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장. 귀신의 나무(3)
귀목 던전의 공략은 신성한 금줄을 찾아 당산나무에 제를 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집안의 당산이라는 철융신의 금줄을 찾아보자는 호구별성의 말에 따라, 우리는 일단 마을의 집들을 살폈다.
장독대에 금줄을 친 집이라면 철융신의 제단을 의미할 가능성이 컸다.
“한데 이 마을은 정말 텅 비었나 보구나.”
몇 차례 빈집을 지나치며 사라가 말했다.
“마을째 휘말렸다고 하지 않았더냐.”
불가살이 던전에서 만났던 혼들.
이 던전에도 오류가 생겼으니, 어쩌면 마을 사람들 또한 그렇게 되어버렸을지 모른다.
나도 모르게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장군의 부탁과 달리 직접 찾아온 것은 결국 그들이 무사하길 바라서였는데.
“대왕님.”
그때 강림 형이 말했다.
“대문에 금줄이 쳐져 있습니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척 보기에도 다른 집들보다 훨씬 커 보이는 집이 있었다.
“다른 뿌리들과 달리 오방색을 전부 달아놓은 금줄입니다.”
그의 말대로 유독 눈에 띄는 집이었다.
크기뿐 아니라 대문과 벽을 휘감은 금줄이 그랬다.
흰지만 매달아 놓은 마을의 다른 금줄들과 다르게 굵고 화려했다.
높은 담장 위로 드러난 지붕은 푸른 유약을 바른 청기와였다.
“이야, 청기와라면 사치깨나 부리는 지붕이지.”
집을 올려다본 호구별성이 한 소리 했다.
“그래, 딱히 요새 놈들이 사는 집은 아니구나.”
자청비도 말을 보탰다.
볼수록 이질적인 느낌을 풍기는 집은 처음부터 이 마을에 어우러지며 존재해 온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마을이 던전으로 변하며 새로이 안배된 구조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일단 들어가 보죠.”
검수엽을 꺼내 들며 말했다.
대문이 금줄과 나무뿌리로 얽혀 있었다.
들어가기 위해선 일단 저것부터 없애야 했다.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파아아앙!
한발 앞서 검푸른 신성이 번쩍였다.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대왕님.”
발설지옥의 권능으로 대문과 뿌리를 한꺼번에 날려버린 강림 형이 나를 뒤로하며 먼저 발을 내디뎠다.
[ (!) 신목이 낯선 이의 존재를 감지합니다. ]
팝업창이 떴다.
[ (!) 신목이 낯선 이의 존재를 경계합니다. ]
원래라면 금줄을 얻고 제를 준비하기 시작하고부터 떠야 할 팝업창이었다.
올바른 공략법은 신목을 차지한 망령의 방해를 뚫고 제를 올리는 것이니까.
역시 일반적인 귀목 던전과는 형식이 달라졌다.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하며 주변의 기척에 집중했다.
어떤 방식으로 망령이 공격해 올지 모르니 경계해야 했다.
“금줄은 여기 바로 있구나.”
사라가 마당의 장독대를 가리켰다.
금줄이 둘러진 독 위에 맑은 물이 담긴 그릇과 누렇게 붉을 밝힌 초가 서 있었다.
산신령인 철융신에게 치성을 드리는 형태였다.
“일단 금줄부터 챙기겠습니다.”
바로 눈앞에 목표했던 물건이 있었다.
나는 곧바로 장독대의 금줄에 손을 가져갔다.
대문을 두르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방색으로 장식된 금줄이었는데, 손이 닿자마자 희미한 빛을 내며 내게 스며들었다.
[ 당산의 금줄(D) ]
아이템이 된 금줄이 인벤토리에 들어왔다.
던전에서만 사용되는 D등급임을 확인하고 안심하는 것도 잠시.
[ (!) 신목이 낯선 이의 행태에 분노합니다. ]
다시 팝업창이 떴다.
파장창!
동시에 금줄을 둘렀던 장독대가 절로 깨져버렸다.
