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장 (1) (35/187)

15장. 부름(1)

광천못.

서천꽃밭 너머의 연못.

열다섯을 못 넘기고 죽은 아이들은 종종 사라수대왕의 권속이 되어 광천못에서 물을 뜨는 일을 했다.

신성한 물을 먹고 자라는 서천의 꽃밭을 가꾸기 위해서.

“갑자기 뭔데?!”

걸음을 빨리하며 호구별성이 물었다.

당장 광천못으로 가야 한다는 바리의 말에, 우리는 영문도 모르는 채로 서둘러 광천못으로 달리는 중이었다.

“저승이 무너진다니! 제대로 좀 말해줘 봐!”

잔뜩 당황해서 소리치던 그녀가 돌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느덧 가까워진 광천못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니, 저건 또 언제 저렇게 똥물이 됐대?!”

그녀의 말대로 아름답기로 이름 높던 광천못은 그새 진흙탕이 되어 있었다.

은가루를 뿌린 것처럼 반짝이던 물은 더러워져 물속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못 위로 늘어져 있던 아름드리 버드나무도 시들어 꺾인 지 오래였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못 전체에서 번지는 탁기였다.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눈살이 찌푸려질 만큼 광천못 주변은 탁기로 가득했다.

안개처럼 번진 탁기는 안 그래도 볼품없어진 광천못을 더욱 음산하게 했다.

“허.”

광천못을 훑던 사라가 작게 탄식했다.

“그래, 저 물이 아직 맑을 리 없지. 아이들, 순수한 영이 돌보던 못이니.”

결국 광천못이 오염된 것은 사후세계가 붕괴되면서 혼의 순환이 끊겼기 때문이었다.

광천못은 서천의 꽃을 기르는 물.

서천꽃감관인 그는 한눈에 문제의 원인을 알아봤다.

“……저승이 무너진다는 게 이런 뜻이었군요.”

강림 형이 말을 받았다.

“물에 닿는 부분부터 침식되고 있습니다.”

형 말대로 못의 주변은 곳곳이 까맣게 바스러지는 중이었다.

“서천꽃밭을 기르는 광천못이 탁해졌다는 것은 결국 생의 권능이 무너졌다는 뜻이니까요.”

생과 사는 본디 하나인지라, 생의 권능이 무너지면서 죽음의 권능인 저승마저 무너질 거란 말이었다.

큰일이었다.

이대로 두면 광천못의 침식은 곧 저승 전체로 번질 것이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사라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 힘만으로는 할 수 없어.”

여전히 굳은 얼굴로.

“이 물은 결국 태초의 물이야. 되돌리려면 물의 권능, 그중에도 태초의 생을 열었던 권능이 필요해.”

“뭐?”

호구별성이 바로 알아듣고 인상을 썼다.

“야 씨, 설마 용궁이야?!”

용궁.

그 말에 나도 작게 신음했다.

그녀가 왜 저런 반응인지 알기 때문이다.

“분명 용궁이…… 육지의 것에 문을 열어 주는 경우는 단 하나뿐이라고 했죠.”

그래, 가 본 적은 없지만 나도 그 정도는 알았다.

“……왕족의 은인일 때.”

용궁, 그들은 왕족과 연이 닿아야만 문을 연다는 것을.

직후 우리들 사이에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저승이 침식되기 시작했는데, 해결할 방법이 하필이면 용궁밖에 없다니.

대체 어떻게 해야 신조차 보기 힘들다는 용왕과 만날 수 있단 말인가.

“……!”

그때였다.

“오빠, 잠깐만요!”

못을 살피던 바리가 내 팔을 잡았다.

“못이 이상해요!”

어느새 돌연 심각한 낯이 되어서는.

“정말, 정말로 두 분이 느끼셨던 게 사실이었어!”

그러더니 그녀가 혼잣말처럼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뭔가 알아낸 거야?”

내 물음에 바리가 심각한 얼굴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용궁. 용궁이 이미 광천못을 움직이고 있어요.”

“……용궁이 못을 움직이고 있다고?”

좀 더 설명해달라는 뜻에서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는 내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이미 알고 계셨어요. 그래서 우릴 기다리셨던 거예요.”

그러더니 성큼 못 안으로 들어갔다.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 주겠다는 듯 더러워진 물에도 개의치 않고.

“……!”

그런데 그녀가 물에 들어간 순간, 잔잔하던 광천못에 물결이 일었다.

뿐만 아니라 진흙탕처럼 혼탁했던 물이 바리를 중심으로 새하얗게 정화되기 시작했다.

