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장. 의심(1)
귀철을 얻고 저승에 돌아왔다.
길드에 들르지 않고 곧장 돌아온 것은 강림 형의 고집 때문이었지만, 막상 회복을 위해 누워 있으니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소개해준 게 하필 버그로 왜곡된 던전이라…….”
나는 천천히 떠올렸다.
정직한 길드의 허름한 간판.
직원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낡은 사무실.
앳된 얼굴을 한 아르바이트생 장군.
위험할지도 모른다며 다른 루트를 권유하던 아이의 걱정과 솔직함.
과연 아이는 버그에 대해 몰랐을까.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서 그 던전을 추천했을까.
불편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 한숨만 삼키던 끝에 헌터 전용 단말기를 쥐었다.
바로 커뮤니티에 접속해 귀철 던전을 검색했다.
[정보] 개꿀 던전 추천함(13)
(광산 입구 사진.jpg)
서해 쪽에 오래된 광산 던전ㅇㅇㅇ
귀철이라고 유니크 재료템 노다지임
경매장 검색ㄱ 팔지도 않음 마지막 거래가 작년 16억
몹은 귀신 나옴 사령술사 개꿀ㅋ
〔익명1〕 ㅅㅂ 불가사리 던전이자나 개새끼야
↳〔작성자〕 ㅇㅇ? 불가살이가 머임? 저기 걍 귀신 나오는대?
↳↳〔익명3〕 어그로 먹금ㄱㄱ
↳↳〔익명7〕 작성자놈 은근슬쩍 불가살이 제대로 쓰는거 ㅈㄴ웃기네ㅋㅋㅋㅋㅋ
〔익명2〕 ㅈㄹ 귀철을 누가 씀
〔익명4〕 정보탭에 낚시글 쓰지 마라
〔익명5〕 낚일까봐 진지하게 쓰는데 아는 형 저기서 죽었다
↳〔익명5〕 시신은 못 찾았는데 실종되고 소식끊겼어
↳↳〔익명5〕 그 형도 사령술사고 그때는 그냥 언데드 던전으로 알려졌었는데.. 암튼 저기 가려면 화속은 필수야
〔익명6〕 나 저기 가봤는데 쫌 기분 나쁨
↳〔익명6〕 사람 많이 죽은거 맞는듯 원귀 가득함 울할머니가 무당임
↳〔익명8〕 걍 언데드 나와서 그런거 아님? ㅋㅋㅋㅋㅋ 무당ㅇㅈㄹ 씹오글ㅋㅋㅋㅋㅋ
〔익명3〕 --------어그로 먹금----------
사진을 보니 우리가 갔던 던전이 분명했다.
2주 전에 올라온 이 글이 귀철 던전 키워드의 최신글이었다.
그 외에도 같은 장소를 찍은 사진이 첨부된 게시물은 모두 던전에 도전했던 지인들이 사라졌다는 얘기였다.
커뮤니티까지 알려진 던전은 원래 몹시 위험하거나 별 볼 일 없는 던전이 대부분이다.
애초에 장군이 먼저 언급한 문제이기도 하고, 따라서 그것만으로 그를 의심할 수는 없었다.
“귀철이 나오는 던전은 몇 개 더 있지만, 전부 불가살이 던전보다 훨씬 멀어.”
또한 다른 던전들이라고 해서 딱히 우리가 갔던 던전보다 안전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니 장군도 그저 가까운 던전을 알려줬을 가능성이 크다.
검색을 통해 찾을 수 있는 모든 던전을 알려줄 수도 있었겠지만, 그랬다 한들 나는 아마 가장 가까운 불가살이 던전을 골랐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 일은 공교로운 우연도 뭣도 아닌,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던 사고였다.
최소한 이성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러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건 설명도 증명도 할 수 없는 한 줄기의 직감이었다.
단말기를 끄며 나는 침대 위에서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굳이 찝찝함을 이어갈 필요는 없겠지.”
어쨌든 던전을 나왔으니 장군에게 다시 들러 인증서를 받아 와야 했다.
앉은 자리에서 검색만 해도 찾을 수 있는 정보를 위해 굳이 길드를 찾은 건, 그저 정상적인 방식으로 던전을 클리어했다는 인증서를 위해서였으니까.
다만 내가 그의 말을 선뜻 믿을 수 없게 된 이상 귀목 던전까지 소개받는 건 바람직하지 않았다.
“…….”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문득 짙은 피로감을 느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낡은 사무실에서 우리를 반기던 소년의 천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이제…… 누군가의 호의조차 그대로 믿지 못하게 되었구나.”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49년 만에 인간 사회로 돌아왔다는 실감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아침 식사를 위해 잠옷 차림으로 마당에 나왔을 때였다.
