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장 (4) (78/187)

25장. 가려졌던 것들(4)

업경을 얻고 사라수대왕 저택의 마당으로 돌아왔다.

다과가 차려진 테이블에는 신들과 바리의 조부모가 앉아 있었고, 그들 주위로 격자무늬 셔츠를 입은 각양각색의 도깨비들이 보였다.

“으응? 마침 새 왕이 돌아오는구나.”

제일 먼저 자청비가 손을 들었다.

“하도 안 오길래, 내 그냥 인사 없이 돌아갈 뻔하지 않았느냐.”

슬슬 정말로 저승을 떠날 생각인지 그녀는 모자까지 푹 눌러 쓴 상태였다.

짧은 머리에 볼캡으로 얼굴을 가리니 처음 만난 날처럼 호리호리한 체구의 남자로 보였다.

“업경은 잘 받았어?”

“흐음, 확실히 그새 기운이 좀 더 갈무리되어 있구나.”

호구별성과 사라가 번갈아 한마디씩 했다.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친 강림 형 또한 살피는 시선으로 나를 훑고는 말했다.

“눈이 깊어지셨군요.”

천천히 신들을 돌아보았다.

형의 말대로 눈이 깊어져서였을까.

지금껏 알지 못했던 그들의 세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단순히 존재해 온 세월이라기보다는…… 타고난 혼의 격이라고 해야 할까.

심연처럼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것은, 이 한반도의 위대한 신들이 타고난 혼의 격이었다.

그 격은 그들이 품은 신성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타고난 혼의 격과 그들이 부리는 신성에는 다소 괴리가 있었다.

흘러넘쳐야 할 깊은 무언가가 보이지 않는 벽에 갇혀 있는 것 같다면 맞을까.

새삼 그들이 힘을 거의 잃은 상태라는 걸 실감했다.

아니, 잃었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은가.

그보다는 쌀가마니의 쌀을 바늘구멍으로 꺼내어 쓰는 느낌이었다.

보고 있으려니 그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이 몹시 갑갑하겠다는 감상마저 뒤따랐다.

“……그 눈에 익숙해지시기 전까지는.”

강림 형이 다시 말했다.

“다소 피로하실 수 있습니다.”

그 말대로 모든 감각이 이전과 달리 예리하게 곤두서 있었다.

그저 대상을 잠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순간 그것이 품은 본질에 정신이 어지러이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집중하지 않으면 이전처럼 평범하게 볼 수 있었지만, 집중도를 조절하는 것이 아직 내 의지로는 쉽지 않았다.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일부러 집중하는 게 아니라 그냥 보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대상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선 애초에 업경에 연결된 모든 감각을 의식적으로 느슨하게 풀어야 했다.

“익숙해지신다면 다시 편히 만물을 바라보실 수 있을 겁니다.”

차분히 말을 이은 형은 말을 마친 후에도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

아직 할 말이 더 있는 건가?

묘한 얼굴로 나를 보는 그에게서 나 역시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있자, 그는 이윽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때까지는, 무리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본래 카르마 등급의 필드와 같은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나는 아직 업경으로 대상의 마음까지 읽어 낼 수 없다.

그러나 형의 마음만큼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나는 옅게 흘러드는 그의 속내에 작은 어지러움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말한 것처럼 나는 아직 그것을 편히 바라볼 수 없었다.

“그러면 대왕님.”

그때 옆에 섰던 탈해가 말했다.

“저는 제 가신들과 함께 다시 공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빈틈없어 보이는 얼굴은 그새 워커홀릭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제부터 하게 될 일이 아주 많으니까요.”

느릿하게 더해진 말에는 무심코 미소 짓고 말았다.

그는 이제 아주 오랫동안 저승에 머물면서 아주 많은 것을 만들어줄 것이다.

뒤돌아선 탈해가 가신들을 향해 걸음을 뗐다.

몇몇씩 흩어져 있던 도깨비들도 일제히 그들의 왕에게 돌아갔다.

호구별성은 각양각색의 체형 위로 똑같은 격자무늬 셔츠와 뿔테안경을 쓴 도깨비들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어휴, 저렇게 보니까 무슨 <월리를 찾아라> 같네.”

……이럴 때면 나보다 호구별성이 90년대 고전 문화를 더 잘 아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한데.

“새 왕아, 그럼 나도 이제 가 보마.”

탈해에 이어 자청비가 말을 꺼냈다.

푹 눌러쓴 볼캡을 살짝 들어 올린 그녀가 나와 눈을 맞추며 웃었다.

“네가 불러준 덕에 며칠간 잘 쉬었다 가는구나.”

