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장 (2) (93/187)

29장. 영겁의 시간이 고이면(2)

모두의 시선이 두 바리를 향했다.

하얀 한복을 나부끼는 무채색의 소녀는, 같은 이름을 가진 신을 마주하고는 살짝 몸을 떨더니 이내 한없이 깊은 눈으로 입을 열었다.

“무척 오랜만이에요.”

그 말에 바리공주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똑같이 검고 깊은 눈 안에 같은 이름의 소녀를 담아내며.

“난 처음 보는 것 같구나.”

그녀의 대답에 바리는 조금 놀란 듯하더니 곧 다시 차분한 얼굴로 답했다.

“당신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런 것이겠죠.”

바리공주와 바리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소녀에게서 시선을 돌린 바리공주가 차사들을 보았다.

“다들 오랜만이오.”

한 점의 어두움 없이 밝은 얼굴이었다.

그녀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으나 차사들은 쉬이 입을 열지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같은 것을 궁금해하면서도, 먼저 입에 올리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모처럼 만났지만 지금은 서둘러야 할 일이 있소.”

대답이 없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리공주가 다시 말했다.

“그대들의 왕께서 해주어야 할 일이지.”

속내를 비치지 않는 신비로운 눈이 이제는 나를 향했다.

“나와 단군이 왕을 엄호할 테니, 그대들은 여기서 잠시 기다려주시오.”

바리공주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림 형이 나섰다.

“대왕님께서 무슨 일을 하셔야 한다는 겁니까?”

크고 넓은 등이 버릇처럼 내 앞을 가로막았다.

“글쎄, 이곳에 고인 시간을 매듭짓는다고 하면 맞을까.”

바리공주가 형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러나 그 대답이 마음에 차지 않았는지 형은 더 노골적으로 그 등 뒤에 나를 감췄다.

아무리 바리공주가 엄호한다 한들 정체 모를 일에 날 혼자 보내는 것이 내킬 리 없겠지.

갑자기 헤어졌다가 이제 겨우 다시 만났으니 저렇게 나오는 것도 어쩔 수 없겠지만.

나는 형의 팔뚝을 잡아끌며 그의 앞으로 나섰다.

단군과 바리공주는 그 일에 대해 말을 아꼈다.

나는 여전히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흑탑의 전설이 만들어 낸 이곳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단군과 무조신 바리공주가 나를 집어 그리 말했다.

무엇보다 내가 별안간 이곳에 떨어지게 된 원인과도 관련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형, 제가 해야 해요.”

평소처럼 돌아왔던 형의 얼굴에 재차 파동이 일었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눈은 귀목 마을 당시 보았던 눈과 비슷했다.

안 된다고 고집을 피우다가도, 그러지 말라는 내 한마디에 땅으로 꺼지듯 힘을 잃었던 그때가 떠오르는 눈이었다.

“그대를 이해하오, 강림.”

그때 바리공주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저 안은 깊이 들어갈수록 공간이 몹시 불안정하오.”

차사들이 같이 갈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나와 저이가 함께 손을 섞어도 한 명을 더 들이는 것이 고작이야.”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이제부터는 안에 들어가는 것조차 꽤나 고된 일인 것 같았다.

범상한 주술 정도는 순식간에 해체하는 단군과 바리공주마저도 쉬이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결국 형은 더 말하지 못했다.

내가 잡은 팔을 뿌리치지도, 내 앞을 다시 가로막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서서 입을 굳게 다물고 날 내려다보았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얼굴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으나 나는 그가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알았다.

머리와 달리 마음은 좀처럼 내키지 않더라도.

“그러면 우리는 먼저 들어가겠소.”

바리공주가 단군에게 시선을 주며 몸을 돌렸다.

“왕이 사라져서 그대들의 걱정이 컸을 것이오. 충분히 안부를 나눈 후에 다시 보내주시오.”

말을 마친 그녀와 단군이 천천히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나는 서서히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크게 숨을 내쉬며 차사들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그러니까.”

얼굴을 좀처럼 풀지 않는 강림 형과 아직도 다소 경황이 없어 보이는 다른 두 차사에게 조금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제가 걱정을 끼쳐드렸죠?”