장독에 담겨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액체가 깨진 파편과 함께 나를 향해 피처럼 터져 나왔다.
“대왕님!”
뒤에 섰던 강림 형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파아아앙!
검푸른 신성이 나를 감싸듯 빛을 발하고, 내게 퍼부어진 것들이 마구 튕겨 나갔다.
촤악!
형이 놓친 파편 몇 개는 내 뺨과 어깨를 짧게 할퀴고 지나갔지만 극히 미미한 상처에 불과했다.
“……아, 깜짝이야.”
손등으로 뺨의 상처를 훔치며 형을 돌아보았다.
사라가 있다고는 하나, 형이 재빨리 막아준 덕에 큰 상처로 번지지 않았다.
눈이 마주친 형에게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제가 좀 조심성이 없었죠?”
금줄은 던전 공략의 핵심 아이템인데.
망령에만 신경 쓰다 트랩을 놓친 것이 겸연쩍었다.
표정을 굳힌 형이 내게 무어라 말을 하려던 찰나.
콰아아아앙!
장독대가 깨진 것이 끝이 아니었는지 깨진 장독대 쪽에서 다시금 굉음이 울렸다.
-그으으……으으으.
가래가 끓는 기묘한 소리를 내며 뭔가가 몸을 일으켰다.
-그으……그으으.
괴물도, 망령도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 형태를 가진…… 새까만 가면으로 얼굴을 덮은 자였다.
손이 보이지 않을 만큼 소매가 긴 두루마기 차림에, 광인처럼 아무렇게나 기른 백발이 휘날렸다.
가면에 대충 뚫린 눈구멍 너머로 빨갛게 달아오른 눈이 귀신의 것처럼 형형했다.
“철융신이잖아?”
그것을 알아본 호구별성이 독기를 뿜었다.
“저거 짝퉁이지?”
그녀가 자청비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지. 그 영감은 지금 그저 하늘만 돌보고 있을 테니.”
자청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집집마다 깃든 가택신들은 진짜 신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보낸 화신들이었다.
수호신의 천명을 받은 진짜 가택신들은 그들의 화신들과 똑같은 위치에서 천계의 천지왕궁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에게 치성을 드리는 자들을 보살피기 위해 대신 똑같이 생긴 화신들을 내려보낸 것이다.
그것이 모든 집들이 저마다 가택신을 모실 수 있는 이유였다.
“그 겁쟁이 영감들이 하늘 문을 걸어 잠그는 것만으로는 안심하지 못하고 가택신들을 닦달했거든.”
자청비가 말을 이었다.
“거 인간 놈들 보살피는 힘이 얼마나 된다고, 그것까지 다 거둬들이라는지.”
아무래도 천계의 가택신들이 화신들을 모두 거두어 이승을 강복(降福)하던 가택신의 가호가 전부 사라진 모양이었다.
하늘의 부귀영화도 마다하고 굶주린 인간들을 보필하는 농경신이 된 자청비에게는 한심해 보일 법도 했다.
“그럼 저건 가택신을 흉내 낸 망령이겠군요.”
가짜 철융신에게 검을 겨누며 말했다.
목신을 억압하고 귀목이 된 망령이니 가택신의 형태로 공격해 오는 것도 납득이 되었다.
쿠우우웅!
그때였다.
쿠우웅!
쿠우우웅!
이번에는 뒤쪽에서 굉음이 울리더니 강림 형이 무너뜨렸던 대문에서 무언가 불쑥 솟아났다.
-그으으……으으.
마찬가지로 괴이한 소리를 내는 어린아이였다.
대문에서 기어 나왔으니 대문을 지키는 문전신 녹두생이일 터였다.
콰아앙!
콰아아앙!
콰앙!
계속해서 연달아 굉음이 쳤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집 전체가 흔들리며 집 안 구석구석에서 가택신의 모습을 뒤집어쓴 망령들이 기어 나왔다.
부엌에서 불을 때는 조왕신, 화려하게 차려입은 측신 정랑각시, 성주단지에 모신 성주신까지.
