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장. 당신을 무너뜨리는 것(4)
천생교주의 딸, 여소은.
흑탑주의 필드와 충돌한 업경의 권능은 모친을 죽이고 흑탑주가 된 그녀의 삶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처음은 그저 어린 소녀였다.
태어났을 때부터 주변의 모두에게 고귀한 존재로 받들어졌지만, 그녀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칭송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름답지만 어딘가 소름 끼치는 어머니가 매일 밤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일 때마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곳은 정상이 아니야.’
화려하게 치장된 방 너머로 끊이지 않고 들려 오는 비명 소리.
어쩌다 나간 복도마다 감도는 끔찍한 죽음의 기운.
자신과 어머니를 둘러싼 온갖 사악한 것들.
천생교.
다른 사람의 몸을 빼앗아 영생을 이어간다는 정신 나간 집단.
그 광기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을 무렵.
-나가요, 여기서.
그녀를 둘러싼 모든 비정상적인 것들 중에서 오직 그 남자만이 그녀를 밖으로 이끌었다.
-당신은 그 여자와 같지 않아요. 나가서 평범하게 살 수 있어요.
어린 나이에 천생교까지 흘러든 주제에, 또다시 평범한 인생을 그리워하는 순진한 남자.
-우리 같이 나가서, 이런 것들은 잊고 그냥 평범하게 살아요.
그 순한 웃음에 이끌려 그녀도 평범한 삶을 꿈꾸게 되었으나.
-감히 우리를 갈라놓으려고 하다니.
스무 해의 삶에서 유일무이한 빛이었던 그는 분노한 모친의 손에 무참히 짓밟혔다.
잠시나마 평범한 삶을 갈망하던 그녀의 마음은 그대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런데 당신이 나를 벌하겠다고?”
산산이 조각나버린 소녀의 꿈속에서 흑탑주가 말했다.
“내게 처음부터 다른 길 따윈 없었어!”
그녀의 외침과 함께 그녀를 둘러싼 어둠이 해일처럼 덮쳐 왔다.
“……!”
순식간에 내 숨통을 죄어 오는 깊은 어둠에, 나는 그녀에게 맞서던 것도 잊고 그대로 몸을 굳혔다.
“함께 도망치려던 연인마저 잃어버린 내가, 그럼 대체 어떻게 살아야 했지?”
“크으윽!”
파도치는 어둠이 전신을 짓눌렀다.
“말해 봐, 당신이 대체 무슨 자격으로 나를 벌한다는 것인지!”
흑탑주의 공격은 쉴 새 없이 나를 몰아붙였다.
나는 혼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녀를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아으윽!”
나를 짓누르는 그녀의 한과, 그녀의 업을 비추는 업경의 권능.
그 사이에서.
[ 한빙지옥(L) ]
손끝으로 하나의 지옥을 펼쳤을 때였다.
츠츠츠!
츠츠츠츠!
그녀를 비춘 업경에서 막대한 신성이 뿜어져 나오며 나와 그녀를 중심으로 새하얀 한기가 휘몰아쳤다.
부모를 해친 패륜아를 벌하는 한빙지옥의 한기였다.
파장창!
휘몰아치는 얼음의 파편이 모친을 해친 업을 삼키고 흑탑주를 덮쳤다.
파장창창!
물처럼 변했던 흑탑주의 몸도 그녀의 업을 품고 자라난 혹한의 칼바람에 얼어붙기 시작했다.
“하아, 하…….”
나는 나를 짓누르던 검은 신성에서 벗어나 비로소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패륜아를 벌하는 매서운 한기 속에서 나는 지옥의 권능에 힘을 더했다.
파장창!
파장창창!
새하얗게 그녀를 얼린 한기가 점점 더 매서워졌다.
“이대로…… 끝을.”
그렇게 업경으로 증폭된 신성이 그녀를 완전히 얼려버린 순간.
쩌어어어억.
결빙된 그녀의 몸에 기다란 금이 갔다.
조금만 건드리면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버릴 듯 위태로운 금이었다.
