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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 (5) (73/187)

24장. 귀신의 나무(5)

어느새 귀목의 바깥이었다.

가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한 이들이 아직 갇혀 있는데, 나는 그곳에서 빠져나와 있었다.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 허리를 붙들고 있는 팔의 주인을 멍하니 바라봤다.

강림 형.

그래, 형이 나를…… 바깥으로 끌고 나왔다.

사고가 느릿하게 굴러가는 와중에 손가락 사이로 반짝이는 영혼의 잔해가 사금처럼 흘러내렸다.

그것들이 내 손아귀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는 감각이 선명했다.

다시는 주워 담을 수 없게 흩어지는 모습이 천천히 두 눈에 새겨졌다.

“승리하셨잖습니까.”

형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뿌리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주변의 삿된 기가 한순간에 가셨습니다. 해서 대왕님께서 승리하셨음을 알았습니다.”

아직 멍한 머릿속에 낮고도 분명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나는 천천히 상황을 인지해 나갔다.

내가 귀목에 박혀 있던 법칙의 핵을 파괴했다.

던전은 그대로 클리어되었다.

……하지만.

“한데 당신께서는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던전은 클리어되었으되, 내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그 사실을 의식하자마자 몸이 움찔 떨렸다.

허리를 단단히 붙잡은 팔에서 억센 힘이 느껴졌다.

“당신께서 나오지 않았는데 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에 형의 어깨 너머가 차츰 눈에 들어왔다.

마을을 덮었던 금줄은 어느새 곳곳이 검붉게 젖어 있었다.

희었던 종이가 저마다 핏자국이 튄 것처럼 얼룩져 있었다.

갈라진 뿌리 아래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열이 보였는데, 이전에 학교 던전에서 봤던 기묘한 문자들과 흡사했다.

공간이 뒤틀리고 있다는 형의 말처럼 문자열 주변은 끊임없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들을 차례차례 인식하면서 깨달았다.

“저것 때문이었어.”

귀목에 잡혀 있던 혼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형, 저기 혼들이 많이 있어요.”

나는 문자열을 응시하며 말했다.

“제가 새로 생긴 풍문으로 되돌리고 있었는데…….”

“우주퇴적물 말씀이십니까.”

그러나 미처 말을 다 꺼내기도 전에 형이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무 안에서부터 다시금 기운이 일그러지고 있는 건 그 때문이었습니까.”

나를 붙든 팔에 힘을 더하며 그가 말했다.

“이제 그만 물러나셔야 합니다.”

“되돌릴 수 있어요.”

형의 팔뚝을 붙잡았다.

“저 사람들, 제가 전부 되돌릴 수 있어요.”

파지직!

그때 형에게 닿은 내 손에서 스파크가 일었다.

하얗게 튄 스파크가 순간 형의 팔뚝에까지 번져 황급히 손을 떼었다.

손을 물리려 했으나 형은 되레 내 손목을 붙잡았다.

“저는 물러나셔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저도 지금 되돌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고집을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에 나도 언성을 높였다.

“되돌리고 있었어요. 분명히 내 손에 쥐었다고요.”

말을 내뱉고 있는데도 귓가에서는 그들의 절규가 메아리쳤다.

한때 격랑처럼 몰아쳤던 외침이 이제는 쓰디쓴 상실감이 되어 깊은 늪으로 나를 끌어내리고 있었다.

손만 뻗으면 저들을 품에 안을 수 있는데.

그걸 아는데 내가 어떻게 이대로 가만히 있어.

“다시 돌아가서…….”

“이미 이 땅에 존재하지 않게 된 자들입니다!”

그러나 형은 더없이 단호하게 내 말을 끊었다.

“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자들 때문에 당신께서 위험을 감수하셔야 합니까!”

내리꽂히는 시선을 마주하며 생각했다.

나를 향한 걱정과 나의 불안전에서 오는 분노로 새파랗게 달아오른 저 눈이, 모순적이게도 나를 찍어 누르는 것 같다고.

-그렇다면 앞으로도 제게 이리 속내를 감추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자연히 불가살이 던전에서 형과 부딪쳤던 때가 떠올랐다.

내게 그렇게 묻던 형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어떻게든 감싸서 묻어 두었던 마음이 끝내 다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형, 그때 물었었죠.”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참고 참았던 말이 멋대로 흘러나왔다.

“앞으로도 형한테 계속 속내를 감출 거냐고.”

또 한 번 내 앞을 가로막아선 그에게.

“형이 내 판단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나는 형한테 아무것도 솔직할 수 없어요.”

그때는 차마 보일 수 없어 감췄던 속내를 내뱉고야 말았다.

