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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 (2) (60/187)

21장. 재료 수집(2)

어느 소도시 외곽.

정돈되지 않은 보도블록 위로 낡은 건물이 하나 서 있었다.

칠이 벗겨진 벽에는 이곳저곳 거미줄처럼 금이 간 채로, 본래 무슨 색이었는지 마저 희미할 만큼 빛바랜 간판은 그마저도 자모음이 몇 개 날아가 있었다.

-저직ㅎ 길ㄷ

“……어우야, 저건 좀 심한데?”

창문을 내려 간판을 확인한 호구별성이 혀를 찼다.

“저거 정직한 길드라고 적혀 있는 것 맞냐?”

“음, 아마 맞을 거예요. 그런 이름이었으니까.”

나는 차의 시동을 끄며 대답했다.

일부러 좀 작은 길드를 고르긴 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허름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인지라, 그녀에게 마저 설명했다.

“전설급 각성자들한테 속하지 않은 길드가 제대로 운영되기는 힘들죠.”

이미 아홉 명의 전설급 각성자들이 한반도를 나누어 가진 이상, 어떤 연맹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 세력으로 살아가기엔 힘든 세상이었다.

전설(L)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라도 중대형 길드는 대부분 하나의 연맹을 골라 소속되기를 선택했다.

다만 나는 조금이라도 전설급 각성자들의 눈에 띌 여지를 없애고 싶었다.

흑탑주도 미래를 보는 도사인 마당에, 내가 드러날 수 있는 변수는 최대한 줄이는 편이 좋으니까.

귀철에 대한 정보를 구하기 위해 굳이 ‘정직한 길드’를 고른 것 역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어떤 연맹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 길드였고, 그중에서도 그나마 찾아가기 쉬운 곳에 있어서.

다만 이 정도면 길드라기에도 뭐하다.

그냥 작은 중계 사무실에 더 가까우려나.

말이 중립이지, 정확히는 수준 미달이라 어떤 연맹에도 속하지 못했다는 게 더 맞겠는걸.

“귀철이라는 게 공급은 늘 있는데 수요는 그닥이거든요. 그래서 저런 작은 길드라도 정보가 있을 거예요.”

사실 그 정도의 정보는 인터넷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전에 우리가 이무기 던전을 인터넷에서 찾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귀철을 얻을 수 있는 던전도 분명 인터넷을 뒤져 보면 금방 나올 터였다.

모르긴 해도 아마 저 작은 길드도 우리가 귀철에 대한 정보를 요구하면 그냥 인터넷에서 찾아 알려주지 않을까.

저런 곳에 제대로 된 정보 공급처가 있어 보이진 않으니.

그럼에도 굳이 정보 길드의 중계가 필요한 것은, 정당하게 던전을 격파하고 아이템을 얻었다는 것을 증명할 행정 절차를 위해서였다.

이무기 때야 대놓고 인간들의 암묵적인 룰을 깰 요량으로 절차 없이 찾아간 것이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행정 절차를 제대로 밟아둬야 했다.

어쨌든 당분간 인간 헌터 행세를 하기로 했으니 이런 기록들이 필요할 때 우리 신분을 증명해줄 것이다.

“근데 이런 데서 떼어주는 서류가 의미가 있긴 해?”

아직도 영 미심쩍은지 호구별성이 물었다.

“그건 상관없어요. 연맹에 속하지 않은 길드도 절차는 천부인이 보증해 주거든요.”

어떤 연맹에도 속하지 못한 길드가 구멍가게 정도나마 영업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천부인이 최소한의 기능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만약 천부인마저 없었다면 이렇게 소형 길드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터전을 보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단군의 뜻이겠지.

그런 사람이니까.

그를 싫어하는 이들은 그것마저 위선이라고 말하겠지만, 그는 분명 인간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을 누가 돌봐야 하는지 알고 있는 자였다.

“…….”

그런 생각을 하자 새삼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지금 나 또한, 23년 전 내가 살린 남자의 도움을 받고 있지 않은가.

***

차에서 내려 건물로 향했다.

반쯤 깨진 계단에, 열다가 부서질 것 같은 낡은 문은 어째 가까이 갈수록 더욱 새롭게 허접했다.

“뭐, 그래도 안은 나쁘지 않구나.”

사무실에 들어서며 사라가 말했다.

“그러게. 낡았는데 청소를 잘해놨네.”

뒤따라간 호구별성도 한마디 했다.

