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장. 의심(2)
서해 용궁에서 가져온 지옥수 씨앗 다섯 개는 천벌과 싸우는 과정에서 발아해 작은 묘목이 되었다.
지금은 서천꽃밭에 뿌리를 내리고 광천못의 물을 마시며 자라고 있었는데, 묘목을 돌보는 것은 다름 아닌 강림 형이었다.
누구보다 시왕지옥의 재건을 고대하는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나무의 상태를 확인하곤 했다.
물론 서천꽃감관 사라도 꽃을 기르는 권능으로 하여금 나무의 상태를 살폈다.
묘목이 무사히 땅에 자리 잡은 것을 보고는 물만 적절히 주면 알아서 자랄 것이라 한마디 남겼을 뿐이지만.
그런 사라에게 강림 형은 일침을 놓았다.
물은 알아서 줄 테니 삿된 것은 나무에 가까이하지 말라면서.
그렇게 나무 돌보미를 자처한 형은 다섯 그루의 나무들 앞에 각각 팻말까지 세워 두었다.
-刀山
-火湯
-寒氷
-劍樹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궁서체로 손수 이름을 새겨 넣은 팻말들.
그중에서도 가장 크고 훌륭한 것은.
-拔舌
바로 우리 발설지옥의 이름이 새겨진 팻말이었다.
다섯 개 모두 흠잡을 곳 없는 필체였지만, 유독 공들인 티가 나는 그 팻말에서 나는 일찌감치 형의 편애를 눈치챘다.
애초에 나도 발설지옥의 차사였던지라 형의 그 편애를 그냥 묵과했다.
사실 팻말만 좀 그런 거지, 형은 모든 지옥수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으니까.
그런데.
“뭐야, 무슨 일이야?!”
난데없이 들린 형의 외침에 우리는 토스트를 먹다 말고 서천꽃밭으로 뛰어갔다.
심상치 않은 외침은 전에 없이 짙은 슬픔으로 차 있었다.
무언가 큰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형의 목소리를 따라 우리는 금세 서천꽃밭 한구석에 다다랐다.
형이 하루에도 몇 번씩 살피는, 지옥수들을 심어 놓은 땅이었다.
팔뚝만 한 묘목들 앞.
묘목에 비하면 지나치게 거대한 강림 형이 굳은 듯이 서 있었다.
“뭔데, 무슨 일인데?”
앞에 나선 호구별성이 먼저 영문을 물었지만.
형은 묘목에 시선이 붙박인 채 창백해진 얼굴로 내게 말했다.
“대왕님.”
다섯 그루의 묘목 중 가운데에 자리한 녀석을 가리키면서.
“발설이가 기력을 잃었습니다.”
“……발설이?”
나는 그 말에 나무들을 내려다봤다.
전체적으로 전에 봤을 때보다 조금 시들해져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운데에 있는 나무는 유독 심했다.
발설이.
유난히 멋들어진 팻말이 붙은 발설지옥의 나무였다.
“허.”
뒤에 선 사라가 턱을 감쌌다.
“물을 너무 많이 준 것 같다만.”
꽃감관답게 그는 나무에 발생한 문제가 무엇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한데 왜 한 녀석만 그리 시들었는지는 모르겠구나.”
사라가 그렇게 의문을 표했을 때였다.
‘발설이’를 보던 형이 흠칫 몸을 떨었다.
“……?”
순간 나는 그의 반응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아니겠지 싶으면서도, 당장 생각나는 원인이 하나 있기는 했다.
“……형, 혹시 발설이한테만 물을 더 줬어요?”
내 추궁 아닌 추궁에 형은 또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고는 서슬 퍼런 평소와 달리 살짝 기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야, 발설이가 맏형이 아닙니까.”
발설이가 맏형이었어?
처음 알게 된 사실에 나는 커다랗고 시든 형과 작고 시든 발설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근데 형, 우리 원래 다섯 번째 지옥이잖아.
순서 바꾸고 싶었어?
“그러게, 내 분명 하루 한 번씩만 주라고 하지 않았더냐.”
상황을 파악한 사라가 쯧쯧 혀를 찼다.
무려 저승의 이등악이 그를 핀잔했음에도 기가 죽은 형은 그저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밥을 많이 먹어야…… 빨리 키가 크는 게 아니었나.”
“염병, 뭔 손주 본 할매처럼 말하고 있어.”
듣고 있던 호구별성도 면박을 주었지만, 형은 저승의 일등악에게마저 아무런 대꾸를 못 하고 고개만 조금 숙였다.
맏형이랍시고 물을 너무 많이 줘서 시들어버린 사태가 어처구니없는 것도 잠시.
이때껏 본 적 없는 형의 풀 죽은 모습에 마음이 쓰여 사라를 돌아봤다.