다시 만난 것은 좋았으나, 내가 없는 사이 걱정이 컸을 그들을 생각하니 영 마음이 불편했다.

다만 나를 대하기 어려운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내가 말을 건네도 세 차사는 한참을 대답 없이 내 얼굴만 빤히 보았다.

입을 열지 않는 그들을 대신하듯 업경의 권능이 그들이 겪었던 혼란을 어렴풋이 내게 전해주었다.

강림 형의 것만큼 선명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사라와 호구별성의 혼란도 형의 것처럼 무거웠다.

그들도 그사이 나의 부재를 업이라고 여겼던 걸까.

“너 없어서 아주, 나라 망하는 줄 알았다.”

침묵 끝에 호구별성이 먼저 한마디 했다.

“영감이나 강림이나, 합쳐서 육천 살도 넘는 것들이 쓸데없이 심통만 부리지를 않나.”

말하면서도 사라와 강림 형을 흘겨보는 것이, 영 좋지 못한 꼴을 본 것 같았다.

“하여튼 다시는 우리 두고 어디 가지 마라.”

그렇게 말한 호구별성이 한숨을 푹 쉬었다.

할 말이야 많지만 그걸로 끝내겠다는 마음이 묻어났다.

“다친 곳은 없어 보이니 다행이구나.”

사라가 나직하게 말했다.

내 몸 상태도 함께 살피고 있었는지, 목소리도 그렇고 늘상 나른하던 눈이 평소보다 예민하게 날 서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새 몸도 생겼어요.”

나는 괜히 그를 향해 두 팔을 활짝 펼쳐 보였다.

“스탯도 똑같이 최대치고…… 움직이는 것도 먼저 쓰던 몸이랑 다르지 않아요.”

안심하라는 의미에서 한 말인데 정작 사라는 안 그래도 날카로워진 눈을 한층 첨예하게 벼리며 팔짱을 꼈다.

“그래도 저승에 돌아가면 한번 보자꾸나. 그대로 써도 괜찮은 몸인지.”

그 말에 문득 내 몸에 걸린 주술을 풀어주면서도 잠깐 의문을 표하던 바리공주가 떠올랐다.

그러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고,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바리공주도 확실하지 않다고 했으니까.

어차피 돌아가서 자세히 살필 것이라면 공연히 벌써부터 걱정을 더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두 차사와 한 차례씩 말을 주고받고, 나는 마지막으로 바리를 바라보았다.

“혹시 나 때문에 잠에서 깬 거야?”

때가 되면 일어날 것이라고 했던 바리였다.

보름이 지나도록 깊은 잠에 빠져 있었는데, 하필 이때 눈을 뜬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내가 그렇게 사라져버렸으니 차사들이 바리를 찾은 것은 이해가 되었지만, 그래도 더 오랫동안 자야 했던 것을 나를 찾는다고 급하게 일어난 것일까 봐 염려스러웠다.

“아뇨,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을 뿐인걸요.”

내 물음에 바리가 차분히 대답했다.

“오빠가 가장 저를 필요로 하실 때 곁에 돌아올 수 있어서 기뻐요.”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한결같이 믿음직한 모습이었다.

나는 잠시 바리를 바라보았다.

업경의 권능이 전해주는 그녀는 아직도 혼란이 가라앉지 않은 차사들과 달리 고여 있는 물처럼 잔잔하기만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신보다도 더 초연한 모습이었던지라 나는 바리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졌다.

업경이 읽어 내는 그녀의 본질은 어딘가 단군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영겁의 세월이 빚어낸,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이 확실한 존재.

단군처럼 일부러 감추고 있다는 인상은 아니었으나, 마찬가지로 내가 볼 수 있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오빠가 무엇을 궁금해하시는지 알아요.”

바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그분과 마주하고서야 온전히 깨달았어요.”

우리가 가진 의문을 풀어주려는 듯이.

“머지않은 미래에 바리공주님께서는 아득한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가실 거예요.”

시공간을 꿰뚫어 보는 깊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그녀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게 영겁의 시간을 거스르시다가 무당들의 신이 될 어느 소녀를 만나실 거예요.”

이미 본 것을 전해주듯 담담한 어투였다.

