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귀신의 철(6)
[ ‘시스템 벨눴냇번똴흐흐흐 #00-000’ ]
- 분류 : 미완벨곗결흐 풍문(XX)
- 내벨닒땟흐 : 사후세계의 법뭘몃반랩뢍멘꽥라닻흐흐 벨뜻굶늅렀렸걷걍벨둣뇩벰룐령놔빎 해체(……)
- 벴닒때력륫흐흐흐 : (!)해당 풍문은 미완벨곗결흐 입니다. 현재 아무런 영향력을 베맏몄늚뙨룩놂걍벨궷됩흐 없습니다.
오류투성이의 팝업창이었다.
새로운 미완성 풍문이 생겼다는 건 이해했다.
한데 대체 어떤 조건으로 생성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풍문이란 각성자의 업적이 이 땅의 새로운 신화로서 영구적인 효과를 남기게 된 것.
우주질서보존회의 시스템에 따라 생성되었으되, 시스템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경우는 없었다.
제대로 읽을 수는 없지만, 이 미완성 풍문의 이름에는 ‘시스템’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그 이질적인 표현만으로도 분명 여느 풍문과 달랐다.
“…….”
물론, 단순히 알 수 없는 오류 탓에 아직 이름이 정제되지 않았을 뿐인지도 모르지만.
생각지 못한 일에 잠시 팝업창을 응시할 때였다.
“역시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는군요.”
안보팀장이 다시 말했다.
“당신네 저승이 제대로 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바람에 영혼들이 하나로 뒤엉켜버렸단 말입니다.”
대놓고 빈정거리는 말이었지만, 내가 집중한 건 하나였다.
영혼들이 하나로 뒤엉켰다는 사실.
저 검은 덩어리들은 결국 인간의 혼이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로 뒤엉켰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
“……혼이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안보팀장이 말을 이었다.
“‘어떤 객체가 쌓아 올린 하나의 인과’입니다.”
지구의 언어가 아닌, 우주질서보존회의 언어로.
“그 하나의 인과가 수도 없이 겹쳐진 것이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사건의 집합체’ 우주인 거죠.”
나는 순간 안쪽이 비치지 않는 새까만 선글라스 너머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다.
착각이 아니었다.
우주의 일부가 변덕처럼 내게 눈높이를 맞추고 있었다.
“다만 우주도 시시각각 불필요한 정보를 여과해야 하기 때문에, 당신네 저승이 만들어졌지요.”
죽음을 통해 기억이라는 불필요한 정보는 날려버리고.
하나의 개체가 평생에 걸쳐 만들어 낸 결과만을 계속 유지하려는 시스템.
그것이 사후세계를 통한 ‘윤회’라고, 그녀는 말했다.
“뭐, 언젠가부터 당신들은 그것을 두고 후생에서라도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고 말하더군요.”
설명을 잇던 안보팀장이 다시금 검은 덩어리…… 우주퇴적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당신네 사후세계가 무너지는 바람에, 우주가 그 넘쳐나는 정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저렇게 뒤섞여버린 겁니다.”
우주퇴적물.
수많은 생이 뒤엉킨,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덩어리.
그녀를 따라 그것을 바라보며 나는 그저 검게만 보였던 덩어리에서 다시 온갖 것들을 마주했다.
여과되지 않은 정보가 뒤엉켰다는 말처럼.
비로소 그것의 모든 것이 새로이 보였다.
기쁨, 슬픔, 분노, 즐거움.
탄생, 성장, 쇠퇴, 손상, 죽음.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왔던 일평생의 시간이.
“그렇게 우주가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주변의 인과마저 집어삼키고 끊임없이 시공간을 왜곡하게 되는 거죠.”
우주퇴적물을 응시하던 안보팀장이 다시 내게 고개를 돌렸다.
“내버려 두면 저것은 결국 이 우주에 ‘발생할 수 없는 사건’을 불러오게 됩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팀장의 뒤에 섰던 우주질서보존회 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주퇴적물 주변으로 폴리스 라인을 설치하고는, 양손에 무언가 푸르스름한 빛을 내며 그것을 둘러쌌다.
“그래서 저희가 이렇게 적절히 처치하는 거죠.”
답이 되었냐는 듯.
말을 마친 안보팀장이 나를 내려다봤다.
“…….”
나는 선글라스에 가려진 그녀의 눈을 마주하다 손끝으로 우주퇴적물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그럼 결국, 당신들이 저들을 데려간다는 겁니까?”
내 물음에 안보팀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저들’이라니요, 선생님.”
아이를 가르치듯 가벼운 목소리.
“‘저것’이겠죠.”