아직 나오지 않은 호구별성과 사라 대신 다른 이가 눈에 띄었다.
왕도깨비 석탈해였다.
일찍부터 하루 일과를 시작한 그의 가신들이 마당 곳곳에서 망치를 두들기는 와중, 그는 아직 식사가 끝나지 않은 듯 혼자 토스트를 먹고 있었다.
다만 옆에는 설계도로 보이는 서류들을 잔뜩 쌓아 놓은 채, 토스트를 먹으면서도 끊임없이 또 새로운 설계도를 그려 내고 있는지라…… 별로 여유로운 모습은 아니었다.
저승에 온 지 일주일이 되었는데도 딱히 쉬는 걸 본 적이 없네.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굉장한 워커홀릭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대왕님.”
눈이 마주친 탈해가 인사했다.
“바삭하게 굽는 게 좋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이놈이 알아서 조절할 겁니다.”
그러더니 높은 발판 위에 올라 열심히 토스트를 굽는 장난감 로봇을 가리켰다.
팔뚝만 한 크기의 작은 로봇은 반짝이는 눈에 네모나게 각진 몸, 등에는 태엽까지 달려 있어서 무척 아기자기한 생김새였다.
다른 로봇들과 달리 말은 못 하는지 그저 고개만 까딱이고는 계속해서 토스트만 구웠다.
“이건 또 처음 보는 녀석이네요.”
왠지 계속 눈길이 가서 물었다.
자기 키만 한 뒤집개로 빵을 굽는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움직일 때도 뭔가 관절이 삐걱거리는 느낌이라서 유난히 더 장난감 같다고 할까.
“네, 제 귀기를 담아 만든 녀석이죠.”
“귀기요?”
그 말에 살짝 놀라 다시 로봇을 살폈다.
듣고 보니 확실히 도깨비 특유의 귀기가 느껴졌다.
원래도 탈해의 로봇은 도깨비불을 동력으로 움직였지만, 이렇게 귀기까지 머금은 로봇은 이게 처음이었다.
“왕도깨비의 기가 담겼으니, 필요하다면 새로운 도깨비로 깨어날 겁니다.”
“어, 그럼 새로운 가신도깨비가 되는 건가요?”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설계도를 그리는 손을 멈추지 않으며 그가 대답했다.
“그것보다는 태자도깨비의 본체로 만들었습니다.”
“태자도깨비?”
문득 이상함을 느껴 다시 물었다.
“그건 아직 한참 남지 않았어요?”
왕도깨비는 천 년에 한 번씩 세대를 교체한다.
스물네 번째 왕도깨비 석탈해가 태어난 지 아직 50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 그의 뒤를 이을 태자도깨비는 한참 후에나 태어날 터였다.
“모든 왕도깨비가 천 년을 채우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이어지는 그의 대답에.
나는 새삼 그가 저리도 일을 놓지 않는 이유를 깨달았다.
“혹시라도 제가 왕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게 된다면, 그 로봇에서 새로운 왕도깨비가 깨어날 겁니다.”
어째서 이렇게나 쫓기듯 살아가는지를.
선대 왕도깨비 함달파의 죽음이 그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를.
“그 로봇은 제가 태자도깨비이던 시절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로봇을 본떠 만든 것이랍니다. 원본은 아직 불을 다루는 게 서툴렀던 제가 홀라당 태워 먹었죠.”
그의 여러 로봇들 중에서 왜 유독 이 녀석만 다른 느낌을 주는지마저도.
“아버지께서는 괜찮다며 웃어넘기셨지만, 언젠가 제가 태자도깨비의 본체를 만든다면 꼭 그 모습으로 만들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그는 다시 설계도를 그리는 것에 집중했다.
제 손으로 직접 풀어놓아야 할 것이 아주 많다는 듯이.
……언제 죽을지 몰라 두려워하는 삶이라.
나는 말없이 탈해를 바라보았다.
가족의 죽음으로 자신마저 죽음에 쫓기게 된 삶.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죽음에 쫓기기 마련이건만, 한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겠다는 강박마저 느껴지는 그 모습은 어쩔 도리가 없이 안타까웠다.
하나 그것이 그 나름의 상처를 치료하는 방식이라면, 내가 무어라 말을 보탤 일은 아닐 터였다.
문득 탈해가 다시 나를 돌아봤다.
“가져다주신 철은 도깨비불로 한창 녹이는 중입니다.”
어제 가져온 귀철 얘기였다.
“상당히 좋은 품질이었죠. 새로운 대왕님께 훌륭한 업경을 만들어드릴 수 있을 것 같다며 벌써 다들 기뻐하고 있습니다.”
