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하늘과 땅의 왕(3)
23년 전.
첫 번째 천벌이 발생한 날이었다.
생불왕 삼신할미조차 어쩔 수 없었던 수많은 죽음을 앞두었을 때.
머지않아 신의 권능이 무너질 것을 직감한 염라는 그날 거둔 망자는 큰 죄인이 아니라면 재판 없이 곧바로 환생시킬 것을 명했다.
윤회가 무너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혼을 돌려보내기 위해서였다.
예고된 천벌의 날.
삼백 차사가 모두 모인 하늘은 스산했다.
끝없이 늘어진 검은 행렬은 그 자체로 거대한 장례 의식 같았다.
그런데 그곳에서.
죽음의 집행자가 모두 모인 그곳에서 처음으로 삼신의 예언이 빗나갔다.
18,828명이 죽을 것이라던 예언과 달리, 12명이 끝까지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18,828명 중에 고작 12명이었지만 파장은 컸다.
저승이 세워진 이래 처음으로 신의 개입 없이 운명이 바뀐 것이었으니까.
18,828명을 죽일 것이라 예언되었던 천벌이 아직 ‘12’를 머리 위에 남긴 채로 사라졌을 때.
-정말이야, 죽지 않았어!
-명부가 빗나갔어!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살아남은 12명의 명부를 쥔 차사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명부가 빗나갔다고?
-괴물에게 죽는 것은 항상 정확했잖아!
-그래, 설령 던전이라도 삼신의 눈을 피할 순 없어!
-그런데 이번에는 괴물이 먼저 죽었어!
그 사이 18,816명의 망자를 인도하던 다른 차사들도 당혹했다.
-저자, 저자가 괴물을 없앴어!
그리고 그 중심에 스물일곱의 젊은 헌터 주도혁이 있었다.
천벌이 아직 12라는 숫자를 남겨뒀을 때.
제 목숨을 걸고 그것을 끝냄으로써 12명을 구해 낸 남자가.
-저자, 결국 저자인가!
-저자가 12명의 운명을 바꾼 거야!
이윽고 차사들은 서로 찾기 시작했다.
-이봐, 누구 저놈 명부 없어?
혹시 주도혁의 명부를 든 차사가 있는지.
-없어!
-나도 없어!
-나도 아니야!
한참 서로 머리를 맞댄 끝에 298명의 시선이 한 명에게로 모였다.
-……저도.
299번째 차사였던 나였다.
-……저도, 없습니다.
나는 내 몫의 명부를 쥐고 대답했다.
그러나 거짓말이었다.
내 몫의 명부에는 주도혁의 것도 있었다.
그는 참사로부터 두 시간 뒤 홀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할 운명이었다.
천벌을 쓰리트리는 과정에서 입은 치명상으로 인하여.
하지만 당시 나는 그것이 불합리하다고 느꼈다.
제 목숨을 바쳐 12명의 운명을 바꾼 자가, 정작 본인은 운명대로 죽어야 한다는 게.
주도혁.
그가 본래 천벌을 쓰러트리기로 예정된 시간은 천벌이 남은 12명까지 모조리 죽인 다음 훨씬 약해졌을 때였다.
그러나 그는 운명을 비틀어 아직 12명이 살아 있을 때, 그래서 더욱 강한 상태의 천벌에 맞섰다.
타고난 영웅의 기질로, 제 목숨을 걸어, 기어이 12명을 구해 낸 것이다.
그의 죽음은 불합리했고, 부조리했다.
그런 이가 살아남는다면 분명 훨씬 더 많은 일을 해낼 테니까.
그래서 그의 명부를 숨겼다.
그의 죽음에 납득할 수 없어서.
그가 명부대로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렇군, 저자야.
차사들은 내 말을 믿었다.
-삼신께서는 분명 참사에 휘말린 모두가 명부에 적혀 있다고 하셨어. 그런데 엉뚱하게도 명부 없는 저자가 참사에 뛰어들었지.
그들은 망연히 중얼거렸다.
-……운명이 예정하지 않은 자가 운명을 바꾼 거야.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18,816명의 혼을 인도하느라 경황이 없어 보지 못했다.
천벌 종료 수십 분 전.
주도혁이 치명상을 입는 순간 천벌의 머리 위의 숫자가 하나 줄었음을.
괴물로 인한 죽음의 운명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 하나 성사되었음을.
다른 차사들은 ‘12’가 남았는데도 13명이 살아남은 것만을 보았고, 운명에 예정되지 않은 주도혁이 운명을 바꾼 것이라 여겼다.
그렇게 나는 그의 명부를 감춘 사실을 들키지 않았다.
애초에 속이는 것이 불가능한 두 분을 제외하고는.
“끝났군.”
강림 형이 말했다.
“저게 마지막 머리다.”
