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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5) (42/187)

16장. 이무기 터(5)

이무기가 펼친 전설급 필드.

녀석이 다루는 물의 권능이 내 숨을 압박했다.

벌어진 입에서는 비명 대신 물거품이 새어 나왔다.

“……!”

쭉 찢어진 이무기의 눈이 나를 향했다.

나는 이무기의 꼬리에 묶인 몸을 비틀며 스킬을 발동했다.

[ 화탕지옥(L) ]

화르르륵!

지옥의 화탕을 끓이는 불길이 나를 감싸듯 피어올랐다.

화려하게 개화한 불꽃은 숨통을 열고 물속에서도 형형한 불씨를 휘날리며 번져 나갔다.

-뭐야?!

꼬리에 불이 붙은 이무기가 깜짝 놀라 육중한 몸을 떨었다.

그 잠깐의 틈이면 되었다.

몸을 죄던 힘이 느슨해지는 것을 놓치지 않고 나는 있는 힘껏 발을 굴렀다.

“……큿!”

그새 뼈라도 부러진 모양인지 발목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나는 통증을 참으며 헤엄쳐 올랐다.

꼬리에 붙은 불은 물살을 따라 흔들리면서도 이무기의 몸뚱이를 조금씩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러나 녀석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불붙은 꼬리로 재차 나를 노렸다.

위협적인 속도로 다가온 그것이 재차 내 몸을 잡아채려는 찰나.

[ (!) 풍문(E) ‘복수는 나의 것’의 효과로 지옥 스킬의 효과가 50% 상승합니다. ]

풍문을 발동했다.

선을 갈고 닦은 영혼이 슬픔의 끝에서 악의 대신 남기고 간 그것을.

풍문의 기운을 감지한 이무기는 커다란 눈을 끔뻑이면서도 검게 그을린 꼬리를 멈추지 않았으나.

[ 화탕지옥(L) ]

화르르륵!

한층 더 거세진 불길이 시뻘겋게 치솟았다.

나는 이무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피어난 강렬한 불꽃이 거대한 장막처럼 부풀어 이무기를 덮쳤다.

-뭐, 뭐야야아아?!

전신에 불이 붙은 이무기가 온몸을 마구 뒤틀었다.

하지만 고통스럽게 꿈틀거리는 것도 잠시뿐.

-……하!

녀석은 금세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캬하핫! 고작 그 멍청한 여자의 사념 따위로!

풍문을 발동했다고는 하나 이곳은 이무기가 지배하는 전설급 필드였다.

풍문에 새겨진 연이의 카르마에도 이무기는 그저 비웃음을 터트렸다.

몸뚱이에 달라붙은 불길 따윈 언제라도 꺼뜨릴 수 있다는 듯 자신만만했다.

-여긴 내 공간이야.

콰르르르르!

콰르르르르르!

필드의 밑바닥부터 다시금 물기둥이 용솟음쳤다.

-고작 인간 한 명의 원한이 뭘 바꿀 수 있단 거지?

이무기가 불러온 물기둥과 내 화탕지옥의 불길이 서로 엮이며 난폭하게 요동쳤다.

물기둥의 영향인지 이무기의 몸에 붙은 새빨간 불꽃이 차츰 사그라지는 것이 보였다.

-자, 얼마든지 불태워 봐라, 미물!

누렇게 쭉 찢어진 눈이 번뜩였다.

물과 불이 얽혀 만들어진 장벽이 우리가 잠긴 필드를 거세게 뒤흔들었다.

-내 권능으로 모두 집어삼켜주마!

권능을 한껏 끌어올린 이무기가 검은 아가리를 벌렸다.

콰르르륵!

화르르르륵!

끓어오르는 물거품으로 시야가 희미해졌다.

물러서지 않고 힘을 주어 검수엽을 빼 들었다.

“아니, 고작 한 명의 원한이 아니야.”

나는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천 년간 이어진 징악의 신화지.”

연이가 남긴 풍문은 연이 한 사람의 카르마가 맞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시간이 걸리더라도 모든 것이 순리대로 돌아가리라는 나의 천명이었다.

[ 검수발아(劍樹發芽) ]

영웅담, 검수발아.

