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장. 초대(1)
현무의 몸에 깃들어 있던 안보팀장의 혼을 베어 내는 것에 성공했다.
직접 확인하지 못했던 현무의 핵은 안보팀장의 혼에 묶여 있었다는 모양이었다.
버그의 여파를 정리하기 위해 왔다는 지구청장은 흑탑주가 가지고 있던 현무의 전설을 내게 옮겨주었다.
그러고는 앞으로도 건투를 빈다는 덕담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제 여덟 개 남은 건가.”
한반도의 전설은 총 열 개.
이로써 내가 꺾어야 할 전설은 여덟 개가 남았다.
여덟 개의 전설을 모두 꺾으면 한반도의 유일한 신화가 되어 다시금 이 지구의 유일한 신화가 될 때까지 겨루게 될 것이다.
“…….”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멀찍이 서 있는 남자에게로 시선이 향했다.
여덟 개의 전설 중에는 그의 전설인 신단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현무의 전설을 가져간 것에 아무런 불만이 없는지, 단군은 눈이 마주치자 희미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는 상처가 남은 몸을 가다듬는 중이었다.
탯줄을 느슨하게 만드는 주술의 부작용이었다.
단순한 육체적 손상으로 끝난 게 아니었는지 그의 발밑에서는 아직도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신경이 쓰이시오?”
그때 바리공주가 다가와서 물었다.
“그럴 법도 하지. 나도 조금 놀랐으니까.”
단군과 달리 그녀는 벌써 주술의 부작용을 전부 정리한 듯 상처 없이 말끔한 모습이었다.
“오래전부터 저이와 눈이 섞여 있었지. 하지만 인간이 정말로 나와 손을 섞을 줄은 몰랐소.”
바리공주가 단군을 한 번 돌아보며 말했다.
그가 자신과 같은 수준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것도 모자라, 주술에서도 합을 맞출 수 있었던 것에 그녀는 선선히 감탄했다.
“그대도 알고 있어야 해. 오늘 저이가 없었다면 그대는 그것을 베어 내지 못했을 것이오.”
다시 나와 눈을 맞추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이에게 고마워할 것도 없지.”
부드러우면서도 강건함이 느껴지는 어조였다.
“저이가 없었다면, 애초에 오늘 그대가 그것을 베어야 하는 일도 없었을 테니.”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옅은 미소를 드리운 눈으로 나를 담았다.
“명심하시오, 저승의 왕이여. 도사는 우주의 이치를 따라갈 뿐이니, 제아무리 뛰어난 도사라도 본래 벌어져야 할 일을 조금 늦추거나 빠르게 할 뿐이란 것을.”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잠깐 생각한 뒤에 물었다.
“그 말씀은 끝내 어떤 형태로든 제가 그녀를 베게 되었을 것이란 뜻입니까?”
바리공주는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데 보아하니 그대는 아직 그대의 권능에 서툴더군.”
다만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로 다른 말을 꺼냈다.
생각지 못한 화두에 살짝 입술을 달싹이면서도, 나는 이것이 그녀가 본래 해주고 싶었던 조언임을 짐작했다.
“대상의 본질을 읽는 업경의 권능. 그대 스스로도 그것이 어떤 원리를 가지며, 무엇을 어디까지 알 수 있는지 혼란스러워하고 있어.”
그녀의 말은 정확했다.
아직 나는 업경의 권능이 대체 어떠한 기준으로 효력을 발휘하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지금 말을 나누는 바리공주마저도 마치 여러 겹의 천으로 자신을 가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을 들추고 또 들춰내도, 그녀의 진정한 속내는 알 수 없을 거라고.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상황에서는 누군가의 감정이 내 것처럼 선명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전투 도중에 감각이 예리해질 때라거나, 혹은 좀 전에 차사들과 마주했을 때처럼 그들이 나를 향해 짙은 감정을 품었을 때라거나.
“그대가 대상의 본질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하는 건 두 가지 경우지.”
바리공주가 말을 이었다.
“상대가 감추고 있는 경우, 그리고 그대가 원하지 않는 경우.”
“제가 원하지 않는다고요?”