“아주 다 기어 나오네! 벌써 집 한 채 다 지었다!”
우리를 둘러싸는 망령들을 향해 호구별성이 짙은 독기를 뿜었다.
촤아아악!
나는 제일 먼저 눈앞의 철융신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으으!
소매를 길게 늘어뜨린 철융신의 허리가 대번에 잘려 나갔다.
“……!”
그러나 타격은 잠시뿐.
잘려 나간 철융신의 허리에서 불쑥 금줄이 솟아났다.
촤르륵!
솟아난 금줄은 철융신의 몸을 감싸더니, 이내 놈의 몸을 멀쩡하게 고쳐 놓았다.
“아무래도 집의 터가 놈들을 재생시키는 것 같습니다.”
순식간에 녹두생이와 정랑각시를 날려버린 강림 형은 그들이 철융신과 똑같이 금줄을 휘감은 채 달려드는 것을 보며 말했다.
“뭐, 아무리 가짜 가택신이라도 집이 멀쩡하면 계속 덤벼들 테지.”
조왕신을 베어 낸 자청비도 말을 보탰다.
“집이 문제라는 건가.”
나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놈들이 기어 나온 집을 둘러봤다.
집 안에 깃든 가택신은 그들이 머무는 집이 훼손되면 그 힘을 다하고 떠나는 법이다.
“……그럼 아예 집을 다 부숴버릴까요?”
문득 스치는 생각에 나는 검수엽을 고쳐 잡고 말했다.
“으응? 이걸 한 번에 말이냐?”
무슨 뜻이냐는 듯 자청비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네, 한 번에…… 칼을 잔뜩 쏟아내면 간단할 것 같은데요.”
나는 그녀를 뒤로하며 가볍게 발을 굴렀다.
[ 검수지옥(L) ]
눈부시게 빛나는 은빛의 신성이 시야를 가득히 채웠다.
타인을 위험에 빠뜨린 자를 벌하는 칼날의 숲이 내 손끝에서부터 웅대하게 피어났다.
촤아아악!
촤아아아악!
촤아악!
보는 것만으로도 베여버릴 듯 사늘하게 날이 선 칼날의 나무였다.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은 나무들이 귀신으로 오염된 터를 꿰뚫고 뒤흔들었다.
불경하게 쌓인 담벼락이며, 망령의 치부를 덮고 있던 지붕이 검수지옥의 칼날 앞에 종잇장처럼 갈려 나갔다.
“이야, 새 왕이 얼굴은 순해서는 아주 화끈하구나.”
나를 중심으로 울창하게 드리운 칼날의 숲속에서 자청비가 유쾌하게 말했다.
“역시 재가해서 저승의 국모가 되어보는 것도 재미있으련만.”
이어진 농담에 그저 난감히 웃었을 때였다.
[ (!) 검수벨뜹흐흐옥의 칼날이 대상의 업에 반응벴녁띄받듬흐흐흐다. ]
돌연히 오류 섞인 팝업창이 떴다.
“……?”
촤아악!
촤아아아악!
촤아아악!
이미 한 번 치솟은 칼날의 나무들이 다시 한번 은빛의 신성을 번쩍이면서 더욱 울창하게 몸집을 불렸다.
-그으……으……아아아!
-아아아……아아!
-그아……아아아악!
칼날에 꿰뚫린 가짜 가택신들이 몸부림치며 금줄을 뽑아냈으나, 그마저도 날카로운 칼날나무에 부딪쳐 찢겨 나갈 뿐이었다.
파아앙!
파앙!
파아아아앙!
그렇게 가짜 가택신들을 쥐어짜 내는 와중에도 칼날의 나무는 계속해서 서슬 퍼런 잎사귀와 날카로운 은색 줄기를 더욱 뻗어 냈다.
콰아아아아아앙!
그러고는 어느 순간 폭탄이라도 터지듯 집터를 뒤흔들며 빛으로 산개했다.
