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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4) (46/187)

17장. 서해 용궁(4)

[ ‘심해의 수호자’의 카르마가 당신에게 깃듭니다! ]

- 승리 조건 : 지옥수(地獄樹) 파종 저지

- 지배도 : 6%

용궁의 필드를 완전히 승계했다.

나는 도깨비 무기를 하나씩 챙겨 든 삼차사를 돌아보며 말했다.

“중요한 것은 적들을 쓰러트리는 게 아닙니다.”

필드를 승계하면서 신화전은 완전히 파악했다.

신화전을 벌이던 용신들은 죽지 않는 시체 차사들을 상대로 고전했지만.

사실 그들의 승리 조건은 차사를 물리치는 게 아니라 지옥수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가짜 저승 역시 용신들을 쓰러트리는 게 아니라 용궁의 터를 빼앗는 게 조건이었죠.”

지옥수의 촉수는 지금도 용궁의 기를 빨아들이고 있을 것이다.

주변의 가짜 차사들은 지옥수가 기를 완전히 흡수할 때까지 그것을 지키는 역할일 테고.

“그러니까 우리는 곧바로 나무에 집중할 겁니다.”

준비가 되었다.

태자궁 밖으로 나선 순간.

-그으으어어어---.

-어어어어-----.

빽빽하게 늘어선 가짜 차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벌 떼처럼 몰려왔다.

“계획대로 해주세요!”

물러서지 않고 삼차사에게 명했다.

[ (!) 인연의 무용담 ‘세 명의 차사’의 효과로 삼차사의 능력치가 100% 상승합니다. ]

무용담이 발동되면서 삼차사의 모든 스탯이 두 배 상승했다.

“흥, 좀비 놈들, 다시 봐도 못생겼네!”

먼저 나선 것은 호구별성이었다.

손에는 공작의 깃털로 만든 부채를 들었다.

청옥색의 화려한 접선이 그녀의 섬섬옥수와 맞춘 듯이 잘 어울렸다.

“이거나 먹어라!”

촤르르륵!

반원을 그리는 부채에서 독기가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바람결에 실린 암녹색 신성이 이내 폭발적으로 번졌다.

도깨비가 만든 부채는 그녀의 독이 더 멀리, 더 강하게 퍼지게 했다.

역신에게 꼭 맞는 무기였다.

‘쉽게 잡히지 않는 역병의 권능’을 발휘한 그녀가 말 그대로 역병처럼 차사들 사이를 누볐다.

-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악---.

독에 닿은 차사들이 녹아내리며 괴이하게 울었다.

“병 걸리기 싫으면 마스크를 써야지!”

깔깔 웃는 그녀의 뒤로 이번에는 강림 형이 나섰다.

크고 단단한 주먹이 검은색 반장갑으로 덮여 있었다.

그 또한 신성을 증폭시키는 도깨비 장갑이었다.

퍼어어억!

퍼어어어억!

발설지옥의 검푸른 신성이 번쩍였다.

호구별성의 병으로 약해진 차사들을 형의 신성이 마저 짓뭉갰다.

역신이 휩쓴 길을 저승사자가 뒤쫓았다.

두 신의 조화에 가짜 차사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역병과 죽음이 휩쓴 자리에는 순식간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흐음, 하여튼 기동력은 훌륭하군.”

석장을 든 사라가 뒤따르며 말했다.

생명의 신이 병과 죽음을 반기니 꽤나 아이러니했다.

두 신의 활약으로 우리는 빠르게 적들의 벽을 뚫고 지옥수 앞에 섰다.

정전(正殿)의 지붕을 뚫고 나온 거대한 촉수 나무다.

-여기에 꽂아 주시오!

왕자가 말했다.

걸음을 멈춘 사라가 왕자가 가리키는 곳에 석장을 내리꽂았다.

파아아앙!

새하얀 신성이 일순 눈을 뒤덮었다.

콰아아앙!

석장을 중심으로 뻗어 나간 폭발적인 힘에 정전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부서진 벽과 지붕 사이로 감춰졌던 지옥수의 모습이 전부 드러났다.

무려 다섯이나 되는 지옥수들은 하나같이 내 허리의 열 배쯤 되는 굵기로 몹시 크고 거대했다.

-나는 덜 자란 팔푼이인지라, 용궁의 결계를 완벽하게 유지할 수는 없소.

등에는 어느새 동그란 여의주를 짊어진 채로, 고등어 왕자가 석장 위에서 지느러미를 펄럭였다.

이런 상황에서 좀 그렇지만…… 공으로 재주를 부리는 똑똑한 생선 같았다.

……조금 귀여운데.

-부탁하오, 염라!

파앙!

여의주가 빛을 발했다.

석장과 고등어를 중심으로 둥근 결계가 펼쳐졌다.

별장군의 결계처럼 거북이 등껍질을 닮은 결계는 가짜 차사들의 공격을 퉁퉁 튕겨 냈다.

다만 불완전하다는 말은 사실인지 간혹 결계를 뚫고 들어오는 공격도 있었다.

물론 그럴 때마다 역병과 죽음이 그냥 두지 않았다.

