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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 (4) (72/187)

24장. 귀신의 나무(4)

던전의 보스 귀목이 터주신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솟아오른 나무였다.

차라리 하나의 건축물과도 같은 귀목은 그 자체로 거대한 탑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그것은 나무의 모습을 하고도 짐승처럼 헐떡였다.

놈이 요동칠 때마다 일대를 뒤덮은 뿌리들도 서로 뒤엉킨 뱀처럼 꿈틀거렸다.

금줄에 휘감긴 뿌리들은 쉴 새 없이 꿀렁거리며 뭔가를 빨아들이고 있었는데, 그럴수록 귀목의 외피는 더욱 단단해졌다.

가택신 망령들이 금줄로 재생했듯이 귀목도 금줄로 몸집을 불리는 것이 분명했다.

“확실히 저 금줄도 이상하다.”

귀목을 올려다보며 호구별성이 말했다.

“사악해. 뭔가 지독한 주술이 담긴 게 틀림없어.”

귀목이 두른 금줄에서 무언가 느낀 모양이었다.

“내가 저주굿도 많이 받아먹었잖아. 먹고 동티나 내렸지만. 남 해치는 주술은 딱 봐도 안다.”

굿판을 뛰놀던 역신다운 말이었다.

남을 해친다는 말에 나는 귀목을 주시했다.

살을 에는 한기는 계속해서 선연하게 나를 덮쳐 왔다.

불가살이 던전에서 뼈아프게 나를 짓눌렀던 망자의 한(恨)이었다.

“원래라면 제를 올려서 목신 행세를 하는 망령을 불러내야 했어요.”

차분히 일행에게 말을 꺼냈다.

“다소 과정이 달라졌지만 일단 귀목과 같은 방식으로 공략을 해 보죠.”

귀목의 망령이 눈을 떴으니, 이제 저것을 해치우고 놈이 억압하고 있던 목신을 깨워야 했다.

“귀목을 가르고 그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내부에 갇힌 목신을 구하려면요.”

나는 손에 쥔 검수엽에 힘을 더하며 선언하듯 말했다.

“제가 할게요.”

“꼭 직접 하셔야겠습니까?”

말을 꺼내자마자 강림 형이 인상을 찌푸렸다.

검은 반장갑을 낀 손에 신성을 발한 그가 내 옆으로 한 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명하시면 제가 가서 목신을 꺼내 오겠습니다.”

나를 저 흉특한 귀목 속에 들여보내길 꺼리는 마음이 강하게 느껴졌지만, 나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음, 효율적으로 힘을 쓰려면 역시 제 검수엽으로 검수발아를 쓰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검수엽에 깃든 영웅담 검수발아는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린 업으로 그 힘을 증폭한다.

귀목은 제 몸에 목신을 가두고 위협하고 있으니, 검수발아가 최대로 힘을 발휘할 터였다.

“귀목은 재생 능력이 있으니까 최대한 짧고 굵게 치는 게 좋겠죠.”

반박할 말이 없는지 형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에도 그 고집은 쉽게 꺾이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가 다시 입을 열기 전에 말을 이었다.

“뭐, 형이 제 권능을 믿지 못하시면 어쩔 수 없지만요.”

점점 미간의 골을 좁히던 형이 멈칫했다.

신이 다른 신의 권능을 부정하는 것은 몹시 큰 무례였고, 하물며 나는 이제 형이 모시는 왕이었다.

내가 귀목에 들어가는 걸 막고 싶어도, 감히 내 권능을 못 믿어서 보낼 수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

결국 내게 별다른 대꾸를 못한 형은 대신 새파랗게 날이 선 눈으로 뒤에 선 사라를 노려보았다.

“쳐다보긴. 나라고 대왕이 저리 써먹을 줄 알았겠느냐.”

찍어 내리는 듯한 형의 눈빛에 사라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권능을 들먹여서 아무 말도 못 하게 하는 것은 원래 사라가 먼저 형한테 써먹은 화법이었으니까.

때문에 형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사라를 쏘아보자,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검을 고쳐 잡았다.

좀 미안하지만, 역시 잘 배웠다고 생각이 드는걸.

“제가 귀목을 가르고 안으로 들어가면, 다른 분들은 놈이 저를 삼킨 채로 재생하지 못하게 뿌리랑 금줄을 처리해주세요.”

그들이 귀목의 재생을 막는 사이 나는 던전의 핵을 부수고 목신을 해방시키면 끝이었다.

“형, 엄호해주실 거죠?”

부러 신뢰를 한껏 담은 눈으로 형을 바라보았다.

형의 좁아진 미간은 곧바로 펴지지 못했지만, 그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명대로 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바로 가겠습니다.”

귀목을 향해 발을 굴렀다.

촤아아악!

검을 휘두르자, 내 신성에 공명한 검수엽이 은빛을 발했다.

[ 검수발아(劍樹發芽) ]

타인을 위험에 빠뜨린 자를 벌하는 검수지옥의 영웅담.

서슬 퍼런 칼날의 나무가 귀목의 업을 뚫고 분수처럼 치솟았다.

