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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장 (3) (94/187)

29장. 영겁의 시간이 고이면(3)

어둠 속으로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살갗에 스미는 어둠은 축축한 한기를 품고 있어 깊이 들어갈수록 더욱 선연하게 느껴졌다.

내가 어둠을 파고들 때마다 어둠도 나를 더욱 깊숙이 품는 것 같았다.

현무의 핵이 가까워져서일까.

사방을 잠식한 어둠과 한기도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바리공주와 단군이 앞서간 덕인지 아까처럼 나를 공격해 오는 것들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더 깊숙이 걸어 나갔을 때였다.

복도처럼 좁았던 길이 어느 순간 광장처럼 넓은 공간으로 이어졌다.

“……!”

광장처럼 넓은 공간에 높이 솟아 있는 천장이 보였다.

위에서부터 하얀빛이 드리우고 있어, 이곳이 바깥인지 안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곳이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흑탑의 도사들이 막대한 우주퇴적물을 만들어 내면서 목적했던 주술이 이 공간에 잠들어 있음을.

드넓은 공간에는 벽과 바닥을 구분하지 않고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어지러이 쓰여 있었는데, 그 문자들이 모여서 하나의 거대한 방진을 이루었다.

또한 그 광대한 방진의 중심에는…….

“이게 뭐지?”

나는 중심에 놓인 거대한 무언가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공룡?”

파충류의 것처럼 보이는 몸은 한눈에 공룡을 떠올릴 정도로 웅대했다.

자세히 본 그것의 목은 길고 검었다.

몸은 울퉁불퉁하게 뿔이 돋아 있었다.

전혀 다른 특징을 지닌 두 생물이 서로 얽혀 있는 모습이었다.

바로 이해했다.

검은 뱀과 거북.

흑탑주의 전설.

북방의 수호신 현무였다.

“이건 현무의 몸인가……?”

난생처음 보는 거대한 몸체는 그 압도적인 크기로 인해 생물보다는 차라리 자연 구조물에 더 가까워 보였다.

한데 눈으로 현무를 더듬어가던 나는, 파충류처럼 비늘이 돋아 있는 그 몸이 어딘가 덜 다듬어졌다는 생각을 했다.

크고 검은 거체가 신화적 존재의 위용을 뽐내는 가운데, 군데군데 엉성하게 진흙을 뭉쳐놓은 듯한 부분이 자꾸만 눈에 걸렸다.

진흙을 뭉쳐놓은 듯한…… 그래, 그것을 깨닫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가짜 몸……!”

깜짝 놀라서 재차 현무의 몸을 살폈다.

가짜 몸을 만들던 무당 마을.

고등어에 갇힌 용궁 왕자.

도깨비 인형들…….

그간 마주쳤던 것들이 새로이 곱씹혔다.

그들이 그토록 많은 실험을 해 왔던 것은, 현무라는 신화적 존재의 몸을 만들기 위해서였다는 말인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옆에서 나직하고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먼저 들어왔던 단군이었다.

그의 발밑으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끊임없이 쓰였다가 또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단군이 계속해서 어떤 주술을 시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간이 없소.”

뒤쪽에서 바리공주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이제 그대는 저것을 베어야 하오, 염라.”

그녀가 현무의 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땅의 어떤 것도 저것을 벨 수는 없소. 저것은 본래 이 땅의 존재가 아니니까.”

바리공주의 발밑에서도 단군과 마찬가지로 읽을 수 없는 기묘한 문자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나와 단군이 함께 우주의 이치를 비틀어 그대를 붙잡고 있는 인과를 잠시나마 느슨하게 만들 것이오. 그리하면 그대는 저것을 벨 수 있겠지.”

나로선 그녀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흑탑이 만들어 낸 현무를 벨 수 있도록, 바리공주와 단군이 내게 필요한 조치를 취해준다는 것만은 알아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이해하면서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있었다.

“……왜 하필 제가 베어야 하는 겁니까?”

무조신 바리공주, 그리고 그녀와 비견될 정도의 눈을 가진 단군.

그 두 존재가 입을 모아 구태여 내가 해야 한다고 집어 말한 이유를 몰라서였다.

어떤 강력한 주술이라도 순식간에 그 원리를 파악하고 해체할 수 있는 그들과 달리, 나는 그저 검을 휘두를 뿐인데.

“그대가 해야 해.”

내 물음에 바리공주가 희미하게 웃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그대의 일이니까.”

의아할 정도로 단호한 대답이었으나, 그녀는 그 이상 말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막상 이곳에 다다르자 나도 이 모든 게 어떤 숙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그새 현무에게 가까이 간 단군이 말했다.

단군이 가리키는 곳에는 옅은 푸른빛이 도는 검은색 입구가 열려 있었다.

“이 안으로 들어가시면 현무의 핵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따라 나도 그쪽으로 발걸음을 막 옮겼을 때였다.

파아앙!

나를 중심으로 하얀빛이 번쩍이더니, 내 발밑에서도 알 수 없는 문자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놀라운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뒤바뀐 풍경에 나는 살짝 몸을 떨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거미줄.

그래, 말하자면 아주 촘촘하게 엮인 거미줄이었다.

그 거미줄은 실 하나하나가 매우 복잡한 문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한 내 주변을 뒤덮고 내 전신마저 꽁꽁 묶고 있었다.

갑갑했다.

목이며 팔다리, 손끝과 발끝까지 모든 곳이 그 기묘한 줄에 묶여 있었다.

발을 내딛기는커녕 고개를 조금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웠다.

특히 목에 감겨 있는 줄은 제대로 숨을 쉬는 것도 힘겨울 만큼 나를 강하게 죄었다.

