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장. 귀신의 나무(2)
자청비.
그녀는 본디 지상에서 태어났으나,
문곡성의 아들 문도령과 혼인하여 하늘에 설 자격을 얻었으며,
특유의 담대함과 뛰어난 능력으로 천계의 반란군을 정벌하고 신의 자리에 올랐다.
천신으로서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신이 된 그녀가 선택한 천명은 한반도의 땅을 풍요롭게 하는 것으로,
불에 달궈진 작두를 타는 시련 끝에 농사를 관장하는 농경신으로 모셔졌다.
“이야! 오랜만이다, 청비야.”
제일 먼저 그녀를 알아본 호구별성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다시 볼 수 있어서 기쁘구나, 별성.”
그녀도 호구별성에게 웃어 보였다.
“네가 잠시 사라졌다고는 들었다만, 그래, 내 당연히 다시 만날 거라 믿었지.”
“그랬어?”
“끈질기기로 정평 난 역병이 어디 그리 쉽게 가시겠느냔 말이야.”
짓궂게 웃으며 덕담 아닌 덕담을 건넨 그녀가 나와 강림 형을 돌아보았다.
“뭐, 새 왕과 고지식한 충신이랑은 벌써 뜨겁게 인사를 나누었고.”
우리와 잠시 손을 섞었던 것도 그저 장난이었음을 말한 뒤엔 마지막으로 뒤에 선 사라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우리 시애비 되실 뻔했던 사라수대왕께서도 그간 안녕히 지내셨는가.”
어째 뭔가 사정이 궁금해지는 인사를 건네며.
“크흠.”
자청비의 인사에 사라는 답지 않게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거, 너는 또 왜 오자마자 3천 년도 더 지난 일을 들추는 게냐.”
뭔가 겸연쩍어하는 것이, 평소의 무던함을 생각하면 꽤나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아, 영원을 사는 신인데 그깟 3천 년이 대수던가?”
그 반응에 자청비가 낄낄 웃으며 받아치는 터라.
나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사라에게 물었다.
“진짜로 시아버지 되실 뻔하셨어요?”
“……음.”
내 물음에 사라는 그게 정말 궁금하냐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리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
“저이가 하늘에 오르기 전에 꽃밭에 들른 적이 있단다.”
무슨 일인가 하니, 자청비가 아직 천신이 되기 전 정인이었던 문도령을 찾아 세상을 떠돌아다닐 때였다.
인간의 몸으로 하늘에 오를 방법을 찾아다니던 중, 하루는 저승의 서천꽃밭까지 오게 되었는데.
그때 마침 서천꽃밭에는 매일 밤 꽃을 망가뜨리는 올빼미가 있어 서천꽃감관 사라가 골머리를 앓던 차였다.
사정을 알게 된 자청비는 기지를 발휘해서 올빼미를 잡아주었다.
대담하게도 꽃을 탐하는 올빼미를 꽃처럼 아름다운 자신의 몸으로 유혹해 그것이 품에 파고들었을 때 그대로 머리를 찔러 죽인 것이다.
몇 날 며칠 골치를 썩인 올빼미를 단번에 잡아준 그녀의 기지에 탄복한 사라는, 이대로 그녀를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제 아들 할락궁이와의 혼인을 제안했다고.
“그런데 나는 그때 남장을 하고 남자 이름을 쓰고 있었단 말이지.”
말을 잇던 자청비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내 분명 사내랍시고 문도령의 이름을 대었는데, 상관없으니 자기 아들과 짝지어달라지 무어냐.”
“아, 여인임을 다 알고 그런 것이다. 내 설마 그것도 못 알아봤겠느냐.”
이야기가 이상해진다고 느꼈는지 사라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대꾸했다.
“내 그래도 하늘의 핏줄이다. 아직 인간 여인의 몸에 머물러 있지만 그 혼에 벌써 하늘의 빛이 보여 잡았을 뿐이다.”
하긴 뭐, 꽃밭을 망치던 올빼미를 단번에 잡아줬으니 며느리로 삼고 싶기도 했겠지.
그래도 자청비가 남장을 했다는 것은 그런 일로 귀찮아지기 싫어서였을 텐데.
3천 년이 지나도 부끄러워할 만했다.
“어라, 근데.”
그러다 문득 스치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할락궁이는 소년신이잖아요.”
초대 꽃감관 사라수대왕이 꼴랑 15년 만에 자리를 넘겨버렸으니, 그는 영원히 열다섯 살로 남게 되었을 텐데.
그러자 사라가 내게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
“뭐, 녀석이 생긴 게 어리니 다 큰 마누라가 곁을 지켜주면 든든하지 않겠느냐.”
“…….”
그 말에 나는 둘만 남을 때마다 아버지 사라를 욕하던 할락궁이를 떠올렸다.
영원히 열다섯인 그는 저승에서 가장 어린 외모를 지닌 신이었다.
신이란 존재는 태생이 신이든, 인간에서 신이 되었든, 신성이 완전히 여무는 시점에서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성장을 멈추고 고정되는 까닭이다.
