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장 (4) (41/187)

16장. 이무기 터(4)

울분과 원한.

이대로 비참한 끝을 맞이하게 될지라도, 자신을 이렇게 만든 상대를 참하고 말겠다는 끔찍한 악의.

나는 스스로를 제물로 이무기를 죽이려는 연이와 눈을 맞추었다.

나 역시 그런 최후를 알고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49년 전 인간 이제연의 죽음이 그러했으니.

악인에게 속은 스스로를 힐난하며,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목숨을 건 저주뿐.

그때의 나 또한 지금의 연이처럼, 내 죽음이 상대가 원하던 것을 앗아가리라 악의에 사무친 채로 목숨을 끊었다.

“……아니.”

또한 나는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도 알고 있다.

“역시 당신은 이무기를 잡을 수 없어요.”

서른 번째 제물이었던 이제연이 악의를 품고 자살했다고 한들, 그저 서른 명의 헌터가 다시 한번 희생되었던 것처럼.

그녀의 죽음도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것임을.

“난 주술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저 육신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한계인 당신이 승천 직전의 이무기를 죽일 순 없어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저승차사였던 나는 이런 자들을 많이 봐 왔다.

기능을 다한 육신에 억지로 머무른다 한들 그들은 살아 있는 것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그들에게 허락된 것은 이전까지의 일을 마무리를 짓는 시간뿐이기에.

“결국 당신이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도…… 교활한 뱀은 살아남아 또 다른 희생양을 찾겠죠.”

……스으으! 스으으으!

그녀가 격하게 몸을 떨었다.

-아니야, 죽일 거야!

분노에 휩싸인 채로.

-죽일 거야. 내가 죽여버릴 거야!

이미 불행한 죽음이 확정된 이상.

이제는 죽음 그 자체라도 의미가 있어야 버틸 수 있을 테니까.

-나한테 남은 건 그것밖에 없어!

비늘 사이로 검은 독을 뚝뚝 흘리며, 그녀가 주먹을 쥐고 소리쳤다.

-내 죽음이 그 뱀을 괴롭게 할 거야……!

나는 그저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당신이, 당신이…… 뭘 알아!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당신이 뭘 알아!

그녀의 모습이 내게 너무도 익숙해서.

-나한테는, 정말 아무것도 없어!

익숙하기 때문에 그녀를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나는 그녀가 무엇으로 위로받을 수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이 죽음 끝에는 결국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아니, 아무것도 없지 않아요.”

손을 뻗었다.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서해 용궁의 왕자님…… 당신의 친구를 알고 있습니다. 왕자님은 무사해요. 그분은 끝까지 당신을 믿고 걱정했죠.”

나를 이곳으로 이끈 소년 신을 입에 담았다.

붙잡은 손에서 흘러내린 독이 내 손을 적셔 왔다.

나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지금은 저승의 광천못에 계시는데, 아, 그렇다고 죽은 건 아니에요. 그분은 신이라 괜찮거든요. 그저 당신이 더 아프지를 않기를 바라고 계세요.”

그렇게 그녀에게 나를 드러냈다.

“약속할게요. 덕, 우정, 사랑…… 당신이 쌓은 것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환생을 거듭하여 선을 갈고 닦은 영혼이, 더 이상 악의에 사무치지 않게.

“당신과 당신의 소중한 사람들은 모두 내가 거둘 테니까.”

손을 잡힌 연이가 몸을 움츠렸다.

-당신이 우릴 거둔다고요?

조심스럽게 물으면서.

-당신이…… 누군데요?

아니, 이미 뭔가를 예감한 듯.

-……누구예요, 당신은?

그녀의 눈에는 모든 슬픈 자들이 품는, 안타까운 기대가 담겨 있었다.

“이미 아셨을 텐데요.”

나는 그녀에게 대답했다.

“지금, 당신이 가장 바라는 세상의 왕.”

삶의 끝에서, 지친 영혼이 가장 위로받을 말을.

“그러니까 이제 그만 편히 쉬세요.”

-……아아.

그녀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렇구나.

몹시 편안해진 얼굴로.

-당신이…….

그렇게 숨이 끊어졌다.

이미 오래전 한계에 다다른 육신에 희미한 미소만을 남긴 채.

[ (!) 대상의 카르마가 당신의 카르마에 반응합니다. ]

팝업창이 떴다.

[ (!) 대상의 미완성 풍문(N)이 당신의 풍문(E)으로 변화합니다. ]

나는 망자의 왕이었고,

망자가 남긴 뜻은 이제 나의 천명이 되었다.

[ ‘복수는 나의 것’ ]

- 분류 : 풍문(E)

- 권능 : 사후세계(死後世界), 징악(懲惡)

- 내용 : 세상 저편의 왕이 말하기를, 모든 슬픈 자들의 복수는 나의 것일지어다.

- 효과 : 기억을 읽은 망자의 카르마에 따라 지옥 스킬의 효과가 50%까지 증폭됩니다.