“그럼 저 나무는 어떡하죠?”
“글쎄다.”
자그마한 묘목 앞으로 다가간 사라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혔다.
“흐음.”
손에 새하얗게 신성을 발한 그는 서천의 신성으로 시든 나무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며 말했다.
“나무 자체는 무사하다. 조금 균형을 잃었을 뿐이야. 나무를 기르려면 물, 흙, 빛 모두가 중요하니 말이다.”
얼굴이 딱히 심각하지는 않은 것이, 정말로 큰 문제는 아닌 모양이었다.
사라의 말에 풀 죽어 있던 강림 형의 얼굴도 다시 화색이 돌았다.
맨날 하는 일이 없다며 사라를 욕해 왔지만, 그래도 꽃나무를 기르는 데는 서천꽃감관의 권능을 믿을 터였다.
“다만 원래대로 되돌리려면 내 힘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구나.”
그런데 사라가 그렇게 말하자.
“힘이 부족하다고?”
화색을 넘어 아예 평소와 같은 얼굴로 돌아온 강림 형이 인상을 썼다.
“그게 꽃감관이 할 말인가?”
“그러는 너는 저승차사라서 아주 꽃나무까지 다 죽여버렸나 보구나.”
시니컬하게 형의 질책을 넘긴 사라가 몸을 일으켰다.
“어쨌든, 균형을 맞추려면 흙을 다루는 권능이 필요하다.”
“흙을 다루는 권능이요?”
그 말에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자청비 내외 말씀이신가요?”
천신 자청비와 남편 문도령.
두 신은 농사를 관장하는 농경신으로, 한반도의 땅을 풍요롭게 만드는 권능이 있었다.
“그래, 그들의 힘을 빌린다면 다시금 나무의 균형을 맞출 수 있을 테지.”
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지금은 천계가 문을 닫은 터라, 그네들이 어딨는지도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그럴 것이다.
자청비 부부는 천신이니 하늘에 머물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게 되면 한동안 나무를 되살리기는 힘들 텐데.
“……허.”
이야기를 들은 강림 형이 인상을 썼다.
당장 발설지옥의 나무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걱정이 될 수밖에 없겠지.
“너희들!”
그가 불현듯 나머지 지옥나무들을 돌아봤다.
“발설이가 기력을 되찾을 때까지 물 한 모금도 못 마실 줄 알아라.”
푸릇하게 솟은 묘목들 위로 형의 냉엄한 일갈이 쏟아졌다.
“아픈 형을 두고 너희들끼리만 살겠다고 끼니를 챙기면 되겠느냐.”
“아주 염병이 하늘을 찌르는구만!”
지켜보던 호구별성이 벌컥 역정을 냈다.
“봐라, 전하! 네 형 놈의 형제애란 저 모양이다. 아주 글러 먹었지!”
그녀가 잔뜩 찡그린 얼굴로 형을 삿대질했다.
그 말에 나는 괜히 머쓱해져 형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묘목들을 내려다보던 형이 고개를 들며 눈이 마주쳤다.
“…….”
잠깐의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에서, 나는 새삼 어제 저승에 돌아온 이후 형과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는 것을 의식했다.
저승에 돌아오는 동안 형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형이 무겁게 느껴진 내가 먼저 형을 피했을 뿐이다.
그런데 하필 호구별성이 형제애를 이야기하는 바람에 괜히 또 신경이 쓰였다.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대왕님.”
형이 먼저 내게 물었다.
나무에 대한 걱정을 덜어서일까.
그는 다시 평소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 평소대로.
두 차사나 나무들을 대할 때와는 다른, 언제나처럼 신하로서의 무게가 실린 태도로.
“……아뇨, 딱히.”
나는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가.
“아, 몸은 완전히 나았어요.”
형이 안부를 묻기 전에 덧붙였다.
내가 아프다고 형이 식음을 전폐하면 곤란하니까, 같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나무들도 괜찮다고 하니, 슬슬 다시 움직여 볼까요?”
그러다가도 새벽까지 고민했던 문제를 곱씹고.
“아, 그 전에 아침은 마저 먹고요.”
순박한 소년의 얼굴을, 다시 한번 떠올리면서.
***
정돈되지 않은 도로 위로 차를 세웠다.
적막한 거리에 우뚝 선 낡은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직한 길드’는 여전히 손님 한 명 없이 삭막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번에도 아무도 없는 건가.
문턱을 넘어서며 썰렁한 사무실을 둘러봤다.
다른 길드원들이 잠시 외출 중이라던 그때처럼 오늘도 인기척이 없다.
“……어어?”
다만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앳된 아르바이트생만은 우리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돌아오셨군요!”
우리를 발견한 장군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그렇게 보내드리고 계속 걱정하고 있었어요.”
