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장. 가려졌던 것들(3)
-왕이, 왕이 미쳤다……!
-아아……아아아……!
-이럴 순 없어, 아아아악……!
업경의 권능이 미쳐버린 함달파와 그에게 살해당한 도깨비들을 비췄다.
끝없이 반복되는 지옥도는 아버지를 살해해야 했던 탈해의 업이었다.
귀기 어린 눈이 흔들림 없이 나를 보았다.
그가 내게 말하고 있었다.
그 업을 벌해줄 것을.
제 손으로 아버지를 살해한 것처럼, 저 자신에게도 마땅히 죽음을 내려줄 것을.
“……탈해, 나는 아직 당신한테서 이유를 듣지 못했습니다.”
끊이지 않는 도깨비들의 비명 속에서 나는 물었다.
“대체 왜 선대 왕도깨비를 죽여야 했던 겁니까.”
“저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탈해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든 패륜도깨비들이 그러했듯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왕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대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업경의 권능이 내게 밀려들었다.
내 기억처럼, 내 감정처럼 몹시도 선연히 느껴지는 감각이.
덤덤한 얼굴 뒤로 그가 끝까지 감추려 드는 그의 진짜 속내가.
“……그래, 조금이라도 더 빨리 왕이 되기 위해.”
그 진심이 계속해서 선명하게 전해져 와서, 나는 짓씹듯이 그의 말을 받았다.
“선왕에 의한 동족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제발 새로운 왕이 되어달라 간청하던 다른 도깨비들을 지키기 위해.”
[ (!) 당신의 권능이 필드의 카르마와 충돌합니다. ]
“아닙니까?”
내 추궁에 그림자의 형태로만 재현되었던 탈해의 업이 좀 더 뚜렷한 형상이 되어 필드를 뒤흔들었다.
끊임없이 도깨비들이 죽어 나가던 환상이 멈추었다.
이제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중절모를 쓴 커다란 남자와 베일로 얼굴을 가린 여자였다.
-왕도깨비 함달파, 듣자 하니 곧 죽음이 머지않았다지?
그녀가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베일 위로 드러난 눈가에 점점이 돋아 있는 비늘들.
저승 던전에서 영혼의 조각들을 통해 보았던 흑탑주였다.
-내게는 몸을 갈아타는 주술이 있고, 당신에게는 몸을 만드는 기술이 있지.
폐교 던전에서 봤던 도깨비 인형들.
죽은 도깨비들로 만들어진 인형사의 꼭두각시들.
“흑탑이 도깨비들을 납치한 게 아니었군요.”
업경의 권능이 읽어 내는 그녀와 함달파의 대화에 나는 한숨처럼 내뱉었다.
“……언젠가부터.”
탈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동시에 업경이 보여주던 흑탑주와 함달파의 대화가 멈추었다.
대신 카르마의 주인 탈해는 내게 자신이 겪은 일을 직접 들려주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아버지께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시게 되었습니다.”
모든 왕도깨비들의 수명은 천 년이다.
그 수명이 50년쯤 남았을 때, 그들은 제 손으로 직접 태자도깨비를 깨워 세대를 교체할 준비를 한다.
“다른 왕도깨비들과 달리 예정된 죽음의 때를 받아들이지 못하셨지요.”
“…….”
“신들은 영원의 시간을 살건만, 그들의 나라에서 함께 사는 도깨비들에게 허락된 시간은 고작 천 년뿐이라는 것에 절망하고 분노하셨습니다.”
그런 함달파에게 흑탑주가 접근했다.
자신의 영혼을 다른 이의 몸에 옮기는 주술을 미끼로 드리우며.
그녀는 힘을 합쳐 영생을 살자고 제안했고, 함달파는 주술을 대가로 그들의 가짜 몸 제작 연구에 협력했다.
그리하여 흑탑은 기어이 불법 빙의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후 함달파는 살아 있는 도깨비들을 실험체 삼아 왕도깨비의 새로운 몸을 연구하는 데 매달렸다.
“그래서 제가 직접 그를 죽였습니다.”
탈해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껏 곁을 지켜 온 가신들의 몸을 빼앗아서라도 영생을 살고자 했던, 그 어리석은 아버지를.”