나는 팝업창을 읽다가.

“……이제야, 지옥의 화탕을 끓일 수 있겠군요.”

그냥 조금 웃어 보였다.

그것이 무슨 감정인지, 정녕 웃어도 되는 감정인지 알 수 없음에도.

보라, 선량한 그녀의 죽음은 분명 무언가를 남기지 않았는가.

***

다음 날 아침.

용의 시간, 진시(辰時).

용이 되려는 뱀을 시험하는 진시에는 이런 전설이 있다.

탈피한 뱀에게 “용이다!”라고 소리치면 진짜 용이 되어 승천하고, 반대로 “뱀이다!”라고 소리치면 도로 뱀이 되어 다시 천 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전설이었다.

“뱀이다!”

뱀이 잠든 계곡에서 삼차사와 내가 외쳤다.

수풀이 우거진 골짜기 밑으로 고인 물은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아득했다.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수면 아래는 그저 검기만 해서 마치 바닥을 먹물로 칠해 놓은 듯했다.

콰르르르!

고요하던 물은 우리의 외침에 물거품을 내며 끓어오르기 시작했고.

콰르르르르!

머지않아 계곡 한가운데서 물기둥이 용솟음쳤다.

잠겨 있던 뱀이 고개를 들었다.

감히 누가 부정을 태우냐는 듯 독이 바짝 오른 눈이 형형했다.

-캬아---아아아----!

흉측하게 비늘을 곤두세운 뱀이 우리를 향해 새까만 입을 벌렸다.

[ ‘이무기 터’가 활성화됩니다! ]

- (!) 해당 던전의 등급은 ‘무용담’입니다.

- 클리어 조건 : 이무기의 승천을 막으십시오.

팝업창이 떴다.

이무기가 지배하는 법칙의 영향력은 50%.

이무기를 찾으면 곧바로 주도권 다툼이 시작되는 던전의 법칙 그대로, 영향력이 어느새 절반으로 줄었다.

남은 것은 이무기가 머리에 심은 여의주이자 법칙의 핵을 없애는 일뿐.

“형!”

검을 빼 들며 강림 형에게 신호했다.

“예!”

단번에 알아들은 강림 형이 오랏줄을 든 채 무서운 속도로 이무기에게 달려들었다.

[ (!) 인연의 무용담 ‘세 명의 차사’의 효과로 삼차사의 능력치가 100% 상승합니다. ]

내 신호에 따라 왕과 차사의 무용담이 발동되면서 그의 팔에 육중한 신성이 실렸다.

파아앙!

검푸른 신성이 번쩍였다.

순식간에 이무기의 머리에 올라탄 죽음의 화신이 능숙하게 오랏줄을 휘둘렀다.

촤아아아악.

신의 권능이 담긴 오랏줄이 사정없이 이무기의 목을 졸랐다.

죄인을 오랏줄에 묶어 호송하던 신.

그에게는 사신으로서 가진 ‘죽음’과 ‘사후세계’의 권능 외에도 ‘힘’의 권능이 있다.

오랏줄로 이무기의 몸통을 옥죄는 형을 지켜보며 나는 조금 전 그의 말을 떠올렸다.

-여의주를 직접 회수하시겠다면 뜻대로 하십시오.

-단, 제가 놈을 완전히 묶어 놓은 후에 움직이셨으면 합니다.

물론 형이 먼저 잡아 준다면 여의주를 회수하는 일은 훨씬 편해질 것이다.

거칠고 공격적인 녀석에게서 다칠 확률도 크게 줄어들겠지.

하지만 역시 어색했다.

과보호랄까, 전에 없던 그의 행동이.

나는 작게 한숨을 삼켰다.

저승에 돌아가면 형과 제대로 다시 대화를 나눠 봐야 할 것 같았다.

-캬아아---아----!

목이 졸린 이무기는 형을 떨어뜨리려는 듯 더욱 거세게 요동쳤다.

콰르르르!

계곡물 또한 끓어넘칠 듯 차오르기 시작했다.

형은 재빨리 이무기의 머리에서 뛰어내리는 동시에 오랏줄을 더 길게 빼 들고는 녀석의 몸 전체를 사정없이 졸라맸다.

때맞춰 움직인 호구별성과 사라가 형 뒤에 자리 잡았다.

“쯧, 아직도 쓸데없이 팔팔하군.”

탈피하느라 약해졌을 텐데도 여전히 힘이 대단한지 형이 인상을 썼다.

“대왕님!”

힘의 권능이 담긴 검푸른 신성으로 양팔을 한층 빛내며 그가 외쳤다.

“죄송합니다. 길게 끌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제 뒤에 선 두 차사를 흘끗 곁눈질했다.

“역시 이자들은 별 기능이 없습니다!”

“거, 잉여라 미안하네!”

오랏줄을 붙잡은 호구별성이 소리쳤다.

“난 원래 너 같은 힘캐가 아니란 말이다, 이 무식한 놈아!”

