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장. 귀신의 나무(1)
늦은 시간도 아닌데 주변이 어두웠다.
특별히 날이 흐리지 않건만 빛이 부족한 느낌이었다.
차에서 내린 나와 차사들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래, 여기가 귀신 들린 마을이란 말이지.”
귀신 들린 나무로 인해 던전에 삼켜졌다는 마을.
장군이 말이라도 전해달라 부탁한 그곳에, 결국 발을 디뎠다.
마을은 포장되지 않은 투박한 땅에 낡은 집들이 몇 채 모여 있을 뿐인 작은 규모였다.
입구에 선 장승은 목이 부러져 있어 그냥 보기에도 썩 기분 좋은 곳은 아니었다.
듣자 하니 이곳은 모시던 신목에 귀신이 들리면서 마을 전체가 던전이 된 곳으로, 그 여파 탓에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나오지 못했다고 했다.
“흐음, 그래. 확실히 삿된 기운이 느껴지는 땅이구나.”
차에서 내린 사라가 발밑을 훑으며 말했다.
“그런 데다 정작 산이 품고 있어야 할 정기는 없어. 아무것도 키울 수 없는 땅이야.”
서해 용궁에서 봤던 지옥수가 떠올랐다.
이곳의 환경은 용궁의 기운을 빼앗고 오염된 터를 만들었던 기분 나쁜 나무와 유사했다.
“그럼 하필 흑탑의 성역에서 서해 용궁과 비슷한 일이 생겼다는 거네요.”
성역.
성역이란 전설급 각성자가 ‘카르마 포인트’와 ‘신앙’을 지불해서 선포하는 특수 지역이다.
성역을 선포하고 성전을 세우면, 그곳에서 해당 전설에 기도하는 이들로부터 ‘경애’를 얻을 수 있다.
1만의 ‘경애’가 모여 1의 ‘신앙’이 된다.
즉, 성역에 세우는 성전은 결국 전설급 각성자들이 신앙을 모으는 수단이다.
그런데 15년 전 단군이 선포한 ‘홍인인간’ 선언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성역 내에서 성역의 주인 외 전설급 각성자가 힘을 방출할 시 선전포고로 간주한다.
성전을 공격하는 행위는 경쟁자가 신앙을 모으는 일을 무력으로 방해하는 행위라고 분명하게 정의한 것이다.
힘의 사용을 곧 정치적 부담으로 연결시켜 그들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도록.
한반도 전체가 또다시 전쟁에 시달리는 일이 없도록.
그렇다 보니 지금은 전설급 각성자들끼리도 서로의 성역에 관여할 수 없게 되었고, 때로는 이 마을처럼 그것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곳이 흑탑의 성역인 이상 다른 전설급 각성자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음에도 정작 흑탑에서 문제를 외면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마을을 도울 수 있는 건 전설과 관계없는 각성자들뿐이다.
한데 워낙 소규모에 방문객도 거의 없었다면 외부에 알릴 방법이 요원했겠지.
때문에 장군은 내게 부탁한 것이다.
“괜찮겠냐? 하필 또 흑탑 놈들 땅이라니.”
호구별성이 마을 입구에서 멈춰 선 채 물었다.
“그 어린놈이 일부러 이상한 던전으로 보낸 걸 수도 있다며.”
아무래도 흑탑의 성역에서 던전을 찾는 것이 영 찝찝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말에 나는 내게 고개를 숙이던 장군의 얼굴을 잠시 곱씹었다.
-사실 제가 직접적으로 아는 마을은 아니에요.
-그래도 거기 갇혀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계속 기분이 안 좋아서요.
-이상하잖아요. 마을 하나가 사라졌는데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게.
그렇게 절박한 얼굴을 했으면서도, 그 마을과 아무런 연고가 없다고 하던 그를.
-그 사람들이 무사하길 바라는 제가 이상한 걸까요.
-……죄송해요. 저도 직접 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말을 꺼내서.
-그래도 제발, 누군가는 그 사람들을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만약 아이가 절절한 사연을 이야기하며 나를 붙잡았다면 나는 경계를 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사연쯤이야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 얼마든지 꾸며 낼 수 있으니까.
그러나 고개를 숙인 이유가 단지 모르는 이들의 안위를 위해서였을 때.
그리고 그 말에서 위선을 찾지 못했을 때.
나는 기어이 움직이고 말았다.
“……생판 모르는 사람을 위하는 그 마음을 굳이 거짓으로 치부하기 싫더라고요.”
23년 전.