때문에 할락궁이가 이미 오천 살을 넘긴 것을 알면서도, 그 앳된 얼굴로 백수 아버지를 욕할 때마다 왠지 짠한 마음이 들곤 했다.
그는 일찍 신의 자리에 오른 터라 열다섯의 어린 정신에 아직 다 자라지도 못한 팔로 늘 고된 일을 해야 했으니까.
-하다못해 5년만 더 있다가 은퇴를 했어도 내가 이리 힘들진 않았을 텐데.
-5년도 못 기다린 주제에 5천 년 넘게 놀고먹는 꼴을 보면 아주, 저게 아버지인지 애비인지.
-그렇지 않습니까, 이제연 차사님!
“뭐, 신랑이 좀 어린 것은 나도 별생각 없단다. 물건도 새 물건이 좋고 신랑도 새것이 좋은 게지.”
그런데 자청비는 딱히 그게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아무렇지 않게 말을 보탰다.
“내 팔자가 사나워 꼬마 신랑을 만나기도 전에 띨띨한 서방 놈한테 코가 꿰인 게 아쉬울 따름이야.”
인간 시절부터 정인이었던 남편 문도령을 언급하면서.
“그러고 보니 문도령은 안 보이시네요?”
나는 그제야 그녀가 혼자인 것을 의식하고 물었다.
한반도의 농경신은 부부신으로, 자청비는 언제나 남편 문도령과 함께일 텐데.
“음, 그놈?”
내 물음에 자청비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죽었단다.”
“……네?”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나는 순간 못 알아듣고 그녀를 쳐다봤다.
“글만 붙잡고 살던 백면서생 놈이, 그 허약한 몸으로 마누라 지킨답시고 그대로 죽어버렸어.”
그녀는 계속해서 태연히 말할 뿐이었다.
“안타까워할 것도 없다. 그놈이 죽은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자청비는 신이 되기 전에도 천계 반란군한테 살해당한 문도령을 서천꽃밭의 꽃으로 다시 살린 적이 있었지.
“어차피 그놈은 문곡성(文曲星)의 아들이니, 내 별의 정기를 받아다가 꽃 좀 뿌려주면 다시 살아날 게다.”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녀도 사라처럼 가족을 살릴 생각으로 움직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참에 얼른 재가나 해 볼까?”
그때 자청비가 다시금 짓궂게 말했다.
“새 왕이 이리 젊고 반반한데, 내 저승의 국모가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농담도 잘하셔라.
따라가기 벅찬 농에 그저 멋쩍게 웃었다.
별의 정기로 남편을 살린다던 그녀였다.
말 그대로 하늘의 별도 따 올 만큼 그를 사랑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자청비, 여기는 무슨 일로 왔지?”
그때 이야기를 한참 듣던 강림 형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형의 말대로였다.
문이 닫힌 천계에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그녀가 어쩌다 이곳 던전까지 오게 된 것일까.
“아, 여기 귀목에 볼일이 있거든.”
자청비가 형을 돌아보며 답했다.
그 대답에 한순간 긴장했지만, 그녀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귀목을 키워 낸 흙을 좀 얻어 가려고 왔지.”
그렇다면 우리와 방향은 같되 목적은 다르다는 뜻이었다.
남몰래 작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땅을 풍요롭게 하는 농경신에게 굳이 다른 흙이 필요한 걸까?
“음? 흙이라면 네 힘으로 충분히 만질 수 있지 않더냐?”
“글쎄, 같이 다니는 녀석이 좀 별난 흙이 필요한가 봐.”
같은 의문을 품은 사라의 질문에 자청비가 가볍게 대답했다.
“단군.”
생각지도 못한 이름을 꺼내며.
“내 지금 그 인간 놈의 신단수를 봐주고 있거든.”
“……혹시 천부인에 들어가신 겁니까?”
바로 반응하지 못한 나는 몇 초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
신이 벌써 인간의 전설에 속하게 된 것은 아닌지를.
“아니. 내 어디까지나 상호 동등한 입장에서 힘을 빌려주는 것이다만.”
대답하던 자청비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그래, 내가 인간을 동등하다고 말하는 것부터 세상이 뒤집힐 일이지. 실제로 뒤집혔고.”
그렇게 혼잣말처럼 덧붙이고는, 다시 내게 말했다.
“그래도 놈의 신단수가 언젠가는 하늘에 닿지 않겠더냐. 내 소속이 천신이니 미리 줄을 타서 나쁠 것은 없겠지.”
……자청비를 비롯한 천신들이 단군을 주시하고 있구나.
천부인의 단군으로서 나선 지 15년.
그의 영향력은 인간뿐 아니라 신에게까지 뻗치고 있었다.
“이거 새 왕께서 궁금한 것이 많으신 모양인데.”
말을 잇던 자청비가 내게 다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쨌든 나도 그놈도 비즈니스를 하고 있으니 달리 깊게 말은 못 한단다.”
장난스럽지만 뜻이 분명하게 보이는 눈빛에 나도 입을 다물었다.
