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장. 지금 그의 곁에는(2)
이런 상황에서 단군이라니.
나는 신경을 곤두세우며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봤다.
이토록 약해진 때에 그를 마주친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혹시라도 나를 이런 엉터리 몸에 가둔 것이 저 남자라면, 대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너무 긴장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내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도와드리러 온 것이니까요.”
마스크를 내린 얼굴은 그저 차분했다.
한편으로는 온화해 보이기까지 했다.
“지금쯤 꽤나 난처하실 것 같았거든요.”
그럼에도 나는 쉬이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그의 능력이나 알려진 품성과는 별개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그의 언행은 여전히 껄끄러웠다.
하물며 그가 꿰뚫어 본 것이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나의 미래라면, 더욱이.
“아, 그리고.”
내 경계심과는 상관없이 내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그는 한쪽 무릎을 굽히고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이 모습일 땐 도혁주라고 합니다.”
반원을 그리던 눈이 한층 부드럽게 휘었다.
“도……혁주?”
나는 순간 의미를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내 반응에 그는 다소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
“단군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쓸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도혁주입니다.”
“아…….”
그냥 주도혁이잖아, 이 컨셉충!
“듣고 보니 조금 더 젊어 보이는군요.”
떨떠름한 기분을 숨기며 말했다.
가까이서 본 그는 머리카락 색깔이 바뀐 것 외에도, ‘천부인의 단군’보다 더 젊은 20대 중반 즈음의 외모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완벽한 조형으로 이뤄진 얼굴은 열 살 정도 어려진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단군이 왜 면류관에 곤복 차림을 고집했는지를 조금 이해했다.
평범한 차림으로 나서기엔 지나치게 눈에 띄는 외모였다.
아무리 머리색을 바꾸고 마스크를 쓴다 한들,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저 잘 뻗은 눈매만으로도 그 단군을 떠올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 ‘단군’ 하면 곤복에 면류관부터 생각나도록 만든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단군’이 아닐 때에는 쉬이 그를 연상하지 못하도록.
도혁주라는 웃기는 가명은…… 주도혁이라는 그의 본명을 모르는 이상 전혀 눈치채지 못할 테고.
……아니, 그러고 보니 그새 단군으로 개명도 했댔지. 참.
“그리고 지금처럼 도혁주의 이름을 쓸 때는.”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정보를 상기시킨 그가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적탑의 부탑주이기도 합니다.”
“……!”
이어진 말에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한반도 1위 길드의 길드장과 한반도 5위 길드의 부길드장이 동일인이란 뜻이었다.
뒤늦게 그의 붉은색 머리칼과 얼굴을 가린 마스크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런 모습으로 찾아온 것이 하필 저 단군이라서 곧바로 연결 짓지 못했다.
타오르듯 붉게 물들인 머리칼.
붉은 문양이 들어간 검은색 마스크.
모든 길드원이 화속성 각성자로 이루어진 적탑의 상징이었다.
“또한 적탑의 탑주도 동시에 천부인의 간부로 계십니다.”
곧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단군을 대신해서 흑탑주와 비밀 회담을 가졌던 여자.
업경의 촉이, 이상하게도 흑탑주보다 더 강한 실력을 지녔다고 이야기하던 그 날카로운 인상의 각성자.
아무리 천부인의 간부라지만, 전설급 각성자인 흑탑주보다도 더 뛰어나 보이는 게 이상했는데.
그녀가 사실 적탑의 탑주였기 때문이라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때 봤던 여자를 곱씹으며 단군을 응시했다.
천부인의 단군과 적탑의 탑주가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니.
분명 놀라웠지만 마냥 신기하게만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걸 내게 알려줘도 되는 겁니까?”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비밀을 밝힌 것인지 짐작이 되질 않았다.
“물론 알게 되신 분들 중 대부분은 살아계시지 않죠.”
내 물음에 그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저와 뜻을 같이하시는 분들을 제외하면요.”
사람 좋은 얼굴로 날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곱게 휜 눈과 마주하며 나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에게 협력하지 않으면 나도 그들처럼 될 거라는 말로 들리는데요.”
