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장 (1) (61/187)

22장. 귀신의 철(1)

어느 인적이 드문 폐광산.

출입구에 덧댄 나무는 검게 썩어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다.

들어가는 길목의 돌벽은 아무렇게 자란 풀에 덮여 있었다.

장군의 소개에 따라 귀철을 얻으러 온 불가살이 던전이었다.

발생한 지 벌써 수년이 지났으나, 공략법이 까다로운 것에 비해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은 귀철밖에 없는지라 금세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 되었다고 했다.

차사들과 함께 던전으로 성큼 발을 내디뎠다.

콰르르르!

기다렸다는 듯이 폐광산의 입구가 무너지면서 던전을 알리는 팝업창이 떴다.

[ ‘폐광산’에 입장하셨습니다! ]

- (!) 해당 던전의 등급은 ‘무용담’입니다.

- 클리어 조건 : 던전의 (……)를 막으십시오.

예상대로 클리어 조건이 제대로 뜨지 않았다.

이 던전의 공략이 3단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내려가다 보면 망령들이 나올 거예요. 그것들을 쓰러트리는 게 첫 번째죠.”

안쪽으로 깊숙이 내려가며 말했다.

사용되지 않는 폐광산이었지만 벽에는 주먹만 한 전구가 붙어 있어 그럭저럭 앞이 보였다.

푸드드득!

문득 어둠 속에서 무언가 새카만 것들이 날아들었다.

그게 무엇인지 확인하기 전에.

파아아앙!

검푸른 빛이 번쩍이면서 그것을 쳐냈다.

“……박쥐 떼군요.”

발설지옥의 신성을 거둬들이며 강림 형이 말했다.

“한데 모두 목이 없습니다.”

“목이 없다고요?”

께름칙한 말에 바닥을 살폈다.

과연 형의 말대로 목이 잘린 박쥐들이 잘게 경련하며 널브러져 있었다.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대던 그것들은 어느 순간 뚝 움직임이 멈추더니 거뭇거뭇한 돌덩이들로 변했다.

“……철광석.”

나는 그 돌을 알아봤다

“이건 확실히 불가살이 던전의 패턴이 맞는데.”

불가살이 던전의 첫 번째 공략 조건은 망령들을 쓰러트리는 것이다.

쓰러진 망령들은 제련되지 않은 철광석으로 변하고, 철을 먹고 자란다는 요괴 불가살이가 그것들을 삼킨다.

그렇게 거대해진 불가살이를 쓰러트리면, 비로소 불가살이의 요기와 귀신 들린 철광석으로 만들어진 ‘귀철’을 얻을 수 있다.

“이상하네요. 망령 외에 다른 몬스터가 나온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는데.”

조금 찝찝한 기분으로 다시 걸음을 디뎠다.

좁은 길을 따라 더 깊이 내려가기를 한참.

바깥에서는 상상도 못 했던 크기의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마치 숨겨진 지하도시 같달까.

천장이 아득하게 먼 가운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누런빛이 들어와 어두운 내부를 밝히고 있었다.

벽을 따라 층층이 수레를 끄는 철로가 보였고, 빈 수레가 종종 음산하게 절로 움직였다.

또한 사방에서는 곡괭이로 바위를 캐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간혹 채찍으로 때리는 소리와 울부짖는 비명이 섞여 있었다.

“이야, 분위기 죽이는구만.”

주변을 살피던 호구별성이 한마디 했다.

“그런데 왜 아무것도 없지? 망령이 나온다며?”

그 순간 한발 늦게 팝업창이 떴다.

[ (!) 법몄뇩렛뒷뢍뭐걍베멋뇬깬뚤뢍뮌걍베맏냇밉뜸렷뤠꽥딩땟흐흐. ]

“……!”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오류가 섞인 팝업창.