단군이 쏘아 올린 불꽃이 0을 가리켰다.
천벌과 그를 가둔 결계 내부는 아직도 요란한 폭우와 화염으로 뒤엉켜 있었다.
아마 단군이 마지막 화력을 퍼붓고 있을 터였다.
“일각이 조금 넘었나? 과연 대단하구나.”
사라가 평했다.
토벌 소요 시간은 단 20분.
천부인의 정예 수백 명이 천벌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지만, 그 사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단군 한 사람만의 힘이었다.
결계 내에서 홀로 상대했기에 부상자는 물론 사망자도 없었다.
-아아-아아아아아---!
한데 그때였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결계 안에서 거인이 괴성을 내질렀다.
동시에 여태껏 단단히 작동했던 결계가 불길하게 요동쳤다.
“야, 저거 깨진다!”
호구별성이 소리쳤다.
결계에 작은 실금이 생기더니 순식간에 균열이 번졌다.
파아아아앙!
결계가 깨지면서 천벌과 단군의 모습이 드러났다.
목을 살짝 덮는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렸다.
처음의 단정했던 모습은 이미 없다.
면류관도, 곁을 지키던 여인과 호랑이도 사라졌다.
마력을 공급하던 신성한 나무마저 이제는 그저 앙상한 가지뿐이다.
“왜 가만히 있지?”
강림 형이 말했다.
“아직 힘을 다 쓴 것 같진 않은데.”
결계가 깨진 것은 그렇다 치고 공격까지 중단한 것에 의문을 느끼는 듯.
그런데 천벌이 단군을 후려치려는 순간.
높이 뛰어오른 단군이 권총을 꺼내 들며 소리쳤다.
-지금입니다!
지금?
무엇이?
뻐어어어어엉!
외침과 동시에 단군의 총이 불을 뿜었다.
지금껏 보여주었던 것보다 더욱더 큰 화력으로.
화르르륵!
치솟는 화염에 천벌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
그런데 그 순간.
머리만이 아니라 몸통까지 재가 되어버린 천벌의 뒤로 뜻밖에도 기묘한 빛이 일렁였다.
마치 어떤 불길한 마법의 캐스팅을 연상시키던 그 빛은 어느새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가 되더니 수천 갈래로 갈라졌다.
“이런.”
무수한 불덩이들은 자아를 가진 것처럼 공격적으로 날뛰었고, 이내 쫓기도 힘든 속도로 사방에 흩어졌다.
그에 모두가 눈치챘다.
천벌의 마지막 공격이 어디로 향하는지.
“만 명 다…… 대피시킨 사람들까지 전부 쫓아가서 죽이려는 거야!”
파아아앙!
단군을 중심으로 잎사귀를 닮은 빛이 번졌다.
똑같이 수천 갈래로 갈라진 녹색의 빛은 맹렬하게 불꽃을 뒤쫓았다.
동시에 곳곳에 퍼져 있던 천부인의 길드원들도 일제히 엎드리며 하늘에 손을 올렸다.
“주술이다!”
호구별성이 외쳤다.
“저 많은 애들이 전부 같은 주술을 펼치고 있어!”
그러더니 대번에 구조를 파악했다.
“근데 저마저도 결국 단군의 주술을 빌려 쓰는 거야.”
그 말대로 저것은 단군의 필드 효과일지도 몰랐다.
영웅담 이상의 필드는 그 힘을 신도들에게 나누어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천부인의 주술이 미처 완성되기 전에.
-아악!
-꺄아악!
-안 돼, 안 돼……!
화면 너머로 아득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놓쳐버린 불덩이들이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정없이 피가 튀었다.
그것들은 흡사 실체화된 악의처럼 사람들을 마구 헤집었다.
그리고 잠시 뒤.
찰나였지만 영원 같았던 시간 끝에 천부인의 주문이 완성되었다.
파아아아아—앙!
한순간 녹색을 띤 빛이 화면 가득 번쩍였다.
직후 멋대로 날뛰던 불덩이들은 그 자리에서 움직임을 멈추더니, 곧장 화기를 잃고 곤두박질쳤다.
아니, 정확히는 곤두박질치다 말고 허공에서 사그라들다 소멸했다.
단군과 천부인의 주술이 불덩이를 모두 파괴한 것이다.
“……그래, 저것도 알고 있었군.”
사라가 말했다.
“저 마지막 공격마저 그는 최대한의 대비를 한 거야.”
모두가 깨달았다.
단군이 천부인을 대동한 것은 저것을 위해서였다.
천벌이 끝남과 동시에 펼쳐지는 일격.
만 명을 끝까지 쫓아가서 죽이는 마지막 광역기를 막기 위해서.
마침내 세 번째 천벌이 완전히 끝났다.