어깨까지 한 번 으쓱인 그녀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설명이 되었다면, 저도 이제 팀원들에게 가 봐야겠군요.”
치지직!
동시에 그녀가 열었던 포털이 노이즈를 일으키며 좀 더 커졌다.
“기껏 열어드린 출구가 닫히기 전에, 이쯤에서 밖으로 나가시는 게 서로 좋지 않을까요.”
빨리 나가지 않으면 문을 닫아버리겠다는 협박이 뒤따랐다.
“…….”
돌아선 안보팀장의 등을 보면서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언제 변덕에 따라 포털이 없어질지 모르는데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단지 혼란스러웠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여기서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이 옳은지를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이제 그만 저승으로 돌아가시지요, 대왕님.”
강림 형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제야 다시 형을 보았다.
대화를 마무리 짓지 못한 채 옆으로 비켜섰던 그의 눈은 아직도 매섭게 날이 서 있었다.
“……네, 귀철은 얻었으니까.”
특별히 무게를 싣지 않았음에도 보는 이로 하여금 살갗을 서늘하게 만드는 시선.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며, 우리가 맨 처음 이곳에 왔던 목적을 되새겼다.
“일단 길드로 돌아가서 던전을 클리어했다는 인증서를…….”
“대왕님.”
형이 내 말을 끊었다.
“저는 저승으로 돌아가셔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건조한 어투로 다시 말하는 목소리는 그저 낮기만 했다.
“우선 돌아가셔서 저 돌팔이가 고치지 못한 내상부터 돌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숨긴다고 숨긴 내상을 꿰뚫어 보고 사라의 도발까지 집어낸 형은, 내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성큼 발을 내디뎠다.
치이이익!
노이즈가 울렸다.
포털 안으로 들어선 형의 모습이 그대로 사라졌다.
“염병, 성질머리하고는.”
팔짱 낀 호구별성이 혀를 찼다.
“기죽지 마라, 전하. 너도 영감도 잘했어. 다치더라도 싸워야 했고, 그렇게 이기고 고쳤으니 됐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
“우리가 괜히 신이야? 저 벽창호만 유난이라니까.”
미간을 좁히고 툴툴대던 호구별성도 곧 강림 형에 이어 포털로 들어갔다.
“……뭐, 그렇다고 나까지 거들면 저 성질 더러운 놈이 아주 지랄을 떨까 봐 말을 아꼈다만.”
그렇게 호구별성도 밖으로 나가자 그제야 사라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래서 내 분명 힘이 모자랄 거라 하지 않았더냐.”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그답지 않게 조금 가라앉은 얼굴이었다.
사라야말로 처음부터 내 상처가 완전히 낫지 않았음을 알았을 테니까.
“대왕, 무릇 왕에게는 제 생각을 배제하고 무조건 명을 따르는 신하가 필요하다.”
그가 내게 말했다.
“그리고 너에게 그 신하는 아마 내가 될 것이다.”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내 부탁을 받았는지를.
“뭐, 이 땅에 충신의 천명을 타고난 놈은 따로 있지만 말이다.”
사라는 농담처럼 가볍게 덧붙이고는, 다시 진중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무조건 네 명을 따를 수 있는 것은, 네가 이미 왕좌의 무게를 알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나른히 잠긴 눈에 서려 있는 수천 년의 현기가 오롯이 나를 비추었다.
“왕의 미덕은 희생으로 완성되지만, 왕의 의무는 자기 목숨의 무게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저승이 무너지던 날, 삼백의 차사가 그들의 왕보다 먼저 쓰러졌던 것이…… 결코 왕이 그들보다 약해서가 아님을, 너도 분명 알 테지.”
“…….”
대답을 기다리듯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잠시 말을 멈추었지만.
나는 쉬이 그의 말을 받지 못했다.
알다마다.
그날, 저승이 무너지던 그날에 나의 형제자매들이 어떤 마음으로 쓰러져 갔는지.
그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저승에 돌아오고부터 줄곧 형이 불편했다.
“답하지 않아도 좋다.”
그래서 대답을 기다리던 사라가 그리 말했을 때.
“네가 몰라서 답하지 않는 게 아니란 걸 알아.”
나는 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형이 나를 염려하는 게 싫어서 사라에게만 말을 꺼냈다지만.
사실 그건 정말로 형을 위했던 게 아니라, 단지 순간의 부담이 싫었던 나를 위해서였다고.
두 차사의 마음을 상하게 한 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었다.
……형이 나를 질책할 만했다.
“마력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다. 돌아가서 상처를 마저 보자꾸나.”