그 끝도 없이 늘어진 줄 속에서, 나는 나를 묶고 있는 줄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게.”

온몸을 지독히도 옥죄는 줄 안에서 간신히 몸을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이게…… ‘탯줄’이구나.”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탯줄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 것 같아도, 사실은 타고난 성격과 자라난 환경에 묶여 사고와 행동이 제한되듯이.

아득한 세월을 이어져 온 카르마에 따라, 사실은 내가 할 수 있는 행위도 그에 묶여 언제나 제약되어 있었다.

탯줄이 나를 묶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기에,

나는 내가 이러한 탯줄에 묶여 있는 줄도 모르는 채로,

탯줄의 제약을 받지 않는 행위들만을 행하며 그것이 온전히 나의 판단이라 믿어 왔다.

그러나.

현무의 몸에 깃든 무언가를 베는 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어서,

그것을 행하려는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나를 묶고 있는 탯줄의 제약을 느끼게 된 것이다.

쌓아 온 카르마에 따라서만 산다면, 언제까지고 탯줄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지나가겠지만…… 그 이상을 하려 하면 이렇게 묶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탯줄에 묶인 채로 무겁디무거운 걸음을 겨우 한 발 내디뎠을 때.

불현듯 피 흘리는 바리공주와 단군의 모습이 보였다.

“……!”

알 수 없는 주문을 끊임없이 외우고 있는 그들은 어느새 눈과 코와 입에서 피를 쏟아 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드러난 살갗도 시시각각 곪고 터지며 상처가 번지고 있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그들의 상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그것은 타고난 카르마의 제약을 거부하려는 자들에게 내려지는 우주의 심판이었다.

이제 한 걸음이었다.

고작해야 한 걸음이었다.

한데 겨우 이만큼의 탯줄을 풀어주는 것만으로도, 단군이나 바리공주조차 그만한 심판을 받고 있었다.

아.

결국 탯줄이란 그런 것이었다.

탯줄을 자르지 않은 아기는 자신을 잉태한 어머니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탯줄을 자르지 않은 신은 자신을 잉태한 우주의 인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을 자각하자마자 나를 절망케 했던 생불왕의 일갈이 뇌리를 울렸다.

-탯줄에 묶여, 너를 잉태한 세상의 모든 인과에 묶여 살아 보아라.

-그러나 탯줄에 묶인 아기가 아무것도 할 수 없듯, 너는 세상의 인과에 묶여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일각일각 우주의 심판으로 피를 쏟아 내는 단군과 바리공주가 선연히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계속 탯줄을 끊지 않는 이상, 누군가는 나를 위해 저렇게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지금은 단군과 바리공주였지만, 내가 이대로 계속 격을 갖추지 못한 왕으로 살아간다면 그다음에 피를 흘리는 것은 나의 차사들이 될지도 몰랐다.

나 혼자 탯줄을 자르기 싫다고 버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이제 왕이었다.

탯줄을 자르지 않고 이대로 영원히 불완전한 채로 남아버리면, 그 왕을 모시는 모든 이가 왕의 한계에 부딪쳐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왕이여, 나는 이미 내 앞에서 탯줄을 끊는 네가 보인다.

그 깨달음에 저주와 같던 삼신의 예언이 메아리쳤다.

-나를 부정했던 너는 스스로 나를 찾게 될 것이다.

-너는 결국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것임을, 바꿀 수 없는 것이 있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래의 삼신은…… 이미 이 순간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참담한 절망 사이로 다시금 바리공주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가시오, 염라.”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검붉은 핏덩이를 토해 냈다.

그녀의 상처에 괴로움을 느끼며 힘겹게 발을 옮겼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마치 거센 물살을 거슬러 노를 젓는 것처럼 버거운 걸음이었다.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무언가에 맞서 꾸역꾸역 밀고 나가는 것 같은 압박감을 견디며, 나는 마침내 현무의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현무의 안으로 들어선 순간, 또다시 순식간에 풍경이 바뀌었다.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은빛 보석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밤하늘을 그대로 펼쳐놓은 듯한 광경에 나는 절로 내가 아는 어떤 개념을 떠올렸다.

“……우주?”

그렇게 내뱉은 순간, 주변은 점점 더 우주와 같은 모양새로 바뀌었다.

내가 그곳을 우주에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곳도 내가 생각하는 우주에 맞춰지는 것 같았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가까운 개념이 우주일 뿐, 사실 이곳은 내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공간이었다.

그저 이곳에 들어오면서 우주를 떠올렸기 때문에 우주처럼 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나는 마침내 내가 베어야 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몸을 둥글게 웅크리고 있는 새하얀 것.

현무의 전설이 담긴 핵을 품은 이 거대한 몸의 주인이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듯한 몸은 자세한 생김새를 전혀 알아볼 수 없어서, 단지 크고 빛나는 무언가가 웅크리고 있다고만 느껴졌다.

그런데 그것을 눈에 담은 순간.

“……말도 안 돼.”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업경의 권능이, 뜻밖에도 그것이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존재임을 말해주었다.

“정말 당신이라고?”

업경의 권능이 내게 비춰주는 그녀의 본질을.

아니, 정확히는 본질이 아니라 내게 그나마 익숙한 그녀의 형태를.

이미 몇 번이고 마주쳤던 하얀 양복과 검은 선글라스를.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나는 업경이 말해주는 그것의 정체를 믿을 수 없어 몸을 떨었다.

“내가 당신을…… 베어야 한다고?”

그와 동시에 나를 발견한 우주의 현신이 내게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어 바꾸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어떤 형용할 수 없는 재앙과 같은 형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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