약간의 힘으로도 그녀를 끝낼 수 있는, 혹한의 지옥이었다.
“……하.”
한데 그 순간이었다.
“……하핫! 하하…하하핫!”
새하얀 석고상처럼 얼어붙었던 그녀가 돌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그녀가 들썩일 때마다 얼어붙은 표면이 바스러졌다.
“한빙지옥?”
흑탑주의 얼굴을 덮었던 베일이 산산이 깨어졌다.
미친 듯이 웃어젖히는 그녀의 비늘 돋은 얼굴이 드러났다.
“한빙지옥으로 나를 벌하겠다고?”
폐부를 찢는 듯 날카로운 웃음소리였다.
그녀는 몸 곳곳에 금이 가고 얼음 파편을 피처럼 쏟으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내 연인, 내 미래, 내 인생을 망친 그 여자를 죽였으니 패륜으로 벌하겠다고?”
동시에 흑탑주의 뒤에 있던 가짜 업경이 칠흑 같은 어둠을 뿜었다.
“당신이 대체 무슨 자격으로……!”
파장창창!
비명처럼 이어지는 외침.
동시에 그녀를 얼려 놓았던 한빙지옥의 혹한이, 가시처럼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그대로 나에게 되돌아왔다.
“……크윽!”
더없이 날카롭고 더없이 투명한, 그래서 더 반짝이는 얼음 조각들이 나를 찌르고 베었다.
온몸이 피에 젖어 붉게 물들었다.
상처 난 자리부터 홧홧한 열기에 잠식되다가도 흑탑주가 그러했듯 차디찬 냉기 속에서 얼어붙어 갔다.
“말해 봐,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나를 벌해……!”
그녀의 비통한 외침에 되돌아온 얼음의 지옥이 나를 죄었다.
“그 여자를 죽이지 않았다면, 나는 영원히, 그 여자를 벗어나지 못했을 텐데……!”
나는 차가운 얼음에 갇힌 채로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봤다.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지독히도 서러웠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고함을 토해 내며 내게 권능을 퍼붓는 얼굴에서 나는 광기를 보았다.
그것은 평범한 삶을 갈구하던 끝에 모든 것을 잃고 미쳐버린 어린 소녀의 광기였다.
그 광기의 근원을 이해한 순간, 그녀를 벌하려던 나의 징악의 권능이 그대로 힘을 잃고 고꾸라졌다.
“나한테는, 처음부터, 고를 수 있는 인생이…… 없었단 말이야……!”
내가 지나쳐 온 악의 그림자가 곱씹혔기 때문에.
딸을 잃고 절망했던 저승 던전의 진광.
다른 도깨비들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를 해쳐야 했던 탈해.
형을 위해 칼을 휘둘렀던 어린 쌍둥이 동생.
차례로 떠오르는 그들의 얼굴에, 나는 결국 깨달았다.
내가 권선과 징악의 옥좌에 오를 때.
나의 가장 큰 적은 나와 다른 곳을 바라보는 선일 것이다.
나를 가장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한때는 선이었던 악일 것이다.
다만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고뇌하게 만드는 것은, 악에서 비롯된 악일 것이다.
“……아으윽.”
한빙지옥의 혹한 속에서 나는 살갗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에 신음했다.
“아아……윽.”
아버지를 해쳐야 했던 탈해의 악을 마주했을 때.
나는 분명 탈해에게 더 큰 선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동생이 형을 위해 칼을 들고, 형이 30년 후에도 동생에 대한 사랑을 놓지 못했음을 알았을 때.
나는 쌍둥이 형제를 둘러싼 악의 굴레에서 그저 참담함을 느꼈다.
그렇다면 눈앞의 이 여자는.
처음부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며 울부짖는 이 여자의 악은,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유일한 희망이었던 연인을 죽인 모친에게 칼을 휘두르고.
그다음에는 어린 자신을 향해 탐욕스럽게 입을 벌렸던 교단의 간부들에게 칼을 휘둘렀던.