가신도깨비들도 함께 재료를 살폈던 모양이었다.
그의 말은 그걸로 끝이어서, 나는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철에서 뭔가 이상한 게 느껴지지는 않던가요?”
“음?”
탈해는 내 말에 고개를 갸웃하더니.
“아뇨, 그냥 평범한 귀철이었습니다.”
딱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런가.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우주퇴적물에서 나온 혼들과 불가살이들은 귀철을 남기지 않았다.
때문에 내가 탈해에게 가져다준 철은 첫 번째 망령에서 나온 귀철이었다.
만약 이 귀철에 그들의 혼이 녹아 있었다면, 아마 나는 나의 업경을 가지고도 제대로 쓰기 힘들었겠지.
“아, 굳이 꼽자면 좀 더 짙은 한이 느껴졌다고 할까요.”
그때 탈해가 마저 말했다.
“업경은 대상의 업을 비추는 거울이니까요. 한이 짙다고 해서 문제 될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던전에서 들었던 그들의 절규가 다시금 귓가를 맴돌았다.
그래, 그랬구나.
혼이 아니라 한.
귀철에 깃든 것이 그들의 한이라면, 나는 그들의 한을 새긴 거울로 악인을 벌할 것이다.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 막 앉았을 때였다.
“전하, 먼저 일어났네?”
“좋은 아침이구나.”
마당으로 나온 호구별성과 사라가 반가운 미소를 띠고 다가왔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마침 토스트를 다 먹은 탈해는 그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산더미 같은 서류를 한 팔에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간밤에 잘 쉬었더냐.”
맞은편에 와서 앉은 사라가 내 안색을 살폈다.
“몸에 별다른 이상은 없고?”
어제저녁 내상을 마저 고쳐주고도 아직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아, 네.”
나는 한껏 태연하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정말로.”
그는 어제 내 상처를 마저 치료하던 중 몸에서 무언가 불순함이 느껴진다는 말을 꺼냈다.
내 몸에 불순한 것이 깃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몸 자체가 이전과 다르게 뒤틀린 듯하다고.
이무기 던전에서도, 불가살이 던전에서도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화탕지옥의 화력을 높였으니 어쩌면 그 흔적이 남은 것일지도 몰랐다.
더욱이, 이 몸은 본신이 아닌 우주질서보존회의 시스템에 따라 제작된 가짜 몸이었으니까.
다만 사라도 그 이상 구체적으로 집어내지는 못해서, 딱히 불편한 점이 없었던 나는 일단 내버려 두기로 한 상태였다.
“보자꾸나.”
그 말과 동시에 내 몸에서 새하얀 꽃잎이 피어났다.
사라가 서천의 신성으로 재차 내 몸을 살피는 것이었다.
노란색 후드티 위로 색색의 꽃잎이 빛을 발했다.
“그래, 오늘은 딱히 이상하지 않구나.”
잠시 후 몸 곳곳에서 은은하게 빛나던 꽃이 천천히 사그라졌다.
꽃을 거둔 사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마음이 좀 놓인 듯 어제보다 한결 나아진 얼굴이었다.
가짜 몸에 정체 모를 오류라도 생겼다가 복구된 걸까.
나는 그 오류를 굳이 들추어내기보다는 그냥 수긍하는 것을 택했다.
“설령 문제가 생겨도 가짜 몸을 벗으면 해결되니까요.”
어쨌든 지금은 괜찮은 모양이고.
나는 내 몫으로 바삭하게 구워진 토스트를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래, 하여튼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영감을 찾든 몸을 벗든 해라.”
옆에서 장난감 로봇이 토스트를 굽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호구별성도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한마디 했다.
“가짜 몸이고 뭐고 네가 잘못되면 강림이 영감 대가리부터 깨버릴 거 아냐.”
뼈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쓱하게 토스트만 꼭꼭 씹었다.
“뭐, 내 머리가 깨지면 알아서 고칠 테니 신경 쓰지 말거라.”
사라의 태연한 대답에 작게 웃음이 샜다.
그저 농담이란 걸 알면서도 어제에 이어 그가 아주 든든했다.
호구별성은 그런 사라를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한 번 흘기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데 강림 이놈은 왜 아직도 안 나와?”
“이 시간에 밥도 안 먹고 갈 데라곤 뻔하지 않느냐.”
“또 나무 보러 갔어?”
한데 사라의 말을 곧장 알아들은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이럴 수가 있나……!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지, 서천꽃밭 방향에서 강림 형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발설아, 고개를 들어라……!
신성이 실리지도 않았는데 일대를 뒤흔드는 비통 어린 목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