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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장 (4) (83/187)

26장. 거스를 수 없는(4)

병원의 밤은 고요하다.

병상의 환자들은 이제 취침에 들었을 것이고,

그들의 곁을 지키던 이들도 그저 밤새 아무 일 없이 다시금 내일이 오기만을 기도하고 있을 터였다.

의사는 멍하니 하늘에 뜬 달을 바라보았다.

그의 몸에는 언제 생겼는지 모를 기묘한 문자들이 빼곡했다.

혼이 빠져나가는 주술이라더니 그 말대로 전신에 힘이 풀리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이것이 죽어가는 것들의 기분일까.

20여 년을 병원에서 살아와서인지 그 기분이 낯설지만은 않았다.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

달을 바라보던 의사가 천천히 동생을 돌아보았다.

그새 더 수척해진 동생은 바닥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아마 동생의 혼을 자신의 몸에 옮겨줄 주술일 것이다.

“형은 억울할 것 하나도 없어.”

형은 계속해서 동생을 바라봤지만, 동생은 형의 시선을 피해 주술의 방진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정도면 충분히 행복하게 살았잖아.”

그 말에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는데 마음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혼이 벌써 반쯤 빠져나와서 그런 것이 아닐까 짐작했다.

몽롱한 가운데 몸도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으니 한편으로는 꿈을 꾸는 기분이 들었다.

“형만 행복하게 살았잖아.”

그런 와중에도 동생의 목소리만은 뚜렷하게 들렸다.

그 목소리는 언제나 아플 만큼 뚜렷했기 때문에, 동생이 찾아왔을 때도 거부하지 못했다.

“이제 나도 행복해지고 싶어, 형.”

방진은 금방 완성되었다.

이렇게 쉽게 완성할 수 있음에도 동생이 이제야 찾아온 것은, 그 나름대로 형을 사랑했기 때문일 터였다.

의사는 그것을 알았고.

알았기 때문에 항상 마음이 아팠으며.

마음이 아팠기 때문에 끝내 결단했다.

“더 할 말 있어?”

주술의 준비를 마친 동생이 물었다.

지쳐서 쉬어버린 목소리도, 주술을 그리던 손도 언젠가부터 몹시 떨리고 있었다.

“…….”

의사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미안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 동생에게 말했다.

“네 말대로 나는 너무…… 행복했어.”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동생의 얼굴을 새기듯이 눈에 담았다.

“행복하게 살아서…… 정말, 정말 미안하다.”

동생은 대답이 없었다.

형은 그것마저도 끝까지 미안했다.

미안해서 동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형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동생을 눈에 담으려고 했다.

같은 배에서 한날한시에 태어났지만 생판 남처럼 하나도 닮지 않았던 동생의 얼굴.

문득 그 얼굴이 처음으로 자신과 똑같은 모양으로 일그러졌다고 느낀 찰나.

퍼어어어엉!

불현듯 굉음이 천지에 메아리쳤고.

【내 너희를 한날한시에 내어놓았을 때부터 이리될 줄 알았거늘.】

어떤 자연 현상처럼 일대를 뒤흔드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라도 내 손으로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을 것이다.】

살아 있는 지상의 것들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신의 목소리였다.

***

천부인의 길드원을 따라 쉴 새 없이 계단을 올랐다.

병원에서 공터로 향할 때처럼 이번에도 그녀가 일행을 이끄는 모양새였다.

다만 그것에 의문을 갖는 이는 없었다.

기이하게도 그녀에게서는 어느 순간부터 신들조차도 입을 다물게 만드는 깊은 무언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 업경의 권능으로나마 어렴풋이 감지했던 그것이었다.

“잠깐.”

한참을 계단을 오를 때였다.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보일 때쯤, 앞서 나가던 호구별성이 멈칫했다.

“저기 주술 걸린 것 같은데?”

보자마자 무언가를 느낀 듯 눈이 가늘어져 있었다.

“백퍼 뭔가 걸려 있다. 그냥 들어가면 다쳐.”

앞장섰던 천부인의 길드원이 문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는 그대로 문고리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상관없다.”

