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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장 (3) (87/187)

27장. 당신을 무너뜨리는 것(3)

“그 여자를 치겠다고?”

사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업경의 감각에 더 집중하면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대답하면서 생각했다.

이곳은 흑탑주가 전개한 필드였다.

아마도 그녀는 직접 필드의 핵이 되어 일대의 법칙을 지배하고 있을 터였다.

즉, 필드의 해체 조건 ‘필드의 근원을 끊으십시오’는 결국 어딘가에 숨어 있을 흑탑주를 처치하라는 뜻이다.

“혼자서 괜찮겠느냐.”

사라가 다시 물었다.

지루한 소모전을 안배한 흑탑주의 속셈이야 눈치챘지만, 이대로 나를 그녀에게 내어주는 것도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애초에 흑탑주도 정말로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상대할 생각은 아니에요.”

나는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를 부르고 있어요.”

업경의 권능이 어둠 속에서 그녀의 도발을 읽었다.

“이대로 정말 천천히 말라 죽을 것이냐고 비웃고 있네요.”

사라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나머지 두 차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순간 더욱 예민해진 업경의 감각은, 그들이 입을 열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추 짚어 냈다.

그중 유독 선명하게 전해져 오는 걱정과 분노, 어떤 망설임이 있었다.

“……형, 다녀올게요.”

나는 나를 잡아끄는 듯한 그 감정으로부터 발을 내뻗으며 말했다.

“아으…….”

차사들에게서 멀어짐과 동시에 업이 어지러이 밀려들었다.

단말기 화면을 통해 보고 있음에도 몰려온 현기증에 일부러 업경의 감각을 닫아야 했던, 그 막대한 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흑탑주를 향해 감각을 더욱 첨예하게 벼리며 이를 악물었다.

이제는 눈을 돌릴 수 없었다.

그래선 안 되었다.

나는 그것에 맞서야 할 징악의 신이었으니까.

업경에 몸을 맡긴 채 어둠 속을 한참 내달렸을 때였다.

“……!”

불현듯 몸 전체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동시에 무언가가 전신을 무겁게 짓눌렀다.

말 그대로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흑탑주가 설계한 괴이한 늪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키이이잉!

키이이이이잉!

아까보다 좀 더 선명해진 초음파가 들려 왔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그 괴이한 고래가 아주 가까이에 있음을 짐작했다.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기 위해 나는 눈을 감았다.

기능하지 않는 시각 대신 업경의 감각에 더욱 집중했다.

그러자 기이하게도 어둠 속에서 크고 둥그런 무언가의 존재가 느껴졌다.

보이는 것이 아님에도 보이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나는 아주 천천히, 눈으로 보듯이 세밀하게 그것의 전체를 업경의 감각으로 더듬었다.

고래처럼 둥글고 거대한 몸에 기괴하게 붙은 팔다리.

감각에 더욱 집중하자 그것이 품은 다른 무언가도 함께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한 순간, 나는 칼바람처럼 살갗을 에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업경의 감각을 높일수록 그것의 모양도 시시각각 변해 갔다.

처음에는 여의주처럼 둥근 무언가였다.

조금 후에는 둥글게 몸을 웅크린 거북이였고,

그다음에는 몸을 웅크린 거북이처럼 똬리를 튼 뱀이었다.

거북이와 뱀.

온몸을 잠식한 어둠과 한기 속에서, 나는 마침내 그것이 무엇인지 온전히 깨달았다.

“……그래.”

눈에 보이듯 선명하게 감지되는 그것을 향해 검을 들었다.

“그게 당신의 전설이었구나.”

촤아아악!

손에 들린 검수엽이 망설임 없이 앞을 베었다.

쿠오오오!

길게 찢어진 고래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눈앞은 여전히 검었다.

그러나 길게 찢어진 고래의 틈 사이로 나는 그것이 기지개를 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후후후…….

뱀과 거북.

두 얼굴을 가진 차가운 북녘의 지배자.

둘이지만 하나의 존재로 얽혀 있는 그것이 벌어지는 꽃잎처럼 천천히 만개하며 속삭였다.

-자아, 누가 진정한 극음(極陰)의 왕인지 겨루어 볼까요?

[ (!) 공간의 지배법칙이 바뀝니다. ]

속삭임을 따라 다시금 필드가 전개되었다.

[ 인간 ‘여소은’이 자신의 업으로 필드를 전개합니다. ]

- (!) 해당 필드의 등급은 ‘카르마(K)’입니다.

