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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장 (1) (85/187)

27장. 당신을 무너뜨리는 것(1)

“남은 놈은 내가 직접 데려다 놓겠다.”

삼신이 쌍둥이 형 쪽에 다가가며 말했다.

그는 아직 주술의 여파로 깨어나지 못하는 상태였다.

삼신은 쓰러진 그에게 손을 올리고 새하얀 신성을 발했다.

“혼백이 아직 제 자리를 찾지 못했어. 놈이 스스로 돌아오려면 한나절은 걸릴 것이다.”

삼신의 손이 닿자 그의 몸에 남았던 주술의 흔적이 물에 씻겨 나가듯 사라졌다.

무심히 그를 내려다보던 삼신이 다시금 나와 차사들을 돌아봤다.

다만 나는 그 매섭게 날이 선 눈 앞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희는 일을 마저 정리해라.”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삼신은 그대로 쌍둥이 형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한데 그녀가 사라지는 순간.

생불왕의 신성으로 가려져 있던 주술의 여파가 그대로 내게 밀려들었다.

업경의 감각이 읽어 내리는 쌍둥이의 업이었다.

“……아.”

형제의 30년이 일순 파도처럼 내게 부딪쳤다.

어느 눈이 내리던 밤, 아버지를 찌른 어린 소년으로부터 비롯된 30년이었다.

원망, 울분, 한탄.

늪처럼 질척하게 나를 빨아당기는 두 소년의 유대가 나를 숨 막히게 했다.

두 형제는 끝까지 서로를 사랑했다.

동생은 매일 멍이 가시지 않았던 어린 형을 사랑했고.

형은 끝내 아버지를 찌르고 도망쳐버린 어린 동생을 사랑했다.

세월이 흘러 더 이상 서로에게서 각자가 사랑했던 소년의 흔적을 찾지 못하게 되었어도.

혼자서만 찬란히 빛나는 선인이 된 형을 미워하면서도, 동생은 상처 입은 어린 형만은 끝까지 동정했고.

언젠가부터 서슴없이 악인의 길을 걷게 된 동생을 한탄하면서도, 형은 울면서 도망친 어린 동생만은 연민했다.

어른이 되어버린 서로에게서 끝내 애정을 도려내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오늘에 이르렀다.

“아……으윽.”

그 유대가 내 것처럼 들이닥쳤다.

그들의 명부를 찢었던 내 선택까지도 그들의 유대에 얽힌 업이 되어 내 숨을 졸라 왔다.

활짝 열린 업경의 감각 앞에 질식할 듯한 괴로움만이 생생하고 모든 것이 희미해져 갔다.

“대왕님.”

강림 형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감각을 닫으시고 눈앞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형의 그 손길이 닿는 순간, 나도 모르게 크게 몸을 떨었다.

마주친 그의 두 눈이, 그 눈에 담긴 나를 향한 연민이, 쌍둥이들과의 유대를 끊고 현실에 돌아오라는 그 말이…… 여전히 지독할 만큼 차갑게 느껴져서.

그러나 동시에 그의 말이 옳아서.

나는 형에게서 떨어져 나오듯 조금 몸을 물리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네…….”

그래, 그에게서 물러나 다시금 손에 검을 쥐는 것밖에는.

“생불왕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분명 이것으로 끝이 아니겠죠.”

검을 쥔 손에 힘을 실으며 옥상 펜스 너머를 살폈다.

밤이 깊어져 가는 시각이었다.

다섯 개의 병동은 어둠에 잠겨 고요하기만 했다.

멀찍이서 찢어진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한바탕 소란이 일었던 공터에는 아직도 검은 옷을 입은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토벌에 휘말려 죽은 흑탑의 도사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들을 내려다보다 말했다.

“누나가 아까, 저들에게서 주술이 느껴진다고 했었죠.”

쌍둥이에게 집중하느라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미래를 보는 흑탑주는 왜 저들이 저렇게 무참히 당해버릴 것을 알면서도 굳이 우리에게 보냈을까.

그렇게 의문을 표한 직후.

쿠우우웅!

땅이 흔들렸다.

흑탑의 도사들이 널브러져 있는 공터로부터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거리가 멀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하나 업경은 그들의 시신 위로 또다시 막대한 업이 쌓이고 있음을 감지했다.

