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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장 (1) (80/187)

26장. 거스를 수 없는(1)

내가 두 번째로 명부를 찢은 것은 아홉 살짜리 아이였다.

47년 전 태어난 지 열흘 만에 죽을 운명이었던 쌍둥이를 살려 낸 이후, 또다시 어린아이였다.

그 아이가 예정된 죽음을 불과 몇 분 앞둔 밤이었다.

무척 젊은 얼굴의 의사가 멈춰버린 아이의 심장을 필사적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제발……!

그때 내 눈길을 끈 것은, 이미 살아날 기미가 없는 그 작은 몸에 끊임없이 심폐소생술을 이어가던 그녀의 가느다란 팔목이었다.

그녀의 필사적인 몸짓에 나뿐만 아니라 응급실에 모인 거의 모든 이들이 자신들의 고통마저 잊고 불안한 눈으로 그녀와 아이를 주목하고 있었다.

-제발…… 제발!

들리는 소리라고는 간간이 울리는 사람들의 침음과 그녀의 중얼거림뿐.

-신이시여, 제발……!

신이시여.

그 말이 들렸을 때, 나도 모르게 명부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예정된 때를 부정하려는 의사의 얼굴이, 그때를 기다리는 나의 얼굴과 거울을 맞댄 것처럼 똑같았기 때문이다.

-제연아.

그렇게 명부를 찢으려던 때였다.

내 옆을 지키던 강림 형이 나지막이 말했다.

-네가 지금 그것을 찢는다면 저 여인에게는 오늘 살아남은 아이가 평생의 심마가 될 게다.

응급실의 모든 이들과 달리, 조금의 비탄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사랑은 너무 짧고 미움은 지나치게 긴 법이라.

비탄도, 연민도, 하다못해 조롱조차 없는…… 그저 사실을 읊을 뿐인 건조한 어투로.

-어떤 이에게는 기적이 찾아왔는데 왜 어떤 이에게는 그러한 기적이 오지 않는지. 저 여인은 그렇게 죽는 날까지 신을 원망하게 될 것이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잠시 그의 서늘한 시선을 마주하다가, 결국 그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저 아이가 이대로 죽는다면 그 죽음은 이 자리의 모든 이들에게 상처로 남을 거예요.

고작 그 정도의 말로는, 이곳의 모든 이를 그저 건조하게만 내려다보는 그의 마음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저 그렇게만 답하고서 명부를 찢었다.

-그래.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고,

-네 말도 맞다.

뜻밖에도 그가 내 말에 아무런 책도 잡지 않고 넘어갔을 때.

나는 되레 더욱 큰 불안에 휩싸였다.

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내 아이의 명부를 찢어버린 내게, 그가 정말로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하여 그 높은 신의 자리에서 그가 내게 가르치려던 것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나는 조금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그 이후로 한동안 나는 그 어떤 비통한 죽음 앞에서도 명부를 찢지 못했다.

그로부터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비통한 죽음에 신을 원망하는 그 젊은 의사를 다시 보게 되었어도.

그녀가 그렇게 평생을 바쳐 신과 맞서게 될 것을 짐작한 후에도.

“……어.”

나는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고도 느릿하게 몇 번 더 눈을 끔뻑이고서야 내가 내 방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꿈인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멍한 정신으로 당시의 기억을 더듬었다.

-네 말도 맞다.

꿈에서 깨어난 후에도 형의 그 한 마디가 잔열처럼 귓가에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되새기며 새삼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때는 형이 많이 어렵긴 했지.”

저승차사가 되고도 한동안은 형이 무척 불편했다.

신화의 세계에 완전히 녹아들 때까지, 내게 그는 바로 곁에서 모시면서도 구름 위에 선 존재처럼 느껴지곤 했으니까.

나는 문득 약간의 피로감이 느껴져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한동안 거북하기만 했던 그 서늘한 눈을 떠올리자니, 하필 지금 그런 꿈을 꾼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

사라수대왕 저택의 응접실.

원탁에 모여 앉은 우리는 헌터 전용 단말기를 통해 허공에 띄운 화면을 주목했다.

잠시 후 이 화면에 흑탑주와 천부인의 접선이 비춰질 예정이었다.

“대담한 건지, 우습게 보는 건지.”

팔짱을 낀 호구별성이 말을 꺼냈다.

“이렇게 대놓고 우리도 보라고 할 줄이야.”

흑탑주가 비밀 회담을 요구했음에도 단군은 우리에게 감청하기를 제안했기 때문이다.

