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장. 지금 그의 곁에는(1)
어둠이 가시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신의 눈마저 가렸던 어둠이 물러갔을 때.
호구별성은 그녀의 왕이 승리했음을 직감했다.
일대를 지배하던 전설이 힘을 잃으면서 그녀와 다른 두 차사는 어느새 병원의 공터 한복판에 서 있었다.
다만 근방을 보호하던 신단수의 기운은 아직 꺼지지 않았는지, 자그마한 녹색 빛이 나뭇잎처럼 흩날리는 병동은 여전히 수마에 잠긴 듯 조용하기만 했다.
소란에 휘말리지 않도록 생불왕과 단군이 뭔가 조치를 취한 걸까.
“……잠깐.”
싸움이 끝난 자리에서 호구별성이 멀찍이 홀로 남은 왕을 주시했다.
“저 녀석 왜 저래?”
치열한 전투였는지 왕은 그새 넝마가 되어 있었다.
앳된 얼굴에 마른 몸은 여기저기 찢기고 터진 상처로 가득했다.
그런데 상처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녀석의 행동이었다.
그 요사한 여자가 품었던 삿된 기는 이제 흔적만 남은 채였지만, 왕은 그 여자가 사라진 자리를 계속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작게 벌어진 입술이 신음하듯 희미하게 떨렸다.
움츠린 어깨가 위태롭게 바들거렸다.
고된 싸움을 끝냈거늘, 승리의 영광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대왕님!”
곧바로 옆에서 크고 새카만 것이 달려 나갔다.
“대왕님, 몸이……!”
쥐어짜듯이 다급한 외침과 함께였다.
파아아악!
그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왕의 몸에서 막대한 피가 터져 나왔다.
“이게… 무슨…….”
부상이 큰 탓인지 왕의 목소리는 호구별성조차 제대로 듣지 못할 정도로 작았다.
그녀는 왕이 비명처럼 내뱉은 말을 읽어 내었다.
파아아앙!
삽시간에 찢겨 나가는 왕의 몸에 뒤늦게 서천꽃밭의 신성이 번졌다.
그러나 상처가 치료되는 것도 잠시뿐.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꽃잎들을 다 삼켜버릴 만큼 막대한 핏방울이 터져 나왔다.
“몸에서 나와라, 대왕!”
언제나 느긋하기만 하던 사라가 다급하게 외쳤다.
“몸이 계속해서 망가지고 있다. 어서 나오거라!”
그에 호구별성은 왕의 상처가 사라가 품은 부활의 권능으로도 고칠 수 없는 손상임을 눈치챘다.
“……!”
왕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때였다.
왕의 몸에 작은 스파크가 일었다.
동시에 그의 육과 혼이 완전히 분리되어버렸다.
화아아아아악!
왕을 중심으로 광포한 기운이 번져 나갔다.
기묘한 문자열 또한 어지러이 쏟아졌다.
“주술이잖아!”
그녀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즉시 알아차렸다.
“함정이다. 혼을 해치는 주술이야!”
공격은 단지 수단에 불과했다.
왕의 몸을 망치려던 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왕이 영체로 돌아가기를 의도했던 것이다.
“안 돼, 제연아!”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울린 찰나.
파아아아앙!
붉은빛이 눈을 찌를 듯 강렬하게 산개했다.
“이런……!”
호구별성이 다시 왕이 있던 곳을 직시했을 때, 남아 있는 것은 결국 피를 쏟은 채 널브러져 있는 왕의 가짜 육신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녀가 다급히 쓰러진 왕의 육신 쪽으로 달려갔다.
혼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왕의 흔적에 절로 나쁜 예감이 들었다.
“설마……!”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태에 호구별성이 말꼬리를 흐릴 때였다.
“……아니.”
한발 앞서 왕의 육신에 다가간 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 없을 뿐이다.”
크고 깊은 품에는 그새 창백하게 질린 왕의 육신을 거둔 채였다.
“혼만을 납거한 거야.”
호구별성은 숨을 삼키며 놈을 내려다봤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두 눈에선 어떤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왕에게 적을 허락하지 않는 평소의 사나운 기세라곤 전혀 없었다.
그러나 때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선연히 느껴질 때가 있다.
“……또다시 이 땅의 왕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내가 모를 리가 없다.”
어떤 비탄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에서 뼈를 에는 듯한 통한이 느껴질 때가 있다.
“…….”
호구별성은 말없이 강림을 응시했다.
새 왕을 끌어안은 오랜 신하를 눈에 담았다.
건드리면 터져 나올 것 같은 짙고 무거운 감정이, 몸을 낮춘 신하의 품에 기척을 죽이고 웅크려 있었다.
