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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장 (4) (64/187)

22장. 귀신의 철(4)

역신과 사신의 융합 풍문으로 망령들을 물리치는 데 성공한 후.

망령들이 있던 자리에는 정제되지 않은 철광석만이 가득 남았다.

“던전의 패턴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건가.”

찝찝해져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를 덮쳤던 망령들은 모두 사라졌으나, 그것들이 기어 나왔던 검은 덩어리는 아직도 던전의 한구석에서 출렁이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려던 시선이 재차 붙잡혔다.

“저건 대체 뭐지?”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덩어리에 온갖 것이 뒤엉킨 덩어리.

존재하고 있되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

“아…….”

한데 어느 순간 나는 그 새까만 덩어리에서 뭔가를 느꼈다.

정체를 알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것에서, 결코 낯설지 않은 무언가를.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분명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덩어리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미지에 대한 경계와 혐오보다도, 그것이 풍기는 낯설지 않은 뭔가가 나를 이끌었다.

“……!”

그러다 망령들이 남긴 철광석더미에 몸이 스친 순간.

“이건…….”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비로소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십니까, 대왕님.”

지켜보던 강림 형이 내게 다가와서 물었다.

“형, 이거.”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이 철광석들…… 전부 혼이에요.”

그제야 처음 망령들을 베어 낼 때 느꼈던 감각이 곱씹혔다.

찰나에 지나가버려서 깨닫지 못했으나, 그것은 틀림없이 혼의 감각이었다.

망자와 닿을 때마다 내게 밀려들어 오던 그들의 한(恨)이었다.

[ 염라의 권능이 망자의 한을 읽습니다. ]

팝업창이 떴다.

“……!”

철광석에 깃든 망자들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살려, 살려주세요……!

-나가게 해주세요, 제발!

-아이만이라도 내보내주세요, 제발, 제발!

광산에서 일을 하던 젊은 광부, 말라비틀어진 노인, 사지가 문드러진 병자, 갓난아기를 끌어안은 엄마.

저마다 각기 다른 사연의 사람들.

그럼에도 하나같이 내뿜고 있는 짙은 두려움.

-아아, 아아악!

-아, 안 돼, 아아, 아아악!

-아아아악!

처참한 비명 소리.

차례로 목이 잘려 나가는 지옥도.

불길하게 흔들리는 공간.

그리고 읽을 수 없는 불길한 문자들.

……이윽고 희생자들을 삼키고 발동된 거대한 주술.

“살아 있는 사람들을 죽여서 던전의 몬스터로 만들어 냈구나.”

끔찍한 광경에 고개를 저었다.

망자들의 기억이 보인 것은 한순간이었지만, 권능이 끊기고도 그 모든 것이 계속해서 선명하게 되풀이되었다.

“그럼 대체 목적이 뭐지?”

불가살이 던전의 핵심은 귀철이다.

이 던전의 불가살이는 희생된 망자들을 삼키고 귀신의 힘이 깃든 귀철을 만들어 낸다.

“이 많은 귀철로…… 대체 뭘 하려고.”

그때였다.

[ (!) 베껌겨궉둠뢍뭐걍벨덱냈궉둠뢍뭅걍법맏겨깃두룩놉독딩귐뤠벅. ]

갑자기 오류창이 뜨더니.

쿠우우웅!

쿠우우우웅!

일대가 세차게 흔들리면서 폐광이 재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야이씨, 저 시꺼먼 거 또 나온다!”

호구별성이 독기를 뿜으며 앞을 가리켰다.

폐광이 무너진 자리에서 검은 덩어리가 또다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아까랑 똑같아.”

문득 스치는 불길한 예감에 나는 검은 덩어리를 노려보았다.

똑같은 과정.

그러나 이번에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망령들이 아니었다.

코뿔소처럼 뿔이 달린 얼굴에 타오르듯 형형한 눈동자.

강철 같은 털을 뻣뻣하게 세운 불가살이들이었다.

[ (!) ‘폐광산’ 벨덮됩흐 클리어 조건이 해금되었벨까뇩받등렷륑빎! ]

- 클리어 벨득겡렝룃흐흐흐 : 던전의 ‘불가살이’를 베뜹띈긋륫흐흐흐십시오.