못 전체가 깨끗해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바리의 주변은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세워진 것처럼 물이 맑아졌다.

“……네, 듣고 있습니다.”

맑아진 물속에서 바리가 몸을 낮추며 말했다.

“듣고 있습니다, 용의 후예시여!”

무당, 신들의 중계자가 물에 엎드린 직후.

콰르르르!

물결은 어느새 거대한 물기둥이 되어 용솟음쳤다.

흙탕물에서 솟은 것이라곤 믿을 수 없는 맑고 투명한 물기둥이었다.

-들리시오?!

보석처럼 산란하는 물방울 사이로 어떤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

예스러운 말투였으나, 어쩐지 맑고 앳된 목소리였다.

-나는 위대하신 서방백룡 광순왕의 173번째 자식이오. 들리시오?!

서방백룡 광순왕의 아들.

다시 말해 그것은 서해 용왕 오흠의 아들이란 뜻.

우리는 일제히 물기둥을 주목했다.

“173번째?”

호구별성이 먼저 반응했다.

“그럼 얘가 그 팔푼이, 걔야?!”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녀가 물기둥을 올려다봤다.

“인간한테 잡혀갔다는 애, 얘가 걔냐고!”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제발, 누구라도 듣는다면 제발 도와주시오, 나는……!

미처 사정을 다 밝히기도 전에.

마치 갑자기 통화가 끊어진 것처럼 소년의 목소리는 거기서 뚝 끊겨버렸다.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모두가 멍하니 광천못을 바라봤다.

광천못을 정화하기 위해 용궁의 힘이 필요해진 이때.

때마침 용궁의 왕자가 저승의 광천못까지 움직였는데…… 결국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게 아닌가.

왕자의 목소리가 끊기자 못에서 솟았던 물기둥도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네, 그분이 맞아요.”

잔잔해진 못 안에서 바리가 말했다.

“서해 용궁의 막내 왕자님. 신성이 부족하셔서 불완전한 통신밖에 못 하시는 거예요.”

그녀의 주변은 아직도 물이 맑다.

“그래도 물속에 아직 그분의 뜻이 남아 있어요.”

뭔가에 집중하는 듯, 바리가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으음, 그러니까…… 여기는.”

그러다 문득 그녀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수조?”

그렇게 말하고는 별안간 물 밖으로 달려 나왔다.

“세상에…… 오빠!”

어느새 창백해진 낯으로.

“안 돼! 빨리 가야 해요, 오빠!”

그녀가 작은 손으로 황급히 내 팔뚝을 잡아끌었다.

“빨리! 안 그럼 큰일 날지도 몰라요!”

***

몇 시간 뒤.

인천의 어느 수산시장.

“……그러게. 진짜 큰일 날 뻔했다, 야.”

봉투를 쥔 호구별성이 말했다.

“그래, 하마터면 서해 용궁이 국상을 치를 뻔했구나.”

사라도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가 이 꼴을 당하다니. 바다 왕의 신하들은 정말 무능하군.”

팔짱을 낀 강림 형이 쯧쯧 혀를 찼다.

“그런데 어째 깨어나시질 않네요?”

나는 봉투를 가리키며 물었다.

호구별성이 쥔 봉투에는 작은 고등어 한 마리가 축 늘어져 있었다.

비늘 하나도 보석처럼 빛난다는 용왕의 이름이 무색하게, 어째 줘도 안 먹을 만큼 비리비리한.

덕분에 우리는 왕자의 몸값을 아주 값싸게 치를 수 있었다.

저녁으로 먹을 회와 매운탕거리를 잔뜩 샀더니 입이 귀에 걸린 상인이 고등어는 그냥 덤으로 줬으니까.

“광천못을 움직이느라 지치신 거예요.”

바리가 대답했다.

“원래도 힘이 없는 상태이시긴 했지만요.”

그러더니 봉투에 바짝 대고 말했다.

“왕자님, 이분은 저승의 염라대왕님이세요. 이제 안심하셔도 돼요.”

그 말에 늘어져 있던 고등어가 비로소 지느러미를 퍼덕였다.

아무래도 겁을 먹고 자는 척을 했던 모양이다.

-염라?!

고등어가 꼬리를 치자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음처럼 직접 머릿속으로 전해지는 음성이었다.

-그대가 정말 염라요?!

나는 고등어와 눈을 맞추었다.

“예, 왕자님. 제가 염라입니다.”

그래도 왕자니까, 일단 예를 차려서 고개도 조금 숙여 봤다.