“……!”

갑작스러운 반말.

그럼에도 우리 중 누구도 그것에 반감을 품지 않았다.

어느새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이 그것을 당연하게끔 했다.

“사라, 들어가면 형의 혼백부터 붙잡아라. 혹시라도 놈의 혼백이 흐트러지지 않게.”

때문에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사라의 이름을 불러 명령하고.

“강림, 너는 동생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오랏줄로 묶어라.”

강림 형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지시하고.

“별성, 동생이 쓸데없는 짓을 하려 하면 바로 병을 뿌려라.”

호구별성에게마저 한마디 했을 때에도, 우리는 그녀의 언행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물론 너희 둘이 나서기 전에 내 가위가 먼저 그놈의 생을 잘라 낼 테지만 말이다.”

또한 그렇게 말한 그녀가.

“그리고 너.”

마침내 나를 입에 담았을 때.

“너는 그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보아라.”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아차렸다.

“피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 그게 오늘 밤 네놈이 해야 할 일이니.”

콰아아아앙!

굉음이 터졌다.

주술이 중첩된 문이 그대로 부서지는 소리였다.

문을 박차고 들어간 그녀의 양손에는 어느새 기다란 쌍검이 들려 있었다.

검은 신의 위엄과 권능을 그대로 벼려 낸 듯 신비로우면서도 몹시 위압적이었다.

【내 너희를 한날한시에 내어놓았을 때부터 이리될 줄 알았거늘.】

일대를 울리는 묵직한 진언.

쌍검을 높이 치켜든 그녀가 한순간에 찬란한 광휘로 감싸였다.

빛은 찬란한 동시에 칼바람과도 같았다.

시야를 덮은 빛은 날카로운 가시처럼 사방을 찔렀다.

그 사이에서 그녀를 휘감은 광휘는 어느새 남색 저고리와 짙붉은 치맛자락으로 변해 펄럭였고,

검었던 머리칼은 신수의 갈기처럼 희디흰 백발이 되어 사납게 흩날렸다.

【이제라도 내 손으로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을 것이다.】

일대를 찢어버리는 듯한 일갈.

목소리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힘 그 자체인 음성.

평범한 인간의 몸을 벗고 찬연한 신의 모습으로 강림한 그녀가 양손에 쥔 쌍검을 교차하며 그대로 땅을 박차 올랐다.

파아아앙!

막대한 신성이 새하얗게 번쩍였다.

검신을 맞대고 교차한 쌍검이 그녀의 손짓에 거대한 가위로 변모했다.

모든 생명의 탯줄을 자르는 생불왕의 가위였다.

촤아아아아악!

그녀의 거대한 가위가 허공을 갈랐다.

“아아악!”

직후 짧은 비명과 함께 쌍둥이 동생에게서 거대한 필름 같은 무언가가 뿜어져 나왔다.

생불왕이 점지한 그의 일평생이었다.

그녀의 손짓 한 번에 뽑혀 나간 그의 평생이 종잇장처럼 나부꼈다.

차가운 눈으로 그것을 내려다보며 그녀는 다시 한번 가위를 휘둘렀다.

촤아아아아악!

그것으로 끝이었다.

생사를 관통하는 생불왕의 가위에 47년의 평생이 그대로 잘려버렸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평생을 손짓 한 번으로 결정짓는 것.

그것이 천지 만물의 평생을 점지하는 그녀의 권능이었다.

“생불왕.”

그 모습을 올려다보며 나는 멍하니 그녀를 입에 담았다.

“생불왕…… 삼신할미.”

죽음의 반대편에 선 이승의 왕.

순식간에 쌍둥이 동생의 인생을 잘라버린 그녀가, 살갗이 에일 만큼 서늘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남색 저고리에 검붉은 치마.

노인의 얼굴임에도 베일 듯이 형형한 눈빛.

서리가 내린 것 같은 백발과 구름 위의 존재처럼 느껴질 만큼 몹시 큰 키.

그저 평범하기만 했던 인간 여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이, 그 시선을 받아 내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점지한 만물의 무게에 짓눌리고 마는…… 내가 아는 생불왕의 용안이었다.