팝업창이 떴다.

일부를 읽을 수 없는 오류창이었지만, 불가살이 던전의 클리어 조건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이야아.”

불가살이들을 올려다보며 그림 리퍼가 앓는 소리를 냈다.

“저 친구들이 원래 저렇게 많았었나?”

반년이 넘도록 불가살이를 관리해 왔지만, 그래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처음 나왔던 녀석보다 크구나.”

사라의 말대로였다.

검은 덩어리에서 걸어 나온 불가살이들은 코끼리만 했던 먼저 것보다 절반 이상 컸다.

그에 더해 숫자마저 다섯이나 되었다.

“게다가 저것들, 저 철을 먹으면 자라지 않더냐.”

-쿠오오오!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불가살이들이 일제히 울부짖었다.

놈들은 일대를 전부 씹어 먹을 기세로 주변에 널린 철광석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으아악, 저놈들 더 커진다!”

호구별성이 비명을 내질렀다.

-쿠오오!

-쿠오오오!

놈이 하나뿐이었던 이전과는 속도부터 비교할 수 없었다.

그 짧은 순간 모든 철광석을 씹어 삼킨 불가살이들이 괴성을 지르며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하나하나가 눈 깜짝할 새에 웬만한 빌딩만큼이나 커져 있었다.

“큰일이야. 나는 이제 마력이 없어.”

그림 리퍼가 난처하게 말했다.

“레이디도 마찬가지야. 융합 풍문으로 다 써버렸다고.”

죽음의 신성을 흩뿌리던 그의 손에서는 이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불가살이는 불이 아니면 죽일 수 없어요.”

나는 그에게 대꾸했다.

원래도 우리 중에 화속성 스킬이 있는 것은 나뿐이었다.

그림 리퍼와 호구별성의 마력이 아쉽긴 하지만, 애초에 내 화탕지옥이 아니면 저 불가살이들은 해치울 수 없다.

하지만.

“저것보다 더 작은 걸 하나 처리하는 데만도 마력의 절반을 써야 했는데.”

난감한 마음에 주먹을 쥐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마력이 회복되었다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저것들을 모두 불태우려면 못해도 몇 배는 더 많은 마력이 필요하다.

아니면 아예 화탕지옥의 불길이 훨씬 더 강해지든가.

“……더 강한 불길.”

필연적으로 이무기를 태워버린 불이 떠올랐다.

보통의 화탕지옥보다 훨씬 더 강력했던.

그리하여 계곡의 물을 고갈시키고 바위마저 녹였던 그 백염을, 다시 한번 불러올 수 있다면.

……그래.

그때 내 여러 풍문들이 한데 얽혀 만들어 낸 오류를, 이곳에서 또 한 번 발생시킬 수 있다면.

방법이 떠오르자마자 불가살이들을 돌아보았다.

놈들이 삼킨 철광석은 이 던전에서 희생된 이들의 혼이 담긴 광물이다.

그 카르마를 읽어 내면 지옥 스킬을 증폭시키는 풍문 ‘사필귀정’을 발동할 수 있다.

거기에 검수엽의 검수발아와 화탕지옥 스킬까지 한 번에 발동한다면.

그래.

그리하면 분명, 그때와 똑같은 조건이 충족된다.

가능하다는 보장은 없다.

하나 달리 방법이 없는 지금, 시도할 이유는 충분했다.

“……형!”

결정을 내리고 강림 형을 불렀다.

“예, 대왕님!”

그런데 형이 나를 돌아본 찰나.

나를 직시하는 그의 눈과 마주하며 생각지 못한 문제점을 깨달았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제 권능이 모자라서.

-제가 모자라서…… 또다시, 이런 일이.

이무기 터에서 나의 부상을 자책하던 형의 얼굴.

아프게 곱씹히는 그 얼굴 때문에, 나는 곧바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달싹였다.

화력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더라도 그때처럼 내 몸이 버티지 못할 수 있다.