“……아. 아뇨, 저야말로 감사했습니다.”

지옥수를 심은 땅을 돌봐준 것에 대한 인사도 전할 겸 가볍게 고개를 숙이려는데 자청비가 장난스럽게 손을 뻗었다.

“예의가 바른 것은 좋다만, 왕이 그리 쉽게 고개를 숙여서야 되겠느냐.”

그녀는 내 손을 잡아 악수를 나누고는 뒤에 선 신들을 돌아보았다.

“자, 그러면 우리 차사님들도 안녕히들 계시고.”

“어째 마음이 급해 보이는구나, 자청비.”

불쑥 사라가 말했다.

“내가 이승의 문턱까지 배웅해 주려는데 괜찮겠느냐.”

“으응?”

그 말에 자청비가 조금 놀란 듯 눈을 끔뻑였다.

“아니, 엉덩이 무겁기로 이름난 게으름뱅이 대왕께서 이거 웬일이신가.”

“……거, 싫으면 싫다고 하지. 꼭 그리 악담까지 해야겠느냐.”

퉁명스럽게 대꾸한 사라가 팔짱을 풀며 말을 이었다.

“그냥, 배웅하는 김에 몇 마디 더 물어보려고 그러는 게지.”

“……흐응?”

고개를 살짝 기울인 자청비가 이내 다시금 익살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리하지, 뭐. 과부는 역시 홀아비랑 놀아야 하지 않겠는가?”

“너도 참, 못된 농이 끊이지가 않는구나.”

가볍게 그녀를 타박한 사라가 먼저 성큼 발을 내디뎠다.

“그럼 잠깐 다녀오겠다, 대왕.”

“아, 네. 다녀오세요.”

……보아하니, 정말로 뭔가 물어볼 것이 있는 모양인데.

하긴, 그는 천신이기도 하니까 자청비한테 천계의 근황을 묻거나 할지도 모르지.

그걸 왜 굳이 따로 묻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

멀어져 가는 자청비의 사라의 뒷모습을 건너다보고 있으니 새삼 느껴졌다.

그녀가 참, 적절할 때 저승에 들렀다고.

-정확히는 귀목을 키워 낸 흙을 좀 얻어 가려고 왔지.

한데 그녀의 말을 떠올린 찰나.

-글쎄, 지금 같이 일을 하는 녀석이 좀 별난 흙이 필요한가 봐.

불현듯 그녀가 귀목 던전까지 왔던 이유가 함께 생각났다.

-단군.

-내 지금 그 인간 놈의 신단수를 봐주고 있거든.

그녀와 우리가 마주칠 수밖에 없던 까닭이.

그때는 그냥 흘려 넘겼던 그녀의 말이.

-사실 제가 직접적으로 아는 마을은 아니에요.

-그래도 거기 갇혀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계속 기분이 안 좋아서요.

-이상하잖아요. 마을 하나가 사라졌는데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게.

또한 나를 그녀가 있는 곳으로 보냈던, 어느 앳된 소년이.

“……아.”

그때는 그냥 지나쳤던 목소리들이 뒤엉켜 반복되고, 나는 머릿속을 어지러뜨리는 현기증에 작게 신음했다.

대상의 인과를 꿰뚫어 보는 업경의 권능이 내게 무언가를 쏟아붓고 있었다.

“……설마.”

감각의 파도 속에서 시야가 흔들리는 느낌에 두 눈을 감았다.

“대왕님?”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차사들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지만 반응할 수 없었다.

업경의 권능이 무심코 지나쳤던 기억들을 하나로 꿰어 내는, 그 예리하고 첨예한 감각만이 온 신경을 뒤덮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무사하길 바라는 제가 이상한 걸까요.

-……죄송해요. 저도 직접 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말을 꺼내서.

나를 어느 마을까지 인도했던 그 소년이.

-그래도 제발, 누군가는 그 사람들을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그 마음이.

-제가 제일 강하다는 게, 그분들보다 더 오래 살아야 할 이유는 되지 않으니까요.

과연 누구의 것이었는지.

“……당신이었어.”

그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짜내듯이 중얼거렸다.

아무도 없는 낡은 사무실에서 홀로 손님을 기다리던 어느 앳된 소년을 눈에 그리며.

“단군.”

모르는 사이 한발 앞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그 남자의 이름을.

***

끼이익.

급하게 멈춘 바퀴가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긁었다.

나는 소음에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시동을 껐다.

해가 저무는 시각.

자동차 유리 너머로 다 쓰러져 가는 낡은 건물이 보였다.

벌써 세 번째 방문하는 어느 허름한 길드였다.