연고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던진 청년을 보았던 그때처럼.
기실 장군의 부탁을 외면하지 못한 이유는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마음이 쓰였다.
“뭐, 거짓말이면 그때 가서 그 녀석을 혼내주면 되니까요.”
그런 생각을 하며 호구별성을 향해 덧붙였다.
괜히 시답잖은 웃음까지 흘리면서.
“어차피 저는 권선과 징악의 신이잖아요.”
“얼씨구, 그러니까 일단 믿고 나쁜 놈이면 지옥 보내겠다 이거네.”
호구별성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팔짱을 꼈다.
“하긴 니 애비도 그러더라. 나쁜 놈이면 갱생할 때까지 지옥 보내면 된다고.”
딱히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투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내 결정에 더 말을 얹지 않았다.
“들어가시겠다면 앞장서겠습니다.”
옆에 선 강림 형이 마을 안쪽을 주시하며 말했다.
달리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업경에 필요한 귀목과 마을 사람들의 안위가 이 너머에 있었다.
***
[ (!) 공간의 지배베멋뇬깬뚜흐흐흐이 바뀝니다. ]
마을의 문턱을 넘어서자 던전을 알리는 팝업창이 떴다.
[ ‘신목이 지키던 마을’에 입장하벨곽땍귀룔흐흐흐니다! ]
- (!) 해당 던전벨덮됩흐 등급은 ‘무용담’입베깩됩흐다.
- 클리어 조건 : 오염된 신목을 정화하벨깰민귁뜁흐흐흐오.
클리어 조건은 오염된 신목의 정화.
일반적인 귀목 던전과 다르지 않은 조건이었다.
다만 역시라고 해야 할까.
팝업창의 상태가 이상했다.
“……이번에도 오류가 섞인 팝업창이구나.”
그나마 클리어 조건은 읽을 수 있는 게 다행이었다.
그것마저 없었으면 아주 난감했을 테니.
“우와, 이게 다 뭐야?”
던전을 둘러보며 호구별성이 눈을 크게 떴다.
“밖에서 볼 때랑 완전히 다른데?”
입구 밖에서도 마을 내부는 볼 수 있었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오자 아예 다른 풍경이 되어 있었다.
정돈되지 않은 흙길에 낡은 집들이 모여 있는 것은 똑같다.
다만 땅이며 건물에 굵직한 나무뿌리가 덩굴처럼 빽빽하게 뒤덮여 있었다.
마을 전체가 거대한 화분이 되었다고 해야 할까.
“금줄도 치렁치렁하고 말이야.”
거슬린다는 듯 그녀가 발밑의 금줄을 발로 툭 찼다.
마을을 뒤덮은 뿌리에는 서낭당에서 볼 법한 굵은 새끼줄이 엮여 있었는데, 하얀 색지를 달아둔 금줄이었다.
“원래 금줄 달아 둔 당산나무 건드리면 아주 재수가 없는 법인데.”
“뭐, 틀린 말은 아니겠네요. 자칫하면 우리도 이 마을처럼 나무한테 잡아먹힐 테니까.”
그녀의 말을 받으며 주변을 살폈다.
“마을 어딘가에 신목이 있을 거예요. 정확히는 귀목이지만.”
신목의 정화는 우선 목신을 기리는 제를 올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깨끗한 금줄을 달아 망가진 서낭당을 복구하고, 당산나무를 위한 제단에 향을 피우면 신목에 깃든 목신이 깨어난다.
그 목신이란 게 사실 신성한 나무를 차지한 망령인지라 재빨리 퇴치해야 한다.
그리하면 망령에게 억압되었던 진짜 목신이 다시 풀려나게 되고, 망령이 들렸던 신목도 정화되는 것이다.
그것이 귀목 던전의 공략법이었다.
일반 던전처럼 보스 몬스터를 퇴치하되, 정해진 방법대로 당산나무에 제를 올려야 한다는 점에서 숨겨진 미션이 있는 셈이다.
그러니 귀목에 깃든 망령의 방해를 피해 무사히 제를 올리는 것이 공략의 첫 번째였다.
“우선 새로운 금줄부터 찾아야 하는데, 보통은 던전마다 다르거든요.”
귀목 던전의 공략법을 되새기며 이제는 던전 그 자체가 되어버린 마을을 둘러봤다.
“여기는 금줄이 어디 있으려나…….”
밖에서 봤을 때는 그저 작은 마을에 불과했건만.
막상 던전이 된 곳에 들어와 보니 몇 배는 넓어 보였다.
