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귀신의 철(2)
불가살이 던전의 보스, 고승.
그런데 우리가 마주한 고승은 보통의 고승과 달랐다.
그는 뜻밖에도 금발에 벽안을 가진 백인이었으며, 무엇보다…….
“못 보던 사이 스타일이 많이 달라졌는데, 강림?”
대체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다만, 우리 중에 강림 형을 콕 집어서 아는 척을 하고 있었다.
“형, 저…… 사람 알아요?”
저걸 사람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목소리를 낮춰 형에게 물었다.
“저도 처음 보는 자입니다만.”
그런데 형도 미심쩍다는 듯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응? 왜 그런 표정이지?”
우리의 반응이 영 탐탁지 않자 고승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아하! 내가 그새 살이 너무 쪄서 못 알아보나?”
그가 불현듯 과장된 몸짓으로 삿갓을 벗어 던졌다.
그러고는 붉은 기가 도는 흰 피부에 밝은 금발, 유리알 같은 벽안을 과시하듯 드러냈다.
강림 형만큼이나 큰 체격에 조각처럼 깊은 아이홀의 미남자.
50년 전 던전이 열린 후 해외로 가는 길이 막혔기 때문에 한반도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어진 젊은 외국인이었다.
두 팔을 크게 벌린 그가 강림 형에게 계속해서 반갑게 말을 걸었다.
“나야, 그림 리퍼!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백 년은 족히 넘었지?”
……그림 리퍼?
생각지 못한 이름에 나는 눈을 끔뻑였다.
그림 리퍼라면…… 서양의 저승사자잖아?
“그림 리퍼?”
강림 형이 그제야 눈을 크게 뜨며 반색했다.
“이런, 정말로 자네인가?”
반가운 지인을 만난 것처럼 형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혈색이 몰라보게 좋아졌군!”
“뭐, 옛날의 샤프함은 다소 사라지긴 했지.”
악수를 나눈 그림 리퍼가 쾌활하게 웃어 보였다.
“그새 몸무게가 0.1t은 늘었을걸?”
어…… 그러니까, 저 양반이 정말로 그림 리퍼라는 말이지?
뼈밖에 없는 몸에 검은 로브를 걸친 서양의 사신.
사람을 추수하는 거대한 낫이 시그니처인 그 양반 말이야.
그런데…… 살이 쪘다고?
스치는 의문에 나는 멍하니 그림 리퍼를 올려다봤다.
살이…… 어떻게 찌지?
아니, 그러니까 살이 찌려면 장기가 음식물을 흡수해서…… 잉여 칼로리가, 체지방이 축적돼서…….
그림 리퍼는 뼈밖에 없는데…… 대체 어떻게 살이……?
“…….”
의식의 흐름대로 궁금해하다가, 그냥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신화가 현실이 된 세계가 아니었던가.
한반도의 신들은 대부분 인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인지라 가짜 몸에 현신해도 딱히 겉모습이 바뀌지 않지만.
그림 리퍼처럼 독특한 외형의 신들은 좀 더 인간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야, 그러니까 저 양놈도 저승사자라고?”
호구별성이 흥미롭다는 듯 그림 리퍼를 훑어보았다.
“흐음. 네가 서방의 사신과 알고 지내는 줄은 몰랐구나, 강림.”
사정이 궁금한지 사라도 강림 형을 곁눈질했다.
그 시선에 형이 말을 꺼냈다.
“개화기 때 저 친구가 한반도에 건너온 적이 있습니다.”
때는 19세기 후반, 근대화의 파도가 휘몰아치던 격변의 시대.
서방의 어느 선교사가 젊은 나이에 그만 한반도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어쨌든 이 땅에서 사람이 죽은 것이었으니, 자연히 우리 차사들이 그 혼을 수거하러 갔는데.
마찬가지로 서방의 사신이었던 그림 리퍼도 그의 혼을 수거하기 위해 친히 한반도까지 왔던 것이다.
그렇게 마주친 강림차사와 그림 리퍼는, 과연 누가 이 선교사를 데려가야 하는 지로 시비가 붙었고.
그것은 곧 동서양의 자존심을 건 싸움으로 번져 두 사신이 사흘 밤낮을 박 터지게 겨뤘다고 했다.
“……그래서 누가 이겼어요?”
