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하늘과 땅의 왕(5)
천벌의 중계가 완전히 종료되었다.
천벌이라는 악명이 무색하게도 순식간이었다.
그 단군마저도 나만큼 빠르고 완벽하게 천벌을 끝내지는 못했다.
단지 그와 내 권능의 차이였다.
이 한반도에서 도산지옥의 권능보다 천벌을 상대하는 데 적합한 권능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오늘의 권능은 온전한 나의 힘이 아니었다.
우주가 안배한 용궁의 정기가 아니었다면, 나로선 아직 도산지옥의 권능을 완벽하게 사용하지 못했을 터였다.
-우주가 하늘과 땅의 왕에게 모두 천벌을 맡겼습니다.
그날, 내게 우주의 뜻을 전했던 바리는 말했다.
-왕이시여, 우주는…… 당신이 단군의 한반도를 무너뜨리기를 원합니다.
한순간이나마 우주가 내게 이러한 권능을 허락한 이유를.
23년 전 내 손으로 살렸던 남자는, 이제 우주가 선택한 나의 맞수가 된 것이다.
***
-단군은 정녕 한반도의 구원자가 맞는가?
5년 전 어느 신문에 실린 칼럼의 제목.
한껏 고상한 어투로 쓰였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러했다.
‘나는 단군이 아직도 인기가 너무 많아서 속이 뒤틀린다.’
단군이 한반도의 영웅으로 군림하는 한, 나머지 여덟 명의 전설급 각성자들은 결코 한반도를 손에 넣을 수 없다.
문제는 단군 본인도 한반도를 가질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현재 한반도는 아홉 개의 연맹으로 나뉜 상태였다.
주몽의 ‘고구려’.
궁예의 ‘미륵’.
수로왕의 ‘가야’.
불의 ‘적탑’.
금의 ‘백탑’.
땅의 ‘황탑’.
물의 ‘흑탑’.
나무의 ‘청탑’.
마지막으로 단군의 ‘천부인’.
이렇게 나뉘기 전까지 한반도는 5년간 끊임없이 전쟁에 시달렸다.
수백 명의 각성자들이 ‘경애’와 ‘신앙’을 모으기 위해 비각성자를 무력으로 착취했다.
전쟁으로 지역의 패자가 바뀔 때마다 비각성자들은 그들에게 억지로 신앙을 바쳐야 했다.
그렇게 5년.
모두가 고통받던 때 단군이 나타났다.
단군.
한반도 최초의 전설급 각성자.
그는 두 번째 천벌을 막아 모든 이가 그를 경애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고.
그렇게 쌓인 신앙으로 단숨에 한반도의 전쟁을 끝내버렸다.
‘경애’와 ‘신앙’은 필드의 힘을 증폭시키는 최고의 자원이었으니까.
오랜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염원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자 단군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막대한 힘을 누렸다.
그런데 그는 그때 그 힘으로 한반도를 완전히 평정하지 않았다.
다른 오만한 각성자들처럼 한반도가 나의 것이라 선포하지도 않았다.
전쟁을 끝낸 그는, 수천만의 경애를 받으며 권좌에 오르기는커녕 한반도 전체에 말했다.
신도를 빼앗기 위한 전쟁을 멈추고, 신도들이 직접 그들의 신을 선택하게 하자고.
정말로 인간에서 신이 되고 싶다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여 그들에게 직접 받들어지라고.
이것이 바로 단군의 ‘홍익인간’ 선언이었다.
게이트가 열린 지 꼬박 35년 만의 일이었다.
전쟁이 끝난 한반도에 비로소 제대로 된 ‘문명의 통치’가 돌아왔다.
단군의 말대로 지역을 살기 좋게 통치해야만, 신도를 유지하고 힘을 누릴 수 있었다.
뒤이어 여덟 명의 전설급 각성자들이 새로 탄생하면서 한반도는 총 아홉 개의 연맹으로 나뉘게 되었다.
그렇게 15년.
단군은 홀로 왕좌에 군림하지 않고 만인에게 통치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내가 아는 ‘주도혁’다운 선택이었다.
-제가 제일 강하다는 게, 그분들보다 더 오래 살아야 할 이유는 되지 않으니까요.
그런 이유로 열두 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스물일곱 살의 청년은.
이제는 ‘내가 제일 강하다는 게 모두가 나를 선택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최강자가 되었다.
그건 분명 이상적인 행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모든 사람이 전부 단군 같지는 않다는 데서 발생했다.
영웅의 비극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단군은 한반도의 권좌에 오를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저 한반도의 모든 이에게 신을 선택할 자유를 줬을 뿐이다.
그러나 단군을 따르던 천부인의 간부들은 아니었다.
