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장. 당신을 무너뜨리는 것(2)
휘오오오.
바람이 불길하게 불어제쳤다.
텅 빈 공터.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훼손된 시신들 사이 의자가 우뚝 놓인 광경은 퍽 이질적이었다.
옻칠을 한 듯 검으면서도 화려하게 치장된 의자는 말 그대로 임금의 용상과도 같았다.
그 위로는 얼굴을 베일로 가리고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나른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언제나처럼 창백한 낯에 초점 없는 눈으로 선 사내를 용상 뒤에 대동한 채로.
병원 전체를 어둠과 수마로 잠식시킨 흑탑주.
베일 너머로 그녀와 눈이 마주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천벌을 상대할 때 썼던 탈은 필요 없었다.
그녀는 이미 토벌대로서 참여한 내 얼굴을 봤을 테니.
그저 천부인인 척하기 위해 걸쳤던 두루마기 코트만을 벗고서 나와 차사들은 그 앞에 섰다.
흑탑주가 허공을 향해 희고 가느다란 팔을 뻗었다.
주위로 희뿌연 생령들이 느릿한 걸음으로 모여들었다.
푸드드득!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바람에 흔들거리던 생령들이 일제히 하얀 박쥐로 변해 그녀의 팔에 날아들었다.
화아아악!
흰 박쥐는 그녀와 닿자마자 다시 연기로 화하며 그녀에게 스며들었다.
생령을 흡수할수록 더욱 짙고 무거워져 가는 그녀의 업이 느껴졌다.
“염병, 인간 주제에 신 앞에서 똥폼 잡긴.”
뒤에 선 호구별성이 욕설했다.
흑탑주는 딱히 그녀에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생령을 흡수한 팔을 거두고는 용상 위에서 여유로운 자태로 턱을 괴었다.
“그가 벌써 죽었더군요.”
나직하면서도 살짝 쉰 듯한 저음이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거리가 있음에도 바로 옆에서 들리듯 선명했다.
“안타까운 일이죠.”
반투명한 흑색 베일 너머로 검붉은 입술이 조소했다.
“그런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의 인생도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을 텐데.”
업경의 감각이 어지러이 파도쳤다.
그녀가 쌍둥이를 입에 담는 순간 거대한 업이 내게 밀어닥쳤다.
쌍둥이 동생을 비롯하여 수많은 이를 악으로 이끌었던 업이었다.
악인들 위에 군림해 왔던 악인.
의식을 흔들어 대는 현기증 속에서 나는 그녀를 직시했다.
“그를 조롱하는 겁니까?”
내 물음에 그녀를 휘감은 시커먼 업이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렸다.
“그럴 리가요.”
그녀가 대꾸했다.
“정말로 안타깝게 생각한답니다.”
베일 너머 두 눈이 번뜩였다.
어둠 속에서도 형형히 빛을 발하는 그녀의 눈은 결코 인간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도 그런 인생을 살지는 않았을 거야.”
그 말과 함께 흑탑주와 그녀 뒤의 남자를 휘감은 업이 서늘하게 살갗을 긁어 왔다.
딸의 연인을 죽인 어머니.
연인을 죽인 어머니를 죽인 딸.
아직도 흙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이승에 붙들린 딸의 연인.
눈앞의 여자를 둘러싼 그 업의 굴레가 흡사 내 것처럼 선명했다.
“내가 저승의 왕이 된다면, 그는 그 못난 아버지와 영원히 재회하지 않을 겁니다.”
비웃듯이 이어진 말에 담긴 의미는 명확했다.
그녀는 아직도 저승의 신화를 탐내고 있었다.
또한 이대로 나를 죽여 그 신화를 빼앗을 생각이었다.
[ (!) 공간의 지배법칙이 바뀝니다. ]
팝업창이 떴다.
[ ‘죽음이 고이는 곳’에 입장하셨습니다! ]
- (!) 해당 필드의 등급은 ‘전설’입니다.
- 해체 조건 : 필드의 근원을 끊으십시오.
흑탑주가 전개한 전설급 필드였다.
검은 용상을 중심으로 일대에 한기가 번졌다.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한기는 서리를 품고 휘몰아치는 회오리가 되더니, 이윽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을 바꾸었다.
“……!”
난생처음 보는 기묘한 광경이었다.
눈이 내린 열대우림이라고 해야 할까.
수풀이 울창한 정글에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늪이 펼쳐졌다.