- 해체 조건 : 시전자의 카르마 완전 해체

둘 다 살거나, 혹은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나올 수 있는 생사결의 필드였다.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던 거겠지.

“하아…….”

길게 숨을 내쉬며 새롭게 전개된 필드를 돌아보았다.

시야를 채우는 것은 여전히 심연처럼 깊고 사늘한 어둠뿐이었다.

-아아아아.

어둠 속에서 귀곡성이 울렸다.

짙은 한을 품은 귀신들의 울음이었다.

-아아아.

-아아아아.

귀를 어지럽히는 귀곡성을 따라 한기가 밀려들었다.

겨울바람에 나부끼는 천처럼 흔들거리는 망령이 되어 살갗을 긁어내렸다.

귀곡성을 흘리며 몰려드는 망령들 사이에서 나는 그들을 부리는 흑탑주의 전설을 곱씹었다.

현무.

뱀과 거북의 머리를 가진 북쪽의 신수.

이 어둠과 한기는 그녀가 음기 그 자체의 현신이기 때문일 터였다.

죽음을 의미하는 북방의 신이기에 온갖 망령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것일 터였다.

촤아아아악!

망설임 없이 망령들을 베어 냈다.

망령은 어떤 물리력도 발휘하지 못한 채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그저 귀곡성으로 나의 정신을 어지럽히려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더 이상은 숨어 있을 수 없을 겁니다.”

망령들을 베어 나가며 흑탑주에게 말했다.

망령을 부리는 그녀가 설령 나와 똑같은 귀신의 왕일지라도, 나와 그녀는 같지 않았다.

나는 염라.

망자의 왕이자 권선과 징악의 신이었으니까.

[ 업경(L) ]

지체 없이 스킬을 발동했다.

지금까지처럼 단지 업경의 감각만을 활짝 여는 것이 아니었다.

거울에 비친 업으로 신성을 증폭하는 염라의 레전더리 스킬이었다.

누구보다 죽음에 가까운 나와 그녀의 결정적인 차이.

츠츠츠!

츠츠츠츠!

나를 중심으로 강대한 기가 뻗어 나갔다.

맹렬하게 뻗친 그 기는 어느 순간 하나로 맺혀, 벽처럼 크고 견고한 세 개의 거울이 되어 나를 둘러쌌다.

나를 감싸고 섰으나 검은 표면에 맺힌 상은 내가 아니었다.

업경에 비친 것은 한 명의 여자였다.

대상의 업을 비추는 거울은 이내 그녀의 뒤에 선 창백한 얼굴의 남자까지 비추어 냈다.

그녀가 품은 막대한 업 중에서도 가장 질척하고 깊은 업이었다.

[ 업경(L)의 권능이 당신의 신성에 공명합니다. ]

팝업창이 뜨면서 손에 쥔 검수엽이 보다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악을 벌하는 업경의 권능이 검수지옥의 잎사귀로 벼려 낸 검에 더욱 매섭게 힘을 더했다.

한 발을 내디뎠다.

이미 나는 흑탑주에게 도달해 있었다.

촤아아악!

검수엽을 휘둘렀다.

더 이상 숨을 수 없는 흑탑주가 속절없이 베여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촤아악!

촤아아아악!

멈추지 않고 연달아 검수지옥의 초식을 쏟아냈다.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는 자를 벌하는 검수지옥의 검이었다.

서슬 퍼런 칼날의 나무가 그녀의 몸을 사정없이 찢고 찔렀다.

“후후후.”

몸이 찢겨 나가면서도 그녀는 간드러지는 웃음을 터트렸다.

자상과 절상으로 뒤덮인 몸에서 피 대신 오수처럼 검은 액체가 흘렀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검은 액체 그 자체가 되어 물처럼 쏟아졌다.

“업경이라.”

흑탑주가 물로 화해 사라짐과 동시에 뒤에서 재차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망친 도깨비가 결국 그것을 만들어 냈군요.”

그녀를 돌아봤다.

검수엽에 베이고 찢겼던 몸은 다시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기괴하리만치 멀쩡한 모습에 새삼 그녀의 전설 ‘현무’에 대해 생각했다.

차가운 북쪽의 왕.

그것이 다스리는 오행은 물이었다.

세상의 어떤 날카로운 검도 흐르는 물을 벨 수 없듯,

현무의 전설이 깃든 그녀에게 검이 통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까.