듣다가 궁금해서 물었더니, 강림 형과 그림 리퍼가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벌써 두 세기가 지난 일임에도 여전히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한창 싸우던 와중에 갑자기 날아온 가브리엘이 선교사는 자기네 담당이라며 데려갔습니다.”
“Fucking, 반박할 수 없는 논리였지!”
어, 그러게.
듣고 보니 그렇다.
나는 그들의 대답에 멍청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튼 그렇게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다툰 정으로(?) 그림 리퍼가 다시 유럽으로 돌아갈 무렵에는 두 사신이 제법 막역한 사이가 되어 있었는데.
언제 한번 또 보자고 했으나, 영원의 세월을 사는 신들인지라 이백 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서야 다시 마주친 것이라고 했다.
“뭐, 조선에 왔으니 또 보겠거니 했다만. 그래도 여기서 볼 줄은 몰랐군, 강림.”
대충의 이야기를 끝낸 그림 리퍼가 우리를 돌아봤다.
“그런데…… 이쪽은 다 조선의 사신들인가?”
이제야 우리에게도 관심이 생기는지.
“이 레이디는 또 누구시지?”
그러니까, 정확히는 우리 중에서도 유독 호구별성만 골라서.
“아까부터 몹시 감미로운 페스트가 느껴지는데, 그대의 것이 맞으신지요?”
역병의 기운에 이끌린 듯, 호구별성에게 다가간 그가 그녀의 하얀 손을 쥐며 물었다.
그림 리퍼의 상징인 대낫은 사실 중세 유럽에 흑사병이 번진 이후로 만들어진 신화였으니까.
그림 리퍼는 본디 등불을 들고 조용히 망자를 인도하는 신이었다.
한데 14세기 유럽에 흑사병이 돌면서 마치 낫으로 곡식을 베어내듯 우수수 망자의 목을 추수한다고 하여 지금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다고.
결국 그가 사신으로서 맹위를 떨치게 된 것은 유럽에 퍼진 역병 때문이었으니, 한반도의 역신 호구별성에게도 절로 호감을 느낀 것일 터였다.
뭐, 인간 입장에서는 굉장히 섬뜩한 호감이겠지만.
“페스트?”
그녀도 딱히 그가 싫지만은 않은지, 호구별성이 그림 리퍼의 손을 마다하지 않고 되물었다.
“아~ 흑사병?”
맞잡은 손에서 암녹색의 독기를 피워 내며 그녀가 짓궂게 웃어 보였다.
“왜? 걸리게 해줄까?”
그 말에 그림 리퍼가 즐겁다는 듯 반달처럼 눈을 휘었다.
“살면서 받아온 유혹 중에 가장 치명적인 유혹이군요, Honey.”
“이런, 도저히 못 봐주겠군.”
지켜보던 강림 형이 파르르 눈썹을 떨었다.
“사신이 역신을 기꺼워하다니. 역시 서방의 것들은 꼭 상종하기 싫은 구석이 있단 말이지.”
어째 그대로 두면 꼰대에 이어 21세기 위정척사파로 변모할 기세였다.
“저기, 그런데 그림 리퍼.”
나는 그림 리퍼에게 말을 걸었다.
어쨌든 그가 던전의 보스 고승이 아니라 서방의 사신 그림 리퍼였으며, 강림 형과는 안면이 있는 데다가 우리에게 딱히 적의가 없다는 것은 알았으나.
그렇다면 외국의 신이 대체 무슨 이유로 한반도의 던전에 나타난 것인지를 알아야 했으니까.
“음? 그러고 보니 이쪽은 꽤나 어려 보이는데.”
그제야 그림 리퍼가 나를 돌아보았다.
“조선의 사신은 어린애도 있나 보지?”
“아니, 그분께는 제대로 예의를 갖춰주길 바란다.”
강림 형이 끼어들었다.
“저승의 염라대왕님이시니까.”
“왕?”
그 말에 그림 리퍼가 조금 놀라워했다.
“오, 그럼 이쪽이 자네가 모신다던 사신 왕인가?”
반응을 보니 이전에는 우리 대왕님을 뵌 적이 없던 모양이었다.
하긴, 한반도까지 왔어도 저승이 아니면 대왕님들과 마주칠 일은 없었을 터다.
“너무 젊은데. 차라리 막냇동생이라고 하면 믿겠군.”