우리를 다시 만난 것이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 단추 구멍처럼 작은 눈이 반짝였다.
“귀철 던전은 클리어하신 건가요?”
함박웃음을 짓고서 달려온 그가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무기를 잡았을 때처럼 벌써 커뮤니티에 소식이 전해지기라도 한 걸까.
눈에 띄게 반가워하는 모습은 꼭 우리가 던전을 클리어했음을 이미 짐작한 것처럼 보였다.
“네, 클리어했어요.”
긍정하는 순간 바로 손이라도 잡아 올 듯 가까이 다가온 장군에게서, 나는 한 발 물러서며 대답했다.
“클리어 인증서는 바로 처리해주실 수 있을까요?”
적당히 미소 짓긴 했으나 누가 봐도 선이 명확한 태도일 터였다.
아무런 사담 없이 곧장 꺼낸 본론에 장군은 일순 멈칫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그는 다소 쭈뼛거리면서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크고 넓은 등이 이전보다 조금 작게 보였다.
“금방 해드릴게요.”
조금이지만 분명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는 여전히 온몸으로 제 감정을 드러낼 만큼 솔직했다.
고작 손님이 선을 그었다는 것만으로 쉽게 상처받을 만큼 순진했다.
죄책감과 괴리감이 한꺼번에 피어올랐다.
마음이 불편했다.
그렇지만 모든 이성적 판단을 무시하는 나의 직감을 허투루 넘기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 무엇도 내색하지 않고 장군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실 그 던전에서 사라졌다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자리에 앉은 장군이 먼저 말을 꺼냈다.
“위험한 던전이라는 말씀만 드리고, 그 부분은 미처 알려드리지 않았다는 걸 손님들이 떠나신 후에야 생각해 냈어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무언가 숨겼다는 것을 인정하는 발언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런 곳으로 연결해드려서 죄송해요.”
그럼에도 사과해 오는 목소리는 묵직한 죄악감으로 가득해서, 나는 결국 한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위험한 던전인 건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것이 대화의 끝이었다.
장군은 내 대답에 더는 말을 더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십여 분.
장군이 타자를 치는 소리만이 사무실을 불편하게 울렸다.
그가 다시 내게 온 것은 인증서 발급 절차가 완료되었을 때였다.
그는 내가 앞서 물러섰던 만큼의 거리를 남겨 두고 멈춰선 채 특수 처리된 종이를 내밀었다.
“여기 던전 인증서예요.”
“고맙습니다.”
나는 그렇게만 말하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로써 이곳에서의 용건은 모두 끝났다.
“……귀목 던전은.”
장군이 작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역시 다른 길드에서 찾으시는 거죠.”
처음에 왔을 때 귀목 던전도 함께 언급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네, 그렇게 됐네요.”
인증서를 갈무리하며 긍정했다.
장군은 곧바로 말을 잇지 못한 채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가 무엇을 망설이든.
내겐 그의 말을 기다려줄 이유도, 기다리면서까지 듣고 싶은 말도 없었다.
이만 적당히 인사하고 나가자.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두꺼운 안경 너머로 자그마한 눈이 천천히 접혔다.
희미한 미소를 띤 앳된 얼굴에 나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잘 생각하셨어요. 아무래도 이런 작은 길드에서 찾을 던전은 아니니까요.”
저도 모르게 제 감정을 드러내기만 하던 장군이, 최소한 지금껏 그렇게 보였던 그가, 이번에는 스스로 웃는 얼굴을 꾸며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또 올게요.”
그 말이 최선이었다.
나와 차사들의 생환을 기쁘게 맞아준 어린 아르바이트생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
한데 그 말에 용기라도 얻은 것처럼, 입매를 단단히 한 장군이 돌연 허리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한테서 이미 신뢰를 잃으신 거 알아요. 제 잘못이라는 것도 알고요. 그래도, 그래도…….”
그러고는 머뭇거리는 내내 품고 있었을 게 분명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곳에 던전에 삼켜진 마을이 있어요. 귀신 들린 나무 때문에요.”
절박함을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절대 손님들께 가달라는 말은 아니에요. 그냥, 그렇게 위험한 던전을 클리어하실 정도로 강하시면 분명 다른 강한 분들도 많이 아실 테니까.”
장군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그냥, 누구든지 거기 좀 도와줄 수 없겠냐고 한 번만 전해주세요.”
꾸며 낸 미소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간절하게 나를 보는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붉었다.
말하는 것만으로도 미안하다는 듯이.
하지만 자신은 이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듯이.
“……제발, 말이라도 한 번만.”
그리하여 그 말이 과연 사실일까 의심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사정을 듣게 만드는 그러한 빛을 띠고서.
23장. 의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