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장 (2) (36/187)

15장. 부름(2)

인간한테 빌려준 여의주를 찾아달라던 고등어는 우리의 눈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도 알고 있소. 그대들 모두 나를 바보라고 여기겠지.

볼품없는 지느러미로 소심하게 봉투를 휘저으며.

-하지만 염라여, 나는 그 애를 정말 사랑했소.

앳된 목소리에 맞지 않게 씁쓸한 어조로.

-그 애는…… 아주 오래 기다려서 만난 친구였거든.

오래 기다려?

신이?

“환생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소.

이런.

나는 그 말에 납득했다.

환생이라면 그의 말대로 정말 바보처럼 당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인연이란 그런 것이니까.

축 늘어진 고등어가 말을 이었다.

-내가 아직 신의 모습을 완성하지 못했을 때, 인간에게 잡혀간 적이 있었소.

오면서 이미 들은 얘기였다.

무릇 모든 물에는 물을 다스리는 용왕이 깃드는 법이라.

호수나 강은 물론 작은 연못과 우물에도 용왕이 산다.

민물의 용왕은 모두 네 개의 바다를 나눠 가진 사해 용왕의 자식들인데.

새로 태어난 용왕은 신성이 여물 때까지 잠시 물고기의 모습을 빌린다.

용은 본래 신과 짐승 사이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이 막내 왕자는 인간한테 붙잡히는 바람에 용왕이 되지 못했다.

물려받은 용의 신성에 인간의 탁기가 섞여 영원히 덜 자란 소년 신으로 남게 된 것이다.

-탐욕스러운 간신의 집이었지. 금과 은으로 치장했지만 곳곳의 더러운 탁기를 숨길 수 없었소.

왕자의 말이 이어졌다.

-나를 풀어놓은 물도 더럽긴 마찬가지였소. 그래서 곡기를 끊었다오.

그랬다면 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원래도 신은 신의 음식을 먹지 않으면 조금씩 신성이 떨어지는데.

완전한 용신이 되지 못한 그는 사실상 그저 물고기와 다름이 없었을 테니.

-그런데 열 살도 안 된 조그만 사내아이가 하루에도 몇 번씩 밥을 주더군.

이어지는 말에는 어렴풋한 그리움이 녹아 있었다.

-처음에는 먹지 않았소. 탐관오리가 주는 먹이 따위는 역할 뿐이니. 수치스럽게 영생을 이어갈 바에야 그냥 죽으려고 했소.

아직도 그때를 잊지 못한 듯.

-그런데 며칠 후 그 애가 울더라오. 안 먹으면 죽는다고. 자기네 엄마처럼.

여물지 않은 용신의 혜안으로 아이를 살피니.

아이는 그 탐관오리와 어느 여종의 자식으로.

한 번은 본처가 종에게서 자식을 봤다고 욕을 하자, 화가 난 탐관오리는 양갓집 규수인 본처 대신 제 자식을 낳은 여종을 굶겨 죽였다.

그 꼴을 보고 자란 아이는 물고기도 굶어 죽을까 봐 매일 울면서 고기의 밥을 챙긴 것이다.

-그래서 그 애가 주는 밥은 먹었소. 부정한 것은 일절 입에 대고 싶지 않아 곡기를 끊은 것인데, 아이의 마음만큼은 순수했으니.

결국 왕자가 살아남은 것은 그 아이 덕이었다.

그가 정말로 곡기를 끊었다면, 평범한 물고기처럼 머지않아 죽어 버렸을 테니.

-얼마 뒤 큰형님께서 나를 구해주셨는데, 용궁으로 돌아가며 결심했소. 꼭 그 애에게 은혜를 갚겠다고.

하지만 왕자가 탈출하고 바로 뒤.

아이는 제 아비였던 탐관오리에게 맞아 죽었다.

그저 귀한 물고기를 빼앗긴 것에 화가 났다는 이유로.

“그렇게 인연이 이어진 것이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왕자가 여의주를 빌려준 게 이해가 되었다.

한 번 생겨난 신의 의지는 뜻을 이룰 때까지 사라지지 않으니까.

-얼마 전에 그 애를 다시 만났소.

왕자가 다시 말했다.

-어린 소년에서 과년한 처녀가 되어 있었지만, 나는 한눈에 알아봤소.

그새 또 희미한 기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신줄이 약한 무당이 되어 있더군. 약해서 돈벌이가 썩 잘되진 않았어.

어느새 지느러미마저 조금씩 살랑거리면서.

-그런데 그런 없는 형편에도, 그 애는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여럿 거두어 돌보고 있었소.

그러더니 불현듯 나를 똑바로 마주해 왔다.

-염라, 그대는 저승의 왕이시니 아실 것이오. 인간은 생을 거듭해 영혼을 갈고닦지.