“……저승으로 돌아가자.”
마지막으로 다가온 사라가 말했다.
“바리를 깨워야겠다.”
호구별성은 강림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사라를 보았다.
“우리가 눈을 잃은 이상, 세상 전체를 살필 수 있는 것은 그 애뿐이야.”
그녀는 또한 말없이 사라를 살폈다.
강림이 평소와 달리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면, 매사에 무심한 꽃밭의 신에게서는 전에 없던 분노가 느껴졌다.
“왕을 쫓으려면 바리를 찾는 게 먼저다.”
단조롭게까지 들리는 어조.
이런 상황에도 쉬이 꺼지지 않는 판단력이라고 감탄하기에는, 호구별성은 그가 이미 아슬아슬한 상태임을 읽어 냈다.
썩 좋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왕의 부재는 물론, 그로부터 비롯된 한반도에서 가장 큰 두 신의 동요라니.
“하.”
강림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빙빙 돌아가잔 말인가.”
서늘하게 가라앉은 두 눈에서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그따위 걸 계책이라고 내놓는 게 우습군.”
하지만 그저 저 자신에 대한 자괴감일 뿐이었다.
“천 년 만에 다시 인간으로 돌아간 기분이야. 목 빼놓고 신의 신탁만 기다려야 하는 꼴이.”
텅 빈 왕의 육신을 계속해서 두 팔로 붙들고 있는 것과 같이, 그저 아무 의미 없는 한탄에 불과했다.
“……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는 그 말을 굳이 받아쳤다.
“네 꼴이 아주 우습구나. 정말 그새 인간으로 돌아가버렸어.”
호구별성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저 영감이 돌았나?’
어이를 잃은 그녀가 입을 벌린 채 사라를 바라봤다.
그걸 계책이라고 내놓느냐는 강림의 말 꼬라지가 분명 곱지는 않았다.
그래도 저놈은 원래 그런 놈이었다.
더군다나 왕이 납치된 상황이 아닌가.
그런 와중에 놈이 작은 심통을 부린다고 굳이 맞불을 놓는다고?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라의 난데없는 도발에 강림이 형형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매섭게 날이 선 눈을 보며 호구별성은 불현듯 며칠 전의 언쟁을 떠올렸다.
왕을 사이에 두고 한 차례 부딪칠 뻔했던 두 신이 이제 와 다시금 서로를 향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찍어 누를 듯이 사라를 노려보던 강림이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품에는 여전히 죽은 것처럼 창백한 육신을 끌어안고서.
그 몸에는 더 이상 왕이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이제는 단순히 고장 난 물건에 지나지 않음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왕과 똑같은 생김새를 지닌 그 몸을 차마 그냥 두지 못한 강림이 인벤토리에 집어넣자, 곧 품에 안겨 있던 왕의 육신은 희미한 빛을 뿌리며 사라졌다.
“……서둘러야 한다.”
놈 또한 그 한마디만 남긴 채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한반도에서 가장 빠른 죽음의 걸음이었다.
“하…….”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긴 호구별성이 사라를 홱 돌아봤다.
“아니, 영감! 저놈은 또 쓸데없이 왜 건드려!”
웬일로 시비를 그냥 넘겨서 망정이지, 그 사나운 놈이 지지 않고 받아쳤으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녀의 질책에 사라는 잠시 입을 다물더니.
“……내가 시비를 건다 한들, 그놈이 이런 상황에 굳이 싸울 놈도 아니지 않느냐.”
다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니 그럼 싸우지도 않을 거 왜 받아쳤어?”
호구별성이 인상을 쓰며 그에게 다시 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성질머리가 한반도에서 견줄 신이 없을 만큼 더러운 것이야 사실이다만, 왕의 안전이 최우선인 상황에 공연히 싸움을 벌일 놈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 영감은 왜 굳이 놈을 자극했단 말인가?
사라는 그녀의 추궁에 재차 입을 다물었고, 결국 그녀에게서 살짝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어차피 그놈이 내게 맞설 일도 없는데, 내가 먼저 물러설 필요가 있느냐.”
사라의 대답에 호구별성은 잠시 눈을 끔뻑였다.
그러니까 지금, 다 알면서 괜히 화풀이를 했단 말인가?
어차피 그놈은 못 덤빌 테니까?
“잘한다, 잘해!”
상황을 파악한 호구별성이 결국 버럭 성을 냈다
“이 미친 영감탱이야, 그래서 오천 살 처먹고 천 살짜리 이겨 먹으니까 좋냐!”
“……나도 반성하고 있으니 너무 큰소리 말거라.”
고개를 돌린 사라가 뒤늦게 목소리를 죽였다.
