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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장 (5) (65/187)

22장. 귀신의 철(5)

격통은 찰나였다.

서천의 꽃잎이 새하얗게 빛을 발하며 나를 감쌌다.

눈발처럼 흩날리는 꽃잎에 빨간 핏방울이 섞인 광경이 꿈결처럼 아득했다.

“……하아아.”

숨을 토해 내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상처를 전부 치료하기엔 역시 조금 모자랐다.

자상이 순식간에 사라졌으나, 내상은 아직 남은 듯 몸 안쪽이 묵직하게 아파 왔다.

그래도 버틸 만했다.

약간의 현기증이 일었지만 이무기 때처럼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불가살이를 날려버린 화력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감수할 만했다.

“됐다.”

나는 일행을 돌아봤다.

화력 때문인지 모두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잔열처럼 남은 고통은 내색하지 않은 채 일이 잘 풀린 기쁨만을 전했다.

“성공했어요, 불가살이 잡는 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크고 새까만 것이 훅 시야를 덮쳐 왔다.

“괜찮으십니까, 대왕님.”

말끔히 넘겼던 하얀 머리칼이 다소 흐트러져 있었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두 눈이 내 몸을 훑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셨습니다.”

그 말에 뒤늦게 내 몸을 내려다봤다.

드러난 피부나 옷이 군데군데 붉게 얼룩져 있었다.

상처는 바로 고쳤지만 이미 흘려버린 피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아, 괜찮아요. 바로 나아서.”

나는 오히려 보란 듯이 어깨를 폈다.

어차피 남은 것은 핏자국뿐.

다쳤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으나, 내상은 눈에 띄지 않을 터였다.

“역시 서천꽃밭의 신성을 남겨 두길 잘했죠.”

“…….”

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없이 나를 훑는 시선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이, 낯게 깔린 목소리로 그가 다시 물었다.

“그리 다치실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단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평소보다 날이 선 어투였다.

“제가 들은 것이 틀렸습니까.”

“……형.”

“왜 제게 그런 방식이라 미리 말씀해주지 않으신 겁니까.”

미간을 찌푸린 그가 마저 추궁했다.

“몸이 이리 상하셨잖습니까.”

특별히 언성을 높인 것이 아님에도, 그 안에 담긴 짙은 노여움이 느껴졌다.

칼처럼 살갗을 파고드는 눈빛에 그저 난처하게 그를 올려다봤다.

채 낫지 못한 내상 때문인지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아니, 아니다.

내상 때문이 아니라 그냥 형의 그러한 눈이 불편했다.

그 눈을 보고 싶지 않아서 미리 사라에게 도움을 구한 것이었다.

“형, 저 진짜 괜찮아요.”

불편해서, 나도 모르게 형에게서 한 발 물러서며 대꾸했다.

“괜찮은데, 형이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당신께 화를 내고 있습니까?”

내가 물러선 거리만큼 성큼 다가오며 그가 다시 물었다.

너무 커서 시야를 다 가려버리는 몸집 때문일까.

항상 올려다봐야 했던 그의 검푸른 눈에 천천히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뭣 하는 게냐, 강림.”

그때 사라가 끼어들었다.

“새 왕의 판단이 옳았다. 녀석이 그리하지 않았다면 대체 누가 그것들을 없앴겠느냔 말이다.”

어느새 멎은 채였던 숨을 느리게 내쉬었다.

“그런데 너는 꼭 왕의 결단이 잘못되었다는 듯이 말하는구나.”

팔짱을 낀 사라는 되레 형을 질책하며 겉모습만큼은 전부 회복된 나를 가리켰다.

“내 왕의 뜻대로 서천의 신성도 적절히 쓰지 않았느냐.”

그 말에 형이 곧장 사라를 쏘아보았다.

나를 대할 때와 다르게 확연히 매서워진 얼굴로.

도끼로 찍듯 살벌한 시선에 나는 형이 내게 화를 낸 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정확히는, 나를 대할 때의 그는 화를 억누르고 있었다.

“적절히 썼다?”

“그래.”

얼음장 같은 형의 반문에 사라가 도리어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면 네가 지금 내 권능을 의심하는 게냐?”

“아이구야.”

가만히 지켜보던 호구별성이 앓는 소리를 냈다.