타인을 위험에 빠뜨린 자를 벌하는 칼날나무.

나는 이전에도 이 영웅담으로 전설급 필드를 무너뜨렸다.

당시 필드를 전개한 카르마가 다른 이의 희생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검수지옥의 칼날은 필드에 깃든 죄인의 업을 비껴가지 않을 것이다.

이 필드 또한 용궁의 왕자와 연이의 것을 빼앗아 전개되었으므로.

[ 해당 영웅담에 대한 이해가 완벽합니다! ]

[ 당신의 영웅담이 필드의 카르마에 반응합니다! ]

[ 영웅담의 위력이 1,000% 상승합니다! ]

그리고 그 순간.

[ (!) 당신의 풍문(E) ‘복수는 나의 것’이 당신의 영웅담 ‘검수발아’에 반응합니다. ]

[ (!) 두 카르마가 연쇄적으로 베맏땍긍떪룩놉독딩귐뤠벅(……). ]

[ (!) 법몄뇩렛뒷뢍뭐걍베멋뇬깬뚤뢍뮌걍베맏냇밉뜸렷뤠꽥딩땟흐흐(……). ]

알 수 없는 팝업창이 떴다.

화르르르륵!

화르르르르륵!

꺼지지 않은 화탕의 불길이 돌연 새하얗게 물들며 더한 열기로 공간 전체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거 뭐야아아아?!

순백의 불길이 물기둥을 집어삼켰다.

물기둥은 불길이 얽힌 자리부터 형체를 무너뜨리며 사라졌다.

물을 집어삼킨 불은 역설적으로 더욱 위협적인 벽이 되어 타올랐다.

-뭐, 아아, 아아아악!

조금 전까지 새빨간 불길에 닿고도 조소하던 이무기는 순수한 백염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산사태를 일으킬 정도로 크고 두꺼운 덩치가 순식간에 희고도 광활한 불꽃에 뒤덮였다.

우르르릉!

콰아아아앙!

우레가 쳤다.

깊은 물속에서 먹구름과 낙뢰, 거대한 불이 환상처럼 뒤섞였다.

한데 얽힌 물과 불의 권능에 필드 전체가 흔들렸다.

-아, 아아아, 아아아악---!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고 이무기이자 이무기가 아닌 존재.

그것이 내지르는 비명은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필드와 같았고,

한순간에 뚝 끊어졌다.

[ ‘용이 승천하는 자리’ 필드를 해체했습니다! ]

[ 해당 필드의 등급은 ‘미완성 전설’입니다! ]

[ 카르마 포인트를 ‘10,000’ 획득합니다! ]

제대로 된 팝업창과 함께.

[ 당신의 ‘풍문(E)’이 ‘무용담(E)’으로 변화합니다! ]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정리하듯이.

[ ‘사필귀정(事必歸正)’ ]

- 분류 : 무용담(E)

- 권능 : 징악(懲惡), 사후세계(死後世界)

- 내용 : 세상 저편의 왕이 말하기를, 모든 것은 순리대로 돌아갈 것이다.

- 효과 : 읽어 낸 카르마에 따라 지옥 스킬이 200% 증폭됩니다.

이무기의 필드가 해체되면서 연이가 내게 남긴 풍문도 무용담으로 변화했다.

“……어?”

그런데 부서지는 필드 안에서, 나는 순간 믿지 못할 것을 봤다.

“……대왕님?”

언제나처럼 인자한 미소.

왕을 상징하는 면류관과 검푸른 곤복 자락.

그리워 마지않는 그 모습을.

“아…….”

나의 아버지.

내가 모셨던 나의 왕.

그러나 그를 제대로 불러보기도 전에.

[ (!) 벨댕굶깝룃뒝멂긺베뗬때렛됩뒝륜긋벨겠목흐(……) ]

[ (!) 법뭘몃반랩뢍뮌걍벴뇟때뱅릅렸건꽹럇간겨극딥롼렐독딩귐뤠벅(……) ]

[ (!) 벨댕굶깝룃뒝먕랖벨겟곈꽥롤덖먈뱅(……) ]

다시금 무수한 오류로 점철된 팝업창이 떴다.

