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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장 (2) (97/187)

30장. 초대(2)

“……형, 나도 그 사람이 굳이 혼자 오라고 한 게 찝찝하기는 한데요.”

설득을 위해 말을 꺼냈지만 나를 바라보는 형의 눈은 서늘하게 날이 선 것을 넘어 숫제 얼어붙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이미 형에게서 돌아올 답은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결코 나를 단군에게 혼자 보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근데…… 그 사람이 진짜로 나를 해칠 마음이 있었다면요.”

나는 어떻게 해야 그를 설득할 수 있을지 생각하다가 말을 꺼냈다.

“그럼 나를 또 굳이 혼자 부를 게 아니라, 그냥 둘만 있었을 때 손을 쓰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내가 당시의 일을 입에 올렸을 때.

그저 확고하고 단단하기만 하던 형의 눈이 희미하게 균열을 일으켰다.

그에 나는 뒤늦게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형이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아직까지도 내가 사라졌던 일에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그게…….”

성급하게 굴다 말을 잘못 꺼내고 말았다.

나는 낭패감에 말꼬리를 흐렸다.

형의 그런 눈은 언제나 내게도 같은 아픔을 곱씹게 했다.

나는 형이 그런 눈을 하길 바란 게 아니었다.

“그때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고요.”

그럼에도 결국 해야 할 말은 변하지 않았기에,

나는 부러 얼굴을 조금 굳혀 보였다.

형이 저러한 반응을 보이는 건 마음이 쓰였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이야기를 제대로 하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 사람이 저를 도와줬으니까, 저도 그에게 신뢰를 보여주는 게 맞다고 생각이 들어서요.”

형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표정의 변화는 크지는 않았으나, 나는 형이 일부러 감정을 억누르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왕이 된 이후 줄곧 내게는 화를 내지 않으려고 했던 것처럼.

“대왕님께서 그자에게 호의를 베푼 것이 먼저셨지요.”

낮게 깔린 목소리로 형이 말을 이었다.

“그자가 먼저 대왕님께 흑탑의 토벌을 부탁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형이 단군에게 품은 적대감이 생각보다 훨씬 더 크다는 걸 눈치챘다.

사실 당연할지도 몰랐다.

천부인의 이름으로 토벌에 참여해달라는 그의 부탁을 받고 간 곳에서 흑탑주와 마주쳤고,

직후 차사들이 보기에는 특히 충격적인 방식으로 사라져버리기까지 했다.

그랬던 나를 심지어는 단군이 먼저 찾아냈다는 사실이,

마치 그렇게 될 것을 알고 있던 것처럼 행동했다는 것이,

형은 물러설 수 없이 의심스러운 것이다.

“저는 당신께서 왜 그자에게 그토록 마음을 쓰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형의 낮은 목소리에는 여느 때와 다른 힘이 실려 있었다.

“단지 그자가 선인으로 알려졌다는 이유만으로는, 저는 당신의 그 깊은 호의를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생각하기도 전에 이어진 말에서, 나는 형이 하려는 말이 단지 단군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만이 아님을 직감했다.

무릎 위에 놓인 두 손을 나도 모르게 모아 쥐었다.

그새 손끝이 차가워져 있었다.

불현듯 23년 전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스물일곱 살 청년이 신조차 손댈 수 없었던 열두 명의 운명을 바꿔버린 때를.

그로 인해 저승의 모두가 신의 권능이 무너지고 있음을 알게 된 그때를.

……알고 있었구나.

나를 내려다보는 형의 서늘한 눈을 마주하며 생각했다.

그때 나는 삼백의 형제들에게조차 내가 주도혁의 명부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말았다.

주도혁의 사망 예정 시점과 천벌의 남긴 생존자의 수가 열두 명이 되는 시점에는 다소 차이가 있었던 터에, 나는 형제들에게 그 거짓말을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래, 그런 줄로만 알았다.

형이 나를 추궁하기 전까지는.

형은 그저 기다리고 있었다.

형제들에게마저 감추었던 진실을.

내 손으로 단군 주도혁의 명부를 찢었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솔직하게 말해주기를 계속 바라 왔던 것이다.

형의 그 마음이, 우리의 오랜 신뢰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그 얼음장이 자칫 깨져버릴까 봐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형.”

한참의 생각 끝에 나는 입을 열었다.

“형, 그 사람은…… 제 업이에요.”

내내 함께였던 형에게마저 20년이 넘도록 감추었던 그날에 대한 진심을.

“그래서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 사람과 얽히게 되는 것은 결국 내 손으로 저지른 업 때문이라고.”

47년 전에 명부를 찢었던 쌍둥이들처럼.

차사가 명부를 찢는다 해도 인간은 타고난 불행을 피할 수 없다고.

23년 전의 그 청년도 분명 어딘가 부서진 채로 살아왔을 거라고.

그런데 힘겹게 꺼낸 내 말에도 형은 더욱 차갑게 정색할 뿐이었다.

“그런 이유라면 더욱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새파랗게 날이 선 신의 눈이 다시금 나를 짓눌렀다.

“대왕님, 업은 인간들 사이에서나 쌓이는 것입니다.”

깊이 침잠한 신의 목소리가 나를 끌어 내렸다.

“신이 인세에 무슨 짓을 저지르든, 그것은 결코 업이 아닙니다.”

차가운 한기가 배어 있는 말이었다.

“인간들이 저지른 업을 세상에 펼쳐 놓는 것이 신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도 당신께서는 지금 인간한테 업을 쌓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형의 한마디 한마디가 생불왕을 대신해서 나를 가르치던 때의 목소리를 불러 왔다.

