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장. 영겁의 시간이 고이면(4)
하얗고 거대한 것이 내게 아가리를 벌렸다.
나를 집어삼키려는 그 날카롭고 거대한 이빨을 마주하며, 나는 그것의 정체를 마침내 받아들였다.
우주질서보존회 안보팀장, 조금희.
그녀가 모습을 바꾸어 흑탑이 주술로 만들어 낸 현무의 몸에 깃들어 있었다.
“……윽!”
나는 그녀, 아니 그것의 이빨을 피해 몸을 물렸다.
그러나 탯줄에 묶인 몸은 좀처럼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그저 아주 약간만 뒤로 비켜섰을 뿐이었다.
하나 그것만으로도 그것의 이빨을 완전히 피해 내는 데 성공했다.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은 그것 또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내가 길고 촘촘한 탯줄에 묶여 있는 것처럼, 그것도 움직이려 할수록 새하얀 표면을 아무렇게나 묶은 정체불명의 줄에 몸이 죄어들어 갔다.
“당신들은, 원래 지구의 존재에 손을 댈 수 없다고 했지.”
줄에 묶여 발버둥 치는 그것을 보며 깨달았다.
흑탑이 만들어 냈던 그 막대한 양의 우주퇴적물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우주퇴적물로 희생시켜 불러오려고 했던 ‘발생할 수 없는 사건’이 무엇이었는지를.
그래, 안보팀장은 수많은 우주퇴적물로 자신의 인과를 붕괴시켜 우주질서보존회로서의 제약을 끊을 셈이었다.
“처음부터, 흑탑과 손을 잡은 상태였나?”
깨닫고 난 후에야 도깨비들을 가두었던 폐교 던전에서도, 우주퇴적물이 쌓여 있던 귀철 던전에서도 안보팀장과 마주쳤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저 버그를 처리하기 위해 나타났던 것이라고 여겼다.
사실은 흑탑이 버그를 발생시키는 데 협조하기 위해 계속해서 뒤를 봐준 것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의문이 생겨났다.
“……대체 왜 그런 짓을?”
그것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계속해서 내게 아가리를 벌린 채 덤벼 왔다.
내 몸을 집어삼키려는 그 거대한 이빨을 재차 피하면서 나도 간신히 검수엽을 들었다.
-이제 그대는 저것을 베어야 하오, 염라.
나를 이곳으로 들여보낸 바리공주의 목소리를 상기했다.
-이 땅의 어떤 것도 저것을 벨 수는 없어. 저것은 본래 이 땅의 존재가 아니니까.
그녀는 현무의 몸에 숨어 있었던 저것이 무엇인지 알았을 터였다.
-그대가 해야 해.
다 알고서, 그리도 막대한 고통을 감내하며 나를 이곳에 들여보냈을 터였다.
나는 내가 그것을 베도록 하기 위해 피를 쏟고 있을 바리공주와 단군을 생각하며, 나를 짓누르는 모든 카르마의 제약에 맞서 간신히 검을 들고 그것을 겨누었다.
“……큿.”
검을 휘두르려 자세를 잡는 것마저 힘겨워 절로 신음이 샜다.
그것 역시 무리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숨기지 못하며 나를 향해 벌린 아가리를 가늘게 경련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싸움은 지켜보기에는 무척 우스꽝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의 움직임도 차라리 정지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느렸다.
그러나 우리는 각자 상대를 없애기 위해 필사적으로 힘을 더하고 있었다.
너무도 느리고 힘겨워 마치 영겁에 가까운 시간처럼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작은 움직임에 불과하기에 찰나와 같은 시간이기도 했다.
해서 우리의 싸움은 짧고도 길었으며, 길고도 짧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푸우욱!
그것의 이빨이 내 목을 깊이 파고든 순간.
서거어어억!
나의 검은 그것의 몸을 완전히 베어 냈다.
“큭!”
타는 듯한 고통에 이를 악물며 작게 몸을 떨었다.