‘쪽팔린 줄은 아나 보지?’
호구별성은 저 철없는 늙은이 등짝을 후려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먼저 성큼 발을 내디뎠다.
근처에 차를 세워 두었다.
운전을 맡았던 왕은 없지만 그녀에게는 그가 맡겼던 다른 차 키가 있었다.
-누나, 누나는 운전하지 마세요. 절대 하면 안 돼요.
-아, 그래도 혹시 제가 없으면…… 그땐 운전할 사람이 누나밖에 없기는 하니까. 일단 가지고만 있어요.
차 키를 쥐여주며 왕은 그리 말했더랬다.
-저는 절대 자리를 안 비울 거지만요. 정말 만일을 위해서 드리는 거예요.
멋쩍게 웃던 그 앳된 얼굴을 떠올리자니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래도, 그 핏덩이가 그새 내 왕이 되었긴 했나 보네.”
처음부터 선왕에 대한 신의 때문에 모신 새 왕이었다.
크게 정을 주었다고 느낀 적도 없건만, 막상 사라지니 녀석의 빈자리가 선연했다.
***
“……으윽.”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눈을 뜨긴 했지만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차근차근 기억을 더듬었다.
흑탑주의 필드가 무너지고, 그다음에는…… 몸이 찢겨 나가면서 황급히 영체로 돌아갔었지.
그래, 그런데 막상 육신에서 벗어났더니 그대로 정신이 꺼져버리듯 암전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여긴 어디지?”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살폈다.
동굴처럼 다듬어지지 않은 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두운 가운데 손바닥만 한 횃불이 간간이 설치되어 내부가 흐릿하게나마 보였다.
멀찍이 자리한 쇠문.
그리고 그 옆으로 설치된 좁은 간격의 검은 창살.
“……감옥?”
꺼림칙한 기분에 인상을 썼다.
더 가까이 가서 살피려다, 문득 온몸을 죄는 답답함에 몸을 내려다봤다.
“몸이…… 잘 안 움직여.”
몸에 붙은 여러 장의 부적이 보였다.
벽에 기대앉혀진 몸은 밧줄 따위로 묶인 게 아닌데도 꼭 보이지 않는 사슬에 구속된 것처럼 답답했다.
분명 의식을 잃기 직전 가짜 몸을 벗었다.
그럼에도 이 답답한 몸에서 깨어났다는 것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 내 혼을 이 몸에 담았다는 의미였다.
“……나갈 수도 없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적에 묶인 가짜 몸을 벗어나려고 시도해봤지만, 무당 마을에서와 같이 벗는 것은 불가능했다.
심지어는.
[ 이제연 (염라) ]
* 권능 – 권선, 징악, 죽음, 사후세계
* 스킬 – [L]업경 [L]명부, [L]도산지옥, [L]화탕지옥, [L]한빙지옥……
* 체력 1/1
* 근력 1/1
* 마력 1/1
* ……
이 몸의 모든 스탯은 1이었다.
우주강도단이 나를 죽이려고 일부러 내주었던 형편없는 가짜 몸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이것만으로도 몹시 악의적이지 않은가.
이곳이 어디인지,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이런 연약한 몸에 갇혀버리다니.
그나마 인벤토리 속 검수엽만큼은 그대로인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예상치 못한 최악의 상황 앞에 한숨을 삼키던 그때였다.
끼리릭.
쇠를 긁는 소름 끼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창살을 세운 감옥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보이는 거라곤 흐릿한 실루엣뿐이었으나 몹시 키가 큰 남자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성큼성큼 가까워지는 발걸음에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부적에 구속된 몸으로는 설령 검수엽을 쥐더라도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
한데 빠르게 다가온 그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완연히 드러난 순간.
“……아.”
나는 그를 올려다보며 무심코 신음했다.
붉게 물들인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눈매가 몹시 수려했다.
큰 키에 맵시 있게 걸친 적갈색 반코트가 붉은 머리칼과 더없이 잘 어울렸다.
붉은 문양을 새긴 검은 마스크.
그로 인해 보이는 건 눈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남자의 범상치 않은 외모를 숨길 수 없었다.
무엇보다, 형편없는 몸에 갇혔어도 선명한 업경의 감각이 그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단군?”
결국 반신반의하며 그의 이름을 부르자.
“곧바로 알아보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내 앞으로 다가온 그가 얼굴을 가렸던 마스크를 끌어 내리며 말했다.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군요.”
칠흑 같던 머리칼 대신 타오르듯이 붉은 머리칼 아래로, 그의 눈이 부드럽게 반원을 그렸다.
“우주가 예정한 때에 당신을 다시 뵙습니다, 염라.”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인사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