늪을 둘러싼 나무에는 새하얀 눈 결정이 맺혀 있었다.
더운 습기가 몸을 덮어 오는 한편, 하얗게 내려앉은 눈발에서 냉랭한 한기가 불어왔다.
우림의 우거진 녹색과 눈과 얼음의 흰색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은 꿈결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이게…… 흑탑주의 필드인가.”
처음 접하는 완성된 전설급 필드였다.
이전에도 몇 번 미완성 전설급 필드에 갇혔던 적이 있지만 그때와는 격이 달랐다.
다른 세계로 이동한 것처럼 한순간에 풍경이 달라진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전설급 필드에서는 본인이 가진 풍문을 마음대로 조합해서 펼칠 수 있어요.”
신경을 날카롭게 벼리며 차사들에게 말했다.
“긴장해야겠어요. 어떤 괴이한 풍문으로 덮쳐올지 몰라요.”
말을 꺼낸 순간이었다.
[ (!) 필드의 전설이 ‘칠흑의 지휘자’의 영웅담을 불러옵니다. ]
[ (!) 필드의 전설이 ‘삼키고 자라는’의 영웅담을 불러옵니다. ]
[ (!) 필드의 전설이 ‘생령을 부르는 소리’의 영웅담을 불러옵니다. ]
전설급 필드가 흑탑주의 영웅담을 차례로 실현했다.
촤르르륵!
물이 크게 출렁이는 소리가 났다.
눈 덮인 늪지에서 커다란 몸집을 지닌 무언가가 몸을 일으켰다.
유선형 몸체에 꼬리로 보이는 지느러미가 있었다.
고래를 연상시키는 실루엣이었지만 그림자처럼 검기만 해서 형태를 온전히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저건 또 뭐야.”
신경질적으로 내뱉은 호구별성이 독기를 뿜었다.
“고래 같은데 왜 발이 달렸어?”
그녀가 말마따나 그것은 늪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나왔다.
고래를 연상시키는 몸뚱이에는 괴이한 형태로 굽은 다리가 달려 있었다.
키이이잉!
벌어진 입에서 날카로운 초음파가 쏘아졌다.
생령을 뽑아내던 박쥐들의 초음파와 비슷했다.
“……윽!”
초음파를 인지한 직후 몸이 멋대로 경직되었다.
우리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던 이전과 다르게, 내 몸에서도 실타래 같은 생명력이 빨려 나가는 것이 보였다.
키이이잉!
키이이이잉!
섬뜩하게 귀를 긁는 초음파 속에서 또 한 번 팝업창이 떴다.
[ (!) 영웅담 ‘생령을 부르는 소리’의 효과로 체력이 하락합니다. ]
99.
98.
97.
최대치 100을 찍었던 체력이 조금씩 깎여 나갔다.
겉으로 드러나는 손상은 없었다.
그러나 체력이 0이 되는 순간 가짜 몸의 기능이 정지되리란 걸 직감했다.
피를 쏟고 근육이 상하는 손상과는 달랐다.
이건 가짜 몸의 시스템적 손상이었다.
외상이나 내상이 주는 장애와는 또 다른 손실이었다.
스킬 사용과 직결되는 마력 외에는 잘 체감하지 못했던 스탯의 기능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결국 각성자 간의 전투에서 풍문의 효과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키이이잉!
키이이이이잉!
계속해서 쏟아지는 초음파 속에서 긴장이 높아져 갔다.
이대로 초음파만으로 우리의 체력을 깎아 죽인다면 흑탑주는 손도 대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다.
“……가짜 몸을 벗어야 하나?”
실처럼 뽑혀 나가는 생명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우리를 덮친 영웅담이 단지 체력 스탯을 깎는 것뿐이라면 육체를 벗는 것으로 그것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짜 몸을 벗고 영체가 될 경우 물리적 영향력을 잃어 우리 쪽에서도 흑탑주를 공격할 수 없게 된다.
“대왕님.”
강림 형의 부름에 그를 돌아보았다.
“보아하니 한 번에 10이 한계인 듯합니다.”
형의 말대로 체력은 딱 90이었다.
그 역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며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 (!) 전설의 효과로 영웅담 ‘생령을 부르는 소리’가 영웅담 ‘삼키고 자라는’과 공명합니다. ]
팝업창이 떴다.
흑탑주의 전설이 두 영웅담을 하나로 엮었다.
“허.”
사라가 놀란 얼굴로 작게 침음했다.
“생명력이 모습을 달리하는구나.”