“뭐,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죠.”
딱히 틀린 말은 아닌지라 그저 머쓱하게 웃어넘기려는데.
“이거 재밌는데.”
현기가 깃든 푸른 눈이 오롯이 나를 담았다.
“그냥 얼굴만 어린 게 아니라, 그 혼에 깃든 세월도 딱히 인간과 다를 바 없어 보이거늘.”
아무래도 아직 탯줄을 끊지 않은 내 혼의 격을 바로 알아본 듯했다.
새삼 신화적 존재라는 게 느껴지는 눈빛이랄까.
“서쪽에서 온 그림 리퍼라고 하옵니다, 폐하.”
나를 살피던 그가 별안간 고상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가벼운 것 같으면서도 절도 있는 몸짓.
거기다 폐하라는 호칭이 갑작스럽고도 낯간지러워서, 나는 재빨리 그를 만류했다.
“아니, 그렇게 말을 높이실 건 없고요. 그냥 편하게 대해주시면 돼요.”
“뭐, 그리 말씀하신다면 따르겠사옵니다만. 저 고지식한 친구가 불편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고개를 든 그림 리퍼가 능청스럽게 웃었다.
진심으로 몸을 낮췄다기보다는 원래부터 장난기 많은 성격인 듯했다.
강림 형이 예의를 갖춰달라고 했으니 한 번은 맞춰준 것도 있을 테고.
“그런데 한반도는 어쩐 일이세요?”
다시 돌아가서 물었다.
헌터 시대 이후 해외로 가는 길이 막혔기 때문에 한반도에서는 외국인도 보기 드물어진 상태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외국의 신이 나타나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음~ 유럽이 망했거든.”
내 물음에 그가 다시 가벼운 반말 투로 대답했다.
“종말 신화가 실현되어버렸어.”
종말 신화라.
하긴 유럽에는 여러 가지 신화가 있었지.
개중에는 라그나로크 같은 유명한 종말 신화도 있고.
“그럼 여기는 종말 신화를 피하러 오신 건가요?”
“아니? 나도 그때 유럽이랑 같이 종말을 맞았는데?”
“……예?”
뭔가 되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데?
“이유는 모르겠다만, 죽었다가 눈을 뜨니 조선이었지.”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나는 자연히 이전에 ‘야마라자’를 깨우려던 박수무당을 떠올렸다.
그때 그는 내 방해로 야마를 깨우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어쩌면 누군가는 또 이렇게 다른 신을 깨우는 데 성공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 혹시 누가 당신을 깨웠는지는 아시나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눈 떠보니 그냥 반영구빙의체가 보여서 현신한 거라.”
반영구빙의체라.
가짜 몸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유럽이 종말하기 전에 우주 신화 대통합 시범 사업에 제대로 참여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던 중 종말 신화에 휘말려 소멸했음에도, 어찌 된 영문인지 한반도에서 다시 깨어난 거고.
……이거 어째, 말을 나눌수록 의문만 쌓이는 것 같다만.
“그럼 여기서는 뭘 하고 계셨던 거예요?”
“음, 조선에서 깨어나긴 했는데 아무래도 연고 없는 곳에서 살기가 쉽지 않았거든. 돈도 필요하고.”
그건 그렇지. 현신하면 인간처럼 밥도 먹고 잠도 자야 하니까.
한반도의 신인 우리야 저승에 머물면 됐지만, 달리 갈 곳이 없는 그는 정말로 무일푼 인간이나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런 와중에 숙식 제공되는 일자리를 준다잖아. 그래서 잠시 여기서 일하고 있었어.”
“일이요?”
“그래, 여기 망령들이 잔뜩 있잖아? 그 망령을 삼키는 요괴도 기르고, 뭐. 겸사겸사 여러 일들.”
딱히 이상한 말은 아니었다.
우리도 인간 헌터 행세를 하며 던전에 온 차였으니까.
그림 리퍼도 정체를 숨기고 인간들의 의뢰를 받으며 살아온 것일 테지.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럼 이 던전이 당신을 고용한 누군가의 영역이란 뜻이군요.”
벌써 수년째 그냥 방치된 던전이었다.
그렇다면 그림 리퍼를 고용한 이들은 일부러 아무도 찾지 않는 던전을 골랐던 것일까?