-오오!

봉투 속의 고등어도 좀 더 가까이 와 나를 살폈다.

-그새 몰라보게 젊어지셨구려, 염라!

……응?

-신도 얼굴이 바뀔 수 있소? 그렇다면 나도 좀 더 크고 싶소!

……으응?

……이 양반, 지금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은데.

-내 환갑잔치 때도 와 줘서 고마웠소. 그대는 오셔서 술만 동내고 가셨지만!

……그래, 왕자는 지금 나를 돌아가신 우리 대왕님으로 착각한 모양이다.

-아바마마께서는 부르지도 않은 게 왔다고 역정을 내셨지만! 그래도 또 와주시오, 염라!

반갑다는 듯 고등어가 긴 꼬리를 흔들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그게 나겠냐고!

한참 더 젊은 데다가 애초에 주워 온 자식이라 닮지도 않았어!

“이야, 서해 용왕네 막내 왕자가 그리도 백치미가 넘친다더니.”

고개를 돌린 호구별성이 조용히 뇌까렸다.

-백치미!

그 말에 고등어가 반짝 눈을 빛냈다.

-맞소, 맞소!

뻐끔뻐끔 말이 이어졌다.

-내가 그게 있다고, 우리 큰형님께서 참 많이 아껴주셨소! 하하하!

신이 난 듯 고등어가 지느러미를 펄럭였다.

“……뭐, 막내가 사랑은 많이 받고 자란 것 같구나.”

사라가 대충 헛기침을 했다.

그래, 뭐…… 천진한 게 행복해 보이고 좋네.

나도 적당히 그에게 동의했다.

“그런데 왕자님.”

다시 왕자를 불렀다.

“아무리 봐도 보통의 상태가 아니신 것 같습니다만.”

내 말에 빙빙 돌던 고등어가 다시 소심하게 움직임을 멈췄다.

생선의 표정은 알아볼 수 없지만, 뭔가 주눅이 든 것 같았다.

소년 신이라 그런지 사춘기마냥 감정 변화가 풍부한 고등어였다.

-그렇소. 내가 원래도 덜 자란 반푼이 신이지만 말이오.

기가 죽은 고등어가 말을 이었다.

-지금은 그 반푼이 같은 힘마저도 아주 사라져버렸소.

봉투에 바짝 붙어 눈을 맞춰 오면서.

-여의주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오.

그러고는 그가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이보시오, 염라. 보아하니 그대는 아직 권능이 남아 있는 듯한데 맞소?

그 질문에 나는 자연스레 예감했다.

-그대에게 신의 권능이 남아 있다면, 혹시 나를 좀 도와줄 수 있소?

왕족의 은인이 될 기회가 왔다고.

“여의주를 되찾으시려는 건가요?”

곧바로 왕자에게 물었다.

-그렇소.

왕자가 꼬리를 흔들며 대답했다.

-여의주는 물의 신성이자 용궁의 열쇠요.

……그런가.

어쩐지, 용왕의 자식답지 않게 너무 비루하다 했다.

권능이 깃든 여의주를 잃어버렸으니 안 그래도 덜 자란 신성이 더욱 약해진 모양이지.

-여의주를 잃은 나는, 용궁으로 돌아갈 수 없소.

여의주가 용궁의 열쇠라고 하는 걸 보면 애초에 물길을 열기 위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새로 알게 된 사실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의주가 없으면 나는…….

고등어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아바마마한테 아주 혼쭐이 날 거요!

어…….

그게 다야?

“뭐, 서해 용왕이 좀 다혈질이긴 해.”

나름 변호를 해 주려는 듯 호구별성이 말을 보충했다.

아니 근데…… 화난다고 인간들 멱따고 다녔던 역신이 저럴 정도면, 정말로 서해 용왕 성격이 장난 아니긴 한가 보네.

-그렇소! 제발, 제발 아바마마께서 아시기 전에 좀 도와주시오!

끔찍한 상상을 했는지 가출한 고등어가 절박하게 외쳤다.

솔직히 ‘어른의 입장’에선 어시장까지 잡혀 온 마당에 그냥 집에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만.

“그럼 여의주는 어쩌다 잃어버리신 건데요?”

-……그게.

그 물음에 고등어가 시선을 피하며 소심하게 지느러미를 펄럭였다.

-인간한테…… 빌려줬소.

그 순간, 네 명의 저승 신과 한 명의 인간 소녀 사이에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야, 남의 집 자식인데도 저 집 앞날이 캄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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