고요히 가라앉았으되, 검붉은 염화가 일렁이는 눈으로.
“……그러니 저승의 왕이시여, 당신께서는 이제 벌하셔야 합니다.”
아마도 저승에 찾아온 순간부터 줄곧 품고 있었을 말을.
“아버지의 목숨을 끊어 낸 제 안의 악을 부디 당신의 손으로 벌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나는 그의 요청을 들어줄 수 없었다.
“탈해, 그것은 악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도깨비들을 구하기 위해 내렸던 결단이었다.
그 마음을 어떻게 감히 악으로 결론짓고 벌한단 말인가.
“더 큰 선을 위한 일이었잖습니까.”
그에 탈해가 침묵하며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한 악은 반드시 용서받는 것입니까.”
그가 다시금 나지막이 말을 꺼낸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한 악입니까.”
그의 질문을 듣는 순간 무심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당신께서는 정말로, 그 선과 악의 무게를 잴 수 있으십니까.”
저승의 왕위에 오른 내가, 아마도 영원의 시간을 들여 고뇌해야 할 명제.
“새로운 왕이시여, 신은 변하지 않습니다.”
내내 꿋꿋이 나를 바라보던 탈해가 천천히 고개를 조아렸다.
“오늘 당신께서 한데 얽힌 선과 악의 경중을 가리기로 뜻하신다면, 당신은 이제 영원히 선과 악의 무게를 가리셔야 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에서 나는 그가 나보다 앞서 훨씬 더 깊은 고뇌를 해 왔음을 읽었다.
“당신께서 지금 저에게 미래를 허락해주신다 한들, 제가 누릴 시간은 고작해야 천 년일 것입니다. 저는 고작 천 년의 시간을 대가로 당신께 영원한 짐을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그 깊은 고뇌에는 뜻밖에도, 면식조차 없던 나에 대한 연민마저 녹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나에 대한 염려를 드러냈을 때.
나는 도리어 내가 반드시 그를 품어야 할 이유를 깨달았다.
탈해의 말이 맞다.
내가 지금 탈해의 악을 용서한다면, 나는 앞으로도 영원히 하나의 사건에 얽힌 선악의 경중을 가려야 할 터였다.
하지만.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저승에 오는 모든 이들이 저승의 왕에게 바라는 바가 아니던가.
……아.
나는 이제야, 이때껏 생각지 못했던 저승왕의 천명을 알 것 같았다.
내가 처음 저승의 왕위를 물려받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때 나는 분명 이승에서 기능하지 못한 선악의 저울이 저승에서라도 기능하기를 바랐었다.
이승의 저울보다 공정한 저승의 저울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에 나라도 저승의 왕이 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왕이 된 이상, 내가 바라던 저승의 저울은 결국 나 자신이 될 것이다.
그래, 세상일이란 게 매번 정확하게 흑백이 가려졌던가.
언젠가 저승을 찾게 될 모든 이들은, 저승의 왕 앞에서라도 반드시 하나의 업에 얽힌 선악의 무게를 잴 수 있기를 바랄 터였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이승의 저울보다 공정한 저승의 저울이 되어야 했다.
영원한 저승의 저울이 되어 하나로 얽힌 선과 악의 무게를 재어야 했다.
“……그렇게 할게요.”
따라서 나는 말했다.
“끝없이 선과 악의 무게를 고뇌하겠습니다.”
이 땅의 새로운 권선과 징악의 신으로서 천명했다.
“그리하여 당신의 악과 마찬가지로 내 나라를 찾는 모든 이들의 악을 영원히 함께 짊어지겠습니다.”
탈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왕이시여.”
그리고 또 한참의 침묵 끝에 재차 괴로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패륜을 저지른 도깨비는 모두 미쳐버렸습니다.”
애써 덤덤함을 가장하던 얼굴에,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짙은 슬픔이 비쳤다.
“그러니 저 역시 미쳐가는 게 틀림없습니다.”
냉정했던 목소리는 어느새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제가 미친 게 아니라면, 수많은 동족을 잔인하게 살해한 그자를…… 아직도 사랑할 리가 없잖습니까.”
탈해의 필드가, 필드를 쌓아 올린 그의 업이 다시
내 혼과 연결된 업경의 권능이 그의 업을 마저 읽어 내기 시작했다.