대화를 마무리 지은 사라가 먼저 포털을 넘었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그를 뒤따르지 못했다.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했으면서도, 포털 너머에 있을 얼굴을 아직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뭐해?”
가만히 서 있는 내게 그림 리퍼가 다가와 어깨를 붙잡았다.
“빨리 나가야지. 이제 킹이랑 나만 남았다고.”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그림 리퍼는 과장스러운 태도로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우리 사납고 시커먼 친구는 지금도 안절부절못하고 있을걸? 우리 대왕님 언제 나오지, 왜 안 나오지 그러면서 눈썹을 이렇게 해 가지고.”
“…….”
“하하, 킹이 생각해도 그렇지 않아?”
장난스럽게 찌그러진 얼굴을 마주하자니, 혼자 침울해하는 게 그저 아둔한 짓으로 느껴져서.
나는 결국 그를 따라 그냥 조금 웃고 말았다.
***
치이이익.
그림 리퍼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던전과 연결되었던 포털은 우리가 빠져나온 즉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
나오자마자 강림 형과 눈이 마주쳤지만 애써 피하려 들지는 않았다.
“자, 그러면.”
여전히 내 어깨를 잡은 그림 리퍼가 쾌활하게 말을 꺼냈다.
“던전에서도 나왔겠다, 나는 이쯤에서 작별할까 하는데 어때?”
뜻밖의 말에 나는 바로 그를 돌아봤다.
“벌써 가시려고요?”
그와 계속 함께할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만, 그래도 이렇게 바로 헤어질 거라곤 예상치 못했다.
“저승에서 좀 더 쉬었다 가셔도 되는데.”
“음, 킹의 호의는 고맙지만 나한테 저 던전을 맡겼던 친구들의 정체가 좀 궁금해졌거든.”
“……아.”
분명 평범한 자들은 아닐 테니까.
그림 리퍼로서도 응당 알아볼 필요를 느꼈을 터다.
“그래도 뭐 하는 놈들인지 모르니 조심하시는 게 좋겠어요.”
“뭐, 이미 한 번 사라졌던 몸인데 달리 무서울 게 있겠어?”
“……아니, 그렇게 말하시면 제가 마음이 더 불편하잖아요.”
괜찮을까. 안 그래도 채용 사기(?)까지 당했던 양반인데.
조금 우려가 돼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 걱정해주신다면야, 유럽으로 돌아가기 전에 꼭 다시 찾아뵙겠사옵니다, 폐하.”
한 걸음 물러선 그는 장난스러운 태도로 내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다른 차사들도 차례차례 돌아보았다.
“꽃을 피우는 당신도, 꽃 같은 레이디도, 그리고 우리 고지식한 친구도 다음에 또 보자고.”
한데 그렇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던 그가 불현듯 뭔가를 떠올린 것처럼 강림 형을 가리켰다.
“그런데, 강림.”
벽안의 눈동자가 형의 백발부터 정장, 반장갑과 새카만 구두를 천천히 훑었다.
“혹시 전에도 그 차림을 한 적이 있던가?”
뜬금없는 물음에 강림 형이 눈썹을 굽혔다.
“차림이라니?”
“슈트와 구두 말이야.”
“이러한 의복을 입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줄곧 두루마기였지.”
“그래, 그렇지? 내 분명 보자마자 스타일이 바뀌었다고 말을 했는데.”
뭔가 이상하다는 듯 그림 리퍼가 턱을 매만졌다.
“그런데도 묘하게 그 차림이 낯설지 않아서 말이야.”
의문을 담은 눈이 가늘어졌다.
“마치 과거에 이미 봤던 것처럼.”
미심쩍은 듯 형을 응시하는 그림 리퍼와 달리 형은 여상하게 대답했다.
“뭐, 그렇다면 신통력의 흔적이 아니겠나?”
“신통력?”
“세상이 뒤집힌 후로는 신들도 대다수 신통력을 잃고 천기를 읽기 힘들어졌지만, 본래 신이 미래를 보는 것이 유난한 일은 아니니까.”
“으음, 신통력이라.”
그림 리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아직 석연치는 않지만, 그래도 달리 더 떠오르는 건 없는 모양이었다.
“세상이 뒤집히기 전에 잠깐 자네를 봤을 수도 있겠어.”
어쨌든 볼일은 끝났다는 듯 그는 우릴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든 뒤 등을 돌렸다.
떠나는 그림 리퍼의 뒷모습이 조금씩 멀어져 갔다.
잠시 지켜보던 우리도 이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림 형이 내게 말한 대로, 일단은 저승으로 돌아가기 위해.
22장. 귀신의 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