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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장 (3) (63/187)

22장. 귀신의 철(3)

우리는 결국 상평통보 2만 냥에 착취당하던 그림 리퍼와 함께 던전을 나가기로 했다.

“원래라면 보스를 쓰러트리고 법칙의 핵을 파괴해야 하거든요.”

허공에는 아직도 법칙의 영향력을 의미하는 ‘50%’가 그대로 떠 있었다.

보스와 손을 잡았으니 혹시나 해서 들어왔던 길을 살펴봤지만 헛수고였다.

던전을 조작할 줄 아는 놈들이니, 이런 부분에선 더 철저했겠지.

“그런데 보스 역할을 했던 그림 리퍼에게는 핵이 없었죠. 그럼 다른 곳에 있을 확률이 높아요.”

말하다 보니 막막해져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하 도시처럼 넓은 폐광에서 어떻게 핵을 찾아야 할까.

던전의 클리어 조건은 ‘불가살이를 막으시오’ 그대로였다.

그 불가살이는 이미 해치운 지 오래인데도.

“으음,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숨겨진 곳이라면 짐작이 가는 게 있긴 해.”

그때 그림 리퍼가 말했다.

“지나다닐 때마다 유독 꺼림칙한 곳이 있었거든.”

그렇다면 한번 가 봐도 될 터였다.

우리는 일단 그림 리퍼가 안내하는 쪽으로 향했다.

그곳은 광산 깊숙이, 버려진 연장들과 바퀴 빠진 수레 따위가 쌓여 있는 어느 구석이었다.

“……!”

그림 리퍼를 뒤따르던 차사들이 동시에 주변을 살폈다.

“이야, 이건 확실히 뭔가 어질어질한데?”

“그래, 이 부분만 유독 기운이 아주 꼬여 있구나.”

호구별성과 사라가 번갈아 한마디씩 했다.

“탯줄을 끊으시면 대왕님께서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옆에 선 강림 형이 내게 말했다.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우주의 이치를 읽게 되실 테니까요.”

아무래도 나는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도사들이 주술로 우주의 이치를 비트는 것도, 결국 그것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어쨌든 여기에 뭔가 다른 게 있단 건가.

천천히 끄덕이며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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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안간 팝업창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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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수 없는 오류창이 연달아 뜨더니.

쿠우웅!

쿠우우웅!

곧이어 일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사방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요동쳤다.

모래성이 허물어지듯 폐광산의 안쪽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고는 그 틈에서 새까만 슬라임 같은 덩어리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뭐야, 저거?!”

깜짝 놀란 호구별성이 독기를 뿜었다.

“염병, 뭐 저렇게 잡된 게 다 있어?”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 거대한 덩어리를 주시했다.

그저 검은 것이 아니라 차라리 무(無)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한데 무(無)에 가까운 그것은, 모순적이게도 온갖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분명 비어 있다.

그러면서도 가득 차 있다.

그런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덩어리였다.

“아.”

그런데 그 정체불명의 덩어리에서 돌연 불길한 것들이 한꺼번에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망령이다……!”

조금 전에 봤던 목 없는 망령들이었다.

덩어리에서 완전히 몸이 빠져나온 그것들은 음산한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수가 너무 많았다.

하나하나 비틀거리며 느릿하게 움직이는데도 순식간에 우리 주변을 빽빽하게 둘러쌌다.

‘53%’

‘67%’

‘89%’

동시에 50%까지 떨어졌던 법칙의 영향력이 다시 차올랐다.

‘128%’

‘397%’

‘918%’

‘2,478%’

법칙의 영향력은 본래 100%을 넘어설 수 없다.

고장 난 계기판도 아니고,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수치였다.

“야 씨, 쟤네 덤벼든다!”

호구별성의 외침을 신호탄으로 삼은 것처럼 빽빽하게 늘어선 망령들이 일제히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촤아아아악!

무슨 일인지 제대로 파악할 새도 없이 검수엽을 휘둘렀다.

파아앙!

파아아앙!

뒤에선 강림 형이 발설지옥의 신성으로 주변의 망령들을 한 번에 날려버렸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깐뿐.

망령들은 금세 다시 우리를 둘러쌌다.

몰려오는 놈들을 마주하자니, 꼭 게임 오버 직전의 디펜스 게임에 갇힌 기분이었다.

촤아아악!

촤아아아악!

모두와 등을 맞댄 채 쉴 새 없이 검수엽을 휘둘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먼저 나왔던 망령들처럼 아주 약한 데다가, 2800% 이상 치솟았던 법칙의 영향력이 다시 조금씩 떨어지고 있다는 것.