말을 마친 순간 나를 찍어 누르던 눈빛이 삽시간에 땅으로 꺼지듯 힘을 잃는 것을 보았다.

해서 깨달았다.

지금 나의 대답만으로는 우리의 간극을 좁힐 수 없음을.

형이 나를 가로막는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면, 이 간극은 더욱 깊어질 뿐임을.

“……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자들 때문에 나서냐고요?”

나는 다시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형, 형은 그렇게 말하면 안 돼요.”

내가 왜 나설 수밖에 없는지 그를 납득시키기 위해서.

“적어도 형이랑 나는 저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의미하게 여겨선 안 되잖아요.”

내가 왜 그들을 그냥 둘 수 없는지 그는 알았으면 해서.

“우리의 신화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는데.”

그때였다.

쿠우우웅!

쿠우우우웅!

내 말에 형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일대가 흔들리면서 공간이 눈에 띄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던 나무뿌리 주변이 커다란 물결과 같이 일그러져 사라져 갔다.

“시간이 없어요.”

나는 형을 뿌리쳤다.

“잠깐이면 돼요. 저들을 되돌려놓고 올게요.”

그리고 재차 귀목 안으로 뛰어들었다.

검고 물컹한 내벽이 다시 사방에서 내게 부딪쳐 왔다.

그와 함께 우주퇴적물이 품은 망자들의 혼 또한 기다렸다는 듯 내게 밀려들었다.

“그래, 할 수 있어.”

나는 그것들을 뿌리치지 않고 풍문을 발동했다.

[ (!) 풍문(XX) ‘시스템 벨눴냇번똴흐흐흐 #00-000’이 당벨깰흐흐의 권능에 공명벴녁띄받듬흐흐흐다. ]

파지지직!

파지지지직!

손끝에서부터 하얗게 스파크가 일었다.

“할 수 있어……!”

스파크에 뒤덮인 두 팔이 다시금 갈라지고 터지기 시작했다.

신경 쓰지 않고 검은 덩어리를 품 안 가득 끌어안았다.

파지직!

파지지직!

끌어안은 덩어리들에도 새하얀 스파크가 일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앞다투어 반짝이는 조각들로 뭉쳐졌다.

파지직!

파지지직!

파직!

귀목에 가득했던 검은 덩어리들은 이제 새하얗게 번쩍이는 스파크 속에서 드넓은 모래사장처럼 나를 감싸 오기 시작했다.

사금 같은 결정으로 뭉쳐진 그들의 혼에서, 비로소 되찾은 평생의 기억이 한 장면씩 내게로 흘러들었다.

기뻤을 때.

행복했을 때.

삶을 이루는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었을 때.

비통했을 때.

분개할 수밖에 없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살아가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그 순간순간의 기억 속에서, 나는 우주퇴적물에 녹아든 무수한 이들의 평생을 내 것처럼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실감했다.

모든 망자들의 흔적에 의미가 있는 이유는 그들이 한때 살아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의 신화는 결국 모든 죽은 것들이 한때 살아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조금만, 더.”

그러나 내가 그 반짝이는 결정들 속에서 더욱 풍문에 힘을 더하려 했을 때였다.

“……아.”

결정들이 더 이상 뭉쳐지지 않았다.

[ (!) 풍문(XX) ‘시스템 벨눴냇번똴흐흐흐 #00-000’이 당벨깰흐흐의 권능으로 집합된 정베몄냇번륫흐흐흐 해베몄냇번륫흐흐흐했습베깩됩흐다. ]

오류가 섞인 팝업창을 보자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부족해.”

이 풍문으로는 이것이 한계임을.

“……이 풍문으로는 부족해.”

내가 아무리 힘을 더해 봤자 우주퇴적물이 된 혼들을 사금처럼 되돌리는 것이 전부였다.

하나의 덩어리에서 다시 여럿으로 나누었다 한들 완전한 혼으로는 거둘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러니 부족하다면, 부족하지 않게 하면 된다.

“더 강하게.”

이 풍문은 아직 ‘풍문’에 불과하니까.

[ 풍문(XX) ‘시스템 벨눴냇번똴흐흐흐 #00-000’에 카르마 포인트를 ‘10,000’ 부여합니다! ]

나는 내가 가진 카르마 포인트를 풍문에 쏟아붓기 시작했다.

[ 당신의 ‘풍문(XX)’벨덱꿨흐 ‘무용담(XX)’으로 변벴는냈늅럼흐흐흐니다! ]

떠오른 팝업창에 오류가 섞여 있어도 상관없었다.

“아직이야. 더…….”

