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서해 용궁(2)
서해 바다.
왕자를 따라 어느새 빛이 닿지 않는 심해까지 내려왔다.
사방이 먹물처럼 까만 와중 왕자의 여의주만 푸른빛을 반짝였다.
용왕이 허락한 자들만 찾을 수 있다는 용궁의 길이었다.
물길을 내려가기를 한참, 불현듯 ‘출구’가 보였다.
좁고 긴 터널의 끝처럼 멀찍이서 희미하게 빛이 들어오는.
-다 왔구려.
고등어가 반갑게 말했다.
-서해 용궁에 오신 것을 환영하오.
“이야, 여기가 진짜 용궁이야?”
뒤따르던 호구별성이 눈을 빛냈다.
“나도 삼천 년을 살았지만 용궁은 처음 와 봐!”
성큼 앞질러 나가는 그녀의 너머로 휘황찬란한 궁궐이 펼쳐졌다.
용궁.
물의 권능으로 빚어낸 바다 왕의 성이었다.
백사장처럼 하얀 성벽은 반짝이는 조개와 진주로 장식되었고, 나무 대신 심어진 형형색색의 산호초가 화려함을 더했다.
신기한 것은 분명 문명이 쌓아 올린 성의 모습임에도, 그 자체가 웅장한 자연과 다를 바 없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세계를 닮았으되 동시에 자연 그 자체인 모순.
인간이 이야기해 왔으되 인간은 닿지 못하는 깊은 바다의 신화다웠다.
한데.
“으음, 근데…….”
성을 올려다보던 호구별성이 말을 흐렸다.
“왕자야, 너네 동네는 원래 이렇게 조용해?”
뭔가 이상을 감지한 듯.
“왜 이렇게 아무 기척이 없는…….”
그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리며 가려졌던 용궁의 내부가 드러났다.
“아니, 이게 다 무슨!”
빠르게 문 안으로 들어선 호구별성이 소리쳤다.
“다 부서졌잖아?!”
아름다웠던 성의 바깥이 무색하게도 용궁의 내부는 처참히 무너진 상태였다.
부서진 석상과 조각난 기와가 사방에 널려 있었으며, 그나마 남은 건물도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이 으스러진 채였다.
그중에서도 정전(正殿)은 특히 끔찍했다.
본디 용왕이 집무를 보았을 그곳은, 형편없이 반파된 채 정체불명의 촉수까지 솟아 있었다.
두족류의 그것처럼 빨판이 돋아 있는 기분 나쁜 외형이었다.
“미친, 저건 또 뭔데?!”
호구별성이 촉수를 가리키며 불쾌하다는 듯 독기를 뿜었다.
지붕을 뚫고 자란 촉수들 중심에는, 뭐랄까…… 나무?
그래, 흡사 나무와 비슷한 것이…….
“대왕님.”
강림 형이 내게 말했다.
“저쪽에 무언가 있습니다.”
신성을 끌어올린 그가 내 앞을 살짝 가리며 촉수로 뒤덮인 정전 한쪽을 가리켰다.
자연스레 형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그곳으로 시선을 향했는데.
“……!”
처음엔 한눈에 알아볼 수 없었다.
그저 검었고, 수가 대단히 많았다.
너무 많아서 안개처럼 주변을 뒤덮은 듯 보일 정도였다.
얼핏 인간으로 보였으나 자세히 볼수록 이질감이 느껴졌다.
인간과 비슷한 크기와 생김새를 지녔되 인간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물결에 따라 흔들리는 해조류처럼 흐늘거리는 몸짓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그것의 형태가 점점 눈에 익을수록 선명해지는 것이 있었다.
놈들의 몸뚱이를 감싸고 있는 옷.
그림자처럼 휘날리는 새까만 두루마기 자락이.
“미친! 저승차사잖아, 저거!”
호구별성이 경악하며 그것들을 가리켰다.
[ (!) 해당 영역의 카르마가 당신의 카르마에 반응합니다. ]
팝업창이 떴다.
[ ‘지옥이 자라는 땅’에 입장하셨습니다! ]
- (!) 해당 필드의 등급은 ‘미완성 전설’입니다.
필드를 알리는 팝업창이었다.
[ ‘심해의 수호자’에 입장하셨습니다! ]
- (!) 해당 필드의 등급은 ‘미완성 전설’입니다.
그런데 전개된 필드는 하나가 아니었다.
[ (!) 공간의 지배법칙이 충돌합니다. ]
[ (!) 현재 신화전(神話戰)이 진행 중입니다. ]
연달아 이어지는 팝업창은 놀라웠다.
“……뭐야, 신화전? 여기서 신화전이라고?!”
신화전(神話戰).
신화전은 영웅담급 이상의 필드가 2개 이상 부딪쳤을 때 전개되는 특수 필드로, 말 그대로 신화를 만들어 내는 전쟁이다.
