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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장 (2) (81/187)

26장. 거스를 수 없는(2)

저녁 8시경.

해가 지고 슬슬 어둠이 깊어 올 무렵이었다.

나와 삼차사는 천부인의 이름으로 토벌 장소에 도착했다.

토벌 대상인 흑탑의 간부가 나타날 곳으로 예상되는 곳.

그의 쌍둥이 형제가 근무하는 사랑과 희망 병원.

우리는 이곳에서 쌍둥이 형을 보호하면서 그를 찾아올 쌍둥이 동생을 생포할 예정이었다.

“어째 여기 자주 온다?”

차에서 내린 호구별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세 번째 천벌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이곳을 찾은 게 신경 쓰인 걸까.

“병원 자주 오는 게 딱히 좋은 일은 아닌데.”

“그래, 역신이 그리 말하니 꽤나 모순적이지만 말이다.”

뒤이어 내린 사라가 툭 말했다.

불시에 공격을 받은 호구별성이 그대로 팔짱을 끼며 그를 돌아봤다.

“아니 영감탱이, 나라고 병자들 보는 게 마냥 좋진 않거든?”

“놀랍군. 그 참사를 일으키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니.”

그때 마지막으로 내린 강림 형이 괜히 또 한소리 했다.

그 말에 사라에게 따지던 호구별성이 곧바로 형을 노려보며 짙은 독기를 뿜었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정장에 축축한 독기가 닿자 형은 세상에서 제일가는 오물을 봤다는 듯 호구별성을 쏘아보고는 손수건을 꺼내서 닦아 내었다.

“흥, 지저분하기는.”

“염병, 그럼 병이 깨끗하리?”

“…….”

보고 있자니 참, 서로를 한시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구나.

편한 사이인 건지, 그냥 앙숙인 건지.

아니, 그 전에 저 셋의 평균 연령이 3천 살을 넘는다는 게 맞긴 한지.

“토벌대이십니까?”

내심 웃으며 고개를 젓고 있을 때 마침 누군가가 다가왔다.

세 살짜리 어린애들처럼 티격태격하던 삼차사들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딱딱한 인상의 젊은 여자였다.

얼핏 의사 가운이겠거니 생각했던 옷은 두루마기 코트였다.

흰색을 바탕으로 한 코트는 목깃과 소매에 검은색으로 포인트가 들어가 있어 천부인의 복장임을 알 수 있었다.

단군이 보낸 길드원이겠지.

우리에게 토벌을 부탁하긴 했지만, 단군 쪽에서도 사람을 아예 안 보낼 수는 없으니까.

“여러분의 옷입니다.”

그녀가 우리에게도 똑같은 코트를 내밀었다.

“저주 내성 효과가 부여되어 있으니 입으시는 게 좋습니다. 흑탑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요.”

아이템 효과를 살피자 저주 내성뿐 아니라 이동속도와 방어력, 공격력 옵션까지 들어가 있었다.

못해도 억 단위일 것 같은데 이런 걸 평길드원한테도 지급하다니.

역시 노비도 대감 집 노비가 낫다, 뭐 그런 건가.

성능은 좋아도 등에 천부인의 인장이 크게 새겨져 있어서, 오늘 같은 날이 아니면 입고 다니지는 못하겠지만.

……나중에 탈해한테 비슷한 걸로 만들어달라고 해 볼까.

“이야, 이거 예쁜데.”

곧바로 두루마기 코트를 입은 호구별성이 한 바퀴 빙글 돌며 말했다.

사용자에 맞춰 사이즈 또한 조절되는지 코트의 기장은 무릎까지 오는 그녀의 치맛단에 맞춰져 있었다.

원래도 개량한복을 입던 그녀에게는 특히 잘 어울렸다.

“미감이 형편없는 자들이군.”

코트를 쥔 강림 형이 한마디 했다.

“두루마기는 검은색이 제일이거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어째 입꼬리가 평소보다 살짝 올라가 있는데.

형은 두루마기면 다 좋은 거야?

어쨌든 워낙 몸이 크고 훤칠한 터라 형 역시 천부인의 코트가 맞춘 듯이 잘 어울렸다.

그렇게 호구별성과 형이 두루마기 코트를 입고 있을 때, 그 옆에서 사라도 코트를…… 입었다기보다는 그냥 대충 어깨에 걸쳤다.

