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장 (4) (99/187)

30장. 초대(4)

입술을 달싹였다.

미래를 보는 단군이 과거를 보지 못할 리 없으니, 그가 우리의 과거를 알고 있는 것도 기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리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암시해 오는 그에게 나는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단군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한들.

또한 단군이 알고 있음을 내가 알게 되었다 한들.

구태여 내 쪽에서 그것을 먼저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다만 이토록 확실하게 암시하면서도 끝내 직접 입에 담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어쩌면 그가 조금 더 먼 미래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우리가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때는 지금이 아닌 미래의 어느 날로 이미 정해져 있다든가.

“……알겠습니다.”

따라서 나도 그렇게만 대답했다.

결국 나 때문에 시간을 잃고 고독해졌다는 남자였다.

강림 형에게 말했던 것처럼, 내가 명부를 찢어 살린 이상 단군은 나의 업이었다.

그렇다면 시간을 잃고 되살아난 그가 고독함을 내비칠 때마다 절로 마음이 쓰이는 것도 어쩔 수 없지 않나.

설령 그가 그 고독함을 무기로 나를 움직이고 있다 해도, 그것마저 끝내 나의 업일 텐데.

다 떠나서 팔열지옥과 팔한지옥의 복원을 위해 북유럽의 신화를 얻어 와야 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한반도의 최강자와 협업할 기회를 굳이 마다할 것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북유럽은 어떻게 넘어갑니까?”

나는 제안을 받아들이며 물었다.

“우주질서보존회가 출국길을 막은 지도 벌써 50년이 넘었지 않습니까.”

가벼운 미소를 지은 채로 나를 바라보던 단군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때가 되면 자연히 아실 것입니다.”

이번에도 명확하지 않은 대답이었다.

한데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문 그의 입술 사이로 갑작스레 피가 흘러나왔다.

내가 흑탑을 칠 거라는 미래를 말한 뒤 피를 토했던 바리처럼, 나는 지금 단군이 한 말 역시 우주의 금기를 범하는 일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럼 그때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해서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제안을 받아들여 주셔서 기쁩니다.”

나눠야 할 이야기는 전부 끝났다고 생각한 걸까.

단군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보내드린 녀석이 부디 당신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그러고는 아까 넘겨주었던 해태를 한 번 더 언급하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럼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염라.”

우리가 함께 북유럽으로 넘어가는 때가 그리 머지않았다는 것까지 넌지시 알리면서, 인사를 남긴 단군은 보통의 고등학생처럼 자리를 떠났다.

그가 훌쩍 사라진 방향을 잠시 보다가 나 또한 일어섰고, 저승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한데 몇 걸음 채 떼기도 전에 들려온 싱그러운 웃음소리가 시선을 절로 끌어당겼다.

“……아.”

나는 그제야 천천히 목도했다.

고작 열일곱에서 열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

그들이 오후의 햇살 아래 생기 넘치는 웃음을 터트리고, 활기차게 뛰어노는 풍경을.

20년 전 저승이 닫혔고, 2만 년간 이어져 온 윤회는 정지되었다.

환생문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지옥에서 벌을 받다 형기를 마친 죄인들뿐.

그러니 저승에 당도하지 못한 혼은, 그래서 환생문 너머로 갈 수 없었던 혼은…… 그대로 우주를 떠돌았을 터였다.

그렇게 떠돌다가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우주퇴적물이 되어버리기도 했을 터였다.

나는 가능하다면 우주퇴적물이 되어버린 혼보다 다시 태어난 혼이 더 많기를 바랐다.

지금 우주를 떠돌고 있는 혼들도 너무 오래 헤매는 일 없이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바랐다.

다만 나 자신이 신이기에 염원 대신 내가 해야 하는 일을 되새겼다.

마저 걸음을 떼었다.

고등학교를 벗어남과 동시에 평소와 같은 복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장 천부인의 성역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 (!) 공간의 지배법칙이 바뀝니다. ]

뜻밖에도 팝업창이 떴다.

[ 인간 ‘주도영’이 자신의 업으로 필드를 전개합니다. ]

- (!) 해당 필드의 등급은 ‘카르마(K)’입니다.

- 해체 조건 : 시전자의 카르마 완전 해체

생각지도 못한 카르마 등급의 필드였다.

