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장 (1) (59/187)

21장. 재료 수집(1)

위잉-위이잉-.

몽롱한 와중에 기계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곧 그 위로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섞였다.

-대왕님, 문안 인사 드립니다!

인간과 비슷하지만, 기계음 때문에 어딘가 인공적인 목소리.

얼마 전 왕도깨비 탈해가 만들어준 ‘로봇 하인’의 음성이었다.

“으응….”

시야가 흐릿해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네모진 머리에 반듯하게 쓴 갓이 차츰 선명해졌다.

강림 형이 ‘왕의 신하가 어찌 벌거벗고 다니느냐’며 씌운 것이었다.

인간을 본떴으나 아직은 기계에 더 가까운 모습.

짤막한 기계 팔에는 손가락까지 구현되어 있었지만, 허리 아래로 다리 대신 바퀴가 달려 있어 이동할 때마다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났다.

저승에 로봇이라니.

아직도 썩 익숙하지는 않아서, 나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가 멋쩍게 인사했다.

“……안녕?”

-(*^▽^*)

로봇은 도트로 이뤄진 얼굴에 생긋 미소를 띄우고는, 작은 손에 쥔 빗자루로 방 안을 쓸기 시작했다.

탈해에게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저승에서 로봇이 움직일 수 있는 이유를 물어봤는데, 도깨비의 신통력으로 움직이는 거라서 그렇다나.

정확히는 신통력으로 로봇에 내장된 소형 발전기를 가동해 무한동력을 만들어 낸다는데…… 나는 공돌이가 아니라서 그냥 거기까지만 이해하기로 했다.

그래도 가신도깨비들은 찰떡같이 알아듣고 새 왕의 지혜를 추앙했다.

보아하니 노트북에서 태어난 최신식 왕도깨비가 도깨비 공학에 혁명을 불러온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저택에서 시중을 드는 로봇 하인은 총 다섯 대.

공무를 보는 신하는 항상 단정해야 한다며 다섯 대 모두 강림 형이 손수 갓을 씌워준 상태였다.

덕분에 갓 쓰는 법을 학습한 로봇들은 마주칠 때마다 서로의 갓 매무새를 칭찬하곤 했다.

형은 또 그 모습을 흡족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솔직히, 본인 갓 못 쓰게 한다고 로봇으로 시위하는 것 같은데.

일단 모르는 척하고 있다.

***

사라수대왕 저택의 마당.

별다른 외출 일정이 없었기에 잠옷을 갈아입지 않고 부스스한 머리에 후드만 뒤집어썼다.

아침부터 벌써 이곳저곳에서 연장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운동장만 한 마당에는 온갖 설계도와 건축 자재들이 가득했다.

가신도깨비들이 돌아온 이후 저택 리모델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당 구석에 놓인 원탁에서는 지금도 도깨비 몇몇이 진지한 낯으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왕도깨비 탈해와 그의 가신들.

체구는 다르지만 하나같이 모두 격자무늬 공대생 패션이었다.

여성 도깨비들도 다르지 않았다.

짧게 치거나 질끈 묶은 머리에 격자무늬 셔츠, 두꺼운 뿔테안경을 장착한 그들은 누가 봐도 탈해의 가신들이었다.

멋쟁이 호구별성은 단체로 저게 무슨 꼴들이냐며 경악했지만, 강림 형은 통일성 있는 차림새에 안정감을 느끼는지 의외로 별말이 없었더랬지.

원탁에 모인 도깨비들 말고도 다들 바쁜 듯, 곳곳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망치질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식당으로 향하던 나는 문득 멈칫했다.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풍겨 오는 맛있는 냄새에 고개를 돌리자 마당 한구석에 익숙한 식탁이 보였다.

“전하, 일어났냐?”

먼저 앉아 있던 호구별성이 손을 흔들었다.

커다란 식탁 옆에 자리한 여러 개의 화로에서는 로봇 하인의 솜씨 아래 갖가지 요리가 지글지글 익고 있었다.

-(✌’ω’)✌

뭐지? 저건 가위나 집게를 표현한 건가?

“이제 부엌 공사한다고 당분간 여기서 먹으래.”

자리에 앉자 호구별성이 내 몫의 식기를 놓아주며 말했다.

벌써 부엌 차례인가.

임시라고는 해도 로봇 하인이 도깨비불로 요리하는 장면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조선 시대에 멈춰 있던 저승에도 드디어 4차 산업 혁명이 찾아온 게 실감된다고나 할까.

“좋은 아침이구나.”

맞은편 자리에서 커피잔을 든 사라가 인사했다.