이대로 계속 단군을 따르면 영원히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없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천부인의 간부들은 각자 다른 각성자를 주인으로 섬겼다.
천부인을 떠난 그들은 단군을 섬기던 자들이라는 간판을 이용해서 단군에 대한 온갖 음해와 모략을 시도했다.
그 결과 점차 단군에게 터무니없는 반감을 갖는 자들이 늘어갔다.
바위가 비를 맞아 풍화되는 것처럼, 영원할 것만 같던 단군의 위상도 풍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때 한반도 전체를 신도로 삼았던 단군은, 이제 2천만 명이 조금 넘는 신도를 거느리게 되었으며 그 수는 지금도 시시각각 줄어드는 중이었다.
요컨대 단군은 타고난 성정 덕에 한반도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그 바른 성정 때문에 본인의 정치적 기반이 너무나도 약해지고 말았다.
야욕을 버리지 못한 한반도의 모든 각성자들이 그의 적이었다.
그의 힘은 온전히 그를 영웅으로 떠받드는 2천만 명의 신도들에게서 나왔다.
단군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영웅의 모습을 버리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힘이었다.
대중이 사랑한 것은 인간의 욕망을 초월한 존재로서의 단군이었다.
그런데 세 번째 천벌의 날.
단군이 가지고 있던 유일무이한 무기, 범접할 수 없는 영웅의 고귀함마저 위협받게 되었다.
염라.
정말로 인간의 세태를 초월한 진짜 신이 강림했기 때문에.
달이 태양에 가려지듯.
영웅은 신의 존재로 가려질 수 있다.
단군이 대중의 인기를 유지한 것은, 아무리 다른 세력이 그를 음해한다 한들 그를 대체할 수 있는 고결한 존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단군에 버금가는 또 다른 고결한 존재가 나타난다면?
그렇다면 대중은, 단군이 이룩한 한반도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왕이시여, 우주는…… 당신이 단군의 한반도를 무너뜨리기를 원합니다.
바리가 내게 그러게 말했을 때.
나는 나를 이 순간에 안배한 우주의 뜻을 이해했다.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의 집합체, 우주.
우주는 결코 한반도의 고착을 원하지 않았다.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하나로 수렴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단군은 타고난 성정으로 모두에게 그들의 신을 선택할 자유를 주었지만.
그 바른 성정으로 가장 큰 지지를 받는 바람에 한반도의 정세를 15년이나 고착시키고 말았다.
아무리 위세가 꺾이고 있다 해도 단군은 여전히 한반도의 절반에 가까운 지지를 받고 있었다.
나머지 여덟 명의 각성자가 힘을 합쳐 단군을 친다면 이길 수도 있겠지.
그러나 아무런 명분 없이 영웅을 쳐봤자 그저 15년 전처럼 한반도의 모든 신앙이 가엾은 단군에게 집중될 뿐이다.
그러므로.
단군이 있는 한 아무도 한반도를 손에 넣을 수 없으며, 단군마저 한반도를 손에 넣을 생각이 없다는 고착.
우주는 그것이 염라에 의해 깨지기를 원했다.
단군이 당장 몰락하는 걸 바라는 게 아니다.
조금의 틈이라도 상관없다.
염라의 존재를 앞세워 단군이 쌓아 올린 초월적 위치부터 무너뜨리려는 것이니.
모든 전설을 한데로 엮어 하나의 신화로 만들어 내려면 그와의 충돌은 필연적이다.
결국 나의 존재는 그가 이룩한 평화를 위협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는 한반도의 신화가 되려는 나의 가장 큰 적이 될 것이다.
-너의 가장 큰 적은 너와 다른 곳을 바라보는 선일 것이다.
그래, 언젠가부터 내게 숙명처럼 새겨진 그 말처럼.
***
삼차사가 기다리는 공터로 돌아왔다.
“오셨습니까, 대왕님.”
선비탈을 쓴 강림 형이 나를 맞이했다.
왕도깨비가 만든 탈을 쓴 터라 몸과 목소리가 샌님처럼 가늘었다.
“이야, 전하. 반응 장난 아닌데.”
할미탈을 쓴 호구별성도 굽은 등으로 나를 맞이했다.
뒤로는 백정탈을 쓴 사라가 두꺼워진 몸으로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이거 봐라. 다들 너랑 단군 얘기뿐이다.”
호구별성이 내게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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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커뮤니티는 온통 염라의 이름으로 가득했다.
리젠이 빨라서 대부분이 무플인 와중 간혹 눈에 띄는 제목들이 있었다.
스크롤을 내리다가 핫 게시물 탭을 클릭했더니 픽 헛웃음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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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봐도 단군과 염라가 싸우면 누가 이기느냐가 초유의 관심사다.