여길 다 뒤져서 금줄을 찾고 제를 올리려니 일순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음, 금줄이면 보통 장독대에 걸어 두지.”
듣고 있던 호구별성이 턱을 만지며 대답했다.
“아니면 우물. 근데 우물은 보통 못 쓰는 우물에 걸어 두니까 딱히 제에 쓸 용은 아닌 것 같고.”
무속에서 지극히 모셔 왔던 신답게, 곧바로 쓸모 있는 조언이 이어졌다.
“장독대에는 철융신이 있으니까 따지자면 우물보단 거기가 낫지.”
철융신이라면 장독대를 지키는 가택신의 이름이었다.
가택신이지만 산신이기도 하여 집안의 당산이라 불리는 신이다.
“확실히 철융신의 금줄이라면 당산나무에 제를 올리기 딱이겠네요.”
생각지 못한 큰 도움이었다.
아마 무속을 잘 모르는 헌터였다면 제를 올려야 한다는 것부터 아주 막막했으리라.
새삼 내 옆의 그녀가 신화적 존재라는 걸 실감할 때였다.
파아아앙!
불현듯 발설지옥의 신성이 번쩍였다.
“대왕님, 습격입니다.”
낮은 목소리로 말한 강림 형이 곧바로 내 앞을 가렸다.
파아앙!
다시 한번 검푸른 신성이 빛을 뿜었다.
내게 그 어떤 공격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형이 적을 막아섰다.
“……!”
저승차사 특유의 섬광처럼 빠른 움직임이었다.
한발 늦게, 나는 형과 손을 섞는 적을 마주했다.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였다.
키는 나보다 작았으며 야구 점퍼를 걸친 캐주얼한 차림이었다.
검은 마스크에 볼캡까지 푹 눌러써서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손에 쥔 검으로 그가 검사라는 것만은 알아볼 수 있었다.
파아아앙!
파아아아앙!
그를 상대하며, 강림 형이 연달아 신성을 터트릴 때였다.
“……과연.”
상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왕의 곁을 허락하지 않는 충은 여전하군.”
낮고 허스키하되, 남성의 것으로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
“그래도 여전히 너무 혼자만 짊어지려는 것이 아닌가?”
귀에 와서 달라붙는 듯한 속삭임에 나는 그제야 상대가 여성임을 알았다.
그와 동시에.
펑!
강림 형이 상대하던 적이 난데없이 작은 헝겊 인형으로 변해버렸다.
갑자기 사라진 적에 형이 다급히 뒤돌아 나를 살피려는 찰나.
채애애애앵!
나는 눈 깜짝할 새 휘둘러진 검을 받아쳤다.
내게 달려든 상대를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 갑작스러운 공격 앞에 검수엽부터 뽑아 든 것이다.
“오호.”
검을 부딪친 상대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이거 새 왕의 솜씨도 나쁘지 않구나.”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는 투였다.
채애앵!
채애애애앵!
채애애앵!
거침없이 쏟아지는 공격에 몇 번 더 검을 맞부딪쳤을 때였다.
“검을 휘두르는 실력은 좋다만.”
낮게 속삭인 습격자가 돌연 몇 발자국 몸을 물리고 말했다.
“검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단다.”
더 이상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듯 검을 내리는 대신 곧게 뻗은 검지로 제 목덜미를 가리켜 보이며.
……목?
알 수 없는 행동에 내 목덜미에 손을 가져갔을 때였다.
그제야 목에서 무언가 따끔한 게 느껴졌다.
“……바늘?”
언제 꽂혔는지 모를 바늘이었다.
뭔가에 홀린 듯 그것을 뽑아내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래, 내 그 바늘에 독이라도 발랐으면 어쨌겠느냔 말이다.”
그녀가 비로소 푹 눌러썼던 모자를 벗었다.
“내 서방이라는 놈은 그깟 바늘 한 번 찔렸다고 하늘로 도망도 갔었단다.”
가볍게 벗어던진 모자 아래로 짧게 자른 머리칼과 고운 눈매가 드러났다.
“……어어?!”
그제야 상대를 알아본 호구별성이 반응했다.
“아이고, 청비야! 이게 웬일이야?!”
동시에 나도 멍하니 그녀의 이름을 읊었다.
“……자청비?”
농경신 자청비.
눈이 마주친 그녀가 마스크마저 끌어 내리곤 내게 빙긋 웃어 보였다.
“그래, 새로운 저승의 왕이 이 자청비 님을 뵙는구나.”
자신만만한 얼굴에, 꽤나 독특한 인사를 건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