흑탑주가 그들에게 심은 주술이 무언가 불길한 일을 벌이는 것이 틀림없었다.

“일단 저쪽으로 내려가죠.”

지체할 것 없이 바로 차사들을 이끌며 옥상 문을 열었다.

화아아악!

계단에 발을 내딛자마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기운이 거세게 불어닥쳤다.

파앙!

그 순간 입고 있던 두루마기 코트가 희미하게 은빛을 머금었다.

[ (!) 하늘의 두루마기가 파마(破魔)의 빛을 발합니다. ]

[ (!) 수면 저주가 무효화 됩니다. ]

저주에 내성이 있는 옷답게 반응 속도가 빨랐다.

흑탑주가 병동 전체에 수면 저주를 걸었다.

단순한 수면 저주라면 그저 깊은 잠에 빠질 뿐이니 크게 위협적인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대체 무엇을 노리고 병원 전체를 수마에 빠뜨렸느냐였다.

“갑자기 이렇게 나온다고?”

황급히 계단을 내려가며 생각했다.

이곳은 사랑과 희망 병원이다.

단순히 한반도에서 가장 큰 병원일 뿐만 아니라, 아홉 개의 연맹체 중에서도 중립을 지키는 지역이었다.

세 번째 천벌이 큰 인상을 남긴 건 이제껏 없던 염라의 등장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 여겨졌던 이곳이 가장 끔찍한 재난에 휘말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제아무리 흑탑주라 한들 이곳을 건드리면 그 즉시 한반도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

그녀가 한반도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강자일지라도, 그녀와 똑같은 전설급 각성자들에게 집중포화 당할 명분을 주는 것은 몹시 무모한 짓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이 병원을 상대로 일을 벌였다면, 그 모든 것을 감수할 자신이 있다는 뜻일 터.

그 사실에 긴장하며 마침내 1층 로비까지 내려왔을 때였다.

“물러서십시오, 대왕님.”

앞서 나갔던 강림 형이 현관으로 향하다 말고 나를 가리고 섰다.

그는 반장갑을 낀 손에 검푸른 신성을 발하며 바깥을 가리켰다.

“저것들이 저주를 뿌리고 있습니다.”

유리문 너머로 희뿌연 무언가가 구름처럼 몰려 있는 것이 보였다.

솜털을 뭉쳐 놓은 것 같은 회갈색 무리였다.

얼핏 새와 비슷했으나 자세히 보니 새만큼이나 커다란 나방들이었다.

털이 부숭부숭한 날개가 눈에 들어오자 절로 소름이 돋았다.

파아아앙!

발설지옥의 신성이 나방들을 한 번에 날려버렸다.

“……아.”

놈들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천천히 주먹을 그러쥐었다.

업경의 권능이 그것들에 담긴 사념을 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여자의 모습이 번개 치듯 뇌리에 번쩍였다.

반투명한 베일이 펄럭이며 그 아래로 검붉은 입술이 선연한 조소를 그렸다.

“나를 부르고 있어.”

수마가 내려진 병원은 그저 고요할 뿐.

가로등마저 꺼진 주변은 그저 어둠만이 깔려 있었지만, 업경의 권능은 그녀가 나를 어디에서 부르고 있는지 계속해서 읽어 내고 있었다.

“형, 제가 앞장설게요.”

내 앞을 가리고 섰던 강림 형을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

형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그보다 문을 먼저 열었다.

“제가 흑탑주를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문이 열리면서 일대를 잠식한 불길한 기운이 어둠과 함께 밀려들었다.

“……아무래도 오늘, 그녀와의 싸움이 끝나겠군요.”

차사들을 뒤로하며 문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푸드드득!

나방에 이어 이번에는 시커먼 박쥐 떼가 날아들었다.

파아아앙!

강림 형의 신성이 곧바로 박쥐들을 덮쳤지만, 나방과 달리 발설지옥의 신성에도 별다른 타격 없이 멀쩡하게 날개를 펄럭였다.

“뭐야, 왜 안 죽어!”

뒤쪽에서 호구별성이 성을 냈다.

“나방에 박쥐라니, 거 되게 기분 나쁘게 노네!”

흑탑주가 부리는 사역마들이 심히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푸드득!

박쥐들이 더 높이 날아올랐다.