“누군가의 업을 안다는 것은 결국 그것을 함께 짊어진다는 뜻이니까.”
깊고 검은 눈이 자비로이 나를 보았다.
“그대가 업경으로 만물을 바라볼 때, 업경은 그대의 마음 또한 함께 바라보고 있음이니…… 그대 스스로 짊어질 준비가 되지 않은 업은 보여주지 않는 것이오.”
“……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지금의 그대는 오히려 악인의 업을 더 확실하게 읽어 내겠지. 아직 타고난 숙명을 따라가지 못하는 그대의 몸이 다소 무리를 하게 될지라도, 그대 스스로 그것을 직시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 말에 나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나를 괴롭게 했던 흑탑주의 업을 떠올렸다.
현기증이 일 정도로 거북한 탓에 일부러 업경의 권능을 닫기까지 했던 강렬한 감각.
그것은 다시 말해 그만큼 서툰 권능으로도 확실하게 보였다는 뜻이었다.
“또한 강한 힘을 가진 상대일수록 그대에게서 자신을 감출 수 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지. 사실은 그렇게 강하지 않은 상대도, 그대에게 아무런 적의가 없는 상대마저도 그대에게서 자신을 감출 수 있어.”
나는 이어지는 바리공주의 말에 집중했다.
“그대와 상대가 서로의 업을 짊어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고요한 눈빛과 마주하며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바를 정리했다.
“그 말씀은 곧…….”
그리고 천천히 대답했다.
“무엇보다 제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이군요.”
바리공주의 조언 덕에 내가 비로소 깨닫게 된 답.
“그 어떤 업도 함께 짊어질 수 있을 만큼, 저 자신의 마음이 강해져야 한다고.”
앞서 2만 년의 세월을 군림했던 나의 아버지.
이제는 영원의 세월을 그리워하게 될, 고결한 권선과 징악의 신을 상기했다.
“지옥이 텅 비게 되는 날까지 버티려면, 아무래도 그래야 하지 않겠소?”
바리공주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분처럼 될 수 있을까 두려워하는 나를 다독이듯 다정한 기운을 담아서.
“하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다 한 것 같군.”
그녀가 내게서 가볍게 몸을 물리며 말했다.
“일이 바빠 먼저 물러가겠소. 차사들에게도 안부 전해주시오.”
바리공주는 그렇게 눈 깜짝할 새에 마법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퇴장에 나는 잠깐 머뭇거렸다.
다만 그녀의 말대로 이제는 차사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 멀찍이서 주술의 부작용을 가다듬던 단군이 다가왔다.
“괜찮으시다면 가까운 시일 내에 천부인을 찾아주시겠습니까?”
그가 건네 온 것은 생각지 못한 제안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단군이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만 혼자서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온화한 미소를 짓고서 덧붙인 조건에는 당황스럽고 거북할 수밖에 없었으나,
“제가 신경 써야 할 눈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은 천부인 내부라고 해서 다르지 않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냥 거부하기엔 마음이 불편해지는 이유를 밝혀 왔다.
나는 다시금 그의 정치적 상황을 생각하며 살짝 인상을 썼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건가.
업경의 권능은 단군의 본질을 읽고 그의 말이 진심을 말해주었으나 거기까지였다.
그는 여전히 바리공주와 마찬가지로 베일에 싸인 존재였으니까.
또한 그러한 사실이 거듭 방금 전 바리공주의 조언을 곱씹게 했다.
서로가 서로의 업을 짊어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업경은 상대를 읽어 내지 못한다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꺼려질 수밖에 없는 제안이라는 것을.”
내가 대답이 없자 그가 다시 말했다.
“어디까지나 당신께서 괜찮으시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고는 작은 쪽지를 내밀어 왔다.
“제 메신저 아이디입니다.”
“……메신저?”
단군인데 메신저도 쓰는 건가?
아니, 당연히 그럴 수도 있는 건데 왜 이상하게 느껴지지.
우주강도단이 따로 각성자 전용 어플까지 운영하고 있으니, 딱히 해킹이나 그런 위험도 없을 테고.
……아니, 그렇지도 않은가?
