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서해 용궁(3)
“……!”
염라의 권능으로 죽은 별장군의 기억을 읽는 순간.
방 전체가 눈부신 빛에 휩싸이더니, 화려한 태자의 방은 사라지고 우리는 어느새 용궁의 한복판이었다.
“뭐야, 왜 갑자기 바뀌었어?!”
깜짝 놀란 호구별성이 주변을 살폈다.
다른 두 차사도 심각한 낯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저기…… 저기!
그때 고등어가 꼬리를 펄떡였다.
-큰형님과 둘째 누님이오!
백발을 허리까지 기른 두 남녀였다.
그들의 뒤로는 문어며 장어, 복어 등 온갖 물고기를 닮은 용신들이 조개로 장식한 갑주를 두르고 무장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지, 눈이 마주쳐도 자기들끼리 무어라 의견을 주고받기만 했다.
“이거, 저들은 우리를 보지 못하는 모양인데.”
그들을 돌아본 사라가 말했다.
“아무래도 네가 읽을 별장군의 기억이 우리에게도 보이는 것 같구나.”
……그렇다면 별장군의 주술과 내 권능이 섞이면서 이렇게 된 걸까?
“이미 몇 차례 전투가 벌어진 것 같습니다, 대왕님.”
옆에 선 강림 형이 앞쪽을 가리켰다.
반파된 성벽 아래로 가짜 차사들과 피투성이가 된 용신들이 뒤엉켜 있었다.
-……!
쓰러진 용신들을 알아본 고등어가 몸을 펄떡였다.
“…….”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는 왕자를 내려다봤다.
물고기의 표정을 읽는 법은 모르지만, 동그랗게 뜬 눈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조금 더 가까이서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왕자님.”
가늘게 떨리는 그의 지느러미를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그제야 고등어가 파르르 떨며 나를 돌아봤다.
-……그리하시오, 염라.
그리고는 먼저 앞으로 헤엄쳐 나갔다.
나는 그의 지느러미가 닿았던 손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무너져 가는 서해 용궁을 눈에 담았다.
문득 떠오르는 10년 전의 어느 괴로운 날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큰 형님과 둘째 누님은 서해 최고의 전사셨소.
앞으로 헤엄쳐간 왕자가 말했다.
용왕의 장남과 차녀.
쌍둥이처럼 닮은 백발의 남녀였다.
보통 인간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키에, 번쩍이는 황금빛 눈동자는 틀림없는 용의 눈이었다.
-형님은 술법에 능통하셨고 누님은 검에 있어서 따라올 자가 없었지.
앞장선 남매가 용궁의 전사들을 지휘했다.
“허.”
그들을 살피던 강림 형이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대왕님, 저것은 분명 업경과 진광대왕님의 검입니다.”
그의 말대로, 왕자의 뒤에 선 거울과 공주의 검이 낯설지 않았다.
거울은 죄인의 업을 비추는 염라대왕님의 업경이며, 검은 내 스승이셨던 진광대왕님의 검이었다.
저것들이…… 용궁에 있었다고?
파아아앙!
그때 공주와 왕자를 중심으로 새파란 신성이 번쩍였다.
서해 최고의 전사라는 두 용신의 신성이었다.
둘을 중심으로 폭발한 신성에 가짜 차사들이 단번에 재가 되어 사라졌다.
“……!”
그런데 그뿐이었다.
불타 없어진 듯 보였던 것은 고작해야 찰나.
잿더미 사이에서 다시금 가짜 차사들이 몸을 일으켰다.
마치 알 수 없는 힘에 손상이 복구되는 것처럼
-이런, 여기까지인가!
-우리 힘만으로는 무구를 제대로 쓸 수 없다!
상황을 파악한 왕자와 공주가 한탄했다.
-역시 저승의 신이 아니면 권능을 담지 못해……!
그들의 실력이 모자란 것은 아니었다.
검의 대가라는 둘째 공주만 해도 그러했다.
한눈에 봐도 그녀의 검술은 완벽했다.
다만 그 검술은 도산지옥의 검술이 아니었다.
안타깝지만 도산지옥의 검사가 아니면 진광대왕님의 검은 제대로 쓸 수 없다.
업경도 마찬가지였다.
적의 공격을 튕겨 내는 힘은 어느 정도 유지되었으나, 대상의 업만큼 신성을 증폭시키는 업경의 진정한 권능은 술법의 대가라는 첫째 왕자도 깨우지 못했다.
-아바마마께서 건재하셨다면!
-설마 토끼 간에 독이 들어 있었을 줄이야!
