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장 (2) (39/187)

16장. 이무기 터(2)

[ ‘이무기 터’에 입장하셨습니다! ]

- (!) 해당 던전의 등급은 ‘무용담’입니다.

- 클리어 조건 : 이무기의 승천을 막으십시오.

팝업창이 떴다.

허공에 뜬 영향력은 ‘100%’.

이 던전의 법칙은 이무기가 승천할 때까지 정기를 모으는 것이다.

공략법은 몹시 단순한데, 그냥 이무기를 찾아내서 핵을 부수고 소멸시키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이무기는 자연스레 정기를 모으지 못하게 되니까.

다만 여타 무용담급 던전과는 달리 이무기 터는 산 전체를 뒤덮을 만큼 넓다는 게 문제다.

자칫하면 산에 홀려 이무기는 그림자도 못 보고 죽을 수 있다.

“달이라도 밝아서 다행이군.”

앞장선 강림 형이 말했다.

“산의 정기가 혼탁해졌어.”

오염된 정기 때문인지, 사방에는 기괴하게 뒤틀린 나무들이 마치 울타리처럼 얽혀 있었다.

이무기를 찾는 것 자체가 공략의 일부이다 보니 지형이 몹시 거칠어진 상태였다.

“먼저 길을 좀 정리하겠습니다, 대왕님.”

앞에서 길을 살피던 강림 형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무마다 탁기가 배었으니 닿지 않게 천천히 오십시오.”

“……어.”

아니, 형.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는데.

채 만류하기도 전에 성큼 가 버리는 형의 뒷모습을 멋쩍게 바라봤다.

길이 험하다지만 형이 먼저 궂은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영 어색했다.

우리가 밤에 움직이는 게 특별한 일도 아니고.

원래라면 내가 밤길에 좀 다쳐 봤자 넌 저승사자가 돼서 아직도 밤눈이 어둡냐며 혀만 쯧쯧 찼을 텐데.

“글쎄, 왕께서 지나실 길이니 신하가 먼저 가서 평탄히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

그때 뒤에서 사라가 한마디 했다.

내가 형의 변화를 다소 껄끄럽게 느끼는 것을 알아봤는지.

“저놈 성격에 그걸 나나 별성한테 맡길 놈도 아니지.”

……뭐, 원래도 형은 우리 대왕님 일이라면 황소고집이었으니까.

그 말을 듣고 보니 괜히 더 말을 보태는 것도 이상해서,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앞으로 계속 이러는 건 좀 불편하니까, 이무기 일이 정리되고 말하면 되겠지.

“근데 전하, 여기 뭔가 좀 이상하다.”

문득 호구별성이 다른 말을 꺼냈다.

“정기가 뒤틀린 거야 이무기 때문이라 쳐도.”

뭔가를 느꼈는지 어째 좀 찜찜하다는 얼굴로.

“산 전체에서 주술이 느껴지거든?”

“주술이요?”

“그래, 바리가 있으면 확실히 알 텐데. 뭐, 나도 인간이 주술로 뭔 짓 하면 딱 아니까.”

인상을 쓴 그녀가 나를 돌아봤다.

“여기 뭔가, 아주 끔찍하게 뒈지라는 사념이 느껴져.”

쯧쯧 혀를 차면서.

“일종의 저주지, 그럼 반드시 제물이 필요해.”

“제물요?”

그냥 지나갈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럼 던전에 규칙이 더해질 수 있단 거네요.”

‘이무기 터’는 본래 단순한 던전이다.

확실한 공략법이 나와 있을 만큼.

그런데도 알려지지 않은 규칙이 있다는 건, 누군가 주술로 던전의 시스템을 조작했다는 뜻이다.

곤란한데.

여기서 대체 무슨 일이…….

“대왕, 그런데.”

사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발에 뭐가 자꾸 채는구나.”

호구별성처럼 불쾌함이 짙은 얼굴로.

“뱀 비늘이다. 아무래도 뱀이 탈피를 한 것 같다만.”

말을 잇던 그는 무언가 거슬리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한데…… 이건 이무기의 것이라기엔 너무 작구나.”

그때였다.

그의 뒤로 무언가 기척이 느껴진 것은.

“도령님!”

“……!”

그대로 검을 빼 들었다.

동시에 기척을 눈치챈 사라가 몸을 홱 돌려 피했다.

“뭐야?!”

호구별성이 소리쳤다.

“이런 미친!”

그리고는 ‘그것’을 가리키며 욕설했다.

“저게 뱀이야, 사람이야!”

갑자기 나타난 괴한은 온몸이 비늘로 덮여 있었다.

사람처럼 두 발로 서 있는데도 비늘 탓에 꼭 뱀처럼 보였다.

……스으으.

벌어진 입에서는 사람의 말 대신 바람 소리 비슷한 게 났다.

“……!”

눈이 마주친 뱀 인간이 팔을 뻗었다.

비늘 돋은 팔이 목에 닿으려는 찰나,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베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공격은 분명 먹혔다.

그러나 나는 더욱 바짝 긴장했다.

칼날이 상대를 가르는 감각에서 이상함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게 아니야.”