[ 해당 영웅담에 대한 이해가 완벽합니다! ]

[ 당신의 영웅담이 필드의 카르마에 반응합니다! ]

[ 영웅담의 위력이 1000% 상승합니다! ]

-그아아……아아아……!

칼날나무에 몸이 찢겨나간 귀목이 비명을 질렀다.

죄인을 벌하는 은빛 나무는 고통스럽게 벌어진 귀목의 입마저 찢고 더욱 크고 울창하게 자라났다.

촤아아악!

촤아아아악!

나는 귀목을 갈라낸 칼날나무 사이로 발을 내디뎠다.

귀목 안으로 들어서자 빛을 잃은 시야가 캄캄해졌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곳곳에 물컹한 것이 닿아 와서 생물의 뱃속에 들어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서해 용궁에서 마주쳤던 지옥수만큼이나 기묘한 나무였다.

“……!”

컴컴한 나무 속에서 잠시간 헤매던 도중 붉게 빛나는 보석을 발견했다.

이 던전을 지배하는 법칙의 핵이었다.

곧장 붉은 빛을 향해 나아갔다.

핵은 꼭 말뚝처럼 박혀 있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형태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검은 덩어리를 뚫고 나온 상태였다.

덩어리는 슬라임처럼 흐물흐물했다.

한데 마치 사람을 본떠 만든 것처럼 팔다리 같은 게 늘어져 있었다.

“……설마, 이게 목신인가?”

그래, 의식하고 나니 핵으로 목신을 못 박아 둔 모양새였다.

내심 확신하며 목신에 박힌 핵에 손을 대려는 그때였다.

[ (!) 집합베뀌릴흐 정보가 당벨깰겨긍똴흐흐흐 권능에 반벨덮굶늅럼흐흐흐니다. ]

오류가 섞인 팝업창이 떴다.

확인할 수 있는 문자만으로는 내용을 추측하기가 어려웠다.

“……!”

그런데 그 팝업창을 본 직후.

나는 불현듯 목신이라 여겼던 검은 덩어리에서 익숙함을 감지했다.

하나로 뒤엉켰으되, 사실은 하나가 아닌 무언가.

“……우주퇴적물?”

그 정체를 깨달은 순간이었다.

쿠우우웅!

쿠우우우웅!

주변이 크게 진동했다.

귀목의 내부가 꿀렁거리며 크게 부풀었고, 물컹한 나무의 내벽이 사방에서 기분 나쁘게 나를 죄어 왔다.

“……아.”

살갗에 그 불쾌한 감각이 닿는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일었다.

“이것 전부가…… 우주퇴적물이야.”

귀목의 내부는 전부 시커먼 우주퇴적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거대한 귀목을 이루는 것 자체가 곧 우주퇴적물이었던 것이다.

쿠우웅!

쿠우우웅!

귀목의 내벽은 계속해서 살아 있는 것처럼 요동치며 강하게 죄어들었다.

이대로 이 물컹한 나무의 속살에 삼켜질 것 같은 위기감에 나는 더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재빨리 던전의 핵으로 손을 뻗었다.

그렇게 핵에 손이 닿자마자.

파직!

손끝에서부터 기묘한 스파크가 일었다.

[ (!) 충돌한 지베맴결흐칙이 주도권을 겨베땍땟흐니다. ]

[ (!) 사후벨곗됩흐계(死後밧밗누흐界) ↔ 벨검릴흐후세계(뱁룰록흐後世界) ]

다시금 오류가 섞인 팝업창이 떴다.

법칙의 핵과 내가 가진 사후세계 권능의 주도권 다툼이었다.

두 권능이 공간을 지배하기 위해 맞부딪치기 시작했다.

파지직!

파지지지직!

힘을 더할수록 강력한 스파크가 일었다.

저릿하게 팔을 에는 고통에 나는 입을 앙다물었다.

[ (!) 사벴닯꿨흐세계(死백붰릴흐世界) ↔ 사후벨곗됩흐계(死後밧밗누흐界) ]

계속해서 권능과 권능이 부딪쳤다.

파지직!

파지지직!

내 팔에 오르는 스파크도 더욱 격렬해졌다.

쿠우웅!

그러다 어느 순간 나를 죄던 물컹한 내벽이 새까맣게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흘러내리는 그것이 이번에는 깊은 물처럼 나를 잠식해왔다.

몸을 짓눌러 오는 그 검은 바다에 공포를 느낄 새도 없이.

그저 홍수처럼 밀려드는 감정들 때문에 나는 숨을 삼켰다.

우주퇴적물.

저승으로 가지 못한 영혼들이,

하나의 덩어리로 뒤엉켜버린 혼들이,

파도처럼 내게 밀려들었다.

쉴 새 없이 밀려들어 내게 그들의 생전을 이야기했다.

거칠기 짝이 없는 격랑이 되어 한때는 저들도 살아 있었다며 고함쳤다.

“……아, 아아.”

불가살이 던전에서 마주쳤던 자들이 잇따라 떠올랐다.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던 그들의 절규가 이명처럼 귀를 어지럽혔다.

-사라지고 싶지 않아.