“그때 그분은 그 소녀에게 거의 모든 힘을 넘겨주시고 다시 평범한 인간의 혼으로 돌아가실 거예요.”

여기까지 들었을 때, 이 자리의 모두가 신과 소녀의 관계를 직감했다.

“그리하여 신에서 인간으로 돌아가신 그분은, 수천 년의 윤회를 거치고 15년 전 어느 날, 마침내 제가 되실 거예요.”

말을 잇던 그녀가 잠시 이야길 멈추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네, 그분은…… 아득히 먼 전생의 저예요.”

언제나 초연하던 얼굴에 희미하게 긴장이 어렸다.

살면서 겪어 온 모든 것을 우주의 뜻으로 받아들여 온 바리였다.

그럼에도 그것만은 그녀 또한 타고난 숙명의 무게를 느끼는 것 같았다.

“또한 저는 아득히 먼 전생의 어느 날…… 제힘을 나누어주어 소녀를, 그분을, 한반도의 무조신 바리공주가 될 수 있게 도와주었죠.”

결국 바리공주는 자기 자신에게 힘을 받아 신이 된 것이었다.

또한 과거의 자신에게 힘을 나누어 주었던 바리공주는, 다시 인간이 되어 무한히 환생하다가 같은 이름을 가진 소녀가 되어 나를 만난 것이었다.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비로소 업경의 권능이 왜 바리공주는 내가 아는 바리가 아닌데도 내가 아는 바리는 바리공주가 맞다고 느꼈는지 깨달았다.

무조신 바리공주와 인간 바리의 관계는 닭과 병아리의 관계와 비슷했다.

병아리는 아직 닭이 된 적이 없지만, 닭은 반드시 병아리였던 것처럼.

시간을 거스르지 않은 바리공주는 아직 인간 바리가 아니지만, 인간 바리는 바리공주의 환생이었으니까.

“그분과 저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의 원인인 동시에 이미 벌어진 일의 결과입니다.”

차분한 얼굴로 바리가 말을 마무리 지었다.

“다시 말해…… 이 우주의 시공간이 뒤틀려 있다는 증명이겠죠.”

그녀가 말을 마쳤을 때, 나와 삼차사는 잠시 침묵했다.

바리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품어 온 의문이 풀렸으나, 그것은 이제 또 다른 의문을 불러왔기에.

“……혹시.”

때문에 나는 침묵 끝에 다시 물었다.

“그분이 왜 시간을 거슬러 가시는지도 알고 있어?”

바리는 살짝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알지 못해요.”

그러고는 다시금 바리공주가 사라진 길을 눈에 담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분은 이미 알고 계실 거예요.”

과거의 자신이었지만, 그녀도 그 신의 뜻을 다 헤아리지는 못한다는 듯이.

“알고 계시면서도 말씀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분명 있을 거예요.”

조심스럽게 손을 모으며, 그녀는 말했다.

“우주가 그만한 미래를 보여준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그것을 보여줘도 절대 그 길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니까.”

즉 바리공주는 자신이 알고 있는 미래를 그대로 실현하기 위해 침묵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입에 담는 소녀의 차분한 얼굴에서, 새삼 그녀와 나의 간극을 의식했다.

벗어날 수 없는, 나아가 벗어나서도 안 되는 운명이 있다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그럼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구나.”

그렇게 대답하며, 나는 저승차사로 살아가는 동안 집행했던 무수히 많은 죽음들을 떠올렸다.

태어난 순간부터 정해진 죽음을 인간은 알지 못하기에,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온 그들의 죽음 앞에서 나는 서글펐고 동시에 위안을 느꼈다.

“오빠.”

바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두 분께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검고 깊은 눈이 바리공주와 단군이 사라진 길을 가리켰다.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한반도에서 가장 천기를 잘 읽으시는 두 분이 오빠를 도와드릴 테니까.”

이어지는 말은 내가 아닌, 아직도 얼굴을 풀지 않은 차사들에게 하는 말 같았다.

“……그래.”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차사들을 한 차례 돌아보았다.

“그럼 다녀올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재차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정들에, 뒤로 물러서듯 업경의 감각을 닫으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