빛바랜 벽지며 깨진 바닥은 건물의 외관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래도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 모습에서는 정성을 담아 청소한 티가 났다.

“하긴 바깥이 저런데 안이라도 깨끗해야지.”

팔짱을 낀 그녀가 시니컬하게 내뱉었다.

“그런데 아무도 없네요?”

나는 내부를 한 번 돌아보며 말했다.

손님이 대기하는 소파며, 근무하는 책상이며, 아마 이곳이 사무실의 다인 것 같은데, 정말 아무도 없는 걸까?

그야, 딱 봐도 허름한 게 달리 훔쳐 갈 만한 것도 없어 뵈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문을 다 열어놓고 비워두는 것은 좀…….

“저쪽에 문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때 옆에 선 강림 형이 말했다.

“안쪽에서 기척이 느껴지는군요. 한 명입니다.”

그제야 구석에 창고인지 뭔지 모를 문이 보였다.

닫혀 있어서 안은 보이지 않았는데, 형의 말대로 희미하게 무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불러 볼까요? 아마 여기 직원일 텐데.”

망설일 것 없이 성큼 한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때마침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

어째 기분 좋아 보이는 콧노래와 함께.

안에서 나온 것은 제법 큰 키의 남자였다.

정돈되지 않은 더벅머리에 두꺼운 라운드안경이 눈에 들어왔다.

청소 중이었는지 손에 대걸레를 들었는데, 깨끗한 사무실과 달리 본인은 몸 곳곳에 잿빛 먼지가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앗!”

한 박자 늦게 우리를 발견한 남자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눈을 동그랗게 떴는데, 비현실적으로 조그만 눈은 동그란 단춧구멍 같았다.

안경의 도수가 얼마나 높기에 눈이 저렇게나 작아지는 걸까.

“언제 오셨어요?”

그런데 우릴 보고 놀라는 그의 얼굴이 무척 앳되어 보였다.

큰 키부터 눈에 들어와 눈치채지 못했는데, 감정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표정은 채 빠지지 않은 젖살과 어우러져 매우 순박하게 느껴졌다.

“손님이신 거죠?”

그런 생각을 하는데 그가 대걸레를 내려놓고 반갑게 다가왔다.

그냥 누군가 왔다는 것만으로도 뭔가 되게 기뻐 보이는 얼굴로.

“어서 오세요. 뭐 찾으러 오셨어요?”

보고 있자니 기쁨을 감추지 못해 꼬리를 방방 흔들어 대는 커다란 개가 떠올랐다.

오픈 사흘째가 되어서야 첫 손님을 맞이한 가게의 사장 아들 같기도 하고.

고등학생으로 보이는데, 진짜 여기 길드장 아들인가?

“아, 저는 장군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다른 분들이 외근 중이시라 제가 안내해 드려야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가볍게 소개하는 이름이 좀 특이했다.

성이 장이고 이름이 군인 걸까?

그는 양해를 구하듯 물어 왔지만, 조그만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얼굴을 보면 누구든 쉽게 거절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봐도 장사가 안 된다는 걸 알 수 있기는 하다만, 정말 어지간히 손님이 반가운 모양이네.

“제가 정직원은 아니고 아르바이트생이긴 한데, 다른 분들 안 계시면 제가 봐드리기도 하거든요. 아니면 다른 직원분들 오실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셔도 되고. 그래도 언제 오실지 모르는데 바쁘시면 그냥 제가…….”

계속해서 그가 따발총처럼 말을 쏟아냈다.

지나치게 말이 많고 솔직한 점이 또 어린 아르바이트생다웠다.

정신없는 응대였지만 딱히 불편하지는 않았다.

……보다 보니 괜히 소년 가장으로 동분서주하던 때가 떠올라서, 나는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아이템 정보를 좀 찾으러 왔는데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으면 그냥 해주세요.”

괜찮다고 하자마자 장군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쪽에 앉으세요! 제가 바로 찾아드릴게요!”

곧장 책상 앞으로 간 그가 반대편 의자를 가리켰다.

“무슨 아이템 찾으세요?”

그리고 내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질문이 돌아왔다.

나는 앞에 놓인 의자를 당기며 대답했다.

“근방에 귀철이랑 귀목을 얻을 만한 던전이 있을까요?”

그런데 말을 꺼내자마자 무인도에서 사람을 만난 강아지마냥 들떠 있던 그의 얼굴이 어째서인지 굳어졌다.