“습격?”

이곳은 천부인의 성역이었다.

단군 본인이라면 모를까 조금도 예상한 적 없는 위협에 당황한 사이.

화르르륵!

돌연히 막대한 화염이 폭풍처럼 불어닥쳤다.

“이런……!”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응이 늦어지는 찰나였다.

-멍! 멍멍! 멍!

가슴팍에서 불쑥 털뭉치가 튀어나왔다.

“……!”

[ (!) 풍문 ‘불을 삼키는 개’의 효과로 화속성 공격이 1회 차단됩니다. ]

멍군…… 단군이 넘겨준 신수 해태가 나를 덮치려던 막대한 화염을 그대로 삼켜버렸다.

-멍! 멍멍멍!

불을 삼킨 멍군이 대걸레를 뒤집어쓴 것 같은 작은 몸을 빳빳하게 세우며 내 앞에 섰다.

“그 풍문, 그가 넘겨줬나요?”

작은 발소리와 함께 차분하지만 어딘가 날이 서 있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결국 이번에도 다 보고 있던 거군요, 그 남자는.”

대면하는 건 처음이지만 이미 아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이전에 흑탑주와 비밀 회담을 가졌던 천부인의 간부였으므로.

“……역시, 당신이 적탑주였군요.”

업경의 권능은 대상의 본질을 비춘다.

단말기 화면을 통해 보았다고 해서 잘못 읽어 낸 것이 아니었다.

업경은 여전히 그녀가 전설급 각성자였던 흑탑주보다도 훨씬 더 강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권능을 더했다.

그녀의 본질에 집중했다.

업경의 감각이 하늘을 찌를 듯한 불의 장벽을, 나아가 그 장벽 너머 크고 화려한 날개의 형상을 어렴풋이 잡아냈다.

적탑주.

한반도에서 가장 강한 화속성 각성자.

그녀가 품은 전설은 남방(南方)의 수호신 주작이었다.

“……!”

다만 불현듯 느껴지는 홧홧한 통증에 살짝 미간을 좁혔다.

업경의 감각을 곤두세울수록 적탑주가 품은 막대한 화기에 살갗이 타버리는 듯한 환상통이 느껴졌다.

그녀가 나보다 강하다는 의미였다.

점점 더 거세지는 듯한 환상통에, 나는 적탑주를 살피던 업경의 권능을 갈무리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오해하지 말아요. 해태가 없었어도 당신이 다칠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녀가 무표정에 가까운 차분한 얼굴로 대꾸했다.

세상 전체를 태워버릴 듯한 남방의 전설과는 달리 서리가 내린 듯 차가운 목소리였다.

“난 그의 눈을 피해 당신과 이야기할 곳이 필요했을 뿐이에요.”

그러면서도 칼을 품은 듯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직시했다.

“그러니까 그 해태는 결국 나한테 던지는 경고인 거죠.”

-멍! 멍멍멍! 멍멍!

그녀의 말에 맞춰 내 앞에 섰던 멍군이 다시금 짖었다.

대걸레 같은 하얀 털이 좀 더 부풀어지는 것이, 그녀의 말을 알아듣는 듯한 모습이었다.

“대화가 목적이라기엔 너무 위험한 방법 아닙니까?”

나는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제가 당신을 죽이고 필드를 나갈 수도 있을 텐데요?”

내 물음에 그녀가 냉소적으로 입술을 비틀었다.

“마음에 없는 소리군요. 애초에 그럴 힘도 없으면서.”

그 말과 동시에 업경으로 그녀를 살필 때 느낀 타는 듯한 환상통이 재차 전신에 번져 왔다.

“……!”

갑작스러운 고통에 무심코 숨을 삼키는데, 무언가를 알아챈 것처럼 멍군이 나를 돌아봤다.

-멍! 멍멍! 멍!

그러더니 그대로 폴짝 뛰어 내게 도로 들어와버렸다.

파앙!

멍군이 내 품속으로 들어오자마자 불에 타는 듯했던 환상통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불을 삼키는 개가 보이지 않는 화기까지 삼켜버린 것이다.

“이걸로 확실해졌네요. 그 해태는 날 향한 경고예요.”

적탑주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정말로 당신을 해치려고 했다면 애초에 그가 가만두지 않았을 거야.”