잿더미가 된 천벌 위로 필드의 법칙을 알리던 숫자가 희미하게 빛났다.
‘10,266’라는 숫자는, 어느새 ‘10,007’이 되어 있었다.
단군은 천벌이 사라진 자리를 지켜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부인. 그분들을 인도하십시오.
주변의 길드원들을 향해 그의 명령이 이어졌다.
-그분들의 마지막은 우리가 함께할 것입니다.
그제야 사방에서 생존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끝났어?
-사, 살았다.
-살았어, 살았다고!
처음에는 살아남았다는 안도였다.
-끝났어, 천벌이.
-단군, 이번에도 단군이 천벌을!
-단군, 단군……!
뒤이어 연달아 환호성도 터졌다.
-와아아---단군!
-끝났다----!!
-단군----!!
-단군이 천벌을 끝냈어----!
그렇게 모두가 승리를 반기려는 순간이었다.
-여러분.
단군이 다시 말했다.
차분하고 잔잔한 목소리는 마력이라도 실렸는지 일대를 울릴 만큼 컸다.
-지금 이곳에는 무사하신 10,007분과 미처 구하지 못한 259분이 함께 계십니다.
단숨에 환호를 잠재우는 목소리였다.
-오늘 하루는 부디 259분만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단군은 10,007명을 살려 낸 영웅이 아니라, 지키지 못한 259명의 죽음을 애도하는 역할을 자처했다.
-우리에게는, 그분들과 달리 내일이 있지 않습니까.
엉망이 된 아파트 단지 전체에 묵직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의 말에는 그만한 무게가 있었다.
그의 말대로 살아남은 자는 내일도 기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 자들의 안도는 어느새 남겨진 자들의 통곡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나는 화면 속 단군을 응시했다.
내가 기억하는 얼굴.
그는 첫 번째 천벌을 끝냈을 때도 똑같은 얼굴이었다.
그때도 그는 그가 구해 낸 사람들의 칭송을 원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남은 자들이 신경 쓰지 않게 조용히.
수명이 다한 신수처럼 죽을 자리를 찾아 떠났을 뿐이었다.
나는 그런 그가 못내 눈에 밟혀서, 그의 수명이 다하는 순간을 기다리며 명부를 만지작거렸다.
차사들에게 존재를 감췄던 그의 명부를.
내가 집행해야 할 죽음을.
저 남자를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둬야 할지.
아니면 내 보잘것없는 권능으로나마 막아야 할지.
무엇이 정말로 옳은 것인지를 고민했다.
-……왜 그런 선택을 했습니까?
그래서 물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던 그에게.
그는 이미 기력이 다해 두 눈을 감은 채였다.
무너져 가는 벽에 기대어 예정된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자들이 모두 그러하듯, 그는 저승사자의 물음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제가 제일 강했기 때문입니다.
덤덤한 대답에 나는 다시 한번 물었다.
-단지 당신이 제일 강했기 때문에 천벌을 쓰러트렸단 겁니까?
그때 나는 제대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예정된 때보다 먼저 천벌에 맞섰는지.
무엇이 그로 하여금 12명의 운명을 바꾸게 만들었는지.
그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바꾼 사람은 대체 어떤 마음으로 사는지.
-제가 제일 강하다는 게, 그분들보다 더 오래 살아야 할 이유는 되지 않으니까요.
그것이 전부였다.
죽음을 앞두고도 그는 평온했다.
한 인간이 다른 이들의 죽음을 막겠다 결단한 마음은 거창하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나 사명을 지니고 있지도 않았다.
단지 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실천했다.
그래, 그렇기에.
그것은 한 차사가 한 인간의 죽음을 막겠다 결단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
화면 속의 단군이 발을 내디뎠다.
죽은 자를 기리자는 말 외에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시신을 인도하는 천부인 길드원들이 그를 뒤따랐다.
가족을 잃은 자들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들을 뒤따랐다.
그의 당부대로 모두가 오늘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다.
그렇게 천벌의 생중계가 끝났다.
끝난 것처럼 보였다.
“…….”
나는 잠시 중계가 끝난 화면을 지켜보다가.
“……하늘의 왕이 우주가 부여한 사명을 마쳤네요.”
천천히 나의 차사들에게 말했다.
“이 한반도에 그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진심이었다.
259명을 지키지 못했지만, 누구도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나머지 259명의 죽음이 아무렇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겠지.
결국 누군가는 또 목숨을, 가족을 잃었다.
단군이 말했듯 지키지 못한 자들의 무게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러니까 저는 이제 땅의 왕으로서 반드시 남은 모두를 지키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분 후, 다시 한번 천벌이 내려올 것이다.
만인을 지킨 영웅, 단군조차도 그 존재를 모르는.
우주가 땅의 왕에게 맡긴 두 번째 격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