구멍이 뚫린 목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내게 베인 그것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면서 무너져 내렸다.
-너…… 너……!
정확한 생김새조차 갖지 못했던 하얀 덩어리.
그 불완전한 형태가 깨지면서 그것은 비로소 목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너 때문에…… 내가!
나는 피가 쏟아지는 상처를 손으로 막으며 헐떡였다.
혀뿌리부터 짙은 쇠맛이 느껴졌다.
-내가, 너 때문에……!
고막을 찢을 기세로 울리는 절규에 역설적이게도 내가 승리했음을 인지했다.
그녀는 끝내 나를 해치지 못했지만, 나는 그녀를 베어 내는 데 성공했다.
-왜…… 왜!
하얀 덩어리 위로 내가 알고 있던 여자의 모습이 환영처럼 번쩍였다.
-그렇게 오랫동안 지켜봐 왔는데……!
하얀 양복에 선글라스로 눈을 가린 여자가 원망스럽게 손을 뻗으며 절규했다.
-왜……! 내게는 사랑을 허락해주지 않는 거야!
그렇게 비명 같은 외침을 남기곤 한순간에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아.”
그와 함께 나를 옥죄고 있던 탯줄도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려서.
나는 영문도 모르고 그대로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끝……난 건가?”
나는 멍하니 그녀가 뚫었던 목을 매만졌다.
놀랍게도 그녀가 남겼던 목의 상처는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상처뿐만 아니라 피가 터지면서 곳곳에 흐르고 튄 핏자국까지 원래부터 없던 일인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마치 그녀가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지워진 듯이.
그녀가 남긴 상처마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아, 아아.”
나는 주저앉은 채 그저 신음했다.
몹시 이상한 기분이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상황이 전혀 이해되질 않았다.
탯줄에 얽매인 상태로 그녀를 베려고 그렇게 용을 썼던 사실마저 꿈결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그때.
“수고 많으셨습니다, 선생님.”
허공을 찢고 갑작스레 나타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아주 깔끔하게 처리해주셨군요.”
검은 옷을 입은 거구의 여자.
우주질서보존회 지구청장 조옥희였다.
기척 없이 나타난 그녀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태도로 내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 덕분에 버그를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버그를 처리했다고요?”
나는 그녀의 말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해 되물었다.
내가 우주질서보존회 안보팀장을 베었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갑자기 지구청장까지 나타나서 버그를 운운하다니.
“버그란, 우주질서보존회의 시스템을 인간의 의지가 바꾸는 것이니까요.”
내 물음에 지구청장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분은 수백억 년에 걸쳐 세 개의 행성을 관리하셨습니다만, 종내 인간처럼 이 행성을 사랑하게 되어버리셨지요.”
이어진 그녀의 설명에 손끝이 떨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지켜봐 왔는데……!
-왜……! 내게는 사랑을 허락해주지 않는 거야!
사라지기 직전에 그녀가 내질렀던, 그 비명과도 같은 절규가 귓가를 떠나지 않아서.
모든 지구의 것들을 하찮게 내려다보던 그녀의 마음이 사실은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아서.
“그분은 지구의 존재가 되고 싶으셨던 겁니다. 막대한 우주퇴적물을 만들어서 스스로를 지구의 존재로 바꾸려 하셨고요.”
지구청장이 마저 설명했다.
“다만 저희가 가진 정보의 양이 막대하다 보니, 혼을 지구의 것으로 바꾸는 것은 물론 그것을 버틸 수 있는 육체까지 새로 만들어야 했던 거죠.”
그렇다면 수많은 실험을 거쳐 신화적 존재인 현무의 몸을 만들어 낸 것이, 그녀 자신의 육체로 삼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너무 오랫동안 지구를 지켜봤고, 그래서 지구의 존재가 되고 싶을 만큼 지구를 사랑해버렸기 때문에?
“그게 바로 버그입니다. 버그란 인간의 의지가 우주질서보존회의 시스템에 개입해 다른 효과를 내는 것이니까.”