영향력이 떨어진다는 건 더는 새로운 망령이 추가되지 않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다 한들 이대로 계속하기에 무리가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 정도 숫자면 모기라고 해도 잡다 지쳐서 나가떨어질 것 같았다.

“이대로 가면 끝이 없겠는데?”

새까만 죽음의 신성을 모래처럼 흩뿌리며 그림 리퍼가 말했다.

“역시 한꺼번에 치는 게 좋겠어.”

마치 꼭 방법이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뭔가 다른 수가 있어요?”

달려드는 망령들을 베어 내며 그에게 물었다.

“음, 거기 레이디께서 도와주신다면?”

뜻밖에도 생각지 못한 답이 돌아왔다.

“뭐? 나?”

독기를 뿜어내던 호구별성이 이쪽을 돌아봤다.

한창 힘을 쓰고 있는 그녀의 두 눈은 검게 물든 역안이 되어 있었다.

“마침 사신과 역신이 한자리에 있으니까요.”

검은 신성을 뿌리던 그림 리퍼가 그녀에게 윙크를 했다.

“융합 풍문이라고 혹시 들어보셨나?”

“융합 풍문?”

무슨 뜻이냐며 되물었지만,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호구별성에게 다가갔다.

“중세 유럽에는 죽음의 무도라는 게 있었지.”

죽음의 무도란 교회 묘지에서 단체로 춤을 추던 것을 말한다.

흑사병이 창궐하던 시절, 죽음과 함께 춤을 추면 망자와 교감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된 문화였다.

회화로 표현된 죽음의 무도는 보통 해골의 형태로 그려진 사신과 손을 잡고 춤을 추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어, 잠깐.

사신이 춤을 춘다고?

“고아한 역병의 현신이시여, 이 죽음과 함께 어울려 주시겠습니까?”

호구별성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춘 그림 리퍼가 우아하게 스텝을 밟았다.

“으응?”

얼떨결에 이끌려 간 호구별성이 영문 모르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 (!) 대상의 카르마에 따라 ‘풍문(E)’이 발생합니다. ]

팝업창이 뜨면서 두 신을 중심으로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이 번져 나갔다.

아니, 정확히는…… 익숙한 죽음과 역병의 기운이 한데 얽혀, 난생처음 접하는 불길하면서도 폭발적인 신성이 되어서.

“망령들이 움직이지 않는구나.”

사라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망령들은 뭔가를 감지한 듯 주춤거리며 물러서고 있었다.

“자, 한 곡 추실까요?”

다시 한번 호구별성의 손등에 입을 맞춘 그림 리퍼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어, 어? 뭐 하는 건데?”

호구별성은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그림 리퍼의 두툼한 팔이 부드럽게 허리를 감싸자 금세 눈을 가늘게 뜨며 웃음 지었다.

“뭐, 반반하니까 봐줄까?”

빙긋 웃은 그녀가 그의 스텝에 맞추어 몸을 움직였다.

“춤이라면 나도 자신 있지.”

우아하게 뻗은 그녀의 팔다리가 리듬에 맞춰 섬세한 곡선을 그려 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붉은 치맛단도 아름답게 흔들렸다.

“굿판을 뛰어다닌 게 벌써 삼천 년이 되어 가거든.”

동방의 역신과 서방의 사신이 함께 자아내는 춤사위.

그것은 무척 묘한 춤이었다.

그림 리퍼의 춤은 분명 서양의 왈츠를 닮아 있었고, 호구별성의 춤은 그녀의 말대로 어딘가 무당의 굿을 연상시켰다.

도무지 섞일 수 없을 것 같은 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러웠다.

역병의 몸짓에 죽음이 발을 맞추는, 그 지독하면서도 불길한 조화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끔찍한 광경이 다 있나!”

지켜보던 강림 형이 통탄스럽게 외치며 손을 떨었다.

“사신이 돼서…… 역신과…… 그거를, 그렇게 잡다니……!”

그때 마침 리듬을 탄 호구별성이 좀 더 농밀한 몸짓으로 그림 리퍼에게 밀착했다.

즐겁다는 듯 붉게 상기된 얼굴로, 그녀가 그의 귓가에 무어라 야릇하게 속살거렸다.

“……!”

하필 그 광경을 정면에서 목격한 강림 형이 헛구역질하며 고개를 돌렸다.

[ (!) 대상의 카르마에 따라 ‘풍문(E)’이 완성되었습니다. ]

두 신의 춤이 한창 무르익으면서 또다시 팝업창이 떴다.

[ ‘죽음의 무도’ ]

- 분류 : 풍문(E)

- 내용 : 역병이 죽음과 손을 맞잡았으니, 그것이 죽음의 무도였다.