공격이 불완전한 것을 깨달은 두 용신이 한탄했다.
-토끼 간?!
듣고 있던 고등어가 몸을 떨었다.
-토끼 간은 남해에서 오는 보양식인데……?
대답이라도 하듯 공주가 분노했다.
-억겁의 세월을 함께한 남해 용왕이 어찌 그럴 줄 알았겠는가!
“……!”
잠깐…… 그러니까, 지금.
……남해 용왕이 서해 용왕을 독살하려고 했단 건가?
늘 보내왔던 보양식 토끼 간을 이용해서?
-마마!
그때였다.
-술사들이 동해로 가는 물길을 열었사옵니다!
지쳐 가는 왕자와 공주에게 누군가 외쳤다.
-어서 피하셔야 하옵니다! 서해의 전사들이 함께할 것이옵니다!
남아서 결계를 지키던 별장군이었다.
깜짝 놀란 왕자와 공주가 그를 돌아보았다.
-뭐? 하지만 우리가 물러서는 순간 저 귀신들이 서해를 집어삼킬 것이오!
-제가 남아서 결계를 치겠사옵니다.
……그런 거였나.
별장군은 왕족과 전사들을 동해로 피신시키고 자신은 끝까지 용궁의 결계를 지켰던 거구나.
-그럴 순 없소. 어차피 이 바다를 잃어야 한다면 그대가 남을 이유도 없소!
-잃지 않을 것이옵니다. 소신은 보았사옵니다. 곧 막내 왕자님께서 돌아오실 것이옵니다.
그 순간 상황을 지켜보던 모두의 시선이 별장군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정말로 우리가 올 것을 알고 있던 걸까?
그래서 이렇게 미리 손을 써둔 걸까?
내 권능으로 왕자도 함께 기억을 볼 수 있도록?
-예, 막내 왕자님께서 땅의 왕을 모시고 돌아오실 것이옵니다! 지고한 땅의 왕께서 우리 서해 용궁의 우방이 되실 것이옵니다!
확신에 찬 별장군의 말에 장남과 차녀는 도리어 언성을 높였다.
-지금 뭔 개소리를 하는 거요, 별장군!
-그새 노망이 난 것이오? 그러지 말고 함께……!
표현은 격했으나, 가늘게 떨리는 그들의 눈에서 진심으로 별장군의 희생을 두려워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마마, 소신이 비록 느리고 아둔한 자라이오나, 대신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오지 않았사옵니까.
두 용신의 만류에도 늙은 자라는 말을 이었다.
-소신은 이 서해에서 가장 천기를 잘 보던 별장군이옵니다.
수천 년의 현기가 깃든 눈으로.
-저는 이 서해 용궁을 지키겠사옵니다. 그러니.
동시에 변했던 정경이 물결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니 부디…… 살아남아 주시옵소서, 용의 후예들이시여.
기억을 읽는 권능이 다하고 있었다.
유리가 깨지듯 주변이 무너져 내리면서 별장군의 마지막 말이 들려왔다.
-그리하여 다시, 이 서해에 돌아와 주시옵소서.
……
“……그렇게 된 거였군.”
침묵 끝에 사라가 말했다.
“그래, 그래서 용궁이 텅 비었는데도 아직 나무가 덜 자랐구나.”
호구별성도 혀를 찼다.
별장군이 결계를 남긴 덕에 용궁의 터를 완전히 빼앗기지 않았던 것이다.
“…….”
강림 형은 아무 말 없이 선 채로 생을 다한 별장군을 바라보았다.
푸른빛이 깃든 눈이 깊이 침잠해 있었다.
형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그는 발설지옥의 차사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염라대왕님을 지키는 대신 혼조차 남기지 못하고 소멸해버린 우리의 형제들을.
……그래, 지금 내가 그러하듯이.
그런데 조용히 별장군을 응시하던 그의 시선이 문득 나를 향했다.
익숙한 색의 눈동자가 평소와 같은 진중한 빛을 띠고 오롯이 나를 담았다.
“…….”
시선이 마주친 시간은 짧았다.
늘 보아온 그 눈이 어째서인지 무겁다고 느낀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으니까.
-자라씨 일족은 특히 충신으로 이름이 높았다오.
내 길 잃은 시선이 고등어 왕자에게 닿았다.
-별장군네 사촌 별주부는 그 옛날 위독한 남해 용왕께 바치려 토끼도 잡아 왔었지.
……별장군이 그 별주부네 가족이었던 건가.
-그런데, 남해가 그런 짓을 벌였다니…….
왕자가 말꼬리를 흐렸다.