“……아.”

나는 실감했다.

한반도의 모든 신들이 힘을 잃었지만,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점지하는 생불왕만은 아직도 막대한 힘이 남아 있음을.

살아 있는 이상 언젠가는 느낄 수밖에 없는 생에 대한 경애가 여전히 그녀의 신성이고 권능이었다.

명부를 써서 인간의 수명을 결정 짓던 힘은 이제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녀에게는 아직 이승의 왕이라고 불릴 만큼의 크고 깊은 신성이 남아 있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그녀가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감추었을 때도 업경의 권능은 그 힘을 어렴풋이나마 감지했던 것이다.

“그래.”

삼신이 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결국 네가 내 앞에 왔구나.”

차갑고 건조한 눈.

방금 전에 잘라버린 쌍둥이의 평생 같은 것은, 이미 하등 관심 없다는 눈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점지한 만물의 평생을 그런 눈으로 내려다보곤 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녀는, 바로 그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할망! 이게 웬일이야?!”

먼저 반응한 것은 지켜보던 호구별성이었다.

“그렇게 통 소식이 없더니 언제 또 쓱 끼어들었대?!”

동그랗게 뜬 눈에는 그저 놀라움과 반가움뿐이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그러하듯, 그녀 또한 그녀를 점지한 생불왕을 깊이 경애하고 있었다.

“그래, 별성.”

삼신은 그런 호구별성을 돌아보더니 차갑기만 하던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건강해 보이니까 좋구나.”

아무렇지 않게 인간의 평생을 잘라 내던 때와는 달리, 노인의 얼굴에 걸맞게 인자하게까지 느껴지는 미소였다.

“너를 볼 때면 내 손에 너를 안던 날이 아직도 어제처럼 선명하지.”

그 말에 호구별성이 기쁘게 웃었다.

역신들의 왕 대별상과 왕비 호구신의 딸인 그녀는 삼신이 직접 산파로 받아준 아기였다.

때문에 삼신을 향한 그녀의 눈은 깊이 친애하는 대모(代母)를 보는 것과도 같았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삼신의 눈 역시 아기를 보듯 그저 따스하기만 했다.

“사라.”

삼신이 인자한 얼굴로 이번에는 사라를 돌아보았다.

사라는 서천꽃밭의 파수꾼으로서 직접 생의 권능을 나누어준 그녀의 신하였다.

“가족 소식은 알고 있다. 네가 마음고생이 크겠구나.”

그 말에 사라는 그녀가 걱정해주는 것마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조용히 눈을 낮추는 그의 얼굴에서는 생불왕에 대한 깊은 흠애가 묻어나왔다.

또한 그것은 그녀가 부여해준 부활의 권능에 대한 경애이기도 했다.

“그리고 강림.”

사라에게 인사를 건넨 삼신은 조용히 서 있던 강림 형에게도 눈을 돌렸다.

“가장 충성스러운 차사가 저승의 땅에 남았으니, 먼저 떠난 그이들도 마음이 무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 말에 형도 대답 없이 두 눈을 감으며 조용히 생불왕에게 예를 표했다.

그는 저승의 신하였으나 이승의 생불왕에게도 똑같이 왕에 대한 경애를 담아 고개를 숙였다.

모든 죽음은 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차사들에게 인사를 마친 그녀가, 마침내 내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발설지옥 막내 차사.”

세 차사를 바라볼 때와 달리 그저 냉엄하게 가라앉은 눈이었다.

“네 정녕 새로운 저승의 왕으로 대우받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을 테지?”

나는 그 말에 조용히 숨을 삼켰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지금도 내 곁에는 주술의 여파로 정신을 잃은 쌍둥이 형과 생불왕이 숨을 끊어버린 쌍둥이 동생이 있었다.

그리고 47년 전, 쌍둥이들에게 태어난 지 열흘 만에 죽게 될 운명을 점지한 것은…… 지금 나를 내려다보는, 바로 저 생불왕이었다.

“직접 보아라. 네가 그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삼신이 말했다.

가혹한 선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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