“뭐, 일단은 상호 간 신뢰의 표시라고 받아들여야죠.”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내가 흑탑주와 직접 맞붙을 의향이 있던 것과 별개로, 천부인의 이름으로 토벌에 참여하는 것은 분명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단군 쪽에서도 신뢰를 위해 비공개 회담을 공개하는 정도의 증표는 분명 필요했다.

“그래. 어쨌든 저승에 서해 용궁, 도깨비들한테까지 마수를 뻗친 자가 궁금하긴 했으니 되었다.”

옆에서 사라가 말을 보탰다.

그간 따로 언급한 적은 없었으나 역시 내심 흑탑주가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시간이 되었군요.”

그때 화면을 주시하던 강림 형이 말했다.

“두 사람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화면으로 향했다.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얼굴을 베일로 가린 채 길고 검은 머리를 비녀로 틀어 올린 차림새였다.

그녀의 뒤로는 지나치게 창백한 피부의 남자가 따르고 있었다.

큰 키에 다부진 몸, 흑탑주와 마찬가지로 검은 옷차림이었다.

“뭐야, 남자 쪽은 뭔가 좀 이상한데?”

물끄러미 그들을 바라보던 호구별성이 인상을 썼다.

“저놈 진짜 살아 있는 거 맞아?”

“아뇨, 오래전에 죽은 시체를 움직이는 거예요.”

그녀에게 대답했다.

핏기 하나 없는 남자를 주시하며.

“20년 전에 죽은 흑탑주의 정인이라고 알려진 자죠.”

그는 흑탑주가 전설급 각성자가 되기 전, 흑탑이 천생교라 불렸던 시절 천생교주의 손에 죽은 남자였다.

“그를 죽인 것은 흑탑주의 모친이었고요.”

정인을 잃은 흑탑주는 크게 분노하여 모친을 죽인 뒤 천생교의 2대 교주 자리를 차지했고, 교단의 힘으로 전설급 각성자가 되어 한반도에서 여덟 번째로 큰 세력인 흑탑의 탑주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복수에 성공하고도 그를 잊지 못한 흑탑주는, 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모친 손에 죽은 그를 강시로 만들어 곁에 두었다.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졌는데.”

나는 천천히 설명을 이었다.

“사실 암암리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또 있어요.”

20년 전, 묘령의 흑탑주가 모친을 죽이고 천생교의 새로운 교주가 되었을 때.

핏덩이 같은 어린 여자가 교주가 되었으니, 교단을 노리는 다른 간부들은 그녀를 제압해서 허수아비로 만들고자 시도했다.

그런데 야망에 가득 차 새 교주에게 도전했던 늙은이들은 어째서인지 잔뜩 겁에 질린 채로 전대 교주에게 했던 그대로 철저하게, 아주 비참하게 충성 맹세를 하게 된다.

그 천생교가 연구하던 것이 바로 영생이었다.

육은 하등 소용없고 오직 혼만이 존재의 전부이니, 피로 이어진 몸을 갈아타며 영원을 사는 것이 천생교의 교리였다.

결국 새 교주의 이야기를 접한 모든 이들은 대부분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천생교주가 기어이 딸의 몸으로 갈아타버렸다고.

“허어.”

“아니, 그럼 쟤는 지 딸 몸으로 딸의 남자를 데리고 다니는 거야?”

“망측하기 짝이 없군.”

이야기를 들은 삼차사가 차례로 반응했다.

나는 그 이상 설명하지 않고 흑탑주와 그 뒤에 선 남자를 눈에 담았다.

“……아.”

그런데 화면 속 그들이 시야 가득 담기면서 불현듯 뇌리가 어지러워졌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업경의 권능이 그들이 품은 업을 그대로 내게 쏟아부었다.

“하아…….”

그 막대한 업에 나도 모르게 거칠게 숨을 토해 내었다.

일전에 느꼈던 탈해의 업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무겁고 지독한 업이었다.

아버지를 살해한 탈해의 업이 그의 깊은 슬픔과 고뇌였다면, 흑탑주와 그 정인에게 담긴 업은 그저 서로에 대한 뒤틀린 욕망과 질척한 악의뿐이었다.

아니, 분명 욕망과 악의뿐이었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대왕님.”

그때 강림 형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불편하시다면 잠시 눈을 감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내가 무엇에 신음하는지 곧바로 알아챈 것이다.