“영감탱이 갑자기 세게 나가네.”

그녀의 말대로 사라의 발언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같은 신이라 해도 상대의 권능을 부정하는 것은 몹시 큰 무례였다.

형이 지금 내 상처가 다 낫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한들, 사라가 저렇게 말한 이상 그것을 들추는 순간 둘의 관계는 몹시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다.

“생불왕께서 내려주신 부활의 권능을 의심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하물며 모든 태어난 것들의 왕, 생불왕 삼신할미의 이름까지 나온다면.

“…….”

그것이 사라의 노림수라는 걸 알아차린 것처럼 형은 사라의 말을 받지 않았다.

대신 차갑게 굳은 얼굴 그대로 내게 시선을 돌렸다.

“대왕님, 앞서 드린 질문에 답해주십시오.”

그는 이대로 사라가 내 행동을 두둔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왜 이런 방식이라고 제게 미리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새파랗게 날이 선 눈이 나를 직시했다.

“저와 달리 저치는 당신의 뜻을 알고 있었는데.”

숨이 턱 막혀 들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에서 보다 선연하게 맺힌 분노가 보였다.

이무기 터에서의 형이 떠올랐다.

통한에 차서 자책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형이.”

침음을 삼키며 탄식인지 변명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형이 알았다면, 막았을 테니까.”

그러나 그 말에 사늘하던 그의 눈은 더없이 매섭게 변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제게 이리 속내를 감추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이어지는 추궁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형제와 군신.

무의식적으로 덮어 두려 했던 불편한 변화가, 끝내 새로이 되새겨졌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부딪치게 되는 걸까.

내 최선의 판단이 또 그를 화나게 만들까.

……형도 그냥, 사라처럼 내 판단을 믿고 따라주면 안 되는 걸까.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고 형을 올려다보았다.

대답을 할 수도, 그의 시선을 피할 수도 없는 그 잠시가 영겁처럼 느껴졌다.

“잠깐, 이쪽부터 봐주시겠습니까?”

그때 뜻밖에도 자리에 없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다소 낮은 톤으로 울리는 여성의 목소리는 이미 몇 번이고 들은 적이 있었다.

“……!”

갑작스러운 등장에 모두가 그쪽을 돌아보았다.

“으음, 무슨 일이지? 공무원 양반이잖아?”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그림 리퍼였다.

하얀 정장에 검은 선글라스.

지구청장과 똑같이 생긴 얼굴에 긴 흉터가 새겨진 그녀는 우주질서보존회 안보팀장 조금희였다.

“당신은 또 어디서 들어온 거야?”

그녀를 알아본 그림 리퍼가 과장된 몸짓으로 좌우를 살폈다.

허공에 뜬 던전의 영향력은 아직도 50%.

우리는 불가살이를 처치하고도 여전히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이 지구에 저희가 출입하지 못할 좌표는 없지요.”

선글라스 아래로 입꼬리를 당기며 안보팀장이 대답했다.

지구의 모든 것들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한, 특유의 재수 없는 태도였다.

치이이익.

뒤이어 허공에 노이즈가 발생하며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찢고 여러 명의 거한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팀장과 똑같이 하얀 정장을 차려입은 우주질서보존회 안보팀이었다.

사라졌던 팀장의 한 팔은 복구되어 있었는데, 그녀를 따르는 팀원들은 반대로 곳곳이 조금씩 부서진 모습이었다.

다른 곳은 해상도가 멀쩡한데 어디 한 군데씩 픽셀 아트처럼 되어 있다고 해야 할까.

원래도 묘하게 이질적인 외계인들이었지만, 지금은 더욱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이 던전에서 버그가 확인되어 출동했습니다.”

안보팀장이 다시 말했다.

“버그요?”

내가 그녀의 말꼬리를 잡아챈 순간이었다.

“…….”

내 앞을 가로막고 섰던 강림 형은 서늘한 눈으로 한 번 나를 내려다보고는 몸을 조금 비켜섰다.

내가 일부러 그녀에게 관심을 돌리려 한다는 걸 형이 모를 리 없었다.

상황이 상황이니 잠시 넘어가 주는 것일 뿐.

그럼에도 남몰래 숨을 길게 몰아쉬며 안보팀장을 바라보았다.

