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서해 용궁(5)
신화전에서 승리했다.
[ ‘지옥이 자라는 땅’ 필드를 해체했습니다! ]
[ ‘심해의 수호자’ 필드가 신화전에서 승리했습니다! ]
[ 신화전이 남긴 카르마가 재구성됩니다! ]
[ 카르마 포인트를 ‘137,200’ 획득합니다! ]
[ 신앙을 ‘232,570’ 획득합니다! ]
“……!”
연달아 이어지는 팝업창에는 다소 놀랐다.
카르마 포인트는 물론이고 신앙이 23만이 넘게 쓰였다니.
모르긴 해도 이 필드를 잃은 것만으로도 흑탑은 피해가 클 것이다.
신도의 ‘경애’가 1만이 모여야 겨우 1의 ‘신앙’이 된다.
그런데 그 작은 경애조차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대상을 진심으로 경애한 순간 생기기 때문이다.
즉 신앙 20만은 신도 2천만의 천부인이라도 쉬이 모을 수 없는 자원이다.
그런데 지금 흑탑은 그것을 잃었다.
반대로, 우리는 아직 신도가 없는 상태에서 제법 많은 신앙을 얻었고.
그러니 나중에 흑탑을 치게 된다면 오늘 일은 분명 충분한 호재가 될 것이다.
“…….”
그때였다.
쩌어어엉!
불현듯 뒤에 세웠던 세 개의 업경에 금이 가더니, 손쓸 새도 없이 업경 전체로 번져 나갔다.
“……무슨?!”
파장창!
결국 깨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산산조각 난 거울의 파편이 곧바로 내게 쏟아져 내렸다.
“대왕님!”
파편은 나를 상처 입히는 일 없이 연기가 되어 사라졌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형은 금세 지척으로 다가와 내 몸을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분명 파편이 사라지는 걸 봤을 텐데도 상처를 찾으려는 듯 몸을 훑는 시선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아.”
형이 짊어진 것과 내가 짊어진 것을 자각하게 하는 눈.
이무기를 상대하고 기절했던 그때와 무척이나 닮은 태도.
그 앞에서 또다시 차오르는 불편함을 내리눌렀다.
지옥수의 살점들이 곳곳에 튀어 지저분해졌을 뿐 딱히 다친 곳은 없었다.
내 상처가 아니라고.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그런 말 대신 나는 보란 듯이 몸에 붙은 살점들을 털었다.
무너지던 서해 용궁의 모습에 그가 이 이상 10년 전을 겹쳐 보지 않기를 바라며.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형, 업경이…….”
깨진 업경을 가리키며 화제를 돌렸다.
아니, 정확히는 업경이 서 있던 자리라고 해야겠지만.
“……제가 잘못 쓴 걸까요?”
막상 화제를 돌리고 나니 뒤늦게 걱정이 샘솟았다.
기껏 사라진 업경을 되찾았는데 고작 한 번 쓰고 깨 먹은 것이라면 나는…… 솔직하게, 내가 친 사고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
내 물음에도 형은 한동안 묵묵부답하다 정말로 내게 아무런 상처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차분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처음부터 완전한 업경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나와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용궁에 머물던 왕도깨비가 새 업경을 만들고 있던 모양입니다. 다만 아직 완전치 못해 이렇게 깨져 버렸나 보군요.”
업경이 깨진 건 내 탓이 아니라는 듯.
“업경은 본디 대왕님의 혼과 연결되는 물건입니다. 전에 보셨던 업경은…… 아마 돌아가신 대왕님과 함께 소멸했을 테지요.”
“……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래, 그렇구나.
우리 대왕님께서 쓰시던 업경은 이제 없구나.
……내가 그것을 물려받을 순 없겠구나.
“그런데 새 업경을 만들던 왕도깨비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군요.”
말을 잇던 형이 문득 인상을 썼다.
“새로운 업경을 만들려면 그의 손이 필요할 터인데.”
그 말에 별장군의 기억에서도 왕도깨비를 보지 못한 게 떠올랐다.
시왕의 무기를 만들던 왕도깨비와 가신들.
서해 용궁에 머물고 있었다던 그들은 또 어떻게 된 걸까?
“……어쨌든, 그럼 당장은 신화전에서 승리했으니 된 거네요.”
한숨을 쉬며 상황을 정리했다.
깨진 업경도, 왕도깨비의 행방도 아쉬웠지만 그래도 서해 용궁의 터를 지켜 내고 진광대왕님의 검을 얻었으니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이제 그만 저승으로 돌아가죠.”
문득 처음 용궁에 오려고 했던 이유가 떠올랐다.