“시각을 차단하면 업경의 감각을 갈무리하기 편하실 겁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형의 말대로 당장 시야에서 흑탑주가 사라지자 나를 짓누르던 소름 끼치는 업의 감각도 조금씩 희미해져 갔다.

내가 그것에 집중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품었기 때문일 터였다.

하지만 막상 그들의 업을 피해 눈을 감으니 이번에는 또 다른 것이 어둠 속에서 천천히 나를 압박해 왔다.

업경을 받기 전에는 실감하지 못했던, 이 자리의 무게였다.

-언젠가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여, 이 지옥에 아무도 남지 않는 날이 올 거야.

앞서 2만 년의 세월을 징악의 권좌에서 군림하신 나의 아버지.

그분은 어떻게 항상 그리 믿으셨을까.

한 명의 악인에게도 이렇게나 흔들리는 내가 정말로 그분처럼 될 수 있을까.

“한 명 더 들어온다.”

그때 호구별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잖아? 단군이 아니네?”

나는 감각을 가다듬고서 다시 천천히 눈을 떴다.

화면에 비친 것은 흑탑주와 그녀의 정인, 그리고 그들과 마주 앉은 어느 젊은 여자였다.

천부인의 간부로서 천부인을 상징하는 흰색 두루마기 코트를 입은 그녀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몹시 차가운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예쁘네. 난 여자애들은 좀 세 보이는 애들이 좋더라고.”

흥미롭다는 듯 그녀를 살피며 호구별성이 덧붙였다.

“근데 단군이 직접 안 왔다는 건 역시 그놈이 흑탑을 동급으로 보진 않는다는 뜻이지?”

“그래, 저쪽에서는 수장이 왔는데 놈은 아랫사람을 보내는구나.”

사라가 호구별성의 말에 동의했다.

두 차사의 말을 들으며 나 역시 화면에 비친 그들을 살폈다.

“……?”

한데 흑탑주와 천부인의 간부를 지켜보던 나는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업경의 촉이, 이상하게도 흑탑주보다 천부인의 간부 쪽이 더 강하다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리는 없는데.”

나는 미심쩍은 시선으로 두 사람을 살폈다.

천부인의 간부라면 당연히 일반적인 각성자들보다 훨씬 강할 테지만, 상대는 전설급 각성자인 흑탑주였다.

그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전설을 가진 흑탑주보다 강할 수는 없을 터였다.

음, 그렇다면 역시 아직 내가 업경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려나.

화면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게 되면 힘의 크기를 제대로 가늠하기가 어려워지는 모양이었다.

-말했듯이, 나는 이번에 벌어진 일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때 화면 속 흑탑주가 말을 꺼냈다.

-하지만 내 성역에서 벌어진 일이니 책임은 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으니 거듭 약한 현기증이 일었다.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거짓말에 시시각각 업보가 불어나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제가 직접 그자를 처단하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만 놓치고 말았죠.

멀미하듯 어지러운 가운데 흑탑주의 거짓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에게 주술은 남겨 둘 수 있었습니다. 이대로 가면 그는 그 주술 때문에 죽게 될 거예요.

-곧 죽는다면 무엇이 문제죠?

천부인의 간부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죽지 않을 방법이 있으니까.

흑탑주가 답했다.

-혈육의 몸을 빼앗으면 살아남을 수 있어요.

그녀 자신의 업까지 담긴 대답을.

-다시 말해, 그자의 혈육을 통해 그자의 행선지를 알 수 있다는 뜻이죠.

말을 잇던 그녀가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였다.

-그는 분명 자신의 쌍둥이 형제를 찾아갈 겁니다.

그런데 흑탑주가 내민 사진이 눈에 들어온 순간.

“……이런.”

나는 생각지 못한 충격에 작게 신음했다.

약하게만 이어지던 현기증이 사진을 보자마자 돌연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나를 뒤흔들었다.

업경의 권능이 쏟아지고 있었다.

초점이 맞춰지지 않은 사진은 그리 선명하지 못했다.

이곳에서는 사진 속 얼굴을 알아볼 수 없어야 했다.

그럼에도 업경의 권능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그 작은 얼굴을 한눈에 알아보게 만들었다.

어떻게 몰라보겠는가.

사진을 본 것만으로도 두 아기의 울음소리가 이토록 생생히 귓가를 울리는데.

47년 전, 태어난 지 열흘 만에 죽을 운명이었던 쌍둥이 형제.

막내 차사였던 내가 처음으로 명부를 찢어 살린 아이들.

흑탑주가 꺼내든 사진에는 그들의 얼굴이 찍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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