내 몸에도 기묘한 스파크가 일었다.

그 스파크를 따라 몸에도 붉은 실선이 그려지는가 싶더니.

파아아악!

물풍선 터지듯 전신에서 피가 터졌다.

말 그대로 온몸이 찢기는 막대한 통증을 느끼며, 나는 저항할 여지조차 없이 정신을 잃었다.

***

“……대왕님.”

문득 한없이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의식이 조금씩 선명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짧게 자른 흰색 머리카락. 큰 몸을 단정히 감싼 검은 정장.

잘 어울리는 것과는 별개로 아직 익숙하지 않은 모습의 형이 보였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제 권능이 모자라서.”

그러나 굳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만은 그저 낯설다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 눈을 모르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이미 한 번 겪었다.

“제가 모자라서…… 또다시, 이런 일이.”

무간지옥을 탈출한 죄인들의 손에 우리 대왕님이 쓰러졌던 날.

왕을 잃었을 때의 그 통한이 담긴 눈이었으니.

“…….”

그제야 형의 속내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시 만난 그의 태도가 왜 그리도 바뀌었는지.

왜 자꾸만 나를 감추려고 했는지.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형.”

형을 불렀으나 한껏 잠긴 목에서는 제대로 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형, 나는…….”

나는 진짜로 괜찮다고.

그 말을 전해야 할 것 같아서 어떻게든 목소리를 내려 할 때였다.

“온몸이 너덜너덜하더구나.”

나란히 앉아 있던 사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손에 새하얀 신성을 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건대 그는 계속 내 몸을 치료하던 중인 듯했다.

그래, 고통에 못 이겨 기절까지 해버린 그 상처를.

“아윽…….”

깨닫고 나서야 한발 늦게 통증이 되살아났다.

무심코 새어 나간 신음을 급히 삼켰다.

전신을 난도질당한 고통이 쉬이 가시지 않았지만, 입을 꾹 다물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했다.

눈이 마주친 형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찰나 사라가 따스한 기운을 더하며 말을 이었다.

“엄청난 신성이었다. 한순간에 그 깊은 계곡이 말 그대로 물 한 방울 남지 않고 증발해 버렸지.”

그 말에 비로소 주변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무기에게 묶여 끌려 들어갔던 계곡물은 사라지고 어느새 나는 버석버석한 모랫바닥에 누워 있었다.

쩍쩍 갈라진 바닥은 본래 계곡이었음이 믿기지 않을 만큼 건조했다.

“저거 보이냐, 전하.”

팔짱을 끼고 선 호구별성이 끼어들었다.

“저거 그 뱀이다.”

답지 않게 가라앉은 얼굴로, 어딘가를 바라보면서.

“그냥 잿더미 아니야. 그 뱀 맞아.”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이무기는커녕 시커멓게 타 버린 재만 한가득 쌓여 매캐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여의주는 여기 있어. 뼈까지 타 버렸는데 이건 남았더라고.”

거기까지 말한 그녀가 내게 여의주를 넘겼다.

“화탕지옥의 불길이었지. 그건 분명 네 신성이 맞았다.”

사라가 말을 받았다.

“그런데…… 너도 절대 무사하지 않았어.”

상황을 전해 들어도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무언가 짐작되는 바는 있었다.

아까 봤던 대왕님은, 역시 그냥 환상이 아닌 모양이었다.

“육체는, 개체에 허락된 인과율이라고 했죠.”

겨우 꺼낸 목소리는 이제 제법 멀쩡하게 들렸지만 나는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깊게 침잠한 눈으로 나를 주시하는 시선이 느껴져서였다.

“……일단 저승으로 돌아가죠.”

그게 신경이 쓰여서, 끝내 한숨을 내쉬고 그대로 이야길 마무리했다.

“형…… 아까 했던 말, 육체와 신성 사이의 간극. 돌아가면 그것도 자세히 얘기해주세요.”

내 말에 형은 나를 잠시 말없이 날 바라보기만 하더니.

“……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더 이상 내게 얼굴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이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왕님.”

“…….”

나는 형이 다시 고개를 들기 전에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러고는 조용히 사라의 신성에 몸을 맡겼다.

