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장. 가려졌던 것들(5)
천부인의 단군.
가볍게 인사를 건넨 그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신경 쓰시던 문제들은 해결되셨는지요.”
나는 그 말에 살짝 인상을 썼다.
업경의 재료인 귀철과 귀목.
발설지옥의 나무를 돌보기 위한 땅의 권능.
그 모든 것을 한발 앞서 내게 준 사람은 다름 아닌 그였다.
“……당신은.”
하지만 그것을 단순한 호의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흑탑을 치길 바랐던 겁니까?”
눈앞의 남자는 바리마저 인정한 한반도 최고의 도사였다.
단순히 미래를 내다볼 뿐만 아니라, 본인이 바라는 미래마저 실현할 수 있는 남자였다.
그의 뜻대로 들른 흑탑의 성역에서 나는 그들의 만행을 목도했고, 그 자리에 염라의 이름을 남긴 채 돌아왔다.
“……아니, 그렇게 하도록 당신이 우주에 청했습니까?”
말을 꺼내면서도 나는 난생처음 느껴보는 초조감에 손끝이 차가워졌다.
한반도 전체가 고대하게 된 흑탑과 염라의 전쟁이, 기실 누군가의 설계였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솟구쳤다.
귀목을 얻기 위해 흑탑의 성역에 들어가기로 한 것은 나의 선택이었다.
흑탑의 성역에서 벌어진 참사에 분노하여 전쟁을 선포한 것 또한 분명 내 의지였다.
하지만 그것이 단군이 우주에게 염라가 흑탑을 치기를 청했던 결과라면?
그렇다면 그것을, 정녕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궁금하시다면.”
그는 변함없는 어투로 대답했다.
“직접 살펴보시면 됩니다.”
설명을 더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업경으로 제 속내를 읽어 보라는 의미임을.
“……내가 보는 건 ‘업(業)’입니다.”
짧은 고민 끝에 당신이 지금 업을 쌓고 있느냐는 질문을 돌려서 했을 때.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왕이시여.”
그리고 그가 태연한 얼굴로 그리 대답했을 때.
다소 장난스럽기까지 한 대응에도 나는 눈치챘다.
그가 내 질문에 부정하지 않았다고.
“…….”
단군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떠올렸다.
한반도의 전쟁을 끝낸 영웅.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를 욕심내지 않은 고매한 선인.
한반도를 누구도 완벽하게 평정할 수 없는 고착 상태로 부식시킨 남자.
그런 사람이 있다.
능력이 출중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파악하는 사람.
자신의 한계를 곧 자신이 짊어져야 할 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나는 새삼 단군이 그런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는 스스로 이루어 낸 한반도의 불완전한 평화마저도 자신의 한계에 따른 업으로 여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업을 쌓고 있는지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그 업은 자신의 한계에서 오는 필연적인 업이고, 그럼에도 최선을 다할 뿐이니까.
그러니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후회는 없다.
그 결과가 설령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위험을 초래하게 될지라도.
어쩌면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부터 한반도의 평화가 조금씩 부식되고 있다는 것 역시.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해 왔고, 또한 어쩔 수 없다고 여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그 남자가 나를 내 발로 그의 앞에 당도하도록 유도했다.
내가 가진 업경의 권능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그것만을 되뇌고 있었다.
대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권능을 갖고도 지금은 단지 보이는 대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미지의 존재가, 모르는 사이 나를 그의 뜻대로 움직이고 말았다고.
“적어도 그때 당신께 했던 말은 일말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습니다.”
그때 단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는데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것은 이상하지요.”
어린 장군의 모습으로 내게 부탁하던 때를 끄집어내며.
“제가 이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에서 오랫동안, 가능한 한 아주 많은 것들을 살펴 왔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였으니까요.”
그것은 교만하다면 교만한 말이었다.
또한 몹시 거북하게도, 경계심을 풀고 그저 그의 한탄에만 귀 기울이고 싶어지게 하는 말이었다.
그는 여전히 일면부지한 타인의 고통을 내버려 둘 수 없는 사람이었다.
23년 전, 내가 끝내 그의 명부를 찢겠다 결심했을 때처럼.
“제가 그때 진심이 아니었다면, 당신께서는 분명 움직여주지 않으셨겠죠.”
“…….”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섬찟했다.
그의 선의가 나를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
그 때문에 그의 선의에서 자꾸만 불순한 의도를 찾아내려 하는 나 자신이.