[무용담(XX) ‘시스템 벨눴냇번똴흐흐흐 #00-000’에 카르마 포인트를 ‘100,000’ 부여합니다! ]

나는 계속해서 카르마 포인트를 쏟아부었다.

“내가…… 저들을, 완전히.”

[ 당신의 ‘무용담(XX)’벨덱꿨흐 ‘영벨닯냘흐담(XX)’으로 변벴는냈늅럼흐흐흐니다! ]

풍문에서 무용담으로, 무용담에서 영웅담으로.

“완전히, 되돌릴 수 있게……!”

그렇게 성장한 영웅담에 내가 가진 힘을 모조리 쏟아 낸 순간.

파지직!

파직지지직!

파지지직!

스파크가 겉잡을 수 없이 날뛰던 끝에, 눈부신 빛으로 산개하며 새하얗게 시야를 태워버렸다.

[ 당신의 영벨닯냘흐담(XX)이 당신의 전설에 공명벴녁띄받듬흐흐흐다! ]

마지막으로 떠오른 팝업창.

그와 동시에.

금빛으로 흐르던 망자의 혼들이 산개하는 빛에 파묻혀 형형색색의 보석으로 화했다.

빛나는 별무리처럼 내 주위를 휘감았다.

“……해냈다.”

나는 되돌린 그들을 거두기 위해 떨리는 손을 뻗었다.

[ 당신의 영벨닯냘흐담(XX)이 당신의 전설에 공명벴녁띄받듬흐흐흐다! ]

영웅담의 성장 이후 끝이라고 생각했던 팝업창이 재차 떠올랐다.

[ (!) 당신의 영벨닯냘흐담(XX)이 정베몄냈긍똴흐흐흐 베뭘흐흐식을 되베뭘흐흐니다. ]

[ (!) 당신의 영벨닯냘흐담(XX)이 정베몄냈긍똴흐흐흐 베뭘흐흐식을 되베뭘흐흐니다. ]

[ (!) 당신의 영벨닯냘흐담(XX)이 정베몄냈긍똴흐흐흐 베뭘흐흐식을 되베뭘흐흐니다. ]

쿠우우웅!

쿠쿠우우우우웅!

직후 내용을 해석할 수 없는 오류창들과 함께 폭풍이 휘몰아치듯 귀목 내부의 풍경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

벼락이라도 꽂힌 양 시야가 희게 물든 것도 잠시.

반으로 쪼개진 귀목 사이로 새 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옳거니!”

자청비는 그 앳된 얼굴을 보자마자 제법 짜릿한 기분을 느꼈다.

“해냈구나!”

그녀는 수많은 혼들 사이에 주저앉은 새 왕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보석들로 휘감긴 새 왕은 마치 은하수의 세례라도 받는 듯한 모습이었다.

앳되다 못해 천진하게까지 보이는 어린 왕의 눈이 별빛과 참으로 잘 어울렸다.

자청비가 작게 미소 지었다.

“녀석, 보기보다 뱃심이 좋군.”

실패했다면 그저 아집이었겠으나, 성공했으니 그것은 보기 좋은 뱃심이었다.

무릇 왕이라면 뱃심 좋게 제 뜻을 밀어붙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의 차사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얼굴로 왕을 바라봤지만, 그들과 달리 새 왕과 나눌 짐이 없는 그녀는 시원스레 감탄했다.

모든 죽은 자들을 아끼는 저승의 새로운 왕.

그는 결국 모든 산 자들을 위한 왕으로 군림하게 될 터였다.

“……!”

그런데 아직 던전의 오류는 끝난 게 아니었던 걸까.

쿠우우웅!

쿠우우우웅!

칼날을 닮은 날카로운 바람에 일대가 요동쳤다.

그녀는 다시금 긴장을 품고 주변을 돌아봤다.

“……뭐?”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이게 다 무엇이냐?!”

땅을 뒤덮었던 거대한 뿌리들이 가느다랗게 쪼그라들던 끝에 사라져버렸다.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가 빨려들어 가듯 한데 모여 멀쩡한 집이 되었다.

붉게 얼룩졌던 금줄은 본래의 형태를 되찾았고, 그러다 어느 순간 무언가를 토해냈다.

본래 금줄에 묶여 있던, 그러나 이전에는 본 적 없던 무언가였다.

처음에는 그저 검은 재처럼 흩어져 있던 그것이 반쯤 썩어 문드러진 송장 여럿으로 돌아갔을 때.

“설마, 너 지금 시간을 되돌리고 있는 게냐?!”

그녀는 돌연 벌어진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경악하며 새 왕을 보았다.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인 새 왕은, 본인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멍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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