“내게도 비슷한 게 있답니다.”

흑탑주가 다시 말했다.

“내 안에 품은 깊은 한을 비추는 거울이죠.”

그녀의 뒤로 무언가 거대한 기가 맺혔다.

츠츠츠!

츠츠츠츠츠!

엄청난 기세로 맺힌 그 기는 이윽고 업경과 똑같이 세 개의 거대한 거울이 되었다.

그러나 상대의 업을 비추는 업경과 달리 그녀의 거울에 비친 것은 내가 아니었다.

희고 창백한 남자와 함께 선 흑탑주 본인의 모습이었다.

“그 거울.”

나는 흑탑주가 꺼낸 거울을 알아봤다.

“저승 던전의 그 거울이군요.”

이전에 저승 던전에서 진광이 썼던 거울.

자신을 비추어 힘을 증폭시키되, 종국에는 거울이 품은 어둠에 새까맣게 먹혀버리는 불길한 거울.

“당신이…… 그에게 그 거울을 줬던 거야.”

그때 보았던 진광과 송제가, 서로를 사랑했던 부녀가 다시금 떠올라 입술을 물었다.

“그는 나름 괜찮은 아버지였죠.”

거울에 비친 자신을 일별하며 흑탑주가 말했다.

“어쨌든 끝까지 딸을 사랑했으니까.”

빙긋 웃은 그녀가 곧장 내게 달려들어 왔다.

“그 딸은 더 이상 그 사랑을 감당할 수 없었지만.”

그녀와 함께 검은 물결이 파도처럼 나를 덮쳤다.

“……큭.”

몸을 짓누르는 검은 파도에 절로 신음이 샜다.

검은 파도에 닿은 몸은 순간적으로 경직되었고, 흑탑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치고 들어왔다.

촤아악!

촤아아악!

그녀가 할퀴듯이 손을 휘두를 때마다 흑탑주의 불길한 신성이 채찍처럼 내 몸을 내리쳤다.

“으윽……!”

공격을 받아치고 반격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지만 그럴수록 검은 파도는 더욱 크고 무겁게 나를 덮쳤다.

흑탑주 뒤에 자리한 그녀의 가짜 업경이 그녀의 힘을 증폭시키고 있는 탓이었다.

쓰러지지 않으려 애쓰면서 흑탑주를 직시했다.

업경의 권능을 써야 했다.

내 업경은 그녀의 업으로 내 지옥 스킬을 증폭시킬 것이고,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더라도 업경으로 강화한 지옥 스킬을 사용한다면 그녀를 상대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녀를 과연 어떤 지옥으로 벌해야 할 것인가.

나는 업경의 권능에 집중했다.

[ (!) 당신의 권능이 필드의 카르마와 충돌합니다. ]

팝업창이 떴다.

탈해의 카르마 등급 필드에서 탈해의 업을 읽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필드를 전개한 흑탑주의 업이 점점 뚜렷해졌다.

-아아악!

젊다 못해 어린 여자의 처절한 비명이 들렸다.

-안 돼, 안 돼, 이럴 순 없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된 남자의 시신을 끌어안은 채였다.

-당신이 없으면, 나는…….

또한 그런 그녀를 웃으며 내려다보는, 그녀와 똑같이 닮은 중년의 여인이 있었다.

-나는, 도망칠 수 없단 말이야……!

소름 끼치게 닮은 모녀였다.

-딸아, 이제 우리를 갈라놓을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업경이 그 둘의 모습을 확연히 비추면서, 나는 눈앞의 여자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초대 천생교주가 아니었구나.”

혈육의 몸을 갈아타며 영생을 추구한다는 천생교의 교주가 끝내 딸의 몸을 빼앗았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었다.

“당신은 그때 모친을 죽이고 살아남았어.”

그렇게 말하는 찰나.

휘날리는 검은 베일 아래로 그녀의 검붉은 입술이 속삭였다.

“그래요. 그게 나의 한(恨).”

파충류처럼 동공이 길게 찢어진 두 눈도 베일 아래로 빛을 발했다.

“처음부터 정신 나간 어미를 따르는 것밖에는 선택지가 없었던, 내 비참한 삶이죠.”

나지막하면서도 선명한 속삭임이 귓속을 파고들고.

-안타까운 일이죠.

-그런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인생도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을 텐데.

쌍둥이 동생을 비웃던 그녀의 목소리마저 새롭게 되씹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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