솔직히 말해서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단군의 선의를 믿고 싶은 걸까.
아니면 의심하고 싶은 걸까.
흑탑의 만행을 세간에 알리고 싶다는 마음이 오롯한 선의에서 비롯되었다면, 나는 단군을 여전히 내가 아는 영웅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을 터였다.
한데 그 일이 단지 내가 모르는 사이 그의 뜻대로 이루어졌다는 것만으로 나는 자꾸만 그에게서 숨겨진 악의를 찾으려 들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완벽한 그에게서 온갖 흠을 찾으려 드는 한반도의 절반에 달하는 이들처럼.
“머지않아 흑탑에서 꼬리를 자릅니다.”
단군이 다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미 앞으로의 일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 부드럽되 거침없이.
“목적은 우주퇴적물이지만, 흑탑은 귀목에 대해서만 언급하겠지요. 우주퇴적물은 ‘그들’과도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들’이란 우주질서보존회를 말하는 것일까.
불가살이 던전에서도 그들은 우주퇴적물을 직접 회수한 바 있었다.
“흑탑의 도사들이 사람을 죽여 귀목을 만들었음을 밝히되, 흑탑주는 성역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몰랐다고 주장합니다. 미리 탈출한 흑탑의 간부에게 뒤집어씌운 후 흑탑 측에서 책임을 지겠다며 오히려 탑주의 이름으로 토벌대를 보내고요.”
짧지 않은 설명을 이어가는 단군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차분했다.
“예, 이러한 내용으로 천부인에 중재를 요청할 겁니다.”
단군과 흑탑주는 서로 어떻게 나올지 훤히 알고 있었다.
이것이 아마 미래를 보는 도사들의 싸움일 것이다.
새삼 바리의 빈자리가 곱씹혔다.
지금 바리가 함께 있었다면 바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채 내던져진 기분은 들지 않았을 텐데.
“그 토벌에서 ‘염라’의 존재감을 드러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흑탑주가 토벌대를 보내는 건 본인이 직접 신도의 죄를 심판하겠다는 의도에서니까요.”
내 곁에 없는 바리 대신 단군의 첨언이 이어졌다.
“대중도 그렇게 받아들일 겁니다. 염라가 들춘 죄를 흑탑주가 먼저 단죄하겠다고 나섰다. 그렇다면 인간의 법을 따르지 않는 염라는 어떻게 할 것인가.”
거기까지 말한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때 당신께서 그녀를 심판하신다면, 더욱더 염라의 이름에 걸맞게 되실 겁니다.”
그는 이미 결론을 내렸다.
내가 그것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까지 가진 채로.
그의 확신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바리의 예언대로 흑탑을 칠 생각이었으니까.
다만 바리의 예언을 실행하겠다는 나의 의지가, 정말로 나 자신만의 의지였는지 알 수 없다는…… 다소 불쾌한 의심이 생겨났을 뿐.
“제가 당신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헌터로서 토벌대에 참여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때 단군이 미처 생각지 못한 제안을 꺼냈다.
“흑탑이 중재 요청을 하면, 흑탑주가 문제의 간부를 확실하게 처벌했다는 증명을 위해 천부인 측에서도 토벌대를 보낼 겁니다. 그때 천부인의 토벌대로서 참여해 주십시오.”
일순 멈칫한 나는 곧바로 피어오른 의문에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갑자기 천부인의 토벌대가 된다면 부자연스러울 텐데요.”
“상관없습니다. 천부인의 청년 길드원들은 자주 바뀌니까요.”
내 질문에도 단군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자주 바뀐다고요?”
“충분한 실전 경험을 갖춘 후에는 다른 곳으로 터를 옮기는 거죠.”
……다른 전설급 각성자에게 넘어갈 스펙으로 써먹는다는 건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젊어서는 한반도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단군의 고매함에 취하더라도, 끝까지 그 고매함만으로 버텨 내긴 힘들었겠지.
단군은 그 덕에 대중의 지지를 안으며 범접할 수 없는 영웅이 되었고, 그 탓에 온갖 이해관계가 얽힌 한반도의 정치판에서 고립되었으니.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제가 당신께 드리는 부탁입니다.”
조금의 서글픈 기색도 없이 단군은 말을 이었다.
“천부인의 토벌대는 흑탑의 간부에 의해 전멸합니다.”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를 걷어 낸 얼굴로.
“하지만 당신께서는, 당신과 당신의 차사들께서는 분명 돌아오실 겁니다. 그래서 당신께 부탁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정확히는 23년 전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바로 그 얼굴로.