키이이이잉!

벌어진 놈들의 입에서 기묘한 초음파가 뿜어져 나왔다.

“……!”

귓속을 긁어내듯 소름 끼치는 소음이었다.

반사적으로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기분 나쁜 소음 외 다른 효과는 느껴지지 않았다.

키이이잉!

키이이이잉!

박쥐들의 초음파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거듭 발걸음을 내디뎠다.

정신을 흐트러트리는 박쥐들의 초음파 속에서도, 업경의 권능은 시시각각 예민하게 흑탑주의 흔적을 쫓았다.

느껴졌다.

멀지 않은 곳에 분명 그녀가 있었다.

“……잠깐.”

그때 문득 뒤따르던 사라가 입을 열었다.

“무언가 흘러나오는구나.”

휘오오오.

동시에 어디선가 찬바람이 불었다.

사방을 침잠한 어둠 때문일까.

살갗에 닿는 것만으로도 혼이 빨려 나가는 듯 불길했다.

키이이잉!

키이이이잉!

바람 속에서 박쥐들이 내뿜는 초음파가 끊이지 않고 음산하게 울렸다.

“저게 뭐지?”

호구별성이 병동을 돌아보며 멈칫했다.

“저 뿌연 거, 뭔가 사람 같은데?”

유리문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말처럼 유리문을 통과해 희뿌연 무언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증기 같은 형체에 머리가 있고, 어깨가 있었다.

흔들거리는 팔은 마치 하얀 천을 휘감은 인간이 걸어오는 것처럼 보였다.

“망령인가?”

기괴하면서도 불길한 생김새였다.

망령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한편으론 많이 달랐다.

망령이라면 응당 품어야 할 죽음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생령이군요.”

강림 형이 말했다.

“살아 있는 육신에서 생령을 불러내고 있습니다.”

그가 초음파를 뿜어내는 박쥐들을 훑으며 검푸른 신성을 끌어올렸다.

“수마를 뿌려 육신을 잠재우고 박쥐로 하여금 그들의 기를 뽑아내는 것입니다.”

형의 설명에 절로 미간이 좁아졌다.

흑탑주가 필요로 하는 것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에게서만 얻을 수 있다.

병원에 잠들어 있는 이들을 당장 죽일 셈은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생령이 뽑혀 나가게 놔둘 수는 없었다.

파아아앙!

불현듯 병동에서 환한 빛이 번쩍였다.

병동 전체를 품었던 거대한 빛은 한순간에 연녹색 파편이 되어 눈발처럼 흩날렸다.

흩날리는 빛의 파편을 보며 나는 어떤 성스러운 나무의 잎새를 떠올렸다.

“단군인가?”

신단수.

어둠에 잠식되었던 병원에 빛을 머금은 잎사귀가 내렸다.

그 아래 선 나는 잠시간 그 광경을 바라보며 마치 은하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사아아아악!

그리고 한순간에 초음파와 함께 박쥐 떼가 사라졌다.

나뭇잎 형태로 내린 신단수의 힘이 무언가 조화를 부린 모양이었다.

다만 박쥐가 뽑아낸 생령들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불길하게 발걸음을 이어갔다.

“생령은 혼과는 다릅니다.”

강림 형이 말했다.

“혼보다는 생명력을 품은 기에 가깝지요. 이미 뽑혀 나간 기는 어쩔 수 없지만 잠든 이들에게서 더 이상 그것을 뽑아낼 수는 없도록 조치한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내 얼굴을 살피며 덧붙였다.

“혼과 백이 손상되지 않으면 기는 다시금 차오르니, 잠든 자들이 큰 해를 입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부인이 병원 안에 있는 이들을 보호하겠다는 뜻이리라.

-너희는 일을 마저 정리해라.

나는 삼신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떠올렸다.

-천부인의 토벌대는 흑탑의 간부에 의해 전멸합니다.

-저는, 흑탑주의 정치쇼에 천부인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또한 내게 토벌을 맡겼던 단군을 떠올렸다.

그리하여 미래를 보는 신과 인간이 내게 무엇을 맡겼는지 이해했다.

“다시 가겠습니다.”

마침내 어둠 속에 몸을 숨긴 불길한 여자의 기척을 잡아냈다.

“흑탑주가 어디 있는지, 이제 정확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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