“어…… 귀철이랑 귀목이요?”

삽시간에 변한 표정에 덩달아 당황한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귀철이랑 귀목……. 혹시 없나요?”

그럴 리는 없는데.

수요가 적어 인터넷에서도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인데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귀철이랑 귀목을 찾으시는 거면 좀 비싸더라도 차라리 경매장에 가시는 게 나아요.”

풀이 죽은 얼굴 그대로 장군이 말을 이었다.

“아니면 여기보다 더 큰 길드에 가셔도 되고요. 수수료는 좀 더 붙겠지만, 그만큼 더 공략하기 쉬운 던전을 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장군의 설명은 딱히 이상하지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귀철과 귀목은 경매장에 자주 출품되는 상품이었다.

입수 난이도에 비해 수요가 부족한 탓에, 오히려 한 명만 걸리라는 식으로 시작가부터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매겨져서 그렇지.

규모 있는 길드라면 정보 공급처를 따로 두고 있을 테니 더 좋은 정보를 취급하는 것도 맞고.

그래도 이곳에서 팔 수 있는 정보가 없는 건 아닐 터였다.

위험해서 아무도 찾지 않는 던전이라고 해도 정보는 정보니까.

그냥 검색 한 번 해주는 것만으로 정보료와 수수료가 떨어질 텐데, 이 어린 아르바이트생은 왜 이렇듯 만류를 하는 걸까?

“여기선 정보를 못 찾는 건가요?”

궁금해서 물었더니, 장군이 풀이 죽은 얼굴 그대로 어깨를 움츠렸다.

“아뇨, 찾을 수는 있는데…….”

어째서인지 잔뜩 조심스러운 어조로.

“……위험하니까.”

“위험이요?”

“귀철이랑 귀목은 아무래도 영능력 계열과 관계되어 있잖아요. 자칫하면 공략하러 갔다가 되레 혼을 먹힐 수 있는데…….”

정말로 걱정스럽다는 듯 그가 나와 눈을 맞추며 마저 말했다.

“솔직히 이런 작은 사무실까지 들어오는 정보면, 이미 공략을 포기해버린 던전일 가능성이 높거든요.”

음, 그러니까.

위험한 던전일 가능성이 높아서 우릴 보낼 수 없다는 건가?

다른 길드에 가서라도 좀 더 안전한 던전을 찾으라고?

“이야, 지금 너네가 그거 가릴 때냐?”

듣고 있던 호구별성이 살짝 냉소적으로 물었다.

“니네 건물 꼬라지를 봐라. 위험하든 말든 악착같이 보내서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하는 거 아니야?”

“네?! 아뇨, 그럴 수는 없죠.”

그 말에 장군이 무슨 말이냐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마 형들…… 아니, 아니, 다른 어른들이 계셨어도 똑같이 말씀하셨을 거예요.”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서 장군을 바라봤다.

어리고 솔직한 아르바이트생.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허름한 길드.

돈보다도 다른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직원들.

낡은 간판에 적혀 있던 상호명, ‘정직한 길드’.

평소라면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을 광경이 오늘따라 유독 선연히 눈에 들어왔다.

“전 여기가 마음에 드는데, 다들 어떠세요?”

나는 여전히 장군에게 시선을 둔 채로 차사들에게 물었다.

“뭐, 네가 마음에 든다는데 우리가 달리 할 말이 있겠느냐.”

“뜻대로 하십시오.”

“이제 와서 딴 데 가기도 귀찮긴 해.”

내 뒤를 지키듯 나란히 선 차사들이 차례로 대답했다.

조금도 망설임 없는 수긍에 장군은 도리어 당황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진짜 위험하실 수도 있어요! 막 성불도 못 한 귀신이 잔뜩 나오면 어떡해요!”

그 말에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저승사자가 돼서 귀신을 무서워하면 쓰나.

“괜찮으니까, 제일 가까운 데로 안내해주세요.”

웃음기를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안경 너머 조그마한 눈을 깜박이던 장군이 문득 깨달았다는 듯 숨을 들이켰다.

“혹시 퇴마 계열 각성자세요?”

“음, 뭐 비슷해요.”

“우와, 신기하다! 혹시 여기도 귀신 있어요? 보이세요?!”

“어…….”

“아니다, 있어도 말하지 말아주세요! 무서워요!”

“…….”

21장. 재료수집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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