그때는 그저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절규가, 지금 내게 파도치는 고함에 섞여 되씹혔다.

“……그때처럼, 또 그렇게 보낼 순 없어.”

내게 밀려드는 그들에게 말했다.

[ (!) 충돌한 지베맴결흐칙이 주도권을 겨베땍땟흐니다. ]

그들이 내게 밀려드는 와중에도 던전의 핵과 나의 주도권 다툼은 계속되고 있었다.

파지직!

파지지직!

스파크로 경련하는 팔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어떻게 해야.”

내가 가진 사후세계의 권능에 더더욱 신성을 쏟았다.

[ (!) 벨검릴흐후세계(뱁룰록흐後世界) ↔ 사후세법면꿨흐(死後世뱉넹릴흐) ]

그리하여 끝내 내게로 밀려드는 가엾은 혼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을, 가야 할 곳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지?”

그리고.

[ 공간의 주도권이 바뀝니다 : 사후세법면꿨흐(死後世뱉넹릴흐) → 사후세계(死後世界) ]

마침내 귀목의 내부를 지배하는 법칙이 나의 권능으로 바뀌었다.

나를 잠식했던 검은 홍수가, 수많은 혼이 뒤엉킨 우주퇴적물이 나의 권능에 요동치기 시작했다.

한데 얽혀 알아볼 수 없었던 그들의 삶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홀로 남고, 그런 평범한 일상의 장면들이…… 한 장의 사진이 되어 내게로 흘러들었다.

그렇게 사진 한 장, 한 장을 켜켜이 담아낸 사진첩처럼 내 앞에 펼쳐졌다.

“……!”

그 수많은 평생들에 비하면 그저 한순간일 뿐일지라도.

분명하게,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혼이…… 되돌아오고 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 (!) 당벨깬릴흐의 카르마에 따라 ‘풍문(XX)’이 완성베뀌땍귿듬흐흐흐습니다. ]

또다시 오류창이 떴다.

풍문의 완성을 알리는, 그것만큼은 분명하게 읽을 수 있는 오류창이.

[ ‘시스템 벨눴냇번똴흐흐흐 #00-000’ ]

- 분류 : 풍문(XX)

- 내벨닒땟흐 : 사후세계의 법뭘몃반랩뢍멘꽥라닻흐흐 벨뜻굶늅렀렸걷걍벨둣뇩벰룐령놔빎 해체합니다.

효과 : 사후세법면꿨흐의 권능으로 집합된 정베몄냇번륫흐흐흐 해벨멎냈늅럼흐흐흐니다.

내용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풍문.

그럼에도 나는 직감했다.

이 풍문에 우주퇴적물을 원래대로 돌릴 힘이 있음을.

홍수처럼 내게 밀려들던 우주퇴적물이, 하나로 뒤엉켜버린 영혼들이, 가야 할 곳으로 가기 위하여 내게 그러한 신화를 불어넣었음을.

“할 수 있어.”

그리 확신했기에 새로이 생겨난 풍문을 발동했다.

[ (!) 풍문(XX) ‘시스템 벨눴냇번똴흐흐흐 #00-000’이 당벨깰흐흐의 권능에 공명벴녁띄받듬흐흐흐다. ]

파지지직!

파지지지직!

두 팔에 조금 전과는 비교되지 않는 막대한 스파크가 터졌다.

견디지 못한 살갗이 아무렇게나 갈라졌다.

빠르게 맺힌 핏방울이 줄기를 이루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큿…….”

멈추지 않고 우주퇴적물에 손을 뻗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쥐려고 해도 쥘 수 없는 연기처럼 내 손을 빠져나갔다.

파지지직!

그러나 기어이 스파크와 함께 모래알 같은 알갱이들로 뭉치기 시작했다.

그래, 모래알 같은 알갱이.

사금처럼 반짝이는 그것을, 나는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정화한 혼은 원래도 보석처럼 변하곤 했으니까.

“조금만…… 더.”

연기였던 것을 모래처럼 뭉칠 수 있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힘을 더하면 본래의 보석 형태로 정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하면 내 손에 그들을 완전히 거둘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만, 더하면.”

파지지지직!

또 한 번 커진 스파크에 갈라진 살갗이 뒤틀렸다.

흐르던 피는 맺히자마자 증발해버렸다.

쿠우우우웅!

사방이 요동쳤다.

우주퇴적물은 격랑처럼 끊임없이 내게 부딪쳐 왔다.

내 권능으로 그들 모두를 끌어안기 위하여, 나는 거듭 내 풍문에 힘을 더했다.

이제 거의 다 되었다.

아주 조금이면 된다.

이제 정말로, 조금만…… 더 하면.

파지지지지직!

마치 번개가 내려치듯 시야가 하얗게 번쩍이는 사이.

“……대왕님!”

불현듯 강림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

곧이어 단단한 팔에 허리가 붙잡혔다.

생각지도 못한 흐름에 나는 바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를 올려다봤다.

“빨리 이곳에서 나가셔야 합니다.”

형의 얼굴은 차게 굳어 있었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있습니다.”

그가 아직 완전히 돌아가지 못한 그들의 품으로부터, 나를 무자비하게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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