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장 (2) (54/187)

19장. 손님(2)

왕도깨비.

재주와 해학을 갖춘 도깨비들의 왕.

신의 물건에서 태어나는 그들은 영원을 사는 진짜 신들과 달리 천년마다 세대를 교체한다.

그런데 길고 긴 왕도깨비들의 역사에서 단 세 번, 천년의 세월을 채우지 못하고 세대가 교체된 적이 있었다.

모두 자리를 물려받아야 할 태자도깨비가 선왕을 살해했을 때였다.

살해당한 선왕의 저주였을까?

패륜을 저지른 왕도깨비들은 모두 하나같이 미쳐버렸다.

괴물 불가살이(不可殺伊)를 만들어 일대의 쇠를 약탈하거나.

꺼지지 않는 도깨비불로 사흘 밤낮 도성을 불태우거나.

마을이 모시던 목신을 저주해 사람을 잡아먹는 귀목으로 만드는 등.

선왕을 살해하고 왕이 된 왕도깨비들이 모두 미쳐서 끔찍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패륜을 저지른 왕도깨비는 신들 사이에서도 경멸받았다.

“그런데도 네놈이 정녕 스물네 번째란 말이더냐.”

강림 형이 검푸른 신성을 일렁이며 스물네 번째 왕도깨비 석탈해를 추궁했다.

“말해라. 너의 아비 스물세 번째 왕도깨비 함달파는 어찌 된 것이냐.”

스물세 번째 왕도깨비 함달파는 아직 천 년을 다 채우지 못했다.

그런데 석탈해가 정말로 스물네 번째 왕도깨비라면, 그는 정상적으로 세대를 교체한 왕도깨비가 아니라는 뜻이니.

차사들은 그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패륜을 저지른 왕도깨비들은 모두 미쳐버렸기 때문에.

혹시라도 석탈해가 패륜도깨비라면 문제가 될 여지가 있으니까.

“……제 아버지 함달파왕께서는.”

탈해가 대답했다.

“살해당하셨습니다.”

어느새 웃음기가 가신 채로.

“그 때문에 제가 당신을 찾아온 것입니다.”

검은 뿔테 너머로 그의 눈이 검붉은 귀기(鬼氣)를 발했다.

감정이 격해질 때나 무언가에 집중할 때 발하는 도깨비 특유의 기였다.

“징악의 신이시여, 저 왕도깨비의 가신들을 되찾아주시고 제 아버지를 살해한 자를 벌하여주십시오.”

가신들을 되찾아달라니.

이전에 서해 용궁에서 왕도깨비를 보지 못한 것은, 역시 서해를 침략한 흑탑이 도깨비들을 납치했기 때문이었나?

그 과정에서 선대 왕도깨비가 살해당했고?

……어쨌든, 탈해는 패륜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는 것까지 함의된 말이었다.

“이자의 말만으로는 믿을 수 없습니다.”

강림 형이 먼저 받았다.

“……업경이 있다면 거짓을 꿰뚫어 볼 수 있을 테지만.”

아쉽다는 듯이 말꼬리를 흐리는 게, 결국 형은 아직 탈해가 탐탁지 않은 것 같았다.

의심 없이 받아들이기엔 패륜도깨비의 위험성이 너무 컸으니까.

“……새로운 왕이시여.”

탈해는 강림 형을 일별하더니, 다시 내게 말했다.

“저희 아버지께서 만드신 탈은 마음에 드셨습니까.”

내가 천벌을 상대할 때 도깨비탈로 모습을 바꾼 것을 지켜본 모양이었다.

“저승이 문을 닫았을 때, 변고를 직감하신 아버지께서는 염라대왕님의 안위를 걱정하시며 그 탈을 만드셨지요.”

웃음기 없는 나지막한 목소리.

“매일 밤 나무를 손수 깎으시며 아버지께서는 고대하셨습니다. 언젠가 대왕님을 다시 뵙게 될 날을.”

과거를 그리는 눈.

“이제 그 탈은 그분이 남기신 마지막 장난감이 되었습니다.”

그 눈으로 그가 나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 탈의 주인은 결국 당신이 되셨고,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제가 당신께 탈을 바치게 되었군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그는 내가 자신과 같기를 바라고 있었다.

우리가 똑같이 헤어진 아버지를 그리워하기를.

그리하여 내가 나와 똑같은 그를 외면하지 못하기를.

“……형, 그만하죠.”

나는 그의 뜻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새 업경을 만들려면 왕도깨비 손이 필요하니까요. 탈해의 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대왕님……!”

내 말에 형은 인상을 썼다가.

“……당신께서는, 잔정이 너무 많으십니다.”

못마땅한 얼굴로 짜내듯이 말했다.

그러고는 새파랗게 달아오른 눈으로 탈해를 노려봤다.

도리어 한층 올라간 경계심을 드러내며.

“……뭐.”

지켜보던 사라가 입을 열었다.

“왕께서 그리 말씀하셨으니, 우리가 입을 댈 일은 아니다만.”

그가 상황을 정리했다.

“탈해여, 네가 정녕 새로운 왕도깨비라면 그 증명부터 해야 하는 게 맞지 않겠느냐.”