용궁의 힘으로 오염된 광천못의 침식을 막기 위해서였는데.
이렇게 되면 바로 용신들의 권능을 빌리기는 힘들다.
그래도 고등어 왕자가 계속해서 못에 머물러 준다면 더 이상의 침식은 막을 수 있다.
게다가 서해 용신들이 동해로 대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어떻게든 동해 용궁에 연락을 취해 볼 수 있을 테고.
왕자도 엉망이 된 서해에 홀로 남는 것보다는 우리와 함께 가는 편이 낫겠지.
“……돌아가면 할 일이 많겠지만, 일단 막내 왕자님도 당분간은 저승에서 보호해 드리기로 하고요.”
그렇게 일을 마무리하려고 할 때였다.
-잠깐, 이쪽으로 와 보시오, 염라!
어느새 지옥수가 있던 자리로 헤엄쳐 간 고등어가 소리쳤다.
내 분신들이 베어 낸, 핵이 없는 나머지 네 그루의 지옥수가 있던 위치였다.
-나무가 내 보물고를 품고 있었소!
고등어가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외쳤다.
왕자의 말대로 그 자리에는 어느새 영롱한 금은보화가 가득 쌓여 있었다.
-내 보물에서 용궁의 정기를 흡수하고 있었군. 그대에게 보은을 할 수 있겠어!
그새 눈이 반짝반짝해진 고등어가 신이 나서 말했다.
-이제 모두 그대의 것이오, 염라!
“뭐어?! 이걸 다 준다고?!”
듣고 있던 호구별성이 경악했다.
“아니, 여의주도 턱턱 빌려주더만! 왕자야, 너 그렇게 살면 안 된다!”
그녀는 전 재산을 냉큼 다 내준다는 소년 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충고했지만, 고등어는 단호하게 펄떡였다.
-아바마마께서 그러셨지. 보물은 다시 쌓이지만 인연은 그렇지 않다고.
뭔가 늠름하게 보이고 싶은 듯 지느러미도 크게 들썩이면서.
-그대가 이 서해를 구했소. 아바마마도 형님들도 모두 그러라고 하셨을 것이오!
나는 잠시 고등어와 보물들을 바라보다가, 그냥 조금 웃었다.
“예, 감사합니다, 왕자님.”
뭐, 지금으로선 저승에 두는 것이 좋을 테니까.
용궁이 정상화되면 그때 다시 돌려주면 되고.
“……근데 이걸 다 어떻게 옮기지.”
문제는 보물의 양이 지나치게 많다는 점이었다.
물 밖으로 옮기는 일이 첫 번째고, 가까스로 성공한다 해도 자동차 트렁크에 전부 실을 수 없다는 게 두 번째인데.
나는 난감한 심정으로 보물더미에 손을 올렸다.
한데 그 순간.
“……!”
손에 닿은 보물 전체가 짧게 번쩍였다.
직후.
[ 서해 용궁의 보물(E) ]
뜻밖에도 보물들이 모두 인벤토리에 들어갔다.
“……이것도 들어온다고?”
뿐만 아니라.
“아.”
산더미 같던 보물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보물에 가려져 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이건?”
복숭아씨만 한 크기의 검은 씨앗들이었다.
그 수는 다섯 개.
지옥수의 숫자와 같았다.
씨앗 하나를 줍자 그 또한 아이템이 되어 인벤토리에 수납되었다.
[ 발설지옥의 씨앗(L) ]
- 혀로 지은 죄를 심판하는 발설지옥의 씨앗. 조건이 갖추어지면 발설지옥으로 발아한다.
뭔가 익숙한 이름을 가진 채로.
“지옥의 씨앗이라고?”
서둘러 확인해 보니 다른 네 개의 씨앗도 마찬가지였다.
도산지옥의 씨앗, 화탕지옥의 씨앗, 한빙지옥의 씨앗, 검수지옥의 씨앗.
모두 시왕지옥의 이름을 가진 씨앗들이다.
다섯 개의 씨앗을 도로 꺼내어 살펴보았다.
이름과는 달리 내 눈에는 그냥 평범한 씨앗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으음, 그거 평범한 씨앗이 아니로구나.”
문득 사라가 곁에 서며 말을 보탰다.
“정말로 저승의 신성이 담겨 있어.”
서천꽃감관답게 그의 눈에는 씨앗이 품은 권능이 보이는 듯했다.
“그래, 그걸로 지옥수를 키웠나 보구나.”
그 말에 자연스레 씨앗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리도 씨앗을 이용해 사라져 버린 시왕지옥을 되찾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서해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이 씨앗들일지도 모른다.
“대왕님, 이것도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강림 형이 다른 한쪽에서 바닥을 구르는 뭔가를 주워 들었다.