생각해 보면 시스템이고 던전이고 버그투성이인 마당에, 걔네 메신저 어플은 믿을 수 있는 건가?
“어, 일단 친구…… 등록해 두겠습니다.”
갑자기 온갖 잡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나는 일단 시치미를 떼고 그의 아이디가 적힌 쪽지를 받았다.
“아, 등록해 주시는군요.”
내 대답에 단군이 좀 더 환하게 웃었다.
“새 친구가 생기는 건 15년만입니다.”
“…….”
이 사람, 가만 보면 은근히 자기를 불쌍하게 포장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 제안에 대해선 더 생각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여전히 조금은 떨떠름한 기색으로 대답했지만, 단군은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는 듯이 미소를 거두지 않고 말했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분명 대화를 마무리 짓는 평범한 말이었다.
그런데 말을 하는 이가 단군이라서인지 꼭 내가 연락을 하는 것마저도 이미 정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주가 예정된 때에 다시 보자던 그날과 마찬가지로, 나는 정의할 수 없는 답답함을 뒤로하며 나의 차사들에게 돌아갔다.
***
흑탑과의 싸움을 끝내고 저승에 돌아온 후.
흑탑이 무너졌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한반도 전체를 휩쓸었다.
뒷수습을 한 것은 천부인, 정확히는 단군이었다.
흑탑주가 흑탑의 간부를 토벌하러 갈 때 천부인에 증인 역할을 부탁했던 터라 비교적 쉽게 나서서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는 염라에 대한 언급 없이 ‘흑탑주가 감추고 있던 죄가 드러났다’ 정도로 정리했지만, 사람들은 그 뒤에 염라가 있음을 거의 정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그런 와중에 몇몇 전설급 각성자들은 ‘사실 단군이 흑탑을 친 것 아니냐’며 또 쓸데없는 정치 공작을 벌이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적탑주가 ‘됐고 흑탑의 신도들은 갈 곳 없으면 우리 적탑으로 와라’ 영업을 때리는 바람에, 너도나도 흑탑이 남긴 것들을 흡수하는 데 정신이 팔려 흐지부지해졌다.
적탑의 경우 특유의 독특한 복장, 구체적으로는 빨간 머리와 검은 마스크 때문에 원래도 괴짜 집단이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나는 단군이 일부러 적탑을 그런 이미지로 만들었음을 알아차렸다.
한반도의 전설급 각성자가 모두 단군의 적인 상황이었다.
그는 분명 천부인 밖에서 상황을 움직일 다른 키가 필요했을 터였다.
그런 상황에 다소 독특한 행방을 보이는 적탑은 효과적인 도구였다.
그런 식으로 저승에 돌아온 지 일주일이 흘렀다.
하루아침에 흑탑이 사라진 한반도가 차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동안 나의 두 가지 고민도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아…….”
첫 번째는 혼자서 천부인을 찾아달라는 단군의 요청을 수락할지 말지.
두 번째는 이대로 삼신을 찾아가 탯줄을 끊을지 말지.
사실 고민하면서도 양쪽 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특히 탯줄을 끊어야 한다는 것은 이미 나 때문에 피 흘렸던 바리공주와 단군을 보며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고민 끝에, 나는 우선 단군부터 만나기로 결정했다.
삼신을 만나서 탯줄을 끊은 후에는 다시 본격적으로 다른 전설들과 겨룰 준비를 해야 할 테니까.
그리하여 오늘 아침.
식사를 위해 아침 식탁에 모인 바리와 차사들에게, 홀로 단군을 만나러 가겠다는 말을 꺼냈고.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강림 형이 단호한 목소리로 반대했다.
“적진에 홀로 찾아가시겠다니요. 대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대왕님.”
너무나도 원론적인 말이었다.
때문에 나는 뭐라 대꾸를 못 하고 그저 난감하게 형을 바라봤다.
안 그래도 형은 내가 한번 사라졌던 이후로 한층 더 예민해진 상태였다.
애초에 혼자서 오라고 했던 것부터 경우가 없는 부탁이었다.
그건 내가 어떻게 변호할 수 있는 것이 아닌지라, 나는 끝내 앓는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