베어 낸 감각을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살아 있지 않되,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존재.

저승사자였던 나는 가끔씩 이런 존재를 마주한 적이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왜, 이런 곳에 이런 존재가?

“……어째서?”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뱀 인간에게 의문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어디서 불청객이 떼거지로 몰려왔을까!”

의식을 잡아채듯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불청객은 죽어야지!”

예상치 못한 기습이었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여자가 내게 달려들었다.

“……!”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촤아아악!

본능적으로 휘두른 검이 여자의 몸을 베었고.

허공 가득 검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순식간에 나까지 흠뻑 젖을 만큼 상당한 양이었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그 일격에 죽었을 것이다.

분명 제법 괜찮은 반격이었다.

“……이런, 의외로 이빨이 날카로우셨네!”

그러나 상대는 멀쩡했다.

정확히는 얼굴부터 배까지 길게 이어진 자상을 달고도 아무렇지 않게 웃어 젖혔다.

“……!”

말 그대로 상반신에 금이 간 여자는 순식간에 다가와 그대로 내 목을 움켜쥐었다.

“……크윽!”

여자가 찢어진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달빛 아래로 그녀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크…… 여, 언.”

연이.

용궁의 왕자가 찾던 그 여자.

“아하.”

그러자 ‘연이’가 재밌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당신, 왕자가 보내서 왔구나!”

빠아악!

그 순간이었다.

크고 새까만 것이 무서운 속도로 그녀를 내려쳤다.

신성을 끌어올린 강림 형이었다.

동시에 그녀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나는 반사적으로 기침을 하며 두어 걸음 물러섰다.

“……감히.”

짓씹듯이 내뱉은 형이 연이의 멱살을 잡아 사정없이 내동댕이쳤다.

파아앙!

형의 손에 실린 발설지옥의 신성이 번쩍였다.

눈 깜짝할 새에 상대가 저 멀리까지 굴러갈 만큼 강한 힘이었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형이 다시 한번 달려들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뒤를 놓쳤습니다.”

등을 보인 채 잘못을 고하는 형의 목소리는 무섭도록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검푸른 신성을 극도로 끌어올리며 말 그대로 저승사자처럼 무자비하게 연이를 몰아붙였다.

“대왕!”

“전하!”

다른 두 차사가 내 곁에 와서 섰다.

“저 여자가 걔 맞지?”

연이를 알아본 호구별성이 물었다.

“그런데, 왜…….”

말하면서도 말꼬리를 흐렸다.

“왜 저렇게 세?”

그녀도 연이에게서 이상함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내 일격에 찢어진 몸으로,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강림 형의 무차별적인 공격에도 끄떡없이 합을 주고받는 모습에.

“……약한 무당이라고 안 했어?”

결국 우리는 모두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처음부터 왕자를 속였나?”

왕자는 분명 제 친구 연이가 선한 영혼이라 말했다.

그러나 전생에서는 선했던 인간이 현생에서 악인이 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에는 이미 선한 자들만 남았을 테니까.

빠아아아악!

그때였다.

“형!”

“강림!”

연이를 상대하던 형이 그대로 바닥에 내쳐졌다.

바닥을 구르는 그의 밑으로 벌써 핏물이 흥건했다.

방금 그 일격이 곧바로 치명상으로 이어진 게 분명해 보였는데.

“괜찮습니다.”

그는 태연히 몸을 일으켰다.

“손상은 없습니다.”

새까만 정장이 피에 젖었음에도, 일렁이는 검푸른 신성에 뒤덮여 그저 멀쩡하게.

……뭐지?

진짜 괜찮은 건가?

처음 보는 힘에 나는 형의 몸을 살폈다.

분명 피가 크게 터지는 것을 보았는데 일어선 그의 몸에는 상처가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그새 회복한 것처럼.

사라가 서천꽃밭의 신성을 쓰지도 않았는데.

“대왕님께서 나서실 것 없습니다.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긴 형이 아무렇지 않게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런데 형이 선 위치가 다소 묘했다.

크고 너른 등이 마치 노린 것처럼 연이에게서 나를 가리고 있었다.

“…….”

철벽과도 같은 벽이 시야를 가로막은 것을 보며, 나는 더 참지 못하고 그의 앞으로 나섰다.

“아뇨, 형. 형이야말로 나한테 자꾸 그러지 말고…….”

“……후, 후하핫!”

한데 돌연 연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핫, 이거, 아무래도 그냥 갈 생각은 없나 보네?”

멀찍한 거리에서도 웃음소리는 마냥 선명했다.

“하긴 그래, 왕자가 보냈다면 여의주가 목적이겠지!”

또한 곧이어……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근데 그건 이미 내 거거든?! 아하하핫!”

광소를 터트린 연이가 반으로 갈라지더니 그 사이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저게, 무슨…….”

그래,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것은 뱀이었다.

일대를 검게 뒤덮을 만큼 아주 거대한 뱀.

“말도 안 돼. 연이가 이무기였다고?”

그 믿을 수 없는 일을 지켜보며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일전에 가짜 몸을 만들던 정체불명의 조직.

……그리고 용궁 왕자가 갇혀 버린 볼품없는 고등어.