그가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내민 그것은 자그마한 유리병이었는데, 그 안에서 출렁이는 액체는 용궁의 물건답게 범상치 않은 푸른빛을 머금고 있었다.
“이건 포션인가?”
대수롭지 않게 그것을 받았다.
저승 재건의 실마리를 얻은 마당에, 용궁의 포션이라고 한들 더 놀랄 일은 없을 거라 여기면서.
“……어?”
그런데 아이템의 효과가 눈에 들어온 순간.
“……말도 안 돼. 이런 게 있었다고?”
불현듯 잊고 있던 바리의 말이 떠올랐다.
-우주의 시공간은 하나예요.
-그래서 우주에게 과거와 현재는 의미가 없어요.
-그러니 우주가 오빠에게 천벌을 맡긴다면, 오빠에게 지금 당장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내게 천벌을 맡기겠다는 게 무슨 뜻이었는지,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능력이 없는 지금조차도, 결국 오빠가 천벌을 막아내는 미래와 하나이기 때문에.
“……이겼어.”
때문에 나는 직감했다.
“바리가…… 단군을 이겼어.”
결국 바리의 기도가 성공했다고.
씨앗.
포션.
진광대왕님의 검.
용궁에서 얻은 모든 것들.
그것들은 결국 내게 천벌을 맡기겠다는 우주의 안배였으며.
지난 사흘간, 바리가 염라를 선택해달라 우주에게 청한 결과였다고.
***
저승으로 돌아가는 차 안.
“대왕, 이제 제대로 말해 보지 그러냐.”
팔짱을 낀 사라가 조수석에서 물었다.
“그래, 바리가 이겼다니 무슨 소리야?”
뒤에서 호구별성도 곧바로 추궁했다.
“심상치 않으셔서 그대로 따랐습니다만, 이제는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대왕님.”
강림 형마저 거들었다.
……그래, 답답했겠지.
아이템을 살피던 내가 별안간 앞뒤 설명 없이 얼른 저승에 가야 한다고 우겨댔으니.
그제야 좀 정신이 들었다.
사실 이들은 꽤나 인내심 있게 기다려 준 참이었다.
바리가 이겼다는 걸 깨달은 내가, 그럼에도 일련의 일들이 믿기지 않아서 긴 시간 침묵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몇 시간을 내리 운전하다 보니 차츰 흥분이 가시고 설명할 여력이 생겼다.
“……바리가 기도에 성공했어요.”
하지만 꼭 내가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바리의 기도가 끝났다는 건 단군의 기도도 끝났다는 뜻일 테니까.
단군의 화제성이 어마어마하니 분명 생중계 중일 터다.
“누나, 제 단말기로 방송 좀 틀어주세요. 아마 단군을 생중계 중인 채널이 있을 거예요.”
“……방송?”
그 말에 호구별성이 일단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그래, 뭐.”
그리고는 미심쩍은 얼굴로 단말기를 변환시켜 허공에 창을 띄웠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크게.
“일단 틀라니까 틀긴 트는데…….”
곧 정말로 단군이 방송 중인 것을 발견한 그녀가 채널을 고정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화면에서는 기도를 끝낸 단군이 때맞춰 인터뷰를 시작했다.
-생각지 못하게 기도가 길어졌습니다.
“야, 얘 되게 지쳐 보이지 않냐?!”
방송을 보던 호구별성이 말했다.
꽤나 놀랐다는 듯이.
“진짜, 진짜 그 기도가 어마어마했나 본데?!”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89시간 후, 세 번째 천벌이 발생합니다.
단군은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곧장 본론을 꺼냈다.
-천기누설은 미래를 뒤틀어버릴 위험이 있어, 정확한 장소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고된 기도 때문인지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여전히 아나운서처럼 또박또박하고 신뢰가 가는 어조였다.
-그래도 이 단군과 천부인 길드가, 89시간 후의 천벌을 반드시 막아낼 것입니다.
“뭐야?”
호구별성이 소리쳤다.
“아니, 전하! 얘 기도 성공했는데?”
바리가 이겼다는 내 말과 달리, 단군이 아무렇지 않게 천벌을 예언했기 때문이리라.
“얘가 천벌 막는다는데, 어떻게 된 거야?”
바리와 나에 대한 의심이 아닌,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둥그렇게 뜬 호구별성이 룸 미러에 비쳤다.
나는 화면 속 단군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아니.”
핸들을 돌리며 짧게 대답했다.
“분명히 바리가 이겼어요.”
기도에 성공했다는 단군의 말에도 꺼지지 않는 나의 확신을 담아.
17장. 서해 용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