧붙였다.
“……물을 얼마나 줘야 하는지를.”
그러고선 또 빠른 걸음으로 저 혼자 돌아가버리는지라, 호구별성은 그런 놈의 뒷모습에 대고 어이없어했다.
“아니, 그렇게 하루 한 번씩만 주라고 했구만! 미친놈이 아직도 뭔 헛소리래?”
혹시 저놈이 또 나무를 죽인 것은 아닌지 괜히 한번 묘목들을 돌아본 그녀는, 이내 그를 따라 사라수대왕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30장. 초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