다만 한복과 정장을 갖춰 입은 두 차사와 달리 트레이닝복 상태이다 보니 어째 같은 코트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러니까 애초에 코트가 아니라…….

“영감, 혼자 무슨 담요 걸쳤어?”

그 꼴이 심미안에 거슬렸는지 호구별성이 팍 인상을 썼다.

“추리닝 입고 그러면 완전 거지꼴이잖아! 머리도 봉두난발이구만!”

호구별성의 너무나 직접적인 표현에도 사라는 태연히 그녀를 돌아봤다.

“거지꼴이라니. 이치에 맞지 않는 표현이구나, 별성.”

대충 자른 머리칼에, 값비싼 코트를 담요처럼 걸쳐도 가려지지 않는 꽃처럼 고운 얼굴로.

“이렇게 어여쁜 거지가 어디 있느냔 말이다.”

그가 그렇게 대꾸한 순간, 만물을 점지하는 생불왕께서 오직 미모만을 작심하고 빚어낸 몸이 거짓말처럼 찬란히 빛을 발했다.

그는 호구별성을 향해 보란 듯이 어깨를 펴며 덧붙였다.

“굳이 나를 거지라고 말하겠다면, 꽃거지라고 부르거라.”

“알겠다, 이 꽃그지탱이야.”

실로 아무말이었다.

더 상대할 의욕을 잃은 그녀가 사라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조금 기다리시면 그가 내려올 것입니다.”

천부인 측 길드원이 다시 말했다.

마지막으로 코트를 입은 나는 코트가 체형에 맞게 조절되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에 해를 끼치고 싶지 않으니 자리를 옮겨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또한 본인이 저녁까지는 환자들을 계속 돌보길 원해서 그리하기로 했고요.”

타깃이 된 형 쪽과는 미리 이야기를 나눴구나.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새삼 그녀를 살폈다.

겉보기에는 전혀 특별할 것 없는 모습이었지만, 천부인의 길드원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던 단군이 보낸 만큼 상당한 실력자일 터였다.

한데 그녀를 보고 있으니 문득 업경의 감각이 기이하게 밀려들었다.

분명 상당한 실력자였다.

내가 지금 당장 칼을 빼 들고 그녀를 기습한다 한들 쓰러트릴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의아하게 만드는 것은, 그녀에게서 그 이상의 무언가가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나의 서툰 권능으로는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 짐작할 수조차 없는, 그런 정체불명의 깊이가.

그게 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고민하는 와중 앞서 흑탑주와 대면했던 천부인의 간부가 떠올랐다.

전설급 각성자인 흑탑주보다도 강해 보였던 그 간부나 눈앞의 이 사람을 보면 천부인에 뭔가 있는 듯한데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분명한 게 있다면, 지금 내게 밀려드는 그녀의 본질은 최소한 흑탑주의 업처럼 나를 괴롭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

“저기 오는군요.”

그때 그녀가 앞을 가리켰다.

나는 그녀에 대한 생각을 거두고 그녀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

그리고 곧장 시야에 들어온 누군가에 나도 모르게 손끝을 떨었다.

그는 눈이 내린 것처럼 흰머리가 빼곡한 남자였다.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은 나이를 생각하면 상당히 빨리 세어버린 모습이었다.

주름이 깊어지기 시작한 눈가에는 인자한 연륜이 묻어 나왔고, 곁에는 그의 허리까지 오는 작은 아이들이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르고 있었다.

“선생님, 꽃도 만들어주세요, 꽃!”

“저도 이 칼 만들어주세요, 선생님!”

“선생님, 저는 이제 왕관 만들어주세요!”

아이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밝았으며 저마다 풍선아트로 만들어진 색색의 풍선을 들고 있었다.

토끼, 기린, 공룡…… 각기 다른 동물들을 안은 아이들이 그에게 까르르 웃으며 졸라 댔다.

재잘대는 아이들 속에서 그는 쉴 새 없이 풍선을 만지고 있었다.

중년에 들어선 그의 얼굴에 갓난아기 때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그를 눈에 담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멋진 어른이 되었구나.

47년 전 인큐베이터에서 힘겹게 숨을 내쉬던 작은 아기가, 이제는 아픈 아이들을 돌보는 의사로 성장했구나.

“아, 죄송합니다.”