맑고 순수한 소년 신의 눈으로.

-그 옛날 물고기에게 밥을 주던 어린 영혼은, 생과 생을 거듭하여 이제는 아이들을 거두는 영혼으로 활짝 피어난 거요.

그래, 그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겠다.

신은 만사에 무정하여도, 그래도 가끔은, 반드시 선한 영혼을 사랑할지니.

-그 애를 돕고 싶었소. 마침 신줄도 타고났으니 가능했지.

그가 말했다.

-모자란 신줄을 보충하도록 나는 내 여의주를 빌려줬소.

무당인 그녀는 빌린 여의주로 점사를 봤다고 했다.

소년 신인 왕자의 여의주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없었지만, 그리 큰 힘이 아니기에 오히려 그녀와 아이들 몇 명이 먹고 살기 딱 적당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애가 희한한 것을 가져왔소.

문득 꼬리를 살랑대던 왕자가 움직임을 멈췄다.

-죽은 것처럼 축 늘어진 고등어였지. 몹시 볼품없는.

고등어?

그 말에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왕자를 주시했다.

그래, 봉투에 담긴 이 비리비리한 고등어를.

-그 애는 천진하게 웃으며 한번 그것에 빙의해 보라고 했소.

이어지는 말에 좀 더 인상을 썼다.

-그냥 엉뚱한 장난이라 생각했소. 뭐, 바다의 신은 물고기에도 깃들 수 있나 궁금한가 보다. 그런데.

말을 한 번 멈춘 그가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나올 수…… 없었소.

혼을 몸에 고정시키는 주술!

그에 나는 곧바로 야마라자를 깨우려던 박수무당을 떠올렸다.

당시 놈은 주술로 나를 가짜 몸에 묶어 도망치지 못하게 한 뒤, ‘염라’를 제물로 바쳐 ‘야마라자’를 부르려 했다.

당시 야마라자를 위해 준비된 가짜 몸은 3미터가 넘는 거대한 크기였으니, 이렇게 작은 고등어에 신을 담는 것도 딱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터.

“바리.”

나는 바리를 불렀다.

“풀 수 있겠어?”

나를 가짜 몸에 묶었던 주술은 바리가 만든 주술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왕자를 고등어에 묶은 주술도 풀 수 있을까?

내 말에 바리는 고등어를 살피더니.

“아뇨, 너무 조악한 주술이에요.”

심각한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억지로 풀면 왕자님까지 해를 입으실 거예요. 그래서 실패한 주술이고요.”

그러고는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우주질서보존회가 유통하는 반영구빙의체를 직접 만들었죠. 어쩌면 그 과정에서 고등어를 먼저 만들어 봤을 수도 있겠어요. 그렇게 무엇이 부족한지 실험해 보고 저희 가족을 찾아온 거죠.”

……그런가.

힌두교의 신 야마라자를 부활시키기 위해 바리의 조부모를 해치고 바리를 이용한 박수무당.

놈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설급 각성자에게 속해 있었다.

그 각성자는 아마,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사악한 조직을 부리고 있겠지.

한데 문득 껄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도 무당이라고요?”

설마 그녀도 그 조직의 일원일까?

생을 거듭하여 타인을 도왔다는 그 맑은 영혼이?

“…….”

……하긴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아무리 생을 거듭해 혼을 단련할지라도, 인간은 단 한 번의 생만으로도 쉽게 타락하니까.

-나는 그 애를 믿소.

왕자가 말했다.

-분명 무슨…… 무슨 사정이 있었을 것이오.

나풀거리는 지느러미가 퍽 울적해 보였다.

-비록 나를 이 고등어에 가두고, 어시장에 팔아버렸지만!

……이런.

이 가출 청소년, 그 여자가 팔아치운 거였어?

-아니, 아니야! 분명, 분명 무슨 사정이 있었을 것이오!

우리의 눈에 드리운 의심의 그림자를 읽었는지, 고등어가 다급하게 지느러미를 펄럭이며 그녀를 변호했다.

“뭐, 왕자 네 순정만큼은 인정이다, 야.”

호구별성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왕자를 위해 참는 듯했다.

“결국, 그녀가 당신의 물건을 훔친 것이군요.”

나는 왕자의 말을 정리했다.

“그렇다면 화탕지옥이 마땅합니다, 대왕님.”

옆에서 강림 형이 덧붙였다.

화탕지옥, 그곳은 도둑질한 자를 펄펄 끓이는 지옥이니까.

나는 그 말에 수긍하면서도 문득 느껴지는 익숙함에 눈을 깜박였다.

한마디 툭 얹는 모습이 새삼 돌아가신 대왕님 곁을 지키던 때처럼 반듯해서.

그 시절처럼 내 옆을 곧게 지키고 선 모습이 아직도 조금 이상해서.