증명.

왕도깨비는 그 신분을 증명하는 두 가지 증표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왕도깨비만 쓸 수 있는 도깨비감투요, 하나는 왕도깨비 본인의 혼이 깃든 본체다.

두 증표는 모두 선대 왕도깨비가 후계자를 위해 백일 밤낮 정성을 들여 만드는 신물(神物)이다.

“네, 제가 미처 생각지 못했군요.”

탈해가 대답했다.

목에 걸었던 헤드셋을 써 보이면서.

“이것이 저의 도깨비감투입니다.”

헤드셋을 쓴 그는 눈 깜짝할 새에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도깨비감투라는 이름에 걸맞는 모습이었다.

“오!”

호구별성이 눈을 빛냈다.

“그게 이번 도깨비감투야? 힙한데!”

도깨비감투…… 도깨비헤드셋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하긴 함달파 걔가 워낙 신식 물건을 좋아했지. 개화기에 제일 신난 놈이 그놈이었잖아.”

“네, 그분은 현대 기술에 관심이 아주 많으셨죠. 도깨비다운 귀감을 갖추신 분이셨습니다.”

탈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의 본체도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만들어주셨죠.”

그가 어깨에 메고 있던 노트북 가방을 꺼내 들었다.

“이것이 제 본체입니다.”

그것은 놀랍게도 정말로 노트북이었다.

들고 다니기 좋게 잘빠진 흰색의 초경량 노트북.

탈해의 혼은 저 노트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쉴 때도 그 안에 깃들어 잠들 터였다.

“오호라, 함달파답군. 이런 본체를 가진 왕도깨비는 네가 처음이겠구나.”

재밌다는 듯 사라가 턱을 매만졌다.

“사실 이 본체에는 슬픈 과거가 있습니다.”

한데 탈해가 문득 다른 말을 꺼냈다.

“20년 전, 제 아버지 함달파께서는 후계자인 저를 위해 역대 최고의 신물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계셨지요.”

어느새 우수에 젖은 눈으로.

“아시다시피 새로 태어난 태자도깨비는 혼이 무르익을 때까지 약 십 년간 본체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도깨비가 본체에서 나올 수 없는 것은 꽤나 괴로운 일이다.

뚜렷한 의식이 있되 혼자서 움직일 수는 없다는 거니까.

다만 왕도깨비가 정성을 들여 만든 태자도깨비 본체에는 신묘한 힘이 있어 신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았다.

1,000년 중 써 볼 수 있는 기회는 고작 10년.

따라서 태자도깨비 본체가 완성되면 많은 신들이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았다.

물건을 직접 써 보기도 하고, 물건에 깃든 태자도깨비와 대화를 나누기도 하는 것이다.

덕분에 본체에 깃든 태자도깨비는 여러 신들의 손을 거치며 별로 심심치 않게 십 년을 보내게 된다.

왕도깨비와 가신들은 보통 저승이나 천계, 용궁 같은 신의 나라에 머무르니, 그를 찾는 신들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선왕께서는 용궁에 머물고 계셨지요.”

우수에 젖은 눈으로 탈해가 말을 이었다.

“용궁, 그 멍청한 생선 대가리들은……! 노트북이 뭔지 몰랐단 말입니다……!”

“……!”

그랬다.

스물세 번째 왕도깨비 함달파는 최고의 신물을 만들겠다며 석탈해의 본체를 삐까뻔쩍한 최신식 노트북으로 만들었지만.

자연 그 자체와 다를 바가 없었던 용궁의 생선…… 아니, 용신들은 노트북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게이트 때문에 저승이 망하고 천계가 닫혔으니, 태자도깨비가 완성되었음에도 다른 신들은 용궁으로 구경 오지 못했고.

결국 태자도깨비 석탈해는 노트북이 뭔지도 모르는 생선…… 용신들에게 둘러싸여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비참한 10년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아니, 그냥 관심을 보이지 않는 정도면 다행이지, 그게 태자도깨비 본체인지도 모르는 용신들 손에 함부로 다뤄지는 수모를 겪기까지 했다나?

“크으으윽, 대왕이시여, 혹시 아십니까!”

10년의 통한이 담긴 눈으로 탈해가 말했다.

“심해에 홀로 뚝 떨어진 현대인의 기분을!”

“……!”

그런데 그 말을 들었을 때.

뜻밖에도 나는 탈해에게서 생각지 못한 동지 의식을 느꼈다.

그가 심해에 떨어진 현대인이었다면, 나는…… 나는 사실 조선 시대에 떨어진 현대인이었으니까!

“……아.”

그 순간 나는 애써 잊고 살았던 신입 차사 시절을 떠올렸다.

전기도, 가스도, 인터넷도 없는 저승에 뚝 떨어져서…… 하루아침에 현대문명의 모든 혜택을 버려야 했던 때를.

룸메이트로 짝지어진 상사는 하필 자동차도 극혐하는 꼰대 중의 꼰대라서.

혼놈들을 잡으러 갈 때도 버스를 타기는커녕 요즘 차사들은 근성이 없다는 둥 말도 안 되는 헛소리나 들으며 발바닥에 땀 나도록 뛰어다녀야 했던 그때를.