잠이 덜 깬 듯 나른한 표정에 대충 걸쳐 앉은 모습으로도 생불왕이 정성껏 빚어낸 몸은 조각처럼 늘씬했다.

“생각보다 공사가 커질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식기 위로 음식을 덜며 그에게 물었다.

도깨비들이 삐까번쩍하게 리모델링 해주는 것이야 좋지만, 여기는 원래 그의 집인지라 다소 신경이 쓰였다.

“상관없단다.”

사라가 대답했다.

“마누라가 보면 좋아할 테지.”

그러면서 흡족한 얼굴로 덧붙이는 게, 순간 둥지 짓는 공작새…… 뭐, 그런 게 생각났다만.

언젠가 돌아올 원강아미를 생각하며 나도 그냥 따라 웃었다.

아들 할락궁이가 열다섯 살이 되고서야 함께 저승에 왔기 때문에, 원강아미는 사라보다 좀 더 나이 든 얼굴이었다.

열 살은 어려 보이는 남편이 집을 꾸며 놨다며 생색낼 것을 상상하니 괜히 웃음이 났다.

그때쯤이면 황폐해진 서천꽃밭에도 다시 예쁜 꽃이 만발하겠지.

“오늘도 바리는 아직인가요?”

밥을 한술 뜨며 이번에는 바리네 조부모에게 물었다.

사라 옆에 앉아 다소곳이 차를 마시던 그들이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뼈밖에 없는데도 자연스럽게 먹고 마시는 것이 새삼 신기했다.

대체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

“…!!……!……!”

대답을 하듯 바리네 조부모가 무어라 뼈를 달그락거렸다.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손짓을 보아 대충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천벌 기도 이후 바리는 지금까지 계속 잠든 채였다.

매일 잠든 바리를 살피는 그들이 별말 없는 터라, 그래도 심각한 일은 아니겠거니 하며 기다리는 중이다.

-때가 되면 일어날 것입니다.

-생각하시는 것보다 늦어지더라도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걱정하는 내게 그렇게 쪽지를 써주기도 했으니.

“근데 강림 형은요?”

호구별성, 사라, 바리네 조부모까지, 식구들을 한 번씩 돌아본 다음 물었다.

원래라면 내 옆자리를 지키고 있을 텐데 오늘은 어째 보이지 않네.

그 꼰대가 아직 자고 있을 리도 없는데.

“나무들 보러 갔어.”

호구별성이 대답했다.

“걔 요즘 아주 거기서 살잖아.”

“아, 또 거기 갔어요?”

“며칠 사이 또 자랐다는 것 같던데, 난 봐도 잘 모르겠더라.”

서해 용궁에서 가져온 지옥 씨앗 얘기였다.

천벌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순식간에 팔뚝만 한 묘목으로 자란 지옥수들.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몰라 일단 서천꽃밭에 심어 두었는데, 흙이 잘 맞았는지 건강하게 뿌리를 내렸다.

그게 무척 감격스러웠던 걸까.

형은 틈날 때마다 묘목을 살피러 갔다.

원예가 취미인 저승사자라니.

저승의 재건을 고대하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라 나무가 빨리 자라길 바라는 마음은 모르지 않았다.

다만 크고 시커먼 장정이 팔뚝만 한 묘목을 애지중지하는 것은 꽤나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아니, 팔뚝이 뭐야.

그것도 내 기준이지, 사실 형 앞에서는 콩알이나 다름없잖아.

“아주 꽃감관을 바꿔야 해. 저 영감은 싹이 나든 말든 한 번 들여다보지를 않는데.”

호구별성이 불쑥 사라를 핀잔했다.

커피를 마시던 사라는 불시의 공격에도 느긋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꽃과 아이는 내버려 두면 알아서 크는 법이란다, 별성.”

……어째, 꽃감관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그다지 신뢰가 안 가는 대답인데.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원강아미한테 일러줘야겠다.

“대왕님.”

그때였다.

“잠시 시간을 내주셨으면 합니다만.”

회의를 하던 도깨비들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역시나 똑같은 공돌이, 아니 격자무늬 셔츠 차림이었지만, 가운데 선 탈해는 반듯한 얼굴 때문인지 그 사이에서도 눈에 띄었다.

하긴, 도깨비들을 대표하는 왕도깨비이니 남달라 보이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식사를 마치시면 잠시 제 방에 와주셨으면 합니다.”

탈해가 뿔테안경 너머로 부드럽게 눈을 휘며 말을 이었다.

“업경에 관해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말에 집중했다.

업경이라.

죄인의 업을 비추는 염라의 거울.

대상의 업만큼 지옥의 힘을 증폭시키는 힘을 가진 신물.

업경을 만드는 것은 당대의 왕도깨비와 그의 가신들이며.