[ (!) 법몄뇩렛뒷뢍뭐걍베멋뇬깬뚤뢍뮌걍베맏냇밉뜸렷뤠꽥딩땟흐흐. ]

[ (!) 법몄뇩렛뒷뢍뭐걍베멋뇬깬뚤뢍뮌걍베맏냇밉뜸렷뤠꽥딩땟흐흐. ]

뜻을 알 수 없는 팝업창이 몇 번 더 뜨고.

쿠우웅!

쿠우우웅!

지진이라도 난 듯 땅 전체가 진동했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는데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설마 또 버그야?!”

불현듯 이 던전이 수년 동안 방치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공략이 이루어지지 않은 던전은 그 자체로 버그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지는 걸까?

……우주강도단의 행정이 워낙 개판이니, 어쩌면 정말로 그럴지도.

“대왕, 저기 망령들이 나왔다.”

불쑥 사라가 앞을 가리켰다.

한 무리의 망령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천 조각처럼 흐물거리는 몸짓이었는데, 불가살이 던전에서 나오는 일반적인 망령들과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목이 없잖아?”

검수엽을 빼 들며 인상을 찌푸렸다.

너덜거리는 망령들은 하나같이 목이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대부분은 곡괭이 따위를 든 광부의 모습이었지만, 척 봐도 광부가 아닌 자들이 섞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목 없는 아이를 안고 있는 목 없는 여인의 망령은, 광부 망령들이 출몰하는 폐광산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일단 공략법대로 처리하죠.”

깊게 생각할 것 없이 망령들에게 달려들었다.

“너무 힘을 빼지 않게 주의해주세요. 진짜로 위험한 것은 저 망령들이 아니니까요.”

망령은 고작 첫 번째다.

이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선 철광석을 집어삼킨 불가살이뿐 아니라 그 불가살이를 부리는 고승까지 전부 쓰러트려야 한다.

그래서 이 던전이 까다로운 것이다.

다음 단계를 염두에 두고 힘을 분배하며 싸워야 하니까.

“도령님은 지금 힘을 쓰실 필요가 없어요.”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서천꽃밭의 신성은 가급적 아껴 두는 게 좋습니다.”

“뭐, 네가 그리 말하니 그렇게 하마.”

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별성 뒤에 얌전히 숨어 있겠다.”

“뭐야, 왠지 열 받는데?”

정말로 사라가 뒤에 숨어버리자, 망령에게 독기를 뿜던 호구별성이 꽁한 소리를 냈다.

“어쩌겠느냐. 꼬우면 네가 힐러 하거라.”

“영감탱이, 말이나 못 하면!”

두 차사가 티격태격하는 걸 뒤로하며 다시 망령들에 집중했다.

촤아아악!

손에 들린 검수엽이 거침없이 망령들을 베어냈다.

검수엽은 망자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피어난 지옥의 잎새로 만들어진 검이다.

따로 신성을 더하지 않아도 언데드 몬스터를 상대할 땐 특히 효과적이었다.

촤아아악!

촤아아아아악!

그런데 망령을 차례로 베어 나가던 때였다.

“……어.”

문득 팔을 타고 흘러드는 묘한 감각에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뭐지?”

분명 전에도 느껴본 듯한 감각인데.

베어 낸 망령들이 전부 철광석으로 변하는 것을 잠깐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파아아앙!

뒤에서 검푸른 신성이 번쩍였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대왕님.”

강림 형이 빠르게 다가와 내 등 뒤를 노리던 망령을 처리하고는 물었다.

“아니, 괜찮아요, 형.”

또 괜히 형을 신경 쓰게 만들었나.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식으로 매 순간 형이 내게 집중하고 있다는 걸 느낄 때면 묻어 두었던 부담감이 어김없이 떠올랐다.

파아아앙!

형은 내 답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아예 근처의 망령들을 한 번에 날려버렸다.

나는 결국 조금 앓는 소리를 냈다.

“형, 그렇게까지 안 해줘도 되는데요.”

“별로 큰 힘이 아니니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팔뚝에 검푸른 신성을 휘감은 형이 대답했다.