아니, 아무리 저승차사 걸음이 빨라도 그렇지, 서울에서 부산까지 뛰라고 하다니!

“……저기, 탈해.”

그것은 내게도 잊을 수 없는 뼈아픈 과거였다.

저승에 적응하느라 쎄빠지게 고생하던 때를 떠올린 나는, 똑같은 현대인의 감수성을 갖추고 태어난 스물네 번째 왕도깨비에게 물었다.

“혹시 저승에 오면…… 그.”

49년간 은밀하게 꿈꿔 왔던 나의 소망을.

“저승에도 전기 놓는 게 가능합니까.”

언젠가 저승도 현대화해야 하지 않겠냐는, 21세기 출신 대왕의 포부를.

“아무렴, 여부가 있겠습니까, 대왕이시여!”

내 말에 탈해가 번쩍 안경알을 빛냈다.

“전기뿐이겠습니까! 가스, 철도, 아니, 일단 랜선부터 깔아버립시다!”

의욕에 가득 찬 공돌이가 불끈 주먹을 쥐어 보였다.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언제까지 명부를 손으로 결재하실 겁니까! 이제 그런 건 다 이메일로 하시는 겁니다, 대왕님!”

“며, 명부를 이메일로?!”

그 말에 나는 명부를 결재받으려고 매일 밤낮 온갖 지옥을 뛰어다니던 때를 떠올렸다.

하루는 뭔 메테오가 쏟아지는 이상한 지옥에 잘못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 거기는 코끼리한테 술을 먹인 죄인이 가는 곳이었다.

당연히 이제는 아무도 없는 지옥인지라, 나가는 데는 또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참나.

그런데 이제 차사들이 돌아다닐 것 없이 이메일로 결재하면 된다고?

저승에 전기와 랜선이 깔린다고?

“왜 이제 왔어, 동생……!”

벅차오르는 감동에 나는 탈해의 손을 꼭 붙잡았다.

“크으윽! 보고 싶었습니다, 형님!”

손이 잡힌 탈해도 즉시 온몸으로 감격을 표현했다.

만난 지 십 분 만에 맺은 의형제였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우리는 이렇게 똑같은 현대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데!

“허.”

그때였다.

“잠깐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대왕님.”

가만있던 강림 형이 끼어들었다.

“명부를 어쩌신다고요?”

팔짱을 낀 그가 눈썹을 굽혔다.

“안 될 말씀이십니다. 신입 차사들이 밤낮으로 지옥을 오가는 것은 다 뜻이 있지요. 그런 과정에서 죽음이란 게, 징악이란 게 이렇게 무거운 것이다, 몸소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걸 없애시겠다는 겁니까?”

왕에게 충언을 한다는 듯 진중한 얼굴로, 그는 실로 거지 같은 꼰대 발언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무엇보다 저게 농담이 아니라는 게 괜히 나를 더 울컥하게 했다.

“형, 마지막으로 지옥에 결재받으러 다닌 게 언제예요?”

나는 형에게 물었다.

“음? 없습니다만.”

내 말에 형이 태연히 대답했다.

“저는 삼백 차사의 머리, 으뜸차사입니다. 그런 제가 말단 차사 따위가 할 일을 그대로 할 리 없잖습니까.”

……형, 지금 ‘따위’라고 했어?

“뭐, 뭐라고?”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왕도깨비가 경악했다.

수천 년을 이어진 관료제의 악습, 문명사회에 있어서는 안 될 폐단을 목도한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형에게 말했다.

“이거 완전 또라이 아니야?!”

역시 그는 21세기에 걸맞은 이성과 감수성을 두루 갖춘 도깨비였다.

경멸 가득한 눈으로 강림 형을 노려보던 탈해가 획 나를 돌아봤다.

“저런 개꼰대 또라이 구시대의 흉물을 아직도 내치지 않으시다니, 과연 대왕님의 하해와 같은 덕망은 따라올 자가 없을 것이옵니다!”

구구절절 아부의 말이 쏟아졌다.

내 손을 꼭 붙잡은 그가 말을 이었다.

“부디 제 가신들을 구해주십시오, 대왕님! 이 석탈해와 저의 가신들이 반드시 당신의 나라에 21세기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좋아, 그러니까 도깨비들을 구해다주면 한반도 최고의 기술자가 저승을 환골탈태시켜준다는 거지?!

패륜도깨비고 뭐고, 내 마음은 이미 스물네 번째 왕도깨비 석탈해를 저승의 귀빈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요, 탈해! 우리 함께 이 저승을 바꿉시다!”

“예, 대왕님!”

“그래서 가신들은 지금 어디 갇혀 있는 겁니까?”

우리가 설레는 마음으로 맞잡은 손에 힘을 더하는 와중.

저승에 밀려오는 시대의 격변을 감지한 구시대의 흉물 강림차사께서는.

“허어어.”

도저히 못 봐주겠다는 듯 팔짱을 낀 채 일침했다.

“나라가 혼탁하니 이젠 별 개뼈다귀 같은 간신이 왕의 귀를 홀리는구나.”

19장. 손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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