나와 쌍둥이들 사이에 넘을 수 없는 하늘의 선을 긋던 그의 목소리를 겹겹이 겹쳐 냈다.

-탯줄을 자르시면 지금 당신을 아프게 하는 인간의 삶에서 벗어나실 겁니다.

-그렇게 인간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시면 자연히 인간보다 더 멀리 보시게 될 겁니다.

그때 그는 삼신을 원망하는 나를 연민하여 다정하게 말해주었지만, 사실은 형 또한 삼신의 마음과 같았을 터였다.

신이 되었어도 인간의 편에 머무르려는 내가 잘못되었다고 여겼을 터였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아팠다.

“당신께서 하셔야 할 일은 그자가 부르는 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만 그 탯줄을 끊어 내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계속해서 내게 신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권하고 있었다.

“생불왕을 찾아가십시오. 그리하여 지금처럼 당신의 눈을 가리는 인간의 마음을 끊어 내고 신의 자리에 오르십시오. 그게 당신께서 당장 하셔야 할 일입니다.”

나는 신물처럼 목구멍을 기어오르는 야속함에 숨을 삼켰다.

형의 말대로 탯줄을 끊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탯줄을 끊지 않으면 불완전한 나 때문에 나의 차사들이 피 흘리게 될 것이다.

그것을 깨달았기에 나는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한데도 지금 이 순간 탯줄부터 먼저 끊을 것을 강요하는 형이 야속했다.

그마저도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 무정한 말이 무척이나 슬프고 미워서, 나는 끝내 말하고 말았다.

“내가 꼭 형의 말을 따라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에 형의 눈썹이 살짝 떨렸다.

“지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형의 강요를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고요.”

재차 내뱉은 말에 형도 기어이 인상을 쓰며 대꾸하려 할 때였다.

“왕의 말이 맞다, 강림.”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던 사라가 끼어들었다.

“보다 보니 너는 네 위치를 자주 잊는 것 같더구나.”

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강림 형에게 말했다.

“아직도 새 왕이 네 말 한마디에 고분고분 고개 숙이는 막냇동생으로 보이느냐?”

그리고 사라가 그리 말한 순간.

찍어 누를 듯 나를 직시하던 눈이 일순 크게 흔들렸다.

시선이 어지러이 뒤섞이는 찰나.

업경의 권능을 통해 형의 감정이 차게 식은 파도처럼 내게 밀려들었다.

그러나 그 감정을 내 것처럼 받아들이면서도, 나는 그게 어떤 감정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여태껏 형의 마음이 부담스러울지언정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지금은 내게 휘몰아치는 형의 감정들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이 몹시도 낯설어 나는 입술만 달싹이며 형을 올려다봤다.

“……!”

그런데 돌연 그 알 수 없는 감정의 파도가 멎었다.

한순간에 끊기듯이 사라져버렸다.

“……대왕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형이 여느 때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다시 한 점의 동요도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하지만 형의 곁에서 49년을 보낸 나는 알았다.

그는 의도적으로 표정을 지우고 있었다.

그리고 형이 저런 얼굴을 하는 것은 격렬한 감정을 억누를 때뿐이었다.

그런데도 나의 업경은 그에게서 어떤 감정도 읽어 낼 수 없었다.

-그대가 업경으로 만물을 바라볼 때, 업경은 그대의 마음 또한 함께 바라보고 있음이니…… 그대 스스로 짊어질 준비가 되지 않은 업은 보여주지 않는 것이오.

곧바로 떠오른 바리공주의 말에 잠시 숨을 멈추었다.

모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내 마음이 형의 마음을 받아들일 만큼 강하지 못해서.

-그대와 상대가 서로의 업을 짊어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혹은 형이 내게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보이려 하지 않아서.

그래서 업경을 통해서도 그의 감정을 읽지 못하고 있다는 인과 앞에 놓인 나는, 천천히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49년 만에 처음으로 서로에게 벽이 생겼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자에게 갈 것이냐, 대왕?”

그것이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워서 침묵하고 말았더니 지켜보던 사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꼭 가야 한다고 마음먹었다면 다녀오는 것이 맞아.”

팔짱을 낀 그가 강림 형을 일별하며 덧붙였다.

“저놈이 무어라 하든 그것은 하등 신경 쓸 것도 없다.”

“…….”

사라는 이전에 말했듯 본인의 뜻과 상관없이 무조건 내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그 마음을 알면서도, 어쩐지 이제 와서 쉬이 그러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일까.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으며 나를 바라보는 형 때문일까.

더는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형이 갑자기 멀게 느껴져서일까.

“아니, 전하. 내가 딱히 저 시꺼먼 놈 편을 들고 싶진 않은데.”

이어서 내내 잠자코 듣기만 하던 호구별성마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 속 모를 놈한테 우리 왕만 보내자니 영 맘이 좋진 않아.”

한쪽에만 의견이 쏠리는 것이 염려된다는 듯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리야, 너는 어때? 전하 혼자 다녀와도 되겠어?”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바리에게도 의견을 구했다.

“……죄송해요. 상대가 상대여서인지 뭔가가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아요.”

그녀의 물음에 조용히 지켜보던 바리도 입을 열었다.

지금껏 말을 보태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다는 듯 조금 주저하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오빠가 위험하지 않으실 거라는 확신은 어느 정도 있어요.”

그 정도면 충분한 조언이었다.

바리의 말에 호구별성이 재차 한숨을 내쉬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정말 내 대답만 남았다.

“…….”

차사들과 바리의 시선에 천천히 눈을 감으며, 나는 긴 숨을 내쉬듯이 대답했다.

“그러면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내 결정에 그들은 더 이상 어떠한 말도 얹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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