자청비가 말을 아끼는 태도 외에도, 당장은 단군을 궁금해하는 것이 조금 피로하게 느껴졌다.
단순히 그가 저 멀리 앞서 나가는 경쟁 상대라서만은 아니었다.
본래 차사가 명부를 찢어준 인간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금기였다.
한 번 마음이 동해 인생에 관여하였으니, 앞으로도 그 삶이 흔들릴 때마다 관여하고 싶어질 것이기에.
……저승이 무너진 마당에, 이제 와서 금기를 어겼다고 벌을 받을 일은 없겠지만.
지난 23년간 일부러 잊으려 했던 남자의 삶을 생각지 못한 형태로 알게 된 것이 마냥 기쁘지는 않았다.
지난 세월 그가 이루어 낸 업적으로 그때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어쩌면 그가 내 가장 큰 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그런 단상이 얽혀서.
“그러는 새 왕은 무슨 일로 왔지?”
자청비 쪽에서도 내게 물었다.
“아, 저는 귀목을 얻으려고 왔습니다. 업경을 만들 목재가 필요하거든요.”
“그래? 그럼 나와 목적이 비슷하구나.”
자청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그럼 잠시 저승과 함께해도 되겠느냐?”
“저야 좋죠.”
나는 냉큼 대답했다.
마침 저승에서도 그녀를 필요로 하던 참이었는데 잘됐다.
“그러면 혹시 일이 끝나고 잠시 저승에 들러주실 수 있을까요?”
“음? 거기는 왜?”
“그게…….”
발설이와 형제들이 시들어버린 사정을 이야기하려다 흘끗 강림 형을 곁눈질했다.
눈이 마주친 형은 새삼 자기 실수를 떠올렸는지 시선이 흔들렸다.
나는 형답지 않은 그 모습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않는 대신 자청비에게 간단히 설명했다.
“저도 기르는 나무가 있는데, 좋은 흙이 필요해서요.”
“그래? 그렇다면 내가 적격이긴 하지.”
자청비가 곧바로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도 미리 꽃밭의 꽃을 얻어 가고 말이다.”
원래도 문도령을 살릴 서천꽃밭의 꽃을 받아 갈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뭐, 당장은 서방 없이 사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농담을 덧붙인 그녀가 문득 다시 강림 형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형을 한 번 훑어본 그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차사님께서는 오늘따라 왠지 더 서늘하신걸?”
“저놈? 원래 사납잖아.”
팔짱을 낀 호구별성이 먼저 대꾸했다.
……아니, 뭐. 형은 호구별성한테는 항상 까칠하긴 하다만.
실수 때문에 민망해하는 게 아니라 기분이 안 좋았던 건가?
딱히 짐작 가는 일이 없어 그를 올려다봤다.
형은 별 대답 없이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날 바라볼 뿐이어서 고개가 기울어지던 때에.
“흐음, 나는 또 내가 장난을 걸어서 마음이 상했나 했지.”
자청비가 재차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까 나와 형을 공격했던 일을 사과하는 것 같았다.
“딱히, 내가 부족했던 거니까.”
한데 이어지는 대답에, 나는 형의 기분이 정말로 가라앉아 있음을 깨달았다.
곧바로 자신이 부족했다는 말이 나온 것을 보면, 형은 마지막 순간 자청비를 놓친 것을 계속 신경 쓰고 있었던 거다.
내가 왕이 된 이후 줄곧 형은 내 안전을 무엇보다 중요시했으니까.
……자청비가 아니라 진짜 적이었을 경우를 떠올렸던 걸까.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또 괜히 가슴이 살짝 답답해졌다.
강박에 가까운 철저함이 나를 위한 것임을 안다.
그럼에도 마냥 당연하게 받기에는, 갑자기 변해버린 관계가 아직은 조금 무거웠다.
“마저 움직이시겠습니까, 대왕님?”
그때 형이 내게 물었다.
“자청비와 인사도 나누셨으니 말입니다.”
“아, 네. 빨리 금줄부터 찾아보죠.”
다시 던전 공략을 이어가겠느냐는 질문에 나도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의 말을 받았다.
“그럼 앞장서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형이 성큼 앞서 나갔다.
“흐음.”
그 모습을 보던 자청비는 이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긴 저놈은 저리 딱딱한 게 또 귀엽지.”
“웩, 갑자기 뭔 소리니, 너는.”
그것만은 못 받아주겠다는 듯 호구별성이 핀잔하자 자청비가 낄낄 웃었다.
“글쎄, 내 요즘 독수공방 신세라 반반한 사내면 눈이 돌아가는 것 아니겠느냐.”
“염병, 뱃가죽이 들러붙어도 먹을 걸 먹어야지.”
이렇게 금방 자청비를 만난 것은 생각지 못한 호재였다.
귀목을 공략하는 일이 보다 수월해지는 것은 물론, 지옥수들도 빨리 고칠 수 있겠지.
두 신이 가볍게 농을 주고받는 것을 뒤로하며, 나도 천천히 형을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