그리하여 모친이 사라진 후에도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칼을 휘둘러야 했던 이 여자의 악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연인을 죽인 모친에게 복수를 끝냈을 때 모든 것을 멈추어야 했다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
“……아.”
나는 탈해와의 약속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할게요.
-끝없이 선과 악의 무게를 고뇌하겠습니다.
나의 다짐이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는지.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의 악과 마찬가지로 내 나라를 찾는 모든 이들의 악을 영원히 함께 짊어지겠습니다.
고작 한 인간의 악에도 이렇게나 무참히 흔들려버리는 주제에, 어떻게 감히 그 영겁의 세월을 버티겠다 말했던 걸까.
“으으윽.”
나는 되돌아온 지옥의 무게에 그저 속절없이 부서져 갔다.
나를 짓눌러 오는 그녀의 한에 이대로 찢겨버릴 것만 같았다.
한데 그때.
-딸아…….
소름 끼치는 저음이 들렸다.
-저승의 왕께서 오셨으니, 우리 이제 함께 지옥으로 가야 하지 않겠니?
흑탑주의 뒤에 서 있던 창백한 얼굴의 연인.
그가 짙은 애정이 담긴 두 팔로 그녀의 목을 휘감았다.
가느다란 몸을 터트려버릴 듯 억센 힘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커흑!”
순식간에 몸이 졸린 흑탑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
또한 업경의 권능이 그 남자와…… 아니, 남자의 몸에 갇혀 있던 원혼과 그녀의 이야기를 완전히 풀어놓았다.
모친의 손에 연인을 잃은 그녀가 어떻게 복수를 했는지.
더 이상 연인도 뭣도 아닌 남자의 시체를 그녀는 왜 그렇게 종처럼 끌고 다녔는지.
갈기갈기 찢어져서 차갑게 썩어버린 남자의 몸에 무엇이 갇혀 있었는지.
“그런…….”
수십 년간 썩어 가는 시체 속에 깃들어 있던 원혼의 카르마가 필드에 섞여 들었다.
소름 끼치게 딸과 닮은 엄마.
그녀는 정말로 딸을 사랑했다.
세상을 전부 손에 넣어도 채워지지 않을 것만 같던 갈증이, 그 모든 것을 딸의 손에 쥐여주겠다는 달콤한 꿈으로 변해버릴 만큼.
평생의 꿈이었던 영생마저 포기하고 일평생 하나의 존재에게만 헌신하기로 마음먹을 만큼.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이 뒤바뀔 만큼.
그리도 사랑하는데, 세상 누가 엄마와 딸을 갈라놓을 수 있을까.
-죽음도 우리를 갈라놓을 순 없지.
다시 한번 소중한 딸을 품에 안으며 시체 속의 엄마가 속삭였다.
-그런데 이 엄마가 먼저 죽어버렸으니, 딸도 함께 죽어야 할 수밖에.
딸의 몸을 사정없이 조르고 꺾으며 계속해서 속삭였다.
-자아, 저승의 왕이여.
마치 이 순간만을 바라왔다는 듯이.
죽음으로부터 오직 이것만을 준비해 왔다는 듯이.
-부모 자식의 인연은 다음 생에서도, 그다음 생에서도 끊어지지 않는다지?
나는 그 물음에 숨을 삼켰다.
사실이었으니까.
인연은 끊어지지 않으니까.
부모 자식처럼 강한 인연은 더욱이, 어떤 식으로든…… 윤회할 때마다 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아아아악!”
그러나 모친에 의해 전신이 뒤틀린 채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는 딸을 보자, 도저히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아아악! 떨어져! 나한테서 떨어져!”
필드를 쌓은 흑탑주의 카르마가 흔들리면서 그녀가 진정으로 바라던 것이 그대로 내게 전해졌다.
“떨어져, 떨어지란 말이야!”
그녀가 그렇게나 저승의 신화를 원했던 것은.
사후세계를 지배하고자 했던 것은.
그저 다음 생에서도, 그다음 생에서도 모친을 만나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당신이, 당신이 나를 벌한다고?”