그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해태가 막아준다 한들, 보이지 않는 불을 이용해 환상통을 퍼붓는 여자를 좋게 받아들이기는 조금 힘들었다.

게다가 그녀가 단군에 대해 말하는 투도 신경 쓰였다.

아무도 모르게 긴밀하게 협력 중이던 천부인과 적탑의 수장이, 사실은 물밑에서 서로를 견제하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으니까.

“단군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나 보군요.”

느낀 바를 그대로 내뱉으면서 생각했다.

서로의 두 번째 정체로 얽혀 있으니, 단군과 적탑주는 천부인 내에서도 가장 굳건한 신뢰 관계여야 할 텐데.

단군의 눈을 피해 카르마 등급의 필드를 여는 적탑주나, 그걸 내다보고 천연덕스럽게 해태를 보내는 단군이나, 꽤나 살벌하지 않은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때문에 그들이 대체 무슨 관계일까 가늠하며 물었다.

“……그 남자를 돕지 말아요.”

내 물음에 적탑주는 잠시 침묵하다 조금 망설이는 어투로 대답했다.

그 남자라니, 그러고 보니 그녀는 줄곧 단군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있었다.

“단군 말입니까?”

그것을 눈치챈 나는 그녀가 말하지 않는 입을 직접 입에 담았다.

적탑주는 표정을 굳히더니 이내 냉정하던 얼굴에 자조적인 웃음을 띠었다.

“그래요, 그 남자를 신으로 만들지 말아요.”

단군을 신으로 만들지 말라.

적탑주의 말에 나는 다소 의아해졌다.

“……하지만 그는 신이 될 생각이 없다고 하던데요.”

건물주로 환생할 것이라며 농담처럼 말하던 그를 기억하고 있어서였다.

그녀가 입술을 비틀며 차게 웃었다.

“그 말을 정말 믿어요?”

이어지는 그녀의 냉소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단군의 말에 근거가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당신도 그가 가엽나요?”

내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그녀의 물음이 이어졌다.

“자신의 것은 하나도 없이, 아무런 보상도 없이, 그저 대의 하나로 움직이고 있음에도 수년째 온갖 견제와 음해에 시달리는 그가 가여워서 도와주고 싶어요?”

꽤나 거북하게도, 내가 단군을 마주할 때마다 느꼈던 불편함을 정통으로 집어내는 말이었다.

“하지만 당신도 결국 알 거예요. 세상에 그 남자만큼 자기 뜻대로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나는 잠자코 적탑주의 말을 들었다.

단순히 그녀의 말이 정곡을 찔렀기 때문은 아니었다.

누구보다 단군과 긴밀하게 지내 왔을 적탑주가 내가 단군에게 느꼈던 바를 정확히 말하는 게 걸렸다.

나는 고작 몇 번 만난 것만으로도 느낀 불편함을 알고 있는 사람이, 정작 그와 오랜 세월 함께해 온 그녀라는 것이.

“……나는, 그 남자가 무서워요.”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던 차가운 얼굴에 어느새 그늘이 드리웠다.

“그거 알아요? 세 번째 천벌을 예지했을 때, 그는 이미 259명을 구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게 당시 그의 한계였으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날카롭지도 냉소적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내내 259명을 누구로 할지 고르는 기도를 했죠.”

세 번째 천벌이 한반도를 뒤집어 놨던 때, 세상에는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모든 평생을 살피고, 그들 중에서 가장 죽어도 되는 259명을 선택한 거야.”

그늘진 얼굴에서는 이제 선명한 두려움마저 읽혔다.

“……당신은 그게 진짜 인간이라고 생각해요?”

그 말에는 그녀가 단군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다만 그녀의 말을 듣던 나는 무심결에 되물었다.

“하지만 그게 그의 최선이었던 것 아닙니까.”

그가 구해 낸 1만 명의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가 나서지 않았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한데 그런 내 말에 적탑주는 돌연 허탈하게 웃었다.

“……하.”

그늘졌던 얼굴에 다시금 냉소가 차올랐다.

“그래, 그렇지. 최선이었지.”

차갑게 가라앉은 두 눈이 나를 담았다.

“당신도 결국 신이구나.”

그렇게 적탑주는 조소했다.

신을 원망하는 인간의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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