그리고 그 문을 열어 다시금 좁은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필요한 재료는 다 찾으셨는지요.”

기다렸다는 듯 그곳을 지키던 막내 길드원이 말을 걸어왔다.

큰 키에 라운드안경, 앳된 얼굴은 그대로이되, 이전까지와는 달리 몹시 수려해진 외모의 남자가.

“……하.”

나는 그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안경은 그새 바꾸셨나 봅니다.”

도수가 높아 비현실적으로 작아졌던 그 눈이, 지금은 정성을 다해 빚어낸 듯 완벽한 형태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똑같은 안경입니다만, 아무래도 주술이 효력을 잃어서요.”

투명한 렌즈 너머로 그의 눈이 가볍게 반원을 그렸다.

“제가 누군지 아시는 분께는 제 얼굴이 그대로 보이게 됩니다.”

“이야, 모르는 사람한테는 진짜 얼굴을 감춰주는 안경이라고?”

그 말에 호구별성이 먼저 반응했다.

“편리하겠다, 그거.”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기울인 모습이, 그녀도 눈앞의 남자가 그 단군이라는 게 퍽 신기한 모양이었다.

다만 신기해하면서도 어딘가 불편하기도 한, 그런 얼굴.

그것은 달리 말을 보태지 않는 두 차사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단군을 만나러 가야겠다는 내 말에 의문을 표하며 뒤따랐던 사라와 강림 형도, 지금 이 순간에는 평소보다 훨씬 더 가라앉은 얼굴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럴 법했다.

모르는 사이 한반도 최대의 적수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단 뜻이니까.

“신께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실 만한 물건은 아닙니다.”

그가 호구별성의 말을 받았다.

“우주가 부여한 형(形)을 거스르는 것은 마찬가지니까요.”

코에 걸쳤던 안경을 느릿하게 벗어 내면서.

“……결국 피로해지는 일이죠.”

완연히 드러난 그의 얼굴은 지나치게 수려하다는 것만 빼면 여느 고등학생처럼 앳되었지만.

동시에 도무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는 인상도 함께 주었다.

천벌을 마주했을 때와 같이, 그는 살아 있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영겁의 세월이 깎아 낸 조각 같았다.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 얼굴과 어떤 열기에도 데워지지 않을 듯한 초연함이 특히 그러했다.

“……혹시 그 안경이 말투나 인상도 바꿔주는 겁니까?”

나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쓰였던 아이를 떠올리며 물었다.

스스로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던, 그래서 애써 웃어 보인 얼굴이 더없이 어색하고 슬퍼 보였던 장군이라는 이름의 소년.

무슨 영문인지 업경의 권능은 그 소년이 눈앞의 남자와 같은 존재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에 따라 좀 더 편안한 인상을 줄 수는 있습니다만.”

그가 태연히 대답했다.

“당사자에게 비춰지는 모습에 제 의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군의 대답에 묘한 낭패감이 들었다.

그 말은 그럼 내가 그런 어린애를 바라서 그렇게 보인 거란 말인가?

뭔가 서툴고, 솔직하고…… 다소 시끄럽기까지 했던 친구를?

그래서 어색하게 표정을 꾸며 내는 모습이 더 마음 아프게 느껴지는 아이를?

아니, 물론 어른보다 애들을 더 편히 느끼는 게 맞기는 한데…….

지금처럼 평범하게 말하는 사람을 두고, 나만, 나만 혼자 그렇게 방방 뛰는 강아지처럼 받아들인 거라고?

딱히 울려던 것도 아닌데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까 봐 마음 죄었던 거고?

“…….”

얼굴이 점차 화끈거려 왔다.

나조차도 이게 화가 나서인지 민망해서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셨다면 사과드립니다.”

나를 바라보던 단군이 툭 꺼내 든 말에 나도 모르게 거듭 작은 한숨이 샜다.

가벼운 미소를 띤 그 얼굴을 보며 나는 그가 말과 달리 조금도 사과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것은 그의 본질을 읽어 내는 내 업경의 촉이었으나…… 동시에 나는 내가 그의 어떤 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음을 느꼈다.

신들의 혼마저 꿰뚫어 봤던 나의 업경이, 단군에게서는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전하고 있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마치 영겁의 세월이 빚어낸 무언가 같은.

그러한 존재라고.

“다시 인사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본질은 분명 ‘인간’이라고.

“천부인의 단군이 저승의 새로운 왕을 뵙습니다.”

반달처럼 가벼이 눈을 휜 그가 말을 이었다.

23년 전 내 손으로 살아나…… 이제는 한반도의 절반 위에 군림하게 되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