끝내 다시 모친의 손아귀에 붙들린 그녀가 내게 물었다.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나를 벌해! 나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나는 처음부터 벗어날 수 없었어! 나는, 이 여자를, 벗어날 수 없었어!”
모친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보듯 그녀를 끌어안으며 웃었다.
-우후후, 이제 우리를 함께 지옥으로 보내다오, 저승의 왕이여.
모녀를 둘러싼 시커먼 업이 요동쳤다.
파장창!
파장창창!
내게 되돌아왔던 한빙지옥의 신성은 다시 한번 방향을 돌려 모녀를 중심으로 휘몰아쳤다.
“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공기를 찢고 울려 퍼졌다.
흑탑주의 뒤에 있던 거울이 검게 녹아내리며 두 여인을 집어삼켰다.
살아 있는 딸과 죽어 있는 엄마를 무참하게 씹어 넘겼다.
주인의 한으로 힘을 증폭시키는 사악한 거울이 주인의 통제를 벗어났다.
“……아.”
나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내가 알지 못하는 주술이, 원혼이 된 모친에 의해 펼쳐졌다는 것밖에는.
-하하하……하하하하!
“아아아악! 아아아아악!”
그러나 웃음소리와 비명 소리가 뒤얽혀 점점 높아지는 가운데,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괴로움을 느꼈다.
필드가 무너지고 있었다.
반투명한 천장에서 쇄편이 떨어지고,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벽에 금이 갔다.
흑탑주가 자신의 카르마로 전개했던 필드가 결국 그 카르마에 삼켜지고 있었다.
-결코, 결코…… 헤어지지 않으리!
“아아악……아아……!”
그 끝에 웃음과 비명이 일시에 끊겼다.
흑탑주의 숨이 끊어졌다.
나는 그녀의 사망과 동시에 필드에서 빠져나왔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모녀를 집어삼킨 막대한 업의 굴레에 갇혀 있었다.
홀로 망연히 몸을 떨었다.
사라져버린 모녀의 잔상이 생생하게 되씹혔다.
그러다가도 불현듯 백발을 휘날리던 매서운 얼굴이 생각났다.
-새로운 왕이여, 나는 이미 내 앞에서 탯줄을 끊는 네가 보인다.
나를 조롱하고 저주하던 일갈이 사납게 메아리쳤다.
-나를 부정했던 너는 스스로 나를 찾게 될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을 꿰뚫어 보고 삶을 점지하는 생불왕.
명부가 건재했다면, 삼신은 딸에게 어떤 운명을 점지했을까.
그런 어미한테서 태어나버린 소녀에게 생불왕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아아윽…….”
거기까지 떠올린 나는 끔찍한 자괴감에 몸을 웅크렸다.
삼신처럼 되고 싶지 않아 탯줄을 자르기 싫다고 했으면서.
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나는, 벌써 이렇듯 그녀를 찾는단 말인가.
“대왕님!”
그때였다.
“대왕님, 몸이……!”
갑자기 들려 온 형의 목소리가 어쩐지 다급하다고 느낀 그 순간.
파아아악!
거짓말처럼 내 온몸에서 피가 터졌다.
“이게… 무슨…….”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이 보였다.
파아아앙!
그 고통을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에 서천꽃밭의 신성이 몸을 감쌌지만, 부활의 권능으로 고쳐지는 것보다 몸이 찢겨 나가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몸에서 나와라, 대왕!”
난데없는 격통에 숨을 삼키는 와중 사라가 외쳤다.
“몸이 계속해서 망가지고 있다. 어서 나오거라!”
본능적으로 가짜 몸이 완전히 망가져버렸음을 직감했다.
[ (!) 반영구빙의체를 해제합니다. ]
격통을 견디며 더 늦기 전에 겨우 가짜 몸을 벗었다.
한데 영체로 돌아가려는 찰나.
“……!”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어지러이 펼쳐지며 모든 것이 검게 암전했다.
27장. 당신을 무너뜨리는 것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