눈이 마주친 의사가 멋쩍은 얼굴을 했다.

시선은 우리를 향했지만 두 손으로는 아직도 바쁘게 풍선을 엮고 있었다.

“조금만 더 만들어주고 가면 안 될까요?”

풍선으로 금방 꽃 한 송이를 피워 낸 그가 그것을 한 아이에게 내밀며 말했다.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주고, 그러면 애들이 섭섭할 거예요.”

꽃을 쥐여준 손이 곧바로 칼을 엮기 시작했다.

맨 앞에 선 여자아이의 몫인지 그 애는 유독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가능한 한, 모두에게 주고 싶군요.”

말꼬리를 흐리는 그에게서 짙은 불안이 읽혔다.

탈주한 흑탑의 간부가 혈육인 그의 몸을 노리는 상황이었다.

업경의 권능은 그의 진득한 불안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읽어 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아이들에게 돌아오지 못할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네, 그렇게 하세요.”

그 두려움을 내 것처럼 느끼며,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내일도, 모레도, 아이들은 또 새롭게 조를 테니까요.”

그는 조금 얼굴을 붉히며 미소 짓고는 완성된 풍선 칼을 여자아이에게 내밀었다.

칼을 받은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곧장 멋지게 휘둘러 보였다.

그는 아이를 흡족하게 바라보면서도 손으로는 또 새 풍선을 부풀려 왕관을 만들었다.

“이야, 의사 선생님이라 그런가? 손재주가 좋구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호구별성이 한마디 했다.

쉬지 않고 조잘대는 애들을 보는 눈에 퍽 흐뭇한 빛이 어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차사들의 금기를 떠올렸다.

차사가 명부를 찢어 사람을 살리면 더 이상 그 사람을 지켜보아서는 안 된다.

한 번 마음이 쓰여 그를 살렸으니, 그대로 지켜보다가는 그의 인생이 흔들릴 때마다 계속해서 개입하고 싶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47년 만에 다시 만난 그를 보며 나는 금기가 왜 금기인지를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면 흑탑의 간부가 되었다는 동생 쪽과 마주했을 때에는,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흑탑 측 토벌대도 도착했군요.”

천부인의 길드원이 말했다.

“모두 열다섯입니다.”

“뭐야, 왜 그렇게 많아?”

인상을 쓴 호구별성이 곧바로 의문을 드러냈다.

흑탑주가 토벌대를 보낼 거란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었다.

“저들인가?”

팔짱을 낀 사라가 턱짓했다.

해가 져서 어두컴컴한 가운데 한 무리의 장정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하나같이 검은 옷 곳곳에 기이한 문양을 새긴 입은 흑탑의 도사들이었다.

[ 그다지 강해 보이지는 않는군요. ]

강림 형이 같은 신화에 소속된 자들만 들을 수 있는 전음 기능을 활성화하며 말했다.

[ 저 여자 혼자서도 저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

그의 말에는 흑탑의 도사들보다도 정체 모를 천부인 길드원에 대한 경계가 담겨 있었다.

형 또한 그녀가 상당한 실력자인 걸 눈치챈 듯했다.

애초에 그 단군이 아무나 보낼 리 없을뿐더러, 확실히 그녀에게서는 무언가 범상치 않은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었으니까.

[ 그러나 어느 한쪽만 경계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

평범하게 말하고 있지만, 매서운 발설지옥의 신성이 느껴지는 전음이었다.

누구라도 바로 공격할 수 있게 경계를 세운 상태가 업경의 권능으로 감지되는 것일 터였다.

[ 네, 저도 흑탑 측은 별로 강해 보이지 않아요. ]

업경의 권능 역시 흑탑의 도사들이 별로 강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저들이 갑자기 기습을 해 오더라도 어렵지 않게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 그렇다면 흑탑주가 무슨 생각으로 저들을 보냈는지가 문제겠네요. ]

그리고 그들이 약하다는 점이, 오히려 흑탑주의 꿍꿍이를 의심하게 했다.

“토벌대가 모였으니 이제 슬슬 이동하겠습니다.”

그때 천부인의 길드원이 다시 말했다.

“병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적당한 장소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자를 기다리도록 하죠.”

토벌대로 모인 모두가 그녀의 지시에 따르는 모양새가 되었으나, 굳이 토를 달지 않고 그녀를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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