불가살이들을 상대할 방법이 떠올랐지만, 내가 다칠지도 모른단 걸 솔직히 말할 수가 없었다.

“제가 또 화탕지옥을 써 볼게요.”

잠깐의 머뭇거림 끝에 다시 형에게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나를 짓누르는, 약간의 죄책감을 감추어 내면서.

“형이 저것들 좀 묶어주세요.”

내 말에 잠시 형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는 진중한 얼굴이었으나, 나는 그가 내 힘을 가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보통의 화탕지옥으로는 결코 저것들을 녹일 수 없다는 것 또한, 눈치채고 있으리라.

“혹 힘이 부족해지신다면 바로 물러서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곧 내 명령을 따르는 것을 택했다.

“여럿이라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제가 완전히 놈들을 묶어놓을 때까지 접근하시면 안 됩니다.”

어쩌면 그저 내게서 불가살이들을 떼 놓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지만.

파아아앙!

검푸른 신성이 번쩍였다.

오랏줄을 든 강림 형이 묵직하면서도 빠른 움직임으로 불가살이들 속에 섞여들었다.

“…….”

나는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내가 누구와 무슨 대화를 나누든 내게 집중할 수 없을 만큼, 형이 내게서 충분히 멀어질 때까지.

“……도령님.”

나는 사라에게 다가갔다.

“아직 마력을 사용하지 않으셨죠?”

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힘의 분배를 위해 앞서 그에게는 신성을 가급적 아껴 두라고 말했다.

덕분에 지금 서천꽃밭의 신성은 최대의 회복력을 낼 수 있을 것이다.

“화탕지옥의 화력을 높일 방법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에 사라가 미심쩍다는 듯 눈썹을 굽혔다.

그도 내 화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터였다.

“전에 이무기를 죽였던 화력, 그것을 다시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잠시 나를 내려다보고는, 잠깐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안전한 방법은 아닌가 보구나.”

나지막하되 날카롭게 날이 선 어투로.

“강림 몰래 조용히 와서 말을 꺼내는 것을 보면.”

이렇게 곧장 꿰뚫어 볼 줄 몰라서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때처럼 제 몸이 버티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네, 형한테는 보이고 싶지 않아요.”

나를 내려다보는 신의 눈길에 고개를 조금 숙이면서.

“잠깐의 고통은 감내하겠습니다. 불이 붙으면 제게 꽃을 피워주세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설득할 수 있게 차분히 말을 잇다가, 결국 변명처럼 조그맣게 덧붙였다.

“어차피 상처는 치료해야 하니까.”

“내 꽃이 그 상처를 다 없앨 수 있다는 보장은 있더냐.”

이어지는 물음에는 또 입이 다물렸다.

“그때도 너의 몸을 완전히 고쳐줄 수 없었는데.”

“……달리 방법이 없잖습니까.”

그럼에도 짐짓 힘을 실어 말했다.

“도령님도 그때와 달리 마력을 온전히 가지고 계시니까요. 분명 괜찮을 겁니다.”

사라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 서늘해진 눈으로 나를 응시했지만 끝내 작게 신음하며 고개를 돌렸다.

“너, 아주 나를 못된 놈으로 만드는구나.”

“……죄송합니다.”

“어쩌겠느냐. 누군가는 왕의 명을 따라야 하는 것을.”

이어진 대답에는 작게 안도의 숨이 흘러나왔다.

“어디 한번 뜻대로 해 보거라, 왕이여.”

새삼 그에게는 고마움을 느꼈다.

“내 너의 신하가 되었으니, 서천의 꽃은 오직 네 뜻으로만 피어날 것이다.”

강림 형과는 또 다른, 의지할 수 있는 신으로서 오랫동안 쌓여온 신뢰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파아아앙!

때마침 검푸른 신성이 번쩍였다.

“되었습니다, 대왕님!”

오랏줄로 불가살이들을 묶어낸 강림 형이 소리쳤다.

“그대로 갈게요!”

망설일 것 없이 나는 불가살이들을 향해 도약했다.