촤아아악!

퍼어어어억!

결계가 막아내지 못한 적은 호구별성과 강림 형이 곧바로 쳐냈다.

뒤에선 사라는 그들의 마력이 떨어지지 않게 서천꽃밭의 신성으로 도왔다.

휘몰아치는 역병과 죽음, 그리고 지치지 않는 생명.

이 정도면 뒤를 맡기기엔 충분했다.

“좋아요, 저는 바로 나무를 치겠습니다.”

차사들을 뒤로하며 달려 나가는 순간.

“조심하셔야 합니다.”

스킬을 발동하는 내 귓가로 강림 형의 목소리가 스쳤다.

[ 도산지옥(L) ]

시왕지옥의 첫 번째, 도산지옥.

[ 도산지옥의 권능이 당신의 신성을 복사합니다! ]

- 구현 가능한 분신 수 : 4

진광대왕이 다스리는 그곳은 생전에 얼마나 많은 공덕을 베풀었느냐를 심판하는 지옥으로,

그 힘을 담은 도산지옥 스킬은 지켜야 할 대상의 수만큼 분신을 만들 수 있다.

파아아앙!

도산지옥의 황금빛 신성이 번쩍였다.

나와 똑같이 생긴, 하지만 조금은 작고 투명한 황금빛 분신들이 네 개 생겨났다.

곁에 있는 내 일행, 삼차사와 고등어 왕자를 더한 수였다.

“아, 이런.”

그런데 완성된 분신을 보고도 나는 조금 난감해져서 웃었다.

“……역시 마력이 바닥났네.”

이론적으로 도산지옥의 분신은 수백 개도 수천 개도 만들 수 있다.

지켜야 할 대상의 수에는 제한이 없으니까.

그런데 지금의 나로선 네 개를 만드는 게 한계인 모양이었다.

마력 스탯이 최대치인 100에 도달한 지금도 네 개가 한계이니, 이 이상의 분신을 만들기 위해선 추가로 마력을 증폭시키는 힘을 찾아야 할 것이다.

결국, 이대로는 마력이 부족해 다른 스킬을 쓸 수 없는 상황.

지금부터는 오로지 검만으로 상대해야 한다.

“그래도 상관없어.”

용궁에서 얻은 진광대왕님의 검.

오직 도산지옥의 검사만이 이 검의 진정한 힘을 깨울 수 있다.

나는 손에 쥔 검에 힘을 더하며 개중 가장 큰 나무에 달려들었다.

나와 똑같이 복제된 검을 쥔 네 개의 분신들도 저마다 같은 폼으로 각각의 지옥수에 뛰어들었다.

가까이서 본 나무는 훨씬 더 거대했다.

지옥수를 올려다보며 새삼 그 크기를 실감했다.

진광대왕님의 검도 일반적인 검에 비하면 무척 큰 대검인데도 불구하고, 지옥수에 갖다 대자 마치 식사용 나이프로 나무를 베는 듯한 그림이 만들어졌다.

게다가 분명 나무의 외형임에도 단단한 외피 위로 꿈틀거리는 핏줄이 보는 이의 불쾌감을 자극했다.

촤아아악!

촤아아아아악!

도산지옥의 검술로 나무를 베어 보았다.

역시 그저 베는 것만으로는 기둥에 작은 흠집만 남길 뿐이었다.

살아 움직이는 지옥수는 공격에 반응하듯 크게 꿈틀대더니 곧 내게 촉수 같은 가지를 휘둘러 왔다.

퍼어억!

퍼어어어억!

강력한 힘이었다.

한 번 내리칠 때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이 울렸다.

그래, 강하다.

반가울 만큼 강하다.

“좋아, 그렇게 달려들어 봐라.”

채찍처럼 부딪쳐오는 촉수 가지를 받아치며 말했다.

“계속 그렇게 쳐 봐.”

도산지옥의 진광대왕님께서 쓰시던 검.

이 검에는 그분의 가르침을 담은 권능이 깃들어 있다.

-제연아, 너는 내 검에 깃든 이치가 무엇인지 아느냐.

내게 도산지옥의 검을 가르쳐 주셨던 스승.

저승 시왕 형제들 중 마지막이었던, 그 무서운 저승의 지배자들 중에서도 유독 부드러운 인상의 왕.

-아주 간단한 이치란다.

그분의 검에는 특별한 힘이 있다.

이 검은 타인을 지키며 받아 낸 공격을 그대로 흡수하는 검이니.

그리하여 공격을 열두 번 흡수하면, 축적된 공력을 다시 열두 배의 힘으로 방출한다.

-……너를 해치는 것은 결국 나를 해치는 것이며.

검을 휘두를 때마다, 내게 가르침을 내리시던 진광대왕님의 목소리가 곱씹혔다.

-……너를 지키는 것은 곧 나를 지키는 것일지니.

퍼어어어어억!

열두 번째 촉수를 쳐낸 직후.

나는 공력이 모인 진광대왕님의 검을 그대로 나무 기둥에 깊숙이 박아 넣었다.

파아아아앙!

검에서 뿜어져 나온 황금빛 신성이 시야를 가득 휘덮었다.