나지막이 흘러나온 스스로의 목소리가 얼핏 날 서 있다고 느꼈다.
동시에 이 상황의 주도권이 단군에게 있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어쩔 수 없이 거북해졌다.
“그럴 리가요.”
그는 내 날 선 물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상한 어투로 대답했다.
“저는 그저 당신께 잘 보이려고 말씀드렸을 뿐입니다만.”
“……?”
나한테 잘 보인다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대답에 자연스레 눈이 가늘어졌다.
단군은 미소 띤 얼굴로 태연히 덧붙였다.
“당신은 제 꿈을 이뤄주실 분이시니까요.”
내가?
왜?
……애초에 당신 꿈이 뭔데?
나는 더욱이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쳐다봤다.
부드럽지만 다소 옅게 느껴지는 그의 미소는, 그저 나를 놀리는 것이라기엔 어울리지 않는 무게감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길래…….
“저승의 대왕님께 잘 보여야, 다음 생에야말로 건물주로 태어날 수 있을 테니까요.”
……뭐?
“…….”
나는 그 실없는 농담에 조금도 웃지 않고 되물었다.
“어차피 신이 되실 것 아닙니까?”
장난치지 말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자는 뜻에서 꺼낸 말이었지만, 단군은 답지 않게 동그랗게 뜬 눈을 두어 번 끔뻑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뇨, 저는 한 번도 신이 되겠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만.”
“……?”
지금껏 가벼이 웃고만 있던 얼굴에 의아함이 담기고, 그를 보는 내 눈에도 덩달아 의문이 차오른 직후.
“신은 영원히 일해야 하잖습니까?”
그가 다시 말했다.
“일하기 싫어요.”
생글 웃던 얼굴을 돌연 정색해 보이면서.
“저는 그냥 당신께 잘 보여서 건물주로 환생할 겁니다.”
동시에 활짝 열린 업경의 권능도 내게 속삭였다.
이 인간, 진심이라고.
“미모와 재능, 다 필요 없습니다. 그런 것은 이미 현생에서도 충분히 누렸죠.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불로소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나긋한 목소리가 거침없이 이어졌다.
“보장된 불로소득. 최선을 다해 한반도를 안정시킨 뒤, 전생에 나라를 구한 공으로 건물주로 태어나는 것. 그리하여 고된 노동의 기억을 잊고 일평생 꿀만 빨면서 사는 것.”
청산유수처럼 쏟아내던 끝에, 단군이 재차 보기 좋게 눈을 휘며 강조했다.
“그게 제 꿈입니다.”
……이런 캐릭터였나.
그야 15년 내내 온갖 음해에 시달리면서 한반도를 지켜왔으니 그냥 다 때려치우고 쉬고 싶을 만도 하겠다만.
“…….”
나는 대꾸하지 않고 잠시 그와 눈을 맞추었다.
업경의 권능은 분명 그의 말에 거짓이 없음을 알려주었지만, 내게 단군이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존재였다.
흑탑의 토벌을 맡아달라고 부탁받았을 때와 같이, 그는 대상의 본질을 읽어 내는 업경의 권능으로도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만 파악할 수 있는 자였다.
그것은 내게 결코 온전한 속내를 보이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막대한 신성을 품은 생불왕이 내게 정체를 감추었던 것처럼,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각성자인 그 또한 내 눈 따위는 쉽게 가려버릴 정도로 큰 힘을 가진 것이겠지.
하지만 그 사실 앞에서도 나는 분함이나 패배감을 느끼기보다는…… 되레 단군이라는 인간의 생이 궁금해졌다.
현생에서 누린 것에는 아무런 미련이 없으니, 이제는 그냥 건물주나 되고 싶다는 그의 진심 어린 속내가 궁금해졌다.
“……즉, 당신의 꿈은 현생에서 이룰 수 없다는 뜻이군요.”
내 말을 들은 그는, 불면 날아가버릴 듯 굉장히 덧없이 웃음 짓다가도 정말로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꿈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가볍게까지 느껴지는 대답.