- 효과 : (!) 해당 풍문은 융합 풍문입니다. 역신과 사신의 조화로 일대에 죽음을 내립니다.

융합 풍문.

나로서는 처음 접하는 풍문이었다.

조건을 보니 역신과 사신이 함께 만들어 내는 풍문 같았다.

그런데 효과가 ‘일대에 죽음을 내린다’라니.

대체 얼마나 큰 위력이길래……?

“오호.”

지켜보던 사라가 눈을 빛냈다.

“둘 모두 신성이 막대해지는구나.”

그의 말처럼, 호구별성과 그림 리퍼에게서는 평소보다 훨씬 짙은 역병과 죽음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이야, 이거 신기하네.”

춤을 추던 호구별성이 그림 리퍼와 맞잡은 제 손을 들어 보였다.

“몸이 바뀌고 있는데?”

인간의 것과 다를 바 없던 그녀의 몸이 돌연 안개로 변모했다.

암녹색의 신성이 기체로 화한 그 모습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역병을 형상화한 것 같았다.

“자, 이제 이 낫에 깃들어 주시지요. 역신이시여.”

변한 것은 호구별성뿐만이 아니었다.

그림 리퍼는 어느새 인간의 모습을 벗고 검은 로브를 걸친 악마의 형상으로 돌아가 있었다.

모래알 같은 검은 신성을 흩뿌리던 손에는 인간을 추수하던 거대한 낫이 들린 채였다.

“좋아, 마음껏 날뛰어 보라고.”

역병 그 자체로 화한 호구별성이 그림 리퍼의 목에 두 팔을 휘감았다.

신의 형태로 빚어진 안개가 악마의 등에 휘광처럼 떠 있었다.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Darling.”

목에 감긴 호구별성의 가느다란 팔에 살짝 뺨을 부비며, 그림 리퍼가 손에 들린 대낫을 휘둘렀다.

촤아아아아악!

그의 말대로 죽음을 휘두르는 것은 단 한 번이었다.

검은 반원을 그리는 대낫에서 죽음의 신성이 폭발적으로 뻗어 나왔다.

그 막대한 신성이 살갗에 닿는 순간, 나는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섬뜩함을 느꼈다.

그 잠깐의 섬뜩함이, 우리를 둘러싼 망령들에게는 온몸을 찢어 갈기는 칼바람이 되었다.

“……우와.”

엄청난 광경에 나는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일대에 죽음을 내린다는 그 설명처럼, 단 한 번의 휘두름에 모든 망령이 사라졌다.

“이렇게 강력한 풍문이라니.”

다만 효과는 정말로 한 번뿐인지, 역병과 악마의 모습이 되었던 호구별성과 그림 리퍼는 금세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긴, 이렇게 강력한데 지속 시간마저 길면 그거야말로 진짜 사기지.

“이번 한 번만 쓰기엔 너무 아까운데.”

어쩐지 아쉬워져서 두 신을 바라보았다.

죽음의 무도는 분명 지금 우리가 쓸 수 있는 풍문 중에서 가장 강력한 풍문이었다.

사신과 역신이 조건이니까, 이대로 그림 리퍼와 헤어지면 아마 다시는…….

“……잠깐.”

문득 스치는 생각에 나는 강림 형을 돌아보았다.

“정말 별꼴을 다 보는군!”

아주 끔찍한 것을 봤다는 듯 그들을 등지고 선 형이 잔뜩 일그러진 낯으로 깊게 침음했다.

“그래, 사신과 역신.”

……그거, 강림차사랑 호구별성도 가능한 거 아니야?

“형.”

더 생각하지 않고 나는 강림 형을 불렀다.

“……?”

그새 얼굴이 조금 수척해진 형이 나를 돌아보았다.

호구별성이 춤추는 걸 보는 게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던 듯하지만,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형, 왕의 명령이면 뭐든 따르는 것 맞죠?”

“……예?”

내 물음에 무언가 이상을 감지한 듯 형이 눈썹을 굽혔다.

“모름지기 훌륭한 왕이 되시려거든 결코 신하의 충정을 시험해서는…….”

“됐고 정말 뭐든 따르는 거 맞죠?”

말을 자르고 재차 물었더니, 어명이라면 지옥까지 쫓아 들어가는 충신이 결국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일단 명하시면 따르든지 자결하든지 할 테니 뜻대로 하시지요.”

어쨌든 한다는 뜻이었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그럼 됐어요.”

머지않은 미래에 두 차사가 손을 맞잡고 적들을 해치우는 광경을 떠올리며, 나는 형의 우직한 충심에 미리 감동했다.

좋아, 좋아.

나 혼자만 알고 있기 아까우니까, 나중에 사라한테만 슬쩍 말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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