스물네 번째 왕도깨비 탈해와 나는 약조했다.

내게 새로운 업경을 만들어주는 대신, 나는 그가 만든 업경으로 그의 아버지를 해친 자를 벌하기로.

“신의 물건인 만큼 업경을 만드는 데는 특별한 재료가 필요하거든요.”

짧게 설명한 탈해가 먼저 가 있겠다며 저택으로 들어갔다.

***

사라수대왕 저택의 3층.

본래 서천꽃감관의 권속들이 머물던 3층은 이제 도깨비들의 차지였다.

층 하나하나가 워낙 넓다 보니 도깨비들이 하나씩 방을 차지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는데, 그중에서도 탈해의 방은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해 있었다.

“생각보다 썰렁하네?”

방에 들어선 호구별성이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벌써 며칠 묵었던 것치곤 생활감이 거의 없는 방이었다.

낡은 침대에 테이블 하나, 거기다 개인 짐이라고는 테이블에 놓인 서류 뭉치 몇 개가 전부였다.

매일 밤낮으로 이것저것 만들어 대니 마당처럼 연장이나 설계도 같은 게 잔뜩 널려 있지 않을까 했는데, 정말 아무것도 없네.

“아무래도 쉴 때만 방을 찾으니까요.”

테이블 위 서류들을 뒤적이며 탈해가 대답했다.

“달리 제 물건을 남길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 말에 나는 물끄러미 탈해를 바라보았다.

누군가 머무는 방은 으레 생활감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언제든 떠나버릴 사람 같은 말에 기분이 묘해졌다.

그는 아직 저승에 정을 붙이지 못한 걸까.

애초에 좋은 일로 나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지만.

“아, 여기 있군요.”

탈해가 서류 한 장을 펼쳐 보였다.

“업경의 설계도입니다.”

과연, 설계도에는 우리 대왕님의 거울과 똑같이 생긴 거울이 그려져 있었다.

도깨비들의 문자로 적혀 있어 지시문은 제대로 읽을 수 없었지만,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 오행만큼은 알아볼 수 있었다.

“주재료는 오행에 신의 힘이 깃든 재료들입니다.”

오행이 부분을 가리키며 탈해가 설명을 이었다.

“이 중에서 불과 흙은 도깨비불과 저승의 흙, 그리고 광천못의 물로 충분합니다. 개중에 물은 마침 용궁의 정기가 깃들어 있어 특히 상태가 좋죠.”

그럼 벌써 세 개는 충족되었다는 말이었다.

용궁 왕자가 광천못을 정화했을 때부터 알아봤다.

역시 복고등어를 모셔 왔다니까.

“문제는 철과 나무인데.”

탈해의 손가락이 金과 木을 한데 묶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천계가 문을 닫은 터라 신철(神鐵)을 찾기 힘든 상태입니다. 신목(神木)은 말할 것도 없고요.”

“흐음, 하긴 둘 다 하늘에서 찾는 게 빠르지.”

알아들었다는 듯 사라가 한마디 보탰다.

천계에는 신들이 철과 목재를 얻는 광산과 화원이 따로 있으니까.

천계에 갈 수 있다면 대가를 지불하고 비교적 쉽게 재료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저승이 무너진 후로는 천계도 문을 닫아서 쉬이 갈 수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당장 천계에 갈 수 없다면, 아무래도 이승에서 재료를 구해야 할 텐데…… 차선책으로 귀철과 귀목을 구하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탈해가 마저 설명했다.

“귀기 때문에 좀 탁해지겠지만, 망자의 왕이시니 쓰시는 데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귀신 들린 철과 나무라.

그래도 방법이 있다니 다행이었다.

그 정도면 어렵지 않았다.

귀철과 귀목은 인간 헌터들 사이에서도 드물게 거래되는 재료니까.

워낙 얻기 까다로운 데다가, 영능력 계열 각성자가 아니면 다루기도 힘들어서 보통은 굳이 쓰지 않지만.

그러니 오히려 찾기는 쉬울 것이다.

공급에 비해 수요가 적은 상황이니까.

“그럼 귀철과 귀목만 찾아오면 바로 만들어주시는 건가요?”

내 물음에 탈해는 즉답했다.

“네, 대왕님. 재료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만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두 눈에서 검붉은 귀기가 불꽃처럼 일렁였다.

그에 나는 직감했다.

새 업경을 고대하는 것은 나만이 아니라는 걸.

-징악의 신이시여, 당신께 새 업경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당신께서는 그것으로 제 아버지를 살해한 자를 벌하여 주십시오.

……그렇구나. 너는 복수만 고대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새삼 텅 빈 그의 방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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