“저는, 흑탑주의 정치쇼에 천부인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새삼 눈앞의 남자가 내 앞날에서 가장 치명적인 변수가 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를 깨달았다.
23년 전, 열두 명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남자.
그는 이제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평생을 걸고 있었다.
열두 명을 구하려던 남자의 죽음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 나였다.
그런데 더 많은 사람을 구하려는 남자의 순간순간을, 정말로 그냥 지나쳐버릴 수 있을까.
“……그렇게 할게요.”
그것을 깨닫고 말았을 때, 나는 결국 대답하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다만.”
또한 나를 그렇게 대답하게 만든 남자가 내게 고개를 숙였을 때에는, 자꾸만 그의 선의를 곡해하려 하는 내 일부를 끝내 억누르지 못하고 덧붙였다.
“제가 어떤 마음으로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였는지는, 잘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저 천부인을 지켜주고 싶었다는 그 말이 부디 진심이길 바라면서.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왕이시여.”
그가 돌려준 답은 조금 전과 똑같은 말이었다.
말 그대로 알고 있다는 뜻일 수도, 조금 전과 같이 그저 업을 쌓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는 대답.
나는 단지 전자로만 받아들이고 싶은, 그리하여 23년 전의 내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만 싶어지는 그런 대답이었다.
“그럼, 제가 드릴 말씀은 다 드린 것 같습니다.”
나 역시 굳이 더할 말이 없어서 대화를 마무리 짓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그런데 그의 완벽하게 조형된 얼굴 위로 답지 않게 머쓱한 기색이 비쳤다.
“주단군입니다.”
“……?”
나는 순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내 어리둥절한 시선에 그는 다소 멋쩍게 웃었다.
“사실 단군이 정말로 제 본명이거든요.”
……주도혁 씨, 본명 아니신 거 압니다만.
나는 진실로 의미를 알 수 없어서 대답도 못 하고 그의 얼굴만 빤히 쳐다봤다.
저승의 공문서는 이승의 공문서를 따른다.
고로 명부에 기록되는 이름은 당연히 그의 공식 이름이었으며, 나는 내 손으로 찢은 명부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러니까 주단군이 본명이라는 그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거나, 아니면……설마 그새 개명했나?
“…….”
충격적인 결론에 나는 조금 멍해졌다.
내가 가진 업경의 촉은 기이하게도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다른 것은 하나도 모르겠다면서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될 정보만 알려주는 내 서툰 권능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저도 특이한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단군이 그렇게 말하며 부끄럽다는 듯 얼굴까지 붉히는 걸 보니, 업경의 권능에 어지러움을 느끼면서도 그의 장단에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아주 멋진 이름입니다, 단군.”
인간적으로 개명까지 끝낸 지독한 컨셉충이라면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까.
“이제 정말 다 되었군요.”
자신의 말을 믿는 내 모습에 흡족해진 건지 단군은 다시금 점잖은 미소를 띄웠다.
“우주가 예정한 때에 다시 뵙겠습니다, 염라.”
마치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이미 알고 있는 듯한 인사와 함께.
***
북극점.
우주질서보존회 지구 본부.
지구청장 조옥희는 난감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그녀의 눈앞에는 지구 전역에서 만들어진 풍문의 정보가 펼쳐져 있었다.
“곤란하군.”
그중 그녀의 눈길이 머물러 있는 것은 하나의 비공개 영웅담이었다.
“삭제가 안 된다니.”
[영웅담 ‘시스템 오류#00-000’]
그녀가 직접 비공개 처리한 그 영웅담은 그것이 발현된 개체와의 모든 연결고리를 끊고 현재 아무런 효력도 발생할 수 없는 상태였다.
다만 우주질서보존회의 권한으로도 감출 수는 있을지언정 완벽한 삭제가 불가능했다.
“이건 확실히 치명적인 버그로군.”
당장은 해당 개체도 비공개 처리된 영웅담의 존재를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삭제되지 않는 이상 그것이 또 어떤 식으로 효과를 발생시킬지 모를 일이었다.
인간의 의지가 우주질서보존회의 시스템에 개입해 기준에 어긋나는 효과를 일으키는 것.
버그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뭐, 일단 지켜보도록 할까.”
한동안 화면을 응시하던 그녀가 이윽고 미련 없이 화면을 꺼버렸다.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까.”
25장. 가려졌던 것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