그래서 형을 괜히 힐끗 올려다보았다가, 시선이 마주치기 전에 다시 왕자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녀에게서 여의주를 되찾아 드리겠습니다, 왕자님.”

다만 그렇기에 확실히 해야 할 것이 있다.

“하지만 제가 저승의 왕인 이상, 죄인은 반드시 저승의 법도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 말에 고등어가 깜짝 몸을 떨었다.

“제가 그녀를 벌해도 되겠습니까?”

그 여자가 정말로 사악한 조직의 일원이라면, 마땅히 벌하여 혼을 회수해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용궁의 왕자가 마음을 준 사람이었다.

나는 일단 그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으로 예의를 차렸다.

-염라여, 나도 그대의 법이 엄한 것은 알고 있소.

왕자가 대답했다.

-만약 그 애가 정말로 타락한 것이라면, 그대의 법에 따라 벌해 주시오. 하지만.

간절한 목소리로.

-하지만, 나는…… 저승의 판관에게 온정이 있었으면 좋겠소.

그가 내게 청했다.

-만약, 그래도 만약 무언가 사정이 있었다면 부디 관용을 베풀어 주시오. 대왕이시여.

그래, 무슨 마음인지 이해했다.

“예, 알겠습니다.”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당신의 은혜를 기억한다면,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인간은 은혜를 너무나 쉽게 잊는다는 것을 떠올리면서.

“그녀가 당신을 배신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래도 이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그 여자가 정말로 사정이 있었으면 좋겠다.

볼품없는 고등어가 되어서도 친구를 믿는 가엾은 소년 신을 위해서.

“그런데 왕자님.”

그때였다.

“그럼 지금은 용궁으로 가실 수 없으시겠군요.”

문득 사라가 말을 꺼냈다.

“혹시 머무실 곳은 정하셨습니까?”

그 말에 왕자가 그쪽을 돌아보았다.

-아니, 괜찮다면 이 봉투에서 계속 지내게 해주시겠소?

“…….”

정말 이걸로 괜찮은 거야?

“……애는 참 순한데 말이야.”

뒤에서 호구별성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어찌 왕족을 이런 곳에 모실 수 있겠습니까.”

사라가 옅게 웃어 보였다.

“괜찮으시다면 저승의 광천못은 어떠십니까?”

“……!”

사라의 부드러운 권유에 우리는 곧장 그의 뜻을 알아챘다.

-광천못? 서천꽃밭의 못 말이오?

꼬리를 살랑이는 왕자의 눈이 반짝거렸다.

-내가 거기 머물러도 되오?

“예, 왕자님. 한데…….”

고개를 끄덕인 사라가 조심스러운 어투로 말을 이었다.

“송구하게도 지금 광천못이 매우 혼탁한 상태입니다만.”

-괜찮소! 괜찮소! 아주 좋소!

살랑대던 꼬리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내 비록 반푼이 신이라도 용왕의 아들이오! 내가 머무는 물은 정순하게 주인의 자리를 만들지!

그 말에 사라가 후후 웃었다.

“예, 그렇다면 누추하지만 저승의 광천못으로 모시지요.”

-좋소! 고맙소! 아주 고맙소!

고등어가 신나게 팔딱이며 소리쳤다.

-머물 곳도 마련해 주다니! 저승의 신들이여, 내 이 은혜는 꼭 갚겠소!

……이야. 사라 저 양반, 이걸 또 이렇게 푸네.

본래 우리가 용궁의 도움을 받아 물을 정화해야 할 입장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머물 곳을 찾던 왕자에게 도리어 은혜를 베푼 게 됐지 않은가.

왕자는 물론 용왕에 비하면 한참 신성이 약할 테지만, 적어도 당장의 침식을 늦출 수는 있을 것이다.

단지 광천못에 신성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잠시나마 물이 맑아지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말이오.

문득 왕자가 말했다.

-뒤에 저 친구들도 데려가는 것이오?

응?

-트렁크! 차 트렁크에서 물기운이 느껴지오!

순간 모두가 침묵했다.

아…… 그거?

우리 저녁인데.

아까 왕자랑 같이 샀던 횟감이랑 매운탕거리 말이야.

현신하면 배고파서 밥을 먹어야 하니까.

“흠흠!”

모두가 난감해진 때 강림차사께서 헛기침을 했다.

“예, 왕자님.”

그리고는 차사로서 진중히 저승왕의 뜻을 전했다.

“저희가 좋은 곳으로 모실 겁니다.”

“…….”

저승사자가 하는 말이니, 뭐…… 거짓말은 아니다?

-오오!

그러자 왕자가 천진하게 눈을 빛냈다.

-저승의 신들은 다들 마음이 넓으시구려!

우리는 애매한 미소만 지은 채 누구도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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