그야 신성을 어느 정도 저장해 둘 수 있다고 했으니, 소모가 크지는 않겠다만…….

“저 게으름뱅이 노괴가 가만히 있는데, 대왕님께서 직접 손을 쓰시는 게 거슬렸을 뿐입니다.”

형이 뒤쪽의 호구별성과 사라를 흘끗 곁눈질하며 덧붙였다.

“…….”

그게 문제였어?

하여간, 호구별성은 물론이고 사라도 어지간히 싫어한다니까.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호구별성 뒤의 사라를 한 번 노려본 형이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대왕님께서도 제 뒤에 숨으셔도 됩니다만.”

“아뇨, 정말 됐어요. 그건.”

조금 실없이 웃으며 주변을 돌아봤다.

“첫 번째 공략은 끝났네요.”

말이 끝나자마자 마지막 망령이 호구별성에게 처치되었다.

온 바닥에 철광석이 가득한 광경을 보며 말을 이었다.

“불가살이가 나올 타이밍이에요.”

말함과 동시에 새 팝업창이 떴다.

[ (!) ‘폐광산’의 클리어 조건이 해금되었습니다! ]

- 클리어 조건 : 던전의 ‘불가살이’를 막으십시오.

‘(……)를 막으십시오’에서 ‘불가살이를 막으십시오’가 되었으니 해금이라면 해금이 맞다.

하지만 여전히 정확한 클리어 조건은 아니었다.

우리는 던전의 끝에서 불가살이를 부리는 고승을 쓰러트리고 법칙의 핵을 부숴야 한다.

-쿠오오오!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울렸다.

“녀석이 나옵니다!”

앞에서 덩치 큰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가살이였다.

검수엽을 고쳐 쥐며 녀석에게 집중했다.

얼핏 보기엔 코뿔소를 닮은 모습이었다.

코뿔소처럼 날카로운 뿔이 솟아 있는 얼굴.

부릅뜬 눈은 불에 타오르는 것처럼 형형했으며, 은빛으로 빛나는 털은 여타 짐승과 달리 강철처럼 뻣뻣하게 서 있었다.

당초 성체 코끼리만 했던 몸집은, 녀석이 철광석을 씹어 먹으며 다가오는 사이에도 눈에 띄게 커져 갔다.

커지기 전에 공격할 수도 있었다.

다만 놈이 소화한 귀철이 목적이었기에 우리는 잠시 놈이 철광석을 먹도록 내버려 두었다.

거체가 지나간 자리마다 철광석이 사라졌다.

크디큰 입안으로 빨려들어 가듯 철광석이 삼켜졌다.

“어우, 전하 너 정말 저거 쓰러트릴 수 있겠냐?”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철광석을 전부 삼킨 불가살이를 올려다보며 호구별성이 팔짱을 꼈다.

놈은 이제 집채만 한 크기가 되어 있었다.

저 커다란 몸에 비하면 내 검수엽은 꼭 이쑤시개 같은 꼴이었다.

“괜찮아요.”

불가살이는 불가살(不可殺)이라는 이름처럼 웬만한 방법으로는 죽이는 게 불가능하다.

그게 불가살이 던전 공략이 까다로운 또 하나의 이유였으니, 그렇다면 웬만하지 않은 방법을 찾으면 된다.

“불을 쓰면 쉽게 죽일 수 있는 몬스터입니다.”

불이다.

살(殺)이 불가능한 불가살이는 오직 불 앞에서만 제 무기를 잃는다.

따라서 화속성 스킬의 유무가 불가살이 던전 공략의 핵심이었다.

“놈이 움직임을 완전히 멈추면 접근하셔야 합니다.”

신성을 발한 강림 형이 오랏줄을 빼 들며 말했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습니다.”

이어지는 말은 형이 아직도 이무기 터에서 있었던 일을 잊지 못했다는 말과 같았다.

나는 괜히 또 불편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꾹꾹 눌렀다.

촤아아아악!