처음 왕자를 봤을 때는 그들이 고등어를 거쳐 인간을 만들었을 거라 추측했지만.

어쩌면 그들은 우주질서보존회가 설계한 인간 형태의 빙의체를 먼저 만들고, 그 기술을 응용해 고등어도 만들어 봤던 게 아닐까.

인간의 몸만 만들어 내는 우주질서보존회의 시스템에 버그를 일으켜서.

그럼 인간과 고등어…… 그것들을 거쳐 놈들이 진짜로 하려던 것은.

“……이놈들, 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나는 연이가 변한 이무기를 올려다봤다.

워낙 거대한지라 주변의 나무는 그냥 잔가시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머지않아 용으로 승천할 이무기임을 증명하듯, 그것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일대를 묵직하게 휘어잡고 있었다.

저런 게 자그마한 인간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이 당장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뭐 하는 놈들이길래…… 몬스터에 사람을 빙의시켜?!”

……사람이 몬스터에 빙의했다.

그러한 현실을 간신히 깨달은 순간이었다.

우르르릉!

콰아아아앙!

별안간 천둥 번개가 번쩍이더니 비구름이 휘몰아쳤다.

하늘을 올려다본 사라가 인상을 썼다.

“이런, 이무기가 부르는 비다……!”

곧 일렁이던 비구름에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산 전체를 부수어 버릴 듯 압도적인 기세였다.

캬아아아!

아가리를 벌린 뱀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우르릉! 콰앙!

다시 한번 우레가 쳤다.

미친 듯이 쏟아지던 폭우는 한층 거세졌고, 순식간에 시야마저 가려버렸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퍼어어억!

퍼어어어어억!

이무기가 거대한 꼬리를 사정없이 휘둘렀다.

진흙투성이 바위가 아무렇게나 바스러져 비산했고, 수백 그루의 나무가 함부로 꺾인 채 뿌리를 잃었다.

산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귓가를 사납게 때리는 빗소리 밖으로 무언가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한, 혹은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발밑이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그 직후였다.

이건 마치…….

“미친, 산사태잖아!”

호구별성이 경악했다.

우르르릉!

콰아앙!

콰아아아앙!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비에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

질척해진 흙과 넘치는 빗물이 해일처럼 우리를 집어삼켰다.

휩쓸리는 것은 순간이었다.

묵직한 흙더미가 몸을 덮치자 숨이 턱 막혀 왔다.

산사태라니, 뭔가 이상하다.

원래 이무기 터가 이랬던가?

공략 중 산사태가 발생하는 게 종종 있는 일이었나?

……아니, 역시 이런 건 못 들어봤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였다.

사람이 들어가서 이무기의 지능이 향상된 거다.

이 빌어먹을 뱀이, 헌터들이 익숙지 않은 방법으로 우릴 보내버리려는 거라고!

“……형!”

정신을 놓지 않으려 애쓰면서 나는 강림 형을 불렀다.

“강림 형!”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어느새 목까지 차오른 흙탕물이 늪처럼 몸을 빨아 당겼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가라앉지 않기 위해 팔다리를 내두르는 것뿐.

“대왕님!”

멀찍이서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 역시 산사태에 휘말렸는지 쥐어 짜내는 듯한 외침이었다.

무심코 튀어나오려는 걱정을 삼키고, 뒤이어 다른 두 차사를 찾았다.

“누나! 도령님!”

직접 향하려 해도 지금으로선 이 자리에서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괜찮다, 전하……!”

어딘가에서 호구별성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도, 영감도, 여기…… 우웁!”

흙에 삼켜진 듯 이내 말이 끊겼다.

“……!”

위기였다.

빠르게 결단을 내려야 했다.

우리 몸의 스탯이 최고치라곤 하나 그것만으로 이런 재해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다.

“모두, 몸에서 빠져나오세요……!”

이러다 가짜 몸의 생체 기능이 훼손되면 빙의한 혼까지 소멸하고 만다.

몸을 버리더라도 혼만큼은 지켜야 했다.

“빨리……!”

한데 몸에서 탈출하려던 그때.

[ (!) 시스템이 해당 필드의 카르마와 충돌합니다. ]

[ (!) 당신의 생체 아이템이 해당 필드의 카르마에 반응합니다. ]

지금껏 없던 팝업창이 떴다.

[ (!) 생체 아이템의 분리가 지연됩니다. (남은 시간 : 30초) ]

“……30초?!”

30초라니.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 순간에 무슨.

“설마, 아까 누나가 말한 주술이…….”

무당인 연이가 이무기가 된 걸로 모자라 시스템에도 손댄 걸까?

우르르릉!

콰아아아앙!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말문이 막히기 무섭게, 재차 벼락이 치면서 산 전체가 출렁였다.

“……!”

쏟아지는 폭우.

몸을 죄는 흙더미.

30초는커녕 3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

“……영감, 영감은 내가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문득 호구별성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리고.

“……일단 애들부터 살려!”

서천꽃밭의 새하얀 신성이 번쩍이더니.

……

육중한 흙더미가 덮쳐 오면서 시야가 암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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