나의 경악과 상관없이 지구청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분이 지구를, 인간을 지켜봐 왔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의지가 우주질서보존회였던 그분을 변하게 했다는 뜻이죠.”
나는 내게 노골적으로 경멸을 드러내던 안보팀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구의 만물을 하찮게 보던 상위의 존재가, 사실은 지구를 사랑해서 한 차원 아래의 존재가 되려 했었다니.
어쩌면 그녀가 지구의 존재를 하찮게 여겼던 것은, 상위존재로서 하위존재에게 홀렸다는 사실이 자존심을 건드려서일지도 모른다.
그런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어서, 더욱더 지구의 모든 것을 경멸하는 것처럼 행동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러한 태도는 몹시 인간다웠다.
인간 중에서도 보다 하찮고 유아적인 이들의 행동이었다.
나는 그것에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분이 지구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그리하여 점점 지구의 것이 되었다는 것은…… 저희 우주질서보존회가 그분을 직접 건드릴 수 없게 되었다는 뜻과 같습니다.”
내 기분과 상관없이 지구청장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지구청장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우주질서보존회는 지구의 존재에 직접 손을 댈 수 없다.
그들이 직접 지구의 것을 없애려 들면 우주의 심판에 따라 몸이 심하게 훼손된다.
이전에 안보팀장 본인이 직접 보여준 적도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상기하며 지구청장을 응시했다.
“당신들이 직접 없앨 수 없으니 내가 없애게 했단 겁니까?”
내 물음에 지구청장이 묘한 웃음을 보이며 대답했다.
“뭐, 버그니까요. 지구의 언어로는 결자해지라고 하지요.”
결자해지.
지구청장의 말과 함께 안보팀장의 절규가 거듭 귓가를 맴돌았다.
-너…… 너……!
-너 때문에……내가!
-내가, 너 때문에……!
수많은 지구의 것들 중에서도 유독 나 하나만을 경멸하고 증오했던 안보팀장.
지구청장이 결자해지라 말한 것은 그와도 관련이 있다는 뜻일까.
나는 안보팀장에게 눈곱만큼도 좋은 감정이 없었다.
그녀가 사라진 이 순간조차 그 막대한 증오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지켜봐 왔는데……!
-왜……! 내게는 사랑을 허락해주지 않는 거야!
그럼에도 그녀의 마지막 말만큼은 계속해서 잔열처럼 뇌리에 머물렀다.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기분에 잠겨 들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결국 그분은 그렇게 사라지게 될 줄 알면서도 계속해서 사랑했다는 뜻이군요.”
그 순간 지구청장이 검은 선글라스 아래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역시 지구의 언어는 굉장히 낭만적이네요.”
한 줌의 악의도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감탄.
그러나 친절하게 웃음 지은 그녀의 얼굴에서 나는 거북함을 느꼈다.
단순히 우주질서보존회를 상대하는 입장에서 보았을 때.
본디 나는 사라진 안보팀장보다는 겉으로나마 친절한 지구청장이 낫다고 생각해 왔다.
노골적으로 경멸을 드러내며 과격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 안보팀장보다야, 빈말이나마 나를 편애한다고 말해준 청장이 대하기 편했으니까.
한데 그리도 불편했던 팀장이 실은 지구를 사랑했음을 알게 된 지금, 이제 와 나는 사라진 그녀가 청장보다 더 가깝게 느껴졌다.
……가깝게 느껴진다라.
내가 그녀를…… 정말로 그렇게 느껴도 되는 것일까.
“표정이 묘하시군요.”
그때 지구청장이 다시 말했다.
“그분의 소멸이 썩 유쾌하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입가에는 여전히 옅은 미소가 가시지 않은 채였다.
“너무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지구의 당신이 그런 얼굴을 하신다는 것이야말로…… 그분이 소원대로 지구의 존재가 되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말한 지구청장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내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29장. 영겁의 시간이 고이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