일반적인 필드가 해체 조건에 따라 해체된다면, 신화전에서는 반대로 조건을 완성하거나 그것을 저지한 필드가 승리했다.
필드의 설계자는 조건에 맞춰 여러 법칙을 더할 수 있는데, 법칙이 정교할수록 더 많은 카르마 포인트와 신앙을 필요로 했다.
그런데 여기서 신화전이라고?
용궁이 엉망이 된 건 신화전 때문인 건가?
[ ‘지옥이 자라는 땅’이 당신을 감지합니다! ]
다시 팝업창이 떴다.
[ ‘지옥이 자라는 땅’이 당신의 참전을 권합니다! ]
- (!) 해당 필드의 등급은 ‘미완성 전설’입니다.
- 승리 조건 : 지옥수(地獄樹) 파종
“……지옥수 파종?”
나는 지붕을 뚫고 나온 촉수를 응시했다.
“설마, 저게 그 지옥수인 건가?”
그것은 분명 촉수였지만 중심에 있는 기둥은 나무라면 또 나무였다.
바오바브나무처럼 크고 굵되, 잎사귀 없이 기둥과 가지만 산호초처럼 알록달록할 뿐.
사방에 촉수처럼 뻗은 나무의 가지들은 계속해서 간헐적으로 꿀렁거렸다.
잘은 몰라도 저 가지가 용궁의 뭔가를 흡수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필드 이름이 지옥수라니.”
나는 검은 두루마기를 걸친 기괴한 것들과 지옥수를 다시 한번 훑었다.
“이 필드가…… 정말로 저승의 신화라고?”
그때였다.
지옥수 주변을 거닐던 ‘차사’들이 다가왔다.
그 수많은 움직임은 마치 검은 파도가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아.”
나도 모르게 신음했다.
천천히 밀려드는 그것들은 꼭 시체에 두루마기를 걸친 듯한 모양새였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그저 뻥 뚫려 있었고, 살갗이라기에도 뭐한 살점은 치덕치덕 반죽을 발라놓은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전부 비늘이 돋아 있어.”
그때 저승 던전에서 봤던 흑탑주처럼 저들도 얼굴이며 손에 듬성듬성 비늘이 돋아 있었다.
어설프게 저승을 흉내 낸 것들에 이어 흑탑주와 똑같은 비늘까지.
흑탑이 저승에 이어 용궁까지 쳤다는 뜻일까?
[ ‘지옥이 자라는 땅’이 당신의 참전을 권합니다! ]
- 승리 조건 : 지옥수(地獄樹) 파종
- 지배도 : 94%
재차 참전을 권하는 팝업창이 떴다.
이미 한 번 신화전에 휘말린 이상, 이 엉터리 저승에 합류하거나 이 필드에 맞서는 반대편 필드에 합류해야 할 것이다.
이 저승 필드에 맞서는 필드라면, 아마…….
“용궁에서도 필드를 만들었겠죠.”
나는 왕자와 삼차사를 돌아봤다.
모두 상황은 파악한 모양이었다.
계속된 신화전으로 서해 용궁이 이렇게 처참히 망가졌다는 것을.
“그런데…… 용궁 필드의 핵은 어디 있을까요.”
신화전의 필드도 필드인 만큼 당연히 법칙의 핵이 존재한다.
신화전의 핵은 필드를 설계한 설계자가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필드를 지배하는 법칙의 중심에 있다.
필드의 설계자는 따로 보이지 않으니, 이 엉터리 저승의 핵은 결국 법칙의 중심인 지옥수에 박혀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용궁의 핵은 어디에 있을까?
-……안쪽에서 신성이 느껴지오.
듣고 있던 고등어가 대답했다.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 우리 용궁의 기운이 맞소.
말을 꺼내는 것도 힘들다는 듯,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의 작은 지느러미는 평소의 활기를 잃고 늘어져 있었다.
내색은 안 해도 용궁이 무너진 것에 충격이 클 터였다.
“…….”
시선을 돌려 차사의 복장을 한 시체 같은 이들을 보았다.
우리는 아직 필드를 선택하지 않았다.
이미 지배력이 94%에 달한 저승 필드에 합류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저런 것은 저승의 신화가 아니다.
나는 계속해서 저승의 권능을 넘보는 가짜들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안내해주세요, 왕자님.”
왕자에게 말했다.
“용궁 필드부터 찾겠습니다.”
-……고맙소, 염라.
내가 그를 돕기로 했다는 것을 이해한 왕자가 작게 대답했다.
-……이쪽으로!
작은 고등어가 비장하게 물길을 헤엄쳤다.
[ ‘지옥이 자라는 땅’이 이상을 감지합니다! ]
팝업창이 떴다.
[ ‘지옥이 자라는 땅’이 당신의 합류를 원합니다! ]
동시에 차사를 흉내 낸 이들이 기분 나쁜 소리를 지르며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어떻게든 강제로 필드에 흡수할 기세였다.