“예, 버그요.”

안보팀장이 마저 설명했다.

“느끼셨겠지만 이 던전에는 법칙의 핵이 없거든요.”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 리퍼가 던전 보스에 해당하는 고승 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진짜 고승이 아니었고 법칙의 핵 또한 가지고 있지 않았다.

“뭐, 던전에 버그가 발생하는 게 특별히 유난하진 않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아예 클리어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문제가 있으니까요.”

“그럼 클리어하지 못하는 던전은 우주질서보존회에서 직접 나서는 건가요?”

버그가 발생한 던전에서 고생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당연히 앞으로도 왕왕 비슷한 상황을 맞닥뜨릴 텐데, 그때마다 우주질서보존회를 호출할 수 있다면…….

“딱히 그러지 않을 이유는 없지요.”

안보팀장이 대답했다.

“저희가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면 말입니다.”

즉 어디까지나 그들의 변덕에 따라 행동한다는 뜻이었다.

하긴, 신화급 던전이었던 저승 던전마저도 십 년이나 방치한 이들 아닌가.

한데 그렇다면.

개중에서도 이렇게 그들이 직접 나서는 기준은 대체 뭘까.

“어쨌든 저희가 왔으니 버그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던전 밖으로 연결된 포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안보팀장이 허공에 손짓했다.

치이이익!

노이즈가 일면서 안쪽이 푸르스름한 터널이 생겨났다.

순식간에 바깥과 연결된 포털을 만들어 낸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자, 이제 나가시면 됩니다.”

몹시도 여유롭고 시원스러운 태도였다.

그렇기에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안보팀장은 이렇게 흔쾌하고도 빠르게 일을 처리해주는 존재가 아니었다.

거기다 손짓 한 번으로 포털을 만들어 낼 정도로 간단한 일이라기엔 출동한 팀원들이 너무 많았다.

“그것 때문에 당신들이 온 건가요?”

포털로 한 발 내딛기 전에 그녀와 팀원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정말 법칙의 핵 하나 때문에 이렇게나 많이?”

의문을 표하면서, 나는 아직도 새까맣게 무너져 있는 던전 한구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니면, 뭔가 다른 일이 더 있는 건가요?”

정체불명의 검은 덩어리를.

그것에서 쏟아져 나온 수많은 영혼을.

던전에서 희생된 이들의 절규를.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정말이지, 참 귀찮게 군다니까.”

안보팀장이 대놓고 나를 빈정거렸다.

그 반응에 새삼 생각했다.

그녀는 정말로 날 싫어한다고.

동시에 이상함을 느꼈다.

그녀는 지구의 모든 것을 하찮게 여기면서 유독 나 하나를 진심으로 싫어하고 있었다.

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 떼 중 어느 한 마리만 콕 집어 싫어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일까.

다 똑같은 개미들인데, 하나만 굳이 싫어한다는 건 뭔가 이상하지 않나.

“예, 사실 저것을 회수하러 왔지요.”

안보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저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녀의 손가락이 정체 모를 그 검은 덩어리를 가리켰다.

“저게 바로 우주 퇴적물입니다.”

선글라스 아래로 보이는 입술은 가볍게 비틀려 있었다.

“사후세계가 붕괴되면서 갈 곳 잃은 영혼들이 존재의 이유를 잃고 하나로 뒤엉켜버린 것 말입니다.”

그 설명이 귀에 와닿는 찰나.

안보팀장의 목소리를 덮듯이 망자들의 절규가 거듭 메아리쳤다.

권능으로 읽어 낸 희생자들의 고통이 재차 생생히 살아났다.

그래, 이제야 저 검은 덩어리에서 기시감을 느꼈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것은 결국 혼의 감각이었다.

망자의 왕에게 전하는 수많은 망자들의 통곡.

가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한 채 부유하는 누군가의 생이었다.

“……저들이, 저승에 가지 못한 혼이라면.”

그렇다면.

그렇다면 마땅히.

“이제라도 제가 저들을 저승에 인도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 (!) 당벨깰흐흐의 카르마에 따베덱릴흐 미완의 ‘풍문(XX)’이 베맏몄궉뜬흐흐흐니다. ]

오류가 섞인 팝업창이 떴다.

미완성 풍문의 발생을 알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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