이무기 터나 폐교 던전처럼 던전의 법칙을 조작하려고?
……그래,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어째서 제대로 읽을 수 없는 오류창이 뜬 건지.
대체 왜 보통의 불가살이 던전과 다른 형태의 망령이 끼어 있었는지.
그림 리퍼의 고용주들이 뭔가 조화를 부린 것이다.
“그러는 너희는 무슨 일로 여기 온 거지?”
그쪽에서도 무언가를 눈치챈 듯 이번에는 그림 리퍼가 사정을 물어 왔다.
이 조작된 던전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다만 우리는 던전의 핵을 부수고 귀철을 가져가야 했다.
즉, 우리는 결국 그림 리퍼의 고용주와 부딪치게 될 터였다.
“그림 리퍼 당신은.”
나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맡은 일이 정확히 뭔가요?”
내 뜻을 알아들었는지, 그림 리퍼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외부인이 들어오면 제거하라는 말은 있었지.”
사신답게 어느새 은근한 죽음의 기운이 풍겼다.
“반년이 넘게 아무도 안 오던 차였지만.”
그 말에 잠시 그림 리퍼를 응시했다.
그가 풍기는 죽음의 기운은 저승의 것과 비슷하면서도 좀 더 날것의 섬뜩함이 배어 있었다.
우리가 왕과 차사라는, 인간 사회와 유사하게 정제된 죽음이라면.
날카로운 대낫에 악마의 형상을 닮은 그는, 인간은 어찌할 수 없는 대역병이란 재앙 앞에 오직 죽음에 대한 두려움만으로 빚어진 신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신화적 존재인 그와 적대하고 싶지 않았다.
“뭐, 좀 곤란하긴 했어. 그 요괴를 돌보는 것도 내 일이었는데 너희가 없애버렸거든.”
그리 말하면서도 그는 딱히 곤란한 얼굴이 아니었다.
단적으로 말해 구슬리면 이쪽으로 넘어올 것 같았다.
“결국 당신이 여기서 일하는 것은 돈 때문이라고 했죠.”
“그렇지?”
“그럼 우리가 더 큰 보수로 당신을 다시 고용하면 될까요?”
“오, 그건 너무 상도덕이 없지 않나?”
그림 리퍼가 능청스럽게 빙글거렸다.
“하지만 죽음이 어디 산 자들의 뜻대로 움직이겠어?”
다행히 그를 고용한 인간들에게 별다른 신의는 없는 모양이었다.
최소 반년 이상 폐광에 있었다면 슬슬 나가고 싶기도 할 테고.
“그런데 내가 받은 보수가 꽤 되는데.”
그래도 이어지는 말에는 살짝 긴장했다.
사실 저승에 돌아온 이후 크게 돈을 벌어 놓지는 않았다.
전에 무당 마을에서 가지고 온 재료 아이템을 판 것만으로도 인간 기준에서는 무척 큰돈인지라 그간 부족함을 느낄 일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신을 고용하려면 웬만한 금액으로는 턱도 없을 텐데, 그림 리퍼는 과연 얼마를 받고…….
“상평통보로 2만 냥인데 괜찮겠어?”
“……예?”
뜻밖의 말에 순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상평…… 뭐요?”
혹시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어 다시 물었더니, 그림 리퍼가 웃는 얼굴 그대로 품에서 빨간 복주머니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받아서 열어 보니 정말로 낡은 동전이 가득했다.
한 이백 년 전에나 유통되었을 법한.
“진짜 엽전이잖아!”
“으응, 그렇지?”
뭐가 문제냐는 듯 그림 리퍼가 고개를 기울였다.
“2만 냥이면 한양에서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 한 채 아니었나?”
“…….”
마침내 상황을 파악한 나와 삼차사 사이로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래, 이 양반이 어쩐지 계속 여기를 조선이라고 부르더라니.
그러니까 지금…… 세상 물정 모르는 외국인 할아버지를 정체불명의 파렴치한들이 작정하고 착취해 왔단 뜻이 아닌가.
“……인간이 미안합니다, 그림 리퍼.”
“응?”
징악의 신으로서 나는 그의 손을 붙잡고 조용히 사과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그의 푸른 눈을 마주하자니, 문득 저승에 두고 온 등 푸른 생선이 떠올랐다.
이거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한테 등쳐 먹히는 신이 한둘이 아닐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