거대한 나무는 검이 박힌 자리부터 순식간에 균열을 일으키며 반으로 갈라졌다.

쩍 벌어진 단면은 마치 생물의 내장처럼 분홍빛을 띠고 있었는데, 꿈틀거리던 핏줄만큼이나 축축하고 물컹물컹해 보였다.

스으으.

갈라진 지옥수로부터 새까만 연기가 흘러나왔다.

지금껏 흡수한 용궁의 기일 것이다.

안개처럼 퍼진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나를 덮쳐 왔다.

“……이런.”

살갗에 검은 기운이 닿자마자 나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고등어 왕자나 그의 여의주가 품은 기운과는 확연히 달랐다.

본래 청정했을 용궁의 기운은 지옥수에 흡수되며 오염된 듯 닿은 것만으로도 몹시 거북한 감각이 일었다.

“점점 짙어지는구나.”

몸을 짓누르는 오염된 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반으로 갈라진 지옥수는 그럼에도 죽지 않고 검과 먼 자리부터 달라붙기 시작했고, 도리어 입 벌린 괴물처럼 나를 삼키려 들었다.

“나까지 흡수하려고?”

오염된 기에 붙잡힌 팔다리가 무거웠다.

나무의 물컹물컹한 속살이 핥듯이 옷을 적시고 몸통을 죄여 왔다.

앞서 용궁의 기를 흡수한 것과 같이 이번에는 나를 통째로 집어삼켜 내 신성을 흡수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지.”

갈라진 나무가 내 몸을 탐낸 그때.

내 안에 심어 두었던 업경의 권능이 눈을 떴으니.

이번에는 염라대왕님의 업경 차례였다.

파아아앙!

검푸른 신성이 산개하고, 그 중심에 사람보다 거대한 거울이 셋 모습을 드러냈다.

죄인의 죄를 비추는 염라의 거울이었다.

“이 모든 것은 너희의 것이 아니다.”

죄를 비추는 거울에 새까만 지옥수가 비추어졌다.

업경은 내 팔다리를 붙잡은 기를, 몸통을 죄는 지옥수의 갈라진 기둥을 가차 없이 찢어발겼다.

검푸른 신성을 뿜어 내는 업경으로부터 내 분신들이 상대하던 다른 지옥수들 역시 벗어나지 못했다.

“뿌리가 된 권능은 우리 저승의 것이며, 기둥에 가득한 기는 본래 이 바다의 것.”

쿠우우웅!

쿠우우우웅!

막대한 업을 비춘 거울이 새까맣게 물들며 요동쳤다.

은색으로 빛나던 표면이 완전히 까맣게 변함과 동시에 나는 화탕지옥의 스킬을 발동했다.

[ 화탕지옥(L) ]

도산지옥 스킬로 네 개의 분신을 만들어 내느라 사용한 마력은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업경이 발동된 이상, 지옥을 부르는 것은 이제 거울에 비친 업 그 자체였다.

“남의 것을 훔치면 화탕지옥에 떨어지는 법이야.”

화르르륵!

까맣게 물든 거울에서 이번에는 새빨간 불꽃이 일었다.

업을 잡아먹고 타오르는 화탕의 불꽃이었다.

내 신성은 그저 성냥에 불을 붙이는 것에 불과했다.

불꽃은 가스처럼 번져 있는 업을 포식하고 순식간에 폭발로 화했다.

퍼어엉!

퍼어어엉!

새빨간 불꽃들의 연쇄적인 폭발.

지옥수들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빨갛게 터져 나가는 불꽃 속에서 나는 손을 뻗었다.

나를 삼키려 했던, 거대한 몸뚱이가 갈라지고 찢긴 끝에 새까맣게 타들어 가기 시작한 지옥수의 깊은 곳으로.

그렇게 나무가 품었던 법칙의 핵이 손에 닿았다.

[ (!) 필드의 법칙을 감지합니다. ]

팝업창이 뜨면서 이 필드를 전개한 수많은 권능이 느껴졌다.

오행 ː 수(水), 오행 ː 목(木), 오행 ː 토(土).

세 개의 오행을 비롯하여 사령술, 강령술, 생령술에 온갖 사악한 술법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개중에서도 나를 웃게 만드는 것은.

“……징벌(懲罰)이라.”

지옥수 필드의 핵심이 된 권능에 손을 더하며 나는 작게 탄식했다.

“한 글자가 틀렸잖아.”

[ 필드의 법칙에 당신의 권능을 더합니다! ]

[ 공간의 주도권이 바뀝니다 : 징벌(懲罰) → 징악(懲惡) ]

“누가 누구를 벌한다는 거야, 주제도 모르고.”

마침내 지옥수의 모든 법칙을 해제한 순간이었다.

쿠우웅!

쿠우우웅!

핵을 잃은 나무가 시뻘겋게 불타오르며 요동쳤다.

사방을 메우는 뜨거운 열기에 나까지 아찔할 지경이었다.

쿠우웅!

쿠우우웅!

불티와 재가 뒤섞여 흩날리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마침내 검을 내렸다.

필드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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