왕족이 동해로 대피했다지만 서해 용왕이 남해 용왕의 독에 당했다는 충격은 그리 쉽게 가시지 않을 터였다.
네 개 바다를 나눠 가진 사해 용왕은 본디 형제였으니까.
남해 용왕은 결국 형인 서해 용왕을 독살하려 했던 것이다.
쿠우우웅!
그때였다.
쿠우우우우웅!
불현듯 굉음이 울리더니 사방이 요동쳤다.
“이런, 결계가 깨졌다!”
“별장군의 신성이 완전히 다했습니다!”
기억을 보여주면서 별장군의 힘이 전부 소진된 모양이었다.
파아앙!
하지만 이내 별장군이 쥐고 있던 삼지창이 빛을 발하더니.
“……!”
삼지창은 곧 어떤 물건들로 변했다.
“……업경과 진광대왕의 검입니다.”
물건들을 돌아본 강림 형이 말했다.
“나머지는 처음 보는 것들인데?”
“신성이 느껴진다. 평범한 물건이 아니야!”
나머지 두 차사도 관심을 보였다.
왕자와 공주가 쓰던 저승의 물건에 낯선 물건들도 여럿이었다.
-도깨비들이 만들던 물건들이오!
고등어가 그것들을 알아봤다.
-별장군이 우리를 예지하고 품고 계셨나 보오!
[ ‘심해의 수호자’가 당신의 참전을 권합니다! ]
- 승리 조건 : 지옥수(地獄樹) 파종 저지
- 지배도 : 6%
동시에 팝업창이 떴다.
우리가 참전할 것을 예견한 별장군의 의지처럼.
-하지만…… 염라여.
팝업창을 읽은 고등어가 이쪽을 돌아봤다.
-그대가 꼭 이 싸움을 승계하실 필요는 없소.
뭔가를 결심한 듯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벌써 구할 이상 진행되었소. 적은 너무 많고 별장군의 결계는 힘을 다했지. 하지만 그대들은 아직 필드를 선택하지 않았어.
그는 우리가 저승의 필드를 선택할 것을 권하고 있었다.
용궁의 왕자인 그는 결코 서해 용궁을 포기할 수 없겠지만, 94%나 지고 있는 마당에 차마 함께 싸워달라고 할 수 없는지.
“…….”
나는 왕자를 내려다봤다.
그의 말대로 필드의 지배도는 엉터리 저승 쪽으로 확연히 기울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포기할 이유는 되지 않았다.
“……지배도라는 게 꼭 그만큼 이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왕자님.”
물론 한쪽의 지배도가 100%가 되면 신화전은 끝이 난다.
다만 지배도란, 신화전을 전개한 신앙과 카르마 포인트를 얼마나 지배하고 있느냐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한쪽이 신앙과 카르마 포인트를 네 배 더 소모하는 필드를 전개한다면, 그 신화전의 지배도는 처음부터 한쪽이 80%인 채로 시작된다.
그럼 80%로 시작한 측의 지배도는 그 밑으로는 떨어지지 않는 걸까?
그렇지 않다.
신화전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전개한 필드의 규칙에 따라 상대가 쏟아부은 신앙과 카르마 포인트를 얼마든지 역으로 빼앗을 수 있으니.
더 많은 자원을 쓰면 분명 유리하게 싸움을 시작하겠지만, 그 자원을 뺏길 수 있는 이상 꼭 이긴다는 보장도 없는 것이다.
“저는 저들을 알고 있습니다, 왕자님.”
엉터리 저승 필드를 전개한 것은 흑탑이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지배도가 차이가 나는지도 추측할 수 있다.
흑탑은 한반도에서 여덟 번째로 신도가 많은 전설이지만, 내내 바다에서 살아온 용궁은 신도라는 존재가 거의 없었다.
그러니 두 신화는 애초에 쏟아부은 신앙부터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궁이 이만큼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물의 신성이 가득한 서해 바다이기 때문일 터였다.
전장 자체는 오히려 용궁 쪽이 유리하다.
게다가.
“이길 수 있습니다.”
나는 첫째 왕자와 둘째 공주가 사용했던 검과 업경을 집어 들었다.
“저는 이것들을 제대로 쓸 수 있거든요.”
[ ‘심해의 수호자’에 참여합니다! ]
- 승리 조건 : 지옥수(地獄樹) 파종 저지
- 지배도 : 6%
필드에 참여하며 왕자에게 말했다.
“별장군의 예견처럼, 저승은 서해 용궁의 가장 큰 우방이 될 것입니다.”
또한 이 싸움이 끝나면 서해 용궁은 저승의 가장 큰 우방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