【……그게 정말로 중요하냐, 인간들아.】
예상 그대로의 반응에 나는 쓰게 웃었다.
***
북극점.
우주질서보존회 지구 본부.
지구청장 조옥희의 책상 뒤에 배치된 거대한 괘종시계.
지구 전역의 시간을 알리며,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기준 또한 지구와 완전히 다른 그 시계는 현재 오로지 한반도의 시간만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반도의 세 번째 천벌이 종료되었습니다.”
안보팀장 조금희는 시계가 가리키는 ‘3’을 일별하곤 청장에게 보고했다.
“결국 단군과 염라가 나눠 가졌군요.”
썩 유쾌하지 못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미 죽었어야 할 단군이 세 번을 모두 차지한 것은 역시 비정상적이지요.”
단군.
그는 우주질서보존회 안보팀의 최대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15년 전, 천부인의 단군은 ‘홍익인간’이라는 웃기는 룰을 선포하면서 한반도의 모든 전쟁을 사실상 금지시켰다.
전쟁이 끝난 것은 한반도의 인간들에게는 좋은 일이었으나.
한반도의 모든 가능성을 추적하는 우주질서보존회 입장에서는 전혀 달갑지 않았다.
‘전쟁’은 우주가 한 좌표의 개체를 여과하는 데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한데 단군이 전쟁을 금지한 탓에 사실상 한반도의 정세가 15년이나 고착되고 말았다.
이레귤러.
한낱 3차원의 존재가 이 사업에서 가장 불쾌한 판을 짜낸 버그가 되었으니, 버그를 처리하는 ‘안보팀장’으로서는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일이 참 재미있게 돌아가는군요.”
그녀가 말을 이었다.
“염라, 그는 기어코 자신의 최대 적수를 제 손으로 만들어 냈으니.”
말하면서도 그녀가 조용히 분노를 삼켰다.
단군, 그 이레귤러가 이 행성의 버그라면.
염라, 그 약소한 신은 이 행성에 온갖 버그를 만들어 낸 종양이었다.
‘그래, 악성종양.’
이레귤러 단군이 언젠가부터 두각을 드러내고 버그로 작용하면서.
우주질서보존회는 뒤늦게 왜 이런 존재가 탄생했는지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공간을 뒤져 발견한 것이 바로 저 악성종양, 염라였다.
‘당시에는 염라조차 아니었던 하찮은 저승차사가.’
23년 전, 지구의 악성종양 이제연은 보잘것없는 권능으로 명부를 찢어 시스템에 오류를 일으켰다.
분명 천벌이 남긴 숫자는 ‘12’였건만 그 자리의 생존자는 ‘13’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또한 일종의 버그였다.
버그란 우주질서보존회가 설계한 시스템에 인간이 개입하여 다른 효과를 내는 것.
사업을 위해 설계된 첫 번째 천벌에서, 저 종양이 명부를 찢는 바람에 ‘13’이어야 할 것이 ‘12’로 표기되는 오류가 발생했다.
오류를 발견했을 땐 이미 무수한 인과가 생성된 후였다.
‘인간이 우주질서보존회 시스템에 개입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주의 역사에 편입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그저 작은 표기 오류에 불과했던 그것은 그렇게 전 역사를 통틀어 눈덩이처럼 불어나 시공간 전체를 비틀어버렸다.
결국 차원의 악성종양 이제연은, 단군처럼 존재할 수 없는 이레귤러를 탄생시켰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발생하는 무수한 버그의 원흉인 것이다.
인간이 시스템을 조작할 수 있다.
단군으로 인해 그 사실을 알게 된 다른 인간들이 전 역사에 걸쳐 시스템을 입맛대로 비틀기 시작했으므로.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삭제하려고 했던 건데.’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안보팀장 조금희는 아무도 모르게 입꼬리를 씰룩였다.
종양이 저승 던전에 들어갔던 당시.
그녀는 분명 악성종양 이제연을 깨끗하게 삭제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팀장인 그녀가 친히 던전에 들어간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청장이 삭제 요청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바람에.
‘청장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 종양을 내버려 두는 걸까?’
그녀는 의문이었다.
이제연.
전 시공간에 얽힌 모든 버그들의 기원이 된.
우주질서보존회가 모든 인과를 뒤져가며 꾸준히 추적해 왔던 ‘최초의 버그’를 대체 왜 내버려 두는지.
“……뭐, 이것도 다 우주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때 청장이 불쑥 말을 받았다.
“…….”
우주의 뜻이라.
우주질서보존회를 움직이는 절대적인 법칙에 팀장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군요, 우주의 뜻이지요.”
팀장의 말에 청장도 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 모든 것이 우주의 뜻입니다.”
18장. 하늘과 땅의 왕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