[ 화탕지옥(L) ]

스킬을 발동한 즉시 시뻘건 지옥의 불길이 다섯 불가살이들에게 번져 나갔다.

화르르륵!

화르르르륵!

불이 붙은 불가살이들이 잠시 경직했다.

놈들은 괴성을 질러 댔지만, 상대적으로 약한 화력에 확실히 먼저 상대했던 놈보다 더 버티는 모습이었다.

이대로 저 거대한 몸뚱이들을 녹이기엔 요원해 보였다.

그러나.

“……분명하게 느껴져.”

불을 붙인 나는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놈들이 집어삼킨 철광석.

그것에서 발하는 희생자들의 끔찍한 한(恨)을.

제발 이들을 벌해달라는 절규를.

[ (!) 무용담 ‘사필귀정’의 효과로 지옥 스킬의 효과가 200% 상승합니다. ]

화르르르륵!

화르르르르륵!

풍문의 효과로 불가살이들에 붙었던 불이 두 배의 크기로 번졌다.

-쿠오오오!

-쿠오오오오!

오랏줄에 묶인 불가살이들의 괴성이 커졌다.

몸을 뒤틀어 대는 움직임이 거세졌다.

“아직 모자라.”

불타오르는 놈들을 향해 이번에는 검수엽을 휘둘렀다.

[ 검수발아(劍樹發芽) ]

타인을 위험에 빠트린 자를 벌하는 칼날의 영웅담이 불가살이들을 꿰뚫고 발아했다.

[ 해당 영웅담에 대한 이해가 완벽합니다! ]

[ 당신의 영웅담이 대상의 카르마에 반응합니다! ]

[ 영웅담의 위력이 1,000% 상승합니다! ]

죄인을 벌하는 칼날나무가 불가살이에 깃든 업을 삼키고 순식간에 자라났다.

이 칼날의 나무는 불로만 죽일 수 있는 불가살이를 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제발.”

은빛으로 산개하는 칼날나무 속에서 나는 멈추지 않고 화탕에 불길을 더했다.

“……제발, 통해라.”

화르르륵!

화르르르륵!

그렇게 내 모든 마력을 쏟아 낸 순간.

[ (!) 당신의 무용담 ‘사필귀정’이 당신의 영웅담 ‘검수발아’에 반응합니다. ]

기다리던 팝업창이 떴다.

[ (!) 두 카르마가 연쇄적으로 베맏땍긍떪룩놉독딩귐뤠벅(……). ]

[ (!) 법몄뇩렛뒷뢍뭐걍베멋뇬깬뚤뢍뮌걍베맏냇밉뜸렷뤠꽥딩땟흐흐(……). ]

읽을 수 없는 오류창.

그리고.

화르르륵!

화르르르륵!

시뻘겋게 타오르던 지옥의 불길이 순백의 장벽으로 화했다.

-쿠오오오!

-쿠오오오오오!

새하얀 불의 장벽은 발버둥 치는 불가살이들을 가뿐하게 삼켰다.

이무기 터에서와 마찬가지였다.

공간 전체를 하얗게 둘러싼 거대한 화마.

눈부시게 타오르는 불꽃의 기세는 일대를 전부 녹여버릴 듯 몹시도 강렬했다.

“……해냈다.”

희열에 휩싸인 것도 잠시.

[ (!) 벨댕굶깝룃뒝멂긺베뗬때렛됩뒝륜긋벨겠목흐(……) ]

[ (!) 법뭘몃반랩뢍뮌걍벴뇟때뱅릅렸건꽹럇간겨극딥롼렐독딩귐뤠벅(……) ]

[ (!) 벨댕굶깝룃뒝먕랖벨겟곈꽥롤덖먈뱅(……) ]

무수한 오류창이 뜨면서 내 몸에 스파크가 일었다.

파아아아악!

전신에 이리저리 스파크가 터질 때마다 눈앞이 빨갛게 점철됐다.

“……아으윽!”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숨을 삼킬 때였다.

“대왕님!”

온몸이 터져 나가는 격통 속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꽂혀 옴과 함께.

파아아앙!

새하얗게 만개한 서천의 꽃잎이 시야를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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