흩날리는 칼날의 잎새와 조각 난 금줄이 눈보라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휘몰아쳤다.
“허어.”
은색의 칼날 숲이 순식간에 집 한 채를 갈기갈기 찢어버린 광경을 목도한 사라가 신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흘렸다.
“아주…… 굉장하구나.”
검수지옥을 시전했던 나도 그저 멍하니 숲을 피워 냈던 손을 거두었다.
“……이렇게 강한 스킬이었나?”
뻗었던 내 팔도 어느새 크고 작은 상처로 뒤덮여 있었는데, 이전에 화탕지옥을 증폭시켰던 때처럼 이곳저곳이 갈라지고 터진 모습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때와 달리 몸 전체가 아니라 팔 한쪽만.
“오류창 때문인가?”
멍하니 팔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또 그때처럼 지옥 스킬의 효과가 증폭된 것일까?
……대체 무슨 조건이지?
“대왕님.”
문득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팔의 치료가 필요하실 것 같습니다.”
“아.”
그제야 한발 늦게 살갗이 찢긴 팔에서 통증이 일었다.
울긋불긋한 상처로 얼룩진 팔은 생각보다 타격이 큰지 내 의지와 상관없이 가늘게 경련하고 있었다.
베이고 터진 그 상처는 얼핏 검수지옥에서 찢겨 나간 죄인과도 비슷했다.
……검수지옥의 죄인이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그냥 지나쳤던 팝업창을 곱씹었다.
오류가 섞여 있었지만, 대상의 업에 반응했다는 부분만큼은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타인을 위험에 빠뜨린 자를 벌하는 검수지옥이 이곳에 반응했다는 것일까.
파앙!
고민하는 사이 상처로 얼룩졌던 팔에 색색의 꽃이 피어났다.
“미안하구나. 내 너의 권능에 놀란 나머지 네 몸을 돌보지 못했다.”
사라가 피워 낸 서천의 신성이었다.
상처로 얼룩졌던 팔은 그의 권능으로 금세 회복되었다.
팔을 고쳐준 그가 나를 가볍게 타박했다.
“한데, 너도 몸이 상했으면 말을 해야 하지 않느냐.”
“그, 저도 제가 아픈지 몰라 가지고…….”
내 권능에 내가 놀랐다는 말도 민망해서 말을 흐리는 와중.
쿠우우웅!
쿠우우우우웅!
가루가 되어 무너진 집터가 거듭 크게 흔들렸다.
[ (!) 신목이 낯선 이의 존재에 분노합니다. ]
팝업창이 떴다.
[ (!) 신목의 분노가 터를 흔듭니다. ]
일대가 뒤흔들렸으며.
쿠콰아아앙!
무너진 집터에서 별안간 거대한 나무가 치솟았다.
기둥은 하나의 성이라도 되는 것처럼 굵다랬고, 살아 있는 다리처럼 꿈틀거리는 뿌리에는 두꺼운 금줄까지 칭칭 감긴 채였다.
무엇보다 기괴한 것은 그 거대한 나무에 얼굴이 달렸다는 사실이었다.
작은 눈에 납작한 코, 괴이하게 긴 귀까지 펄럭이고 있었다.
“저 못생긴 건 또 뭐야!”
나무를 올려다본 호구별성이 소리쳤다.
“저놈 귀 좀 봐!”
장승처럼 귀를 늘어뜨린 나무를 가리킨 그녀가 기겁하며 독기를 뿜었다.
“보아하니 터줏대감 같구나.”
사라가 한숨처럼 말했다.
집의 터를 지키는 터주신.
그가 귀목에 씌어 있었다.
당산나무에 제를 올릴 것도 없이, 집을 건드린 것만으로 목신을 억압한 망령을 깨워낸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살갗을 에는 한기에 살짝 몸을 떨었다.
터주신의 모습을 뒤집어쓴 귀신나무에서 무언가 익숙한 것이 느껴졌다.
“……이건, 혼의 느낌인데.”
어쩌면 검수지옥의 신성을 증폭시킨 무언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