소리친 그녀의 주위로 암녹색의 신성이 번쩍였다.

-캬아아-아아아아--!

그 순간 오랏줄에 묶인 이무기가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었다.

탈피로 약해진 피부에 역병의 독기가 스며들어서일 것이다.

“……뭐, 나도 나름 애쓰고 있다만.”

뒤에 선 사라가 대꾸했다.

파아앙!

동시에 삼차사의 팔뚝 위로 검은 꽃이 피어났다.

힘 스탯을 100% 올려주는 뼈살이꽃이었다.

무용담과 꽃의 효과가 중첩되면서 차사들의 힘은 세 배나 강해졌다.

승천을 앞둔 이무기마저 오랏줄에 묶여 옴짝달싹 못 할 만큼.

이것이 어떤 무용담을, 어떤 스킬을, 어떤 권능을 가졌는지가 중요한 이유였다.

그리고 내게는, 악인을 벌하는 징악의 권능이 있다.

“괜찮아요. 이대로 승부를 내겠습니다.”

그대로 이무기를 향해 몸을 날렸다.

거대한 몸이 다 잠겨 버릴 만큼 물이 불어나서인지, 물 밖으로 내놓은 머리는 꼭 홀로 떠 있는 섬 같았다.

그 위에 올라타자 곧바로 이마에 박힌 보석이 보였다.

바다를 닮은 청옥색의 보석.

여의주의 형태를 빌린 그것은 던전을 지배하는 법칙의 핵이었다.

물을 다루는 용궁 왕자의 여의주는 이 핵에 삼켜졌을 것이다.

“이걸 가지려고 죄 없는 이들을 희생시켰지.”

핵에 검을 박아 넣으며, 나는 이무기의 법칙에 나의 권능을 더했다.

“이제 네 업을 갚을 차례다.”

[ (!) 충돌한 지배법칙이 주도권을 겨룹니다. ]

[ (!) 오행(五行) ː 수(水) ↔ 징악(懲惡) ]

한데 그때였다.

-캬아아아--!

아가리를 벌린 이무기가 엄청난 기세로 요동쳤다.

퍼어억!

퍼어어어억!

오랏줄에 묶여 있던 몸뚱이가 사방으로 흔들리면서 삽시간에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켰다.

퍼어어어어어억!

계곡물까지 더욱 무서운 기세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콰르르르!

녀석이 가진 물의 권능이었다.

순식간에 불어난 물이 해일이 되어 나를 덮쳤다.

“……!”

찰나의 암전.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숨통이 죄이고 있었다.

“……크으으윽!”

온몸이 으스러질 듯 막강한 힘이었다.

오랏줄이 돌연 거세진 힘에 더 버티지 못하면서 풀려난 이무기가 그대로 내 몸을 졸라 버린 것이다.

“제연아!”

누군가의 비명 같은 외침이 들리는 한편 숨이 막히는 감각에 일순 눈앞이 흐려졌다.

-움직이지 마라!

그런 와중에도 머릿속으로 스미는 사악한 사념은 뚜렷하게 의식을 파고들었다.

-자꾸 귀찮게 굴면 이놈을 죽이겠다!

나를 인질 삼은 이무기가 킬킬 웃으며 차사들을 위협했다.

뱀이 웃을 때마다 몸이 더욱 강하게 죄였다.

나는 절로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꾹 눌러 참았다.

몇 초, 어쩌면 몇 분일지도 모르는 대치 상태가 이어졌으나.

-뭐, 가만있어도 죽일 거지만!

그것을 깬 것은 차사들이 아니었다.

별안간 계곡물이 전신을 집어삼켰다.

이무기가 나를 힘껏 죈 상태에서 수면 아래로 몸을 처박은 탓이었다.

[ (!) 공간의 지배법칙이 바뀝니다. ]

또한.

[ ‘용이 승천하는 자리’에 입장하셨습니다! ]

- (!) 해당 필드의 등급은 ‘미완성 전설’입니다.

- 해체 조건 : 용의 승천을 막으시오.

필드를 알리는 팝업창과 함께 이때껏 느낀 적 없던 압도적인 기운이 온몸을 짓눌렀다.

그 기운이 공간을 잠식하자, 물보라가 치던 계곡은 심해처럼 깊고 어두운 공간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무용담급 던전이었던 이무기 터는 이제 인간이되 이무기인 존재가 펼치는 전설급 필드가 되어 있었다.

이곳이 전설급 필드라는 것을 인식하자마자 전에 저승 던전에서 봤던 흑탑주가 떠올랐다.

마치 뱀처럼 몸에 비늘이 돋아 있던 여자.

어쩌면.

어쩌면, 이 전설의 주인은…….

“……아.”

그 순간이었다.

몸을 짓누르는 깊은 물속에서 똬리를 뱀이 말했다.

-나는 물의 지배자이니!

-내 권능에 잠겨 죽어라, 미물!

벌써 용왕이라도 된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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