“왕자님, 서두르셔야 합니다!”
맞서기보다 왕자를 재촉했다.
이렇게 머릿수가 압도적으로 차이 난다면 차라리 빨리 용궁 필드에 합류하는 편이 나았다.
-이쪽으로 오시오, 동궁이오!
왕자가 다급하게 앞장섰다.
동궁.
용궁의 태자가 머무는 처소는 난장판 가운데 홀로 웅장히 서 있는 전각이었다.
곧게 뻗은 처마와 산호초로 장식된 기둥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어, 잠깐!”
뒤따르던 호구별성이 앞을 가리켰다.
“결계다! 저거 결계 맞지?!”
거북이 등껍질처럼 전각을 감싸고 있는 둥그런 기운이 보였다.
전각 주변에는 가짜 차사들이 모여 칼이나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 기운이 새파란 스파크를 일으키며 놈들을 튕겨 냈다.
-별장군의 결계군!
왕자가 말했다.
-저것이 지키고 있었구려!
한데 문제는 여전히 그들의 수가 너무 많다는 데 있었다.
우리가 전각에 들어가기 위해선 그 주변을 두텁게 둘러싼 포위망을 뚫고 가야 했다.
그것도 아직 우릴 쫓고 있는 가짜 차사 무리가 도달하기 전까지.
“물러서십시오, 대왕님.”
강림 형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제가 뚫겠습니다.”
파아아앙!
번쩍이는 검푸른 신성이 입구를 가로막은 이들을 일제히 쳐냈다.
손을 대지 않고 날려버리는 발설지옥의 권능이었다.
“어휴, 소 떼 같은 놈. 하여간 힘은 참 좋아!”
뒤따르는 호구별성이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을 했다.
그녀의 말대로 소 떼라도 지나간 양 입구까지 향하는 길이 한순간에 뚫렸으니 조심스레 공감하기는 했다만.
거침없이 나아가는 형에 이어 마침내 전각 안으로 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파아앙!
왕자가 품고 있던 여의주가 푸른 신성을 발했다.
눈이 부실 만큼 환하되 부드러운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 ‘심해의 수호자’가 당신을 감지합니다! ]
팝업창이 떴다.
[ ‘심해의 수호자’가 당신의 참전을 권합니다! ]
- (!) 해당 필드의 등급은 ‘미완성 전설’입니다.
- 승리 조건 : 지옥수(地獄樹) 파종 저지
짐작대로 이곳이 용궁의 필드였다.
“이런, 안쪽도 엉망이군!”
사라가 주변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용신들은 모두 어디로 갔지?”
동궁의 대청은 텅 비어 있었다.
그저 바닥에 흩어진 화려한 세간만이 처소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암시할 뿐.
“분명 필드의 설계자나 핵이 있을 겁니다!”
나는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야, 왼쪽에!”
곧바로 호구별성이 방문 하나를 가리켰다.
그 위로 태자의 명패가 걸려 있었다.
“저쪽에서 신성이 나오는데?!”
태자의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누군가 곧게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키보다 큰 삼지창을 든 노인이었다.
등은 조금 굽었으되 단단한 갑주를 차려입은 게 용궁의 장군인 듯했다.
-맙소사…… 별장군!
노인을 알아본 왕자가 외쳤다.
-별장군, 그대가 홀로 결계를 친 것이오?!
가까이서 본 노인의 머리는 반들반들했고 옆으로 죽 찢어진 입은 뾰족했다.
무엇보다 등에는 커다란 등딱지를 매달고 있었으니.
별장군, 그는 자라의 모습을 한 용신이었다.
“……어, 잠깐만.”
이상을 느낀 호구별성이 멈칫했다.
“전하, 이거…… 이미.”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별장군이 어떻게 됐는지 알아차렸다.
온몸에 피칠갑을 한 노장군은 반개한 눈으로 조용히 시선을 내리고 있었다.
“……의지만 남은 상태군.”
사라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손끝으로 희미한 신성을 발하고 있었지만 노장군에게 꽃을 피우지는 않았다.
그가 이미 죽은 채로 결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미 혼은 사라졌다. 내 힘으로도 어쩔 수 없어. 사력을 다해 남겨 둔 신성만 자리를 지키는 게다.”
“……그런.”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럼 나머지 용신들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
죽어서까지 유지한 별장군의 결계가 무색하게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곳에 머물던 다른 용신들은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
문득 고개 숙인 별장군에게 눈이 갔다.
죽은 자의 기억을 읽는 염라의 권능이라면 그가 눈을 감기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망설이지 않고 손을 뻗었다.
[ 염라의 권능이 망자의 파편을 읽습니다. ]
그런데 권능을 발휘한 직후.
[ 대상의 신성이 당신의 권능에 반응합니다! ]
뜻밖에도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