실처럼 뽑혀 나갔던 우리의 생명력은 수십 마리의 검은 뱀으로 변했다.
캬아아악!
뱀들이 입을 활짝 벌리며 일제히 달려들었다.
파아아앙!
검푸른 발설지옥의 신성이 즉시 뱀들을 쳐냈다.
바닥에 내쳐진 그것들은 먹물 터지듯 형태를 잃었다가 그대로 사라져버렸는데, 동시에 몸 안쪽에서 무언가 훅 하고 차오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
곧바로 상태창을 확인했다.
“체력이 돌아왔어.”
깎였던 체력이 다시 100으로 돌아와 있었다.
키이이잉!
키이이이이잉!
그리고 또다시 초음파가 날카롭게 울렸다.
[ (!) 영웅담 ‘생령을 부르는 소리’의 효과로 체력이 하락합니다. ]
재차 생명력이 실처럼 뽑혀 나갔다.
돌아왔던 체력은 10이 깎여 도로 90이 되었다.
[ (!) 전설의 효과로 영웅담 ‘생령을 부르는 소리’가 영웅담 ‘삼키고 자라는’과 공명합니다. ]
이번에 취한 모습은 검은 도마뱀이었다.
아까와 같았다.
검은 도마뱀 떼가 우리를 덮쳐 왔고, 발설지옥의 신성이 한 번 더 놈들을 날려버렸다.
검은 도마뱀들 역시 한 번에 전부 처리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표정을 굳혔다.
모두가 직감한 것이다.
이것은 결국 어처구니없는 소모전일 뿐이라고.
“이대로 본인은 계속 숨은 채 우리를 끝없이 말려 죽일 셈이구나!”
호구별성이 으르렁거리며 독기를 뿜었다.
그런데 그 순간.
[ (!) 영웅담 ‘칠흑의 지휘자’의 효과로 일대에 어둠이 내립니다. ]
초음파를 내뿜던 검은 고래로부터 돌연 광대한 어둠이 휘몰아쳤다.
“이건 또 뭐 하는 짓이야!”
깜짝 놀란 호구별성이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그러나 일대는 물론이고 그녀와 나 또한 어둠에 뒤덮이고 말았다.
눈을 감은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키이이이잉!
당황한 사이 다시금 초음파가 울렸다.
[ (!) 영웅담 ‘생령을 부르는 소리’의 효과로 체력이 하락합니다. ]
생명력이 깎인 것을 확인하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 곧 이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우리를 덮쳐 올 것이다.
파아아아앙!
아니나 다를까 발설지옥의 신성이 홀로 검푸른 빛을 발했다.
강림 형도 반복되는 패턴에 따라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적절히 받아친 덕에 빠르게 체력이 되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
한데 그때 무언가 뺨을 물어뜯는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촤아악!
재빨리 몸을 뒤로 물리고 기척이 느껴지는 쪽으로 검수엽을 휘둘렀다.
감으로 휘둘렀을 뿐이지만 무언가가 베이는 감각이 선명히 전해져 왔다.
“……이런.”
놈을 베어 낸 즉시 상태창을 확인했다.
“체력이 1 깎였어.”
뺨을 문 그것이 결국 내 가짜 몸에 회복되지 않는 손상을 남기고 말았다.
[ (!) 영웅담 ‘생령을 부르는 소리’의 효과로 체력이 하락합니다. ]
또다시 체력이 깎였다.
이제 내 체력은 90이 아닌 89가 되어 있었다.
파아아아앙!
발설지옥의 검푸른 신성이 재차 빛을 발했다.
파아앙!
파앙!
파아앙!
형도 실수를 인지한 듯 연달아 신성을 번쩍였다.
이번에는 깎였던 체력이 고스란히 돌아왔지만, 내 체력은 여전히 1이 모자란 99였다.
“대왕님, 괜찮으십니까?”
어둠 너머에서 강림 형이 물었다.
아까 놓친 한 마리가 내 체력을 깎아 놓았다는 사실을 크게 신경 쓰는 기색이었다.
“네. 겨우 1이 깎였을 뿐인걸요.”
그래, 고작 1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흑탑주의 속셈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좀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흑탑주에게 휘둘릴 순 없죠.”
어둠에 몸을 숨긴 흑탑주를 향해.
내 오감보다도 정확한 업경의 감각을 곤두세우며 나는 선언하듯 덧붙였다.
“저 혼자서라도 그녀를 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