고통이 전부 가실 때까지.

***

저승에 돌아왔다.

광천못의 왕자는 여의주를 되찾았다는 말에 물장구를 치며 기뻐하다가, 친구의 소식을 듣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렇군, 그 애가.

나는 손바닥에 놓인 작은 보석을 보여주었다.

내 권능으로 변한 연이의 혼이었다.

-그 애가…… 결국, 그렇게.

친구의 혼이라도 눈에 담으려는 듯 왕자가 내게 다가왔다.

그러나 내 손 앞까지 헤엄쳐 왔던 그는 기어이 몸을 물렸다.

-아바마마께서 내게 늘 하시던 말씀이 있소.

푸른 지느러미가 고요히 흔들렸다.

-신은 영원을 살지만, 인간은 순간을 살기에…… 신과 인간의 시간이 섞이면 분명 큰일이 벌어진다고.

그는 여의주를 잃어버린 후 그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을 것이다.

-나는 그저 그 애를 돕고 싶었을 뿐인데.

눈물샘이 없는 눈 옆으로 자그마한 기포가 방울방울 흩어졌다.

-내가 그 애에게 여의주를 빌려주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그 애는, 이번 생에서 끝까지 행복했을까.

나지막한 목소리는 음절 하나하나에 후회가 아로새겨져 있었다.

-아니, 그냥, 내가 다시 그 애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말에 나는 연이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자신이 어리석었다고, 제 욕심 탓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책망하며 괴로워하던 그녀의 모습이.

한없이 눅눅한 어조로 후회를 되씹는 왕자와 겹쳐졌다.

나는 또다시 물속에 잠긴 것처럼 숨이 갑갑해졌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대체 왜 선의가 악의와 불행으로 이어지는 걸까.

이승은 자주 그렇다.

악인의 욕심에는 꼭 선인이 희생된다.

불합리에 고통받는 것은 언제나 선한 이들뿐이다.

“……왕자님.”

그래서 나는 친구와 다시 만난 것을 후회하는 소년 신에게 힘주어 말했다.

“그건 의미 없는 가정입니다.”

그가 베푼 호의는 결코 잘못된 게 아님을.

“좋은 인연은 끊어지지 않으니까요.”

이승, 그 불합리한 세상의 반대편에서 분명하게 전해주었다.

“삼백 년 전, 한 아이가 용궁의 왕자에게 선의를 베풀었을 때부터 두 분의 인연은 이미 시작된 겁니다.”

왕자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으나, 이윽고 연이의 혼을 바라보는 눈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내 비록 반푼이 신이지만…… 그래도 한 가지, 신다운 권능이 있소.

그러고는 확신과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아주 오랫동안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이오.

영원히 소년에 머무는 존재로서의 다짐을.

-이미 삼백 년을 기다렸소. 삼천 년이라도 더 기다릴 수 있지. 그 애를 다시 만나면 또 한 번 그 애의 친구가 되고 싶소.

나는 다시금 실감했다.

내 신화는 결국 떠나보낸 자들의 신화.

떠나보내고도 하염없이 기다리는 자들을 위한 것임을.

“네, 분명 그리되실 겁니다.”

결국 나는 이 수많은 인연의 보증이었다.

그 모든 가슴 아픈 이별이, 세상의 저편을 거쳐 다시 행복한 만남으로 이어지리라는.

말없이 왕자를 바라볼 때였다.

-내 그대에게 너무 많은 신세를 졌구려, 염라.

왕자가 다른 말을 꺼냈다.

-내 친구를 거두어줘서 고맙소. 그러니 나도 그대에게 꼭 보은을 하고 싶소.

내 손에 놓인 연이의 혼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과거의 연을 마무리 짓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얼굴로.

-부디 나와 함께 서해 용궁에 와 줄 수 있겠소? 내 그대에게 나의 보물고를 열어드릴 터이니.

그렇게 제안해 왔다.

-염라여. 그대는 이미 땅의 왕인지라, 영원한 그대의 영화(榮華)에 비하면 내 작은 보물은 초라하기 그지없겠지만…… 그래도 부디 받아주시오.

16장. 이무기 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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