그에 나는 또 어쩔 수 없이 내 손으로 명부를 찢었던 쌍둥이 형제를 떠올렸다.
태어난 지 열흘 만에 죽을 운명이었던 아기들은 아버지의 품에 돌아가는 대가로 그의 사랑을 잃었다.
그렇다면 열두 명을 살리고 죽을 운명이었던 스물일곱 살 청년은 다시금 세상에 돌아가는 대가로 무엇을 잃었을까.
“이곳에서 나가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단군이 화제를 되돌렸다.
“다만 바로 나가실 수는 없으십니다.”
이제 정말로 본론에 들어가겠다는 듯이.
“그 전에 당신께서 꼭 해주셔야 할 일이 있거든요.”
그러고는 부적이 덕지덕지 붙은 내 몸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지금 그 몸으로는 불편하실 텐데, 풀어드릴까요?”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모든 걸 알고서 이곳으로 나를 찾아온 것도.
제대로 된 설명 없이 내게 어떠한 일을 요구하는 것도.
좀처럼 속을 읽을 수 없는 그에게 몸을 맡기는 것도.
간단히 받아들이기에는 꺼려질 수밖에 없어서였다.
물론 정말 나를 해칠 생각이었다면 굳이 번거롭게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었겠지.
갇힌 몸도 몸인 데다, 부적으로 움직임까지 봉쇄당한 상태니까.
그럼에도 즉답할 수 없는 건 결국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가 단군이라서.
그를 온전히 믿지 못해서.
내가 침묵하자 그는 좀 더 조심스러운 얼굴로 덧붙였다.
“제 손이 미심쩍으시다면, 더 확실히 믿으실 수 있는 분께 부탁드릴 수 있습니다만.”
……더 확실히 믿을 수 있는 분?
나는 그게 무슨 뜻이냐는 의미를 담아 단군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그는 설명 대신 빙긋 웃기만 했다.
“그래도 부적만큼은 지금 떼어 내는 게 좋겠습니다.”
한껏 친절한 눈으로 내 몸에 붙은 부적들을 훑는 것이, 내가 거부할 경우에 대해선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끝내 나는 대답했다.
“떼어주세요.”
동시에 생각했다.
이자는 꼭 이런 식으로 처음부터 하나뿐인 선택지를 주고 스스로 고르도록 한다고.
그리하여 그 선택이 정말 나의 의지가 맞는지,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의심을 품게 만든다고.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단군이 내 부적 위로 손을 올렸다.
부적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을 보면서, 나는 그가 눈에 비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읽어 내고 있음을 직감했다.
탯줄을 끊으면 세상의 인과를 보게 될 것이라고 했던 강림 형의 말처럼, 도사인 그도 평범한 인간에겐 허락되지 않은 우주의 인과를 정확히 읽을 수 있는 것이리라.
팔랑.
이윽고 한 장씩 부적이 떨어져 나갔다.
팔랑, 팔랑.
마치 평범한 종잇장처럼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아무런 수고로움도 없이 떨어지는 모습에서 역설적으로 나는 단군이 한반도 최고의 도사라는 것을 실감했다.
내가 주술에 능통하지는 않으나, 다른 어떤 도사도 그처럼 쉽게 종이 떼어 내듯 부적을 제거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주술을 해석하는 그의 눈과 주술을 분해하는 그의 손에는 분명 그런 범상치 않은 힘이 깃들어 있었다.
“그럼 가보도록 할까요?”
단군이 나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낮췄던 자세를 바로 한 순간이었다.
화르륵!
바닥에 떨어진 부적들이 일제히 빨갛게 불타올랐다.
화르르륵!
그는 금세 재가 되어버린 부적을 흘끗 곁눈질하더니, 이번에는 감옥의 창살마저 말끔히 태워버리며 내게 눈짓했다.
“안내하겠습니다, 염라.”
적탑의 부탑주답게 화염을 다루는 솜씨가 능숙했다.
나는 비로소 자유로워진 몸의 감각을 날카롭게 긴장시키며 천천히 그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