강림 형의 오랏줄이 불가살이의 육중한 몸을 휘감았다.

-쿠오오오! 쿠오오오!

순식간에 몸이 묶인 불가살이가 불쾌하다는 듯 사지를 휘저으며 괴성을 질렀다.

오랏줄을 쥔 형의 두 팔에 검푸른 신성이 더 강하게 휘감겼고, 나는 바로 그 순간에 발을 굴러 불가살이에게 달려들었다.

[ 화탕지옥(L) ]

화르르륵!

지옥의 불길이 내 손끝에서부터 강렬하게 피어올랐다.

화르르륵!

화르르르륵!

회오리처럼 이어진 새빨간 불길은 곧 오랏줄에 묶인 불가살이에게로 번졌다.

불은 집채만 한 놈을 삼키고 삽시간에 거대한 장벽처럼 타올랐다.

-쿠오오오!

-쿠오오오오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불가살이가 마구 몸을 비틀었다.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강림 형의 오랏줄에 묶여 꼼짝하지 못했다.

새빨간 불길과 검푸른 오랏줄에 휘감긴 채로 그저 이리저리 몸을 꼬아대고 뒤틀면서 괴성을 질렀다.

‘98%’

‘87%’

‘68%’

허공에 떠오른 법칙의 영향력이 뭉텅이로 깎여 나갔다.

‘50%’

이윽고 던전의 핵을 직접 칠 수 있는 50%까지 떨어지자, 불타오르던 불가살이는 곧 은빛으로 빛나는 가시더미를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우리가 찾던 귀철이었다.

“허, 꽤나 장관이군.”

아직 불길이 남은 귀철더미를 훑으며 사라가 말했다.

불가살이는 사라졌지만 화탕의 불길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푸르스름한 귀기를 머금은 귀철 주위로 붉게 일렁이는 화염은 말마따나 제법 근사한 광경이었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오랏줄을 거둔 강림 형이 다가왔다.

“네. 다만 생각보다 마력 소모가 크긴 하네요.”

나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림 형이 오랏줄로 묶어준 덕에 화탕지옥 스킬만으로 쉽게 잡긴 했으나, 그 잠깐 사이에 마력이 절반 이상 사라져 있었다.

그만한 크기를 불사른 화력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저와 다른 두 차사가 힘을 크게 쓰지 않았으니 괜찮으실 겁니다.”

여차하면 그냥 본인이 나서겠다는 듯, 버릇처럼 내 앞을 살짝 막아서면서 강림 형이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 불가살이가 사라진 자리를 훑었다.

귀철이 솟아난 자리에는 불가살이와 똑같이 생긴 작은 인형이 놓여 있었다.

고사에 따르면 불가살이는 어느 고승이 신통력을 담아 만든 인형으로, 쇠를 삼킬수록 덩치가 커지는 괴물이었다.

이제 그 고사대로 불가살이를 조종하는 던전의 보스 고승을 쓰러트리고 핵을 부수면 된다.

때맞춰 저 멀리서 던전의 주인 고승이 걸어 나왔다.

“그래, 저게 그 고승인가 보구나.”

“음, 겉은 그냥 평범한데?”

놈을 발견한 사라와 호구별성이 한마디씩 했다.

그들의 말대로 고승의 겉모습은 그냥 인간과 다를 바 없었다.

체격은 강림 형만큼이나 컸고, 장삼을 두른 평범한 승려 복장에 머리에는 삿갓을 쓰고 있었다.

“OH, MY GOD!”

우리를 보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도할 정도로 평범…… 응? 외국어?

“이게 누구야, 강림 아니야?!”

몹시 유쾌한 목소리로 반가워하며, 고승이 푹 눌러썼던 삿갓을 들어 올렸다.

“……어?”

그런데 삿갓 아래로 그의 얼굴이 드러난 순간.

“……백인?”

금발에 푸른 눈.

한반도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어진 외견에 나도 모르게 눈을 끔뻑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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