-탈해, 네가 정녕 나를 죽이겠다는 것이냐?
마침내 새로운 왕도깨비가 된 탈해가 동족을 위해 아버지 함달파를 살해하기로 결심했을 때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아들아, 내가 어찌 너를 해칠 수 있겠느냐.
함달파는 패륜을 저지르려는 아들에게 조금도 저항하지 않았다.
수많은 가신을 살해했던 폭군은 그의 태자에게만은 저항하지 않고, 다만 여전히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얼굴로 애원할 뿐이었다.
-탈해, 천 년은 너무 짧다.
-그중에서도 50년은 더욱 짧다.
-아들아, 나는 아직……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
함달파가 더 긴 수명을 탐내게 된 기저에는 사랑하는 아들 탈해와 더 오래 함께하고 싶다는 욕망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도 사랑했던 아들 탈해가 기어이 자신을 죽이려 들었을 때.
-너도 천 년을 다 살게 되면, 이 아비를 이해하게 될 게다.
차마 아들을 해칠 수 없었던 그는 죽는 순간까지 비뚤어진 애정만을 남겼다.
-그러니 탈해야, 언젠가 네가 헤어지고 싶지 않은 너의 아이를 만난다면.
-너는 부디 내가 남긴 이 기술로 영생의 소원을 이루어라.
-이것이 아비로서 주는 나의 마지막 선물이다.
언젠가 탈해도 자신처럼 죽기 싫어지는 날이 온다면.
수많은 동족의 피로 쌓아 올린 기술을 완성하여 영원을 살라고.
“……차라리 그가 나도 사랑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탈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것도 저주라면 저주겠죠. 선왕의 저주로 미쳐버렸던 다른 패륜도깨비들처럼, 선왕을 살해한 저 역시도 그들과 똑같이 미쳐가는 저주.”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주제에, 가증스럽게도 아들만은 끝까지 사랑했던 아버지.
그 지독한 부정에 숨이 막힌다는 얼굴로.
“……왕이시여, 눈을 감으면 저는 아직도 그가 그립습니다. 나를 탄생시켰던 그 손길이, 나를 키웠던 그 사랑이 그립습니다.”
쥐어짜듯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그자의 손에 그렇게나 많은 동족들이 죽어 갔는데…… 역시 저는 미친 게 틀림없습니다.”
진득한 슬픔과 자책을 쏟아 내는 그를 보며, 나는 지금껏 보아 온 탈해의 모든 것을 새로이 곱씹었다.
언제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텅 비어 있던 그의 방.
무언가에 쫓기듯 쉴 새 없이 설계도를 그리던 그의 팔.
매일 밤낮 스스로에게 조금의 쉴 틈도 허락하지 않았던 그 자신.
-모든 왕도깨비가 천 년을 채우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 로봇은 제가 태자도깨비였던 시절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로봇을 본떠 만든 것이랍니다.
-혹시라도 제가 왕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게 된다면, 그 로봇에서 새로운 왕도깨비가 깨어날 겁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만들어 냈던 작은 로봇이 무엇을 의미했던 것인지를.
세상의 모든 것은 시간이 흐르면 죽게 된다.
그러나 세상에는 간혹 시간을 앞질러 간 죽음이 존재한다.
죽음이 그의 시간을 앞질러 가기 전까지, 누구도 그의 고통을 알아주지 못하는 그런 비통한 죽음이 존재한다.
“……탈해.”
……그래, 그렇게나 뚜렷했던 죽음의 징조들을.
왜 줄곧 그의 곁에 있었으면서도 알지 못했을까.
그 모든 것을 뒤늦게 깨닫고 만 나는, 그를 향해 다시금 말했다.
“그건 미친 게 아니라 아픈 겁니다.”
그의 죽음이 그의 시간을 앞질러 가기 전에.
“당신 말대로, 당신이 아직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픈 겁니다.”
나는 그의 고통을 덜어줄 수 없다.
지금은 그 누구도, 그 어떤 말도 이 가엾은 왕도깨비의 고통을 덜어줄 수 없다.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것은 결국 시간뿐이므로.
“하지만 탈해, 당신은 신과 달리 천 년을 살아가는 도깨비입니다. 영원을 살아도 변하지 않는 신들과 달리 당신은 천 년의 시간을 보내며 조금씩 변하게 될 거예요.”
그러니 나는 그에게 살아달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당신의 사랑도, 아픔도, 그리움과 죄책감도 다양한 방향으로 변하게 되겠죠.”
시간이 당신의 고통을 덜어줄 때까지.
당신이 누려야 할 평생이 다시 한번 당신의 죽음을 앞지를 때까지.
“……저는 당신이, 그렇게 천 년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탈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침묵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세상에 정말로 죽음을 바라는 자들이 어디 있겠는가.
죽음이 시간을 앞질러버리는 것은, 그저 당장의 순간순간이 너무도 아프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이미 너무나도 잘 알았다.
스물한 살에 목숨을 끊었던 나 역시도 죽음이 내 시간을 앞질러버릴 만큼 지독하게 아팠을 뿐이니까.
“죽음이 두렵지는 않으셨습니까.”
그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물었다.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가만히 그가 답하기를 기다렸다.
“……두려웠죠.”
그리고 마침내, 생에 대한 의지가 다시 한번 죽음을 앞지르는 길고 긴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역시…… 살아가는 것이 더 두렵습니다.”
내가 가진 업경의 권능으로도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서.
“내가 살아남는다는 것은 내 악이 용서받았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나는 이제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할 테니까요.”
하지만 어쩌면, 지금은 업경의 권능으로 그의 표정을 가늠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할지 모른다.
세상의 모든 일이 선과 악으로 가려지지 않듯, 세상의 모든 감정이 기쁨과 슬픔 어느 한쪽으로 나뉠 수는 없으니까.
“내 아버지를 죽이면서까지 쟁취해 낸 이 삶이, 나와 가신들의 삶이, 끝내 좋은 삶이었다고 증명하기 위해 살아가야 할 시간들이, 저는 실로 두렵습니다.”
나는 문득 처음으로 탈해에게 동질감을 느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그가 나와 같은 현대인이라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수명이 정해진 인간으로서 느낀 동질감에 더 가까웠다.
신은 하나의 숙명을 갖고 태어나 영원을 살아가지만…… 인간은 단지 평생의 시간이 끝났을 때, 그 삶의 끝에서 좋은 삶이었다고 말하기 위해서 살아가니까.
그렇게, 어떤 삶이 좋은 삶일지 평생을 고뇌하면서 살아가니까.
저승의 저울이 된 나도, 이제 모든 인간의 평생을 함께 되돌아보며 그들의 삶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고뇌하며 살아가게 될 테니까.
“탈해, 카르마 등급의 필드를 빠져나가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죠. 시전자가 죽었을 때, 혹은 시전자가 가둔 이가 죽었을 때.”
나를, 아니 탈해 자신을 가두었던 이 좁은 감옥에서 우리가 함께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
“……그리고, 시전자가 가둔 이와 함께 살아가기로 했을 때.”
카르마 등급 필드의 해체 조건은 시전자를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시전자를 죽이기 전에 시전자가 먼저 필드를 거두어버리면 필드는 그냥 사라지게 된다.
그러니 함께 필드에서 나가고 싶다면, 그저 함께 살아서 나가기로 약속하면 된다.
탈해는 분명 그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와 함께 생사결의 감옥에 갇혔던 것일지도 모른다.
더없이 고통스러워도 사실은……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서.
“……내 나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탈해.”
이윽고 스스로를 가두었던 탈해의 필드가 사라졌다.
“저도 이제 당신과 함께 천 년의 생을 고뇌하겠습니다.”
그의 얼굴에 드리웠던 슬픔과 기쁨의 저울이 희미하게나마 기쁨으로 기울어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말을 이었다.
“평생을 살아가는 모든 이가 그렇게 고뇌하겠지만, 저는 다만 영원을 살기에 영원히 고뇌할 뿐입니다.”
모든 죽어가던 것들의 시간이 다시 죽음을 앞지르는 찰나는, 사실은 그 약간의 기울임만으로 충분할 터였다.
그것이 새삼 아프고, 사랑스